소설리스트

34. 어둠이 있는 곳에 그대가 (34/118)


#34. 어둠이 있는 곳에 그대가
2022.08.25.



alt="">

“……허니, 궨차나?”

alt="">

“아, 네.”

alt="">

“계속 불렀는데, 음악 때문에 못 듣는 거 같아숴…… 애니웨이, 놀라게 해서 미안훼.”

alt="">

“괜찮아요. 안 다쳤으니 됐죠.”

넘어지는 줄 알고 철렁했던 가슴이 이제는 등골이 선득해지는 느낌으로 바뀌었다.

이 많은 인파 속에서 어떻게 자신을 한번에 알아본 걸까?

정말 눈썰미가 좋은 걸까?

강이 긴장했던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제인이 몽마임을 확신하냐고 묻던 제 말에 망설임 없이 그렇다고 대답하던 산의 모습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그녀는 옷자락을 툭툭 털며 자연스럽게 거리를 벌렸다.

alt="">

“근데 여긴 웬일이에요? 조깅하러 나왔어요?”

그렇게 묻자, 제인이 품에서 무언가를 주섬주섬 꺼내 보였다.

alt="">

“나 비둘기 밥 주러 나와쒀.”

새우과자였다.

그리고 그녀의 또 다른 손엔 캔맥주가 들려 있었다.

alt="">

“나 오늘 놤췬한테 차였거든.”

alt="">

“아…….”

전혀 생각지도 못했던 대답이라 리액션이 고장나 버렸다.

어색하게 굳어버린 강을 보며 제인은 억지로 입꼬리를 늘여 웃었다.

그러고는 조심스럽게 부탁을 해왔다.

alt="">

“강. 30분만 내 얘기 좀 들어줄뤠?”

alt="">

“그게…….”

alt="">

“10분만. 아니, 5분만.”

그렇게 말하는 그녀의 모습은 어쩐지 처연한 느낌마저 들게 했다.

alt="">

“우리 친구잖아.”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친구’라는 단어에 영 자신은 없어 보인다.

살갑지 못한 제 모습 때문일 것이다.

어쩌지?

평소답지 않게 풀이 죽은 제인을 그냥 두고 가자니, 잘게 떨리고 있는 그녀의 입과 손이 마음을 무겁게 했다.

사실 자신이야말로 누구보다 제인이 평범한 인간이길 바라고 있는데…….

그렇다면 정말로 좋은 친구가 될 수 있을지 모를 일이니 말이다.

강은 냉정히 상황을 고려해보기로 했다.

모든 게 의심스러운 건 맞지만, 만약 모든 게 오해라면?

필요 이상으로 몸을 사리다 결국 아무도 믿지 못하고, 아무 데도 가지 못하고, 끝내 일도, 관계도, 삶도 포기해야 할 것이다.

그러고는 죽는 날까지 집에만 처박혀 피폐하게 악몽이나 꾸겠지.

어쩌면 몽마들이 바라는 일이야말로 그런 것일 거다.

생각을 마친 강은 주변을 한번 둘러보았다.

인파가 인산인해를 이룰 정도라 오히려 안전할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무엇보다 곳곳에 내려앉은 어둠이 그녀를 안심케 했다.

산은,

alt="">

‘나는 너한테 가장 가까이 닿을 수 있는 그림자를 통로로 이용해.’

그림자를 통해 오곤 했으니까.

어둠만 있다면 언제, 어디서든 그와 닿을 수 있었다.

긴장을 지운 그녀가 여유롭게 웃으며 대답했다.

alt="">

“좋아요.”

두려움에 모든 걸 통제받는 삶은 필요 없다.

불행은 언제나 곁에 있었고, 자신은 늘 그것들과 싸워왔으니까.

그리고 제인은 강의 대답이 끝나기 무섭게 그녀를 와락 끌어안았다.

그러고는,

alt="">

“……고마워. 으흑.”

꾹꾹 눌렀던 설움을 토하듯 울음을 터트렸다.

어정쩡하게 허공에 떠 있던 강의 손이 제인의 등을 어색하게 다독여주었다.

* * *

그 시각.

산은 보육원으로 향하고 있었다.

alt="">

“485는 죽었지만, 몽마가 하나라는 법은 없지.”

그런 결론이 나왔기 때문이다.

강의 꿈엔 여전히 보육원이 배경으로 등장하곤 했다.

그는 곰곰이 생각했다.

배후가 누구든 왜 사파로 같이 약한 놈을 매개체로 썼는지 이해가 되지 않아서였다.

단순히 강과 오래 묶어놓을 측근을 심어두기 위한 그림이었던 걸까?

어쩌면 단순한 실험체 같은 걸지도 모른다.

자갈밭 위에 멈춘 차가 조용히 불빛을 꺼트렸다.

산이 향한 곳은 감영희가 생전에 사무실로 사용하던 방이었다.

그림자처럼 숨어든 그는 거기서 오랜 기록물들을 샅샅이 살펴보았다.

하지만 문서화 된 자료만으로는 얻을 수 있는 정보가 한정적이었다.

alt="">

“아무래도 권숙희를 만나야겠군.”

그가 손목시계를 확인했다.

곧 점호 시간이니, 숙희가 이곳을 찾을 것이다.

조용히 보이지 않는 장막을 거둔 산은 어둑한 벽에 모습을 감춘 채 그녀를 기다렸다.

예상했던 대로, 숙희는 얼마 지나지 않아 영희가 쓰던 사무실을 찾았다.

그녀는 혼자였고, 곧 익숙해 보이는 동작으로 방 곳곳에 먼지가 쌓이지 않도록 청소를 시작했다.

어둠 속에서 조용히 숙희를 지켜보던 그가 희미한 빛 아래로 모습을 드러냈다.

기척을 느낀 그녀가 흠칫 어깨를 떨며 돌아보았다.

alt="">

“……여긴 어떻게 들어오셨죠?”

하지만 산은 대답 대신 조용히 해달라며 검지를 제 입술에 가져다 댔다.

거리를 좁혀 다가간 그가 옅게 미소 지으며 말했다.

alt="">

“저희 선약 잡았었는데, 잊으셨어요?”

시선이 얽혔다.

희미한 붉고 푸른 빛이 번갈아 가며 산의 눈동자에 이체처럼 어렸다.

alt="">

 
그리고 그걸 보던 숙희의 동공은 이내 떨림을 멈춘 채, 느슨하게 풀리기 시작했다.

alt="">

“아……. 제가 잊고 있었네요.”

그녀의 반응에 그가 조금 웃었다.

숙희가 느리게 눈을 깜빡이더니 말을 이었다.

alt="">

“차 한잔하시겠어요?”

alt="">

“괜찮습니다.”

alt="">

“…….”

alt="">

“시간이 얼마 없으니, 몇 가지 여쭙고 금방 돌아가겠습니다.”

alt="">

“도움이 될지 모르겠네요.”

수척한 얼굴로 웅얼대던 그녀가 낡은 가죽 소파로 산을 안내했다.

alt="">

“이쪽으로 앉으세요.”

안내에 따라 맞은 편에 자리한 산은 그렇게 숙희와 대화를 시작했다.

그녀는 보육원 화재 사고를 비롯해 모든 걸 낱낱이 말해주었다.

숙희를 통해 얻을 수 있는 정보를 모두 얻기까지 걸린 시간은 30분 남짓이었다.

시간을 확인한 그가 빠르게 자리를 정리하며 일어섰다.

alt="">

“시간 내주셔서 감사합니다.”

alt="">

“별말씀을요.”

alt="">

“아.”

돌아서려던 산이 마지막 당부를 하듯 속삭였다.

alt="">

“제가 오늘 이곳에 왔다는 건 비밀로 해주세요.”

alt="">

“그럼요.”

숙희가 기계처럼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의 눈빛엔 여전히 초점이 없었고, 동공이 반쯤 풀려 있는 상태였다.

잔잔한 미소로 답한 그는 조용히 보육원을 나왔다.

그러고는 차를 몰아 빠르게 숲길을 빠져나왔다.

운전하는 내내 숙희가 했던 말을 머릿속에서 재생시켜보았다.

사망한 선대 원장인 최갑훈의 학대는 대부분 피해 아동과 1:1인 경우에 이루어졌고, 은밀하고 폐쇄된 공간에서 벌어졌다고 했다.

어릴 때부터 지속적으로 학대를 당해온 아이들은 자신이 가스라이팅을 당하고 있다는 사실도 자각하지 못했을 거라고.

그러다 보니 도움을 요청한다는 건 꿈도 못 꿀 일이었을 테고, 커지는 아픔과 두려움은 그대로 아이들의 불안과 슬픔과 악몽이 되어, 고스란히 몽마들의 먹잇감이 되었을 것이다.

그럼 감영희는 왜 최갑훈의 만행을 세상에 알리려 했던 걸까?

편리와 평화를 추구한다던 신념과는 사뭇 어폐가 있어 보이는데.

어쩌면 그 또한 이미 짜인 판이었을지도 모른다.

세상 무서울 게 없던 최갑훈도 죽음 앞에서는 엄청난 두려움과 공포를 느꼈을 테니까.

국과수 감식 결과 발화점은 식당에 있던 쓰레기통이었다.

그리고 원인 제공자는 끝내 밝혀지지 않았다.

어쨌든 그 일로 피해자의 일부는 사망, 일부는 여전히 치료 중인 상황.

그곳은 여전히 몽마들의 성지가 되기에 충분한 장소였다.

하지만 그곳에 있는 모든 이들의 불행과 악몽을 합쳐도 강이 꾸는 악몽과는 비할 바가 되지 않는다.

그러니까 결론은 애초에 그 사건 역시 강의 인생에 남았어야 했을 불행의 일부로 설계되었을 가능성이 높다는 것.

그 과정 중에 사파로의 희생이 예견되어 있었다고 해도, 이상할 일이 아니었다.

놈의 죽음은 오롯이 서강의 상실로 이어졌으니까.

배후가 누군진 몰라도 꽤 지독한 녀석임은 분명했다.

조금 더 철저한 보호가 필요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거기까지 생각을 마친 산은 곧바로 강에게 전화를 걸었다.

alt="">

- 응, 산아.

alt="">

“어디야?”

alt="">

- 한강.

alt="">

“운동하고 있어?”

alt="">

- 지금은 잠깐 쉬고 있어. 제인 만났거든.

그는 더 묻지 않았다.

바로 옆에 제인이 있을 테니, 의심을 살 만한 대화는 하지 않는 게 좋았다.

alt="">

“근처에 있을게.”

alt="">

- 응. 알겠어.

그녀도 그의 의도를 이해한 듯 자연스럽게 답했다.

잠시 후.

강과 제인은 물가가 보이는 언덕 근처의 계단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도시의 야경과 다리에서 쏟아지는 불빛이 화려하게 수면 위로 내려앉았다.

alt="">

“허니. 맥주 마실 거야?”

alt="">

“아니요. 전 물이면 돼요.”

그녀가 옆에 있던 생수병을 흔들자, 제인이 말했다.

alt="">

“그럼 나 라면만 얼른 사 올게. 잠꽌만 기다려.”

맥주캔을 계단 위에 내려놓은 그녀가 바쁘게 계단을 뛰어 올라갔다.

등과 가슴에 호랑이가 수놓아진 화려한 핑크색 트레이닝복.

그런 걸 입고 있으니 눈에 안 띄기가 더 어려웠을 것이다.

어쨌든 제인은 저를 알아본 사람들과 넉살 좋게 스몰 토크를 나누며 팬서비스를 잊지 않았다.

낯가리느라 데뷔 초부터 매일 가리고 다니기 급급했던 자신과는 무척 결이 다른 사람이었다.

강은 턱을 괸 채 멀어지는 그녀를 바라보다 이내 물가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새까맣게 뒤덮인 한강은 좀처럼 그 깊이도 가늠되지 않았다.

그녀는 다시 한번 주변을 확인했다.

다리 아래에도 그림자.

가로등 밑에도, 나무 아래에도 그림자.

온통 그림자 천지라 그런지 별로 무서울 게 없었다.

어디서든 산이 지켜봐 주고 있는 것만 같아서였다.

그런데 그때.

alt="">

“저기요.”

낯선 남자 하나가 강에게 다가와 말을 걸었다.

강이 고개를 돌렸다.

거기엔 웬 처음 보는 남자가 자신을 내려다보며 서 있었다.

다행히 볼캡을 쓰고 있던 탓에 얼굴에 긴 그림자가 드리워진 상태였고, 마스크까지 쓰고 있어 오른쪽 눈만 반쯤 드러낸 게 다였다.

그래서 그녀는 상대가 누구든 자신을 알아보긴 쉽지 않을 거라 생각했다.

alt="">

“무슨 일이시죠?”

빤히 저를 보는 시선에 강이 먼저 물었다.

남자의 입이 느릿하게 열렸다.

alt="">

“저기, 혹시.”

alt="">

“…….”

alt="">

“일행 있으세요?”

아.

무슨 일인가 했더니.

그녀는 모자를 조금 더 눌러쓰며 작게 대답했다.

alt="">

“네. 일행 있어요.”

하지만 남자는 쉽게 자리를 뜰 생각이 없어 보였다.

오히려 상체를 조금 더 숙이며 거리를 좁히곤 다시 되물었다.

alt="">

“남자요? 여자요?”

강의 미간이 구겨졌다.

저렇게 묻는 것 자체가 처음부터 제인과 함께 있던 자신을 지켜보고 있었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그녀가 대답하지 않자, 그가 아예 옆자리에 털썩 앉으며 질문을 던져왔다.

alt="">

“실례가 안 된다면, 전화번호 좀 받을 수 있을까요?”

alt="">

“실례예요.”

alt="">

“에이, 그러지 말고 좀 주세요. 아까부터 지켜봤는데, 스타일이 너무 좋으셔서요. 완전 제 취향이세요.”

alt="">

“…….”

alt="">

“아. 몸매가 좋다는 얘기를 제가 너무 돌려 말했나요? 그냥 대놓고 말하는 게 나았으려나?”

개념을 말아먹은 듯한 태도에 화도 나지 않았다.

그저 어떻게 하면 정체를 드러내지 않고, 최대한 깔끔히 남자를 보낼 수 있을까 고민할 뿐이었다.

강은 턱을 괸 채 넘실대는 한강만 바라보다 뒤늦게 입을 뗐다.

alt="">

“애인 있어요.”

alt="">

“아…… 정말요?”

남자의 말꼬리가 길어졌다.

당황한 걸까?

그냥 이대로 사라져줬으면 좋겠는데.

하지만 이어진 남자의 말은 오히려 강을 몰아붙이기 충분했다.

alt="">

“그럼 데스패치에 찔러도 돼요?”

alt="">

“…….”

alt="">

“서강, 연애한다고.”

 

alt="">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