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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 도발 (36/118)


#36. 도발
2022.09.01.



 


“남좌췬구야? 그런 거까지 보고하게?”

혼잣말 치곤 목소리가 컸다.

두 사람이 동시에 그녀를 돌아보자, 제인이 말을 덧붙였다.


“강이도 친구 별로 없다고 했는데, 있던 친구도 떨어져 나갈 거 가톼서 그뤠.”

오지랖은.

산은 그런 생각을 하며 조금 웃었다.

하지만 친절한 말투로 답해주었다.


“그런 건 걱정 안 하셔도 됩니다. 제가 친구이기도 하니까요.”

“에이, 말도 안 돼.”

말이 끝나기 무섭게 그녀가 손을 내저으며 부정했다.


“남녀 사이에 친구가 어디쒀.”

“…….”

“같이 쇼핑 다닐 수 이쒀? 연애 상담해줄 수 이쒀? 목욕탕 가서 등 밀어줄 수 이쒀?”

그리고 산은 이번엔 대답 대신 침묵을 택했다.

일일이 대꾸하며 소모적인 대화를 이어갈 생각이 없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녀는 그의 침묵이 자신의 승리라 여겼는지, 금세 우쭐거렸다.


“거봐.”

“…….”

“반박 못 하겠지? 나 눈치 되게 빨라.”

결국 제인은 어느 쪽에 장단을 맞춰도 인정하는 꼴이 되게 만들 생각인 것 같았다.

둘이 범상치 않은 관계임을 인정하던가.

아니면 과잉보호로 선 넘은 사람이 된 걸 인정하던가.

하지만 산은 당연하게도 어느 쪽도 긍정해줄 생각이 없었다.

그러니 괜한 오지랖에 놀아나지 않으려면 상대를 말아야 했다.

두 사람 사이에 끼어 있던 강은 그럴 만한 사정이 있다는 걸 말해줄까 잠시 고민했지만, 이내 그만두었다.

그녀 역시 이 일로 대화가 길어지길 원치 않았고, 그사이에 엘리베이터가 도착했기 때문이다.

세 사람은 함께 엘리베이터에 올랐다.

그리고 세로로 붙어 있는 세 개의 버튼이 연달아 눌렸다.

문이 닫히자, 제인이 강에게 말했다.


“허니. 오늘 내 이야기 들어줘서 고마워.”

“아니에요. 나도 즐거웠어요.”

“그뤠? 그럼 앞으로 우리 더 친하게 지내자. 우리 집 놀러 오고 싶으면 아무 때나 놀러 와.”

그녀가 하는 말에 강이 미소로 대답을 대신했다.

띵.

엘리베이터는 제인이 사는 층에 가장 먼저 도착했다.

문이 열렸고, 그녀는 내리기 직전 무언가 잊은 게 떠올랐다는 듯 말했다.


“아, 맞다.”

그러더니 산을 향해 웃으며 충고했다.


“Don’t tie her down too much.”

그러자 그도 친절히 답해주었다.


“It’s not your business.”

그녀가 한 방 먹었다는 듯한 표정으로 양손을 허공에 들어 보였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이내 옆에 있던 강을 한 팔로 와락 끌어안았다.


“굿 나잇, 허니.”

그러고는 보란 듯이 그녀의 뺨에 키스를 한 제인이 쪼오옥 소리를 내며 산을 쳐다보았다.


“Yummy.”

들릴 듯 말 듯 이어진 말은 명백한 도발이었다.

그리고 그 속뜻은 그녀의 정체가 어느 쪽이어도 이상할 게 없다는 중의적 표현으로 해석할 수 있었다.

피어싱이 달린 혀가 놀리듯 새빨간 입술을 훑고 들어갔다.

그걸 본 그의 미간이 구겨졌다.

제인은 재밌어 죽겠다는 듯 깔깔 웃으며 엘리베이터에서 내렸다.

문이 닫히기 무섭게 산은 곧장 강의 뺨을 확인했다.


“괜찮아?”

“응.”

“진짜 괜찮아?”

“괜찮아. 좀 당황스럽긴 했지만.”

“…….”

“왜?”

“아니야. 괜찮으면 됐어.”

그는 그렇게 말했지만, 괜찮지 않은 게 제 쪽인 것 같다는 얘기까진 할 수 없었다.

산은 엄지를 들어 그녀의 뺨에 선명히 찍힌 립스틱 자국에 가져다 댔다.

그러고는 한 방향으로 문질러버렸다.

원래는 뭔가를 읽을 수 있을까 싶어 만져보려던 거지만, 보고 있기가 불편해 충동적으로 한 행동이었다.

하얗고 여린 살갗 위에 붉은 번짐이 생겼다.

그걸 보는데 짜증이 울컥 솟았다.


‘……아.’

속으로 욕을 뱉은 그가 눈을 길게 감았다 떴다.

내면의 평화가 박살 나니, 곧은 미간에 주름이 생겼다.

영문을 알 리 없는 강만 눈이 동그래져서 물었다.


“왜 그래?”

“……아니야. 아무것도.”

산은 간신히 표정 관리를 하며 고개를 저었다.

한 층 더 올라간 엘리베이터가 멈추었고, 그는 그녀를 따라 내렸다.


“잠깐만.”

다가선 산이 번진 립스틱 자국 위로 가만히 손끝을 가져다 댔다.

그러고는 마음을 다잡고 원래 하려던 것을 하기 위해 정신을 집중했다.

딱히 별다른 기운은 느껴지지 않았다.

제인이 인간인지, 몽마인지 아직 확실한 증거는 없었다.

하지만 인간이라면 꽤 거슬리는 존재가 될 것 같았고, 몽마라면 보통내기가 아닐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뭐가 좀 느껴져?”

강이 조심스럽게 묻는 말에 산이 가만히 그녀를 바라보았다.

뭔가를 걱정하는 것 같기도, 혹은 기대하는 것도 같은 눈빛이었다.

아마 제인이 몽마일까 봐 걱정하는 걸 테고, 반대로 그녀가 사람이길 기대하는 듯한 그런 눈빛.

옅은 미소를 지어 보인 그가 고개를 저었다.


“아니. 아무것도 안 느껴져.”

“아, 그래?”

긴장감이 서렸던 얼굴이 온화하게 풀어진다.

무엇도 느껴지지 않아 다행이라고 생각하는 걸까?

어쩌면 제인이 평범한 인간일 거라는 결과에 더 힘이 실어지는 발언이라?

사실 그녀를 실망하게 할 생각은 별로 없었다.

하지만 이번엔 결단코 아니었다.

어떻게든 제인이 몽마라는 확증만 얻으면 곧장 강의 기대와 환상을 부숴줄 생각이다.


“잘 준비되면 불러.”

“알겠어.”

“세수 꼼꼼히 하고.”

“세수?”

“립스틱 자국.”

“…….”

“찝찝하잖아.”

정색한 그가 엄지로 그녀의 뺨을 몇 번 더 문지르고는 돌아섰다.

멀어지는 뒷모습을 강이 말없이 바라보았다.


‘글쎄…… 나는 괜찮은데, 네가 찝찝한 건 아니고?’

그런 생각을 하며 그녀는 피식 웃음을 터트렸다.

집으로 돌아온 산은 거칠게 타이를 끌어내렸다.

그러고는 바로 옷을 벗고 욕실로 들어가 물을 틀었다.

찬물로 열이라도 식혀야 할 것 같아서였다.

솨아아-

한 손으로 벽을 짚은 채 선 그가 쏟아지는 물줄기를 고스란히 맞았다.


‘Yummy.’

머릿속엔 벌써 보란 듯이 강의 뺨에 키스 마크를 남기던 모습과 그녀가 도발하듯 건넨 말이 반복하여 재생됐다.

만약 제 예상대로 제인이 몽마라면, 그건 일종의 선전포고와도 같은 행동일 것이다.

그녀 역시 자신의 정체를 의심할 테니.

물론 아니라면 그냥 정신 나간 여자일 테지.

어쨌든 확실한 것 한 가지는 그녀에게 반드시 남의 것에 침 바른 대가를 똑똑히 치르게 해주겠다는 거였다.

여자든, 남자든.

몽마든, 인간이든.

서강한테 집적거리는 것들만큼은 곱게 봐줄 생각이 없다.

떨어지는 물줄기에 온몸을 흠뻑 적셨지만, 차가운 물의 온도에 비해 몸의 열기는 쉽게 사라지지 않았다.

신경질적으로 젖은 머리를 쓸어넘긴 그가 말했다.


“……걸리기만 해봐라.”

 

 
묵직한 한숨이 한겨울의 냉기처럼 흘러나왔다.

강이 부른 건 그로부터 2시간 후였다.

가벼운 차림으로 나타난 산은 침대맡에 앉아 턱을 괸 채 물었다.


“별일 없었어?”

“별일?”

“아까 그 여자랑 한강에 둘이 있었잖아.”

“아, 그거.”

베개를 베고 누운 강이 이불 위로 다소곳이 손을 모으며 한강에서 있었던 일을 떠올렸다.


“누가 알아봐서 잠깐 난감할 뻔했는데, 제인이 화끈하게 치워줬어.”

“둘이 한패 아니었고?”

불퉁한 그의 표정과 말투에 그녀가 웃음을 터트렸다.


“아니야, 그런 거.”

“그러고 나선 뭐 했는데?”

“제인이랑?”

“어.”

“음…….”

말꼬리를 늘이며 잠시 뜸을 들이던 강이 말을 이었다.


“연애 상담.”

그녀의 말에 산은 제인이 아까 했던 말을 자동으로 떠올리게 되었다.


‘에이, 말도 안 돼. 남녀 사이에 친구가 어디쒀.’


‘같이 쇼핑 다닐 수 이쒀? 연애 상담해줄 수 이쒀? 목욕탕 가서 등 밀어줄 수 이쒀?’

사실 본인 입으로 ‘친구’라고 말은 했지만, 제인이 이야기한 것 중 제가 해줄 수 있는 건 별로 없었다.

생물학적으로 남자니 당연히 여탕엔 들어갈 수 없고, 오프라인으로 쇼핑을 한 건 손에 꼽을 정도였다.

그렇다고 상담에 재능이 있는 것도 아니고.

그게 인간의 연애사에 관한 얘기라면 더욱이 그랬다.

갑자기 할 말이 없어진 산이 슬쩍 강의 얼굴을 살폈다.

제인의 이야기를 하는 그녀의 표정은 썩 나쁘지 않아 보였다.


“재밌었어?”

“음. 나쁘지 않았어.”

그녀는 솔직히 이야기했다.

사실은 제인이 평범한 사람이었으면 하고 바랄 만큼 재미있었다고.


“나랑 은근히 비슷한 구석도 있는 것 같고.”

“비슷한 구석? 어디가?”

그가 동의할 수 없다는 듯 미간을 구겼다.

그걸 본 강이 웃었다.


“그냥. 친구 없는 것도, 외로움 타는 것도, 그래서 느껴야 했던 감정들 같은 것도.”

“네가 왜 친구가 없어? 삼영이 형 있잖아.”

“에이, 오빠랑은 다르지.”

“…….”

목욕탕에 같이 들어갈 수 없어 그러냐고 되물으려다 말았다.

그리고 그녀는 산이 무얼 걱정하는지 알겠다는 듯 상냥히 말을 이었다.


“그래도 조심할게. 네가 조심하라고 했으니까.”

사실 쉽게 정 주었다가, 정말로 그녀가 몽마이기라도 하면 그 상실감을 견뎌내야 하는 쪽은 바로 자신이다.

그러니 애초에 마음을 안 주는 게 답이다.

그게 가장 현명하다는 걸 알면서도, 쉽지 않다는 게 언제나 문제였지만.

강의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그는 그녀의 생각을 읽기라도 한 것처럼 물었다.


“서운해?”

“아니라고 하면 거짓말인데, 익숙해서 괜찮아.”

“…….”

“웬일로 친구가 생기나 기대했는데, 내 팔자엔 그런 거 없는 걸로 쳐야지.”

산은 이번에도 강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그러더니 뭔가를 오래 고심하는 듯하다가 진지하게 물었다.


“여자친구 하나 만들어줄까?”

다소 엉뚱한 말이었지만, 그녀는 고개를 돌려 되물었다.


“어떻게?”

“한번 찾아볼게.”

“찾아본다고? 그게 찾는다고 찾아져?”

“나는 마음 먹으면 뭐든 해.”

“…….”

“너한테 친구 하나 물어다 주는 거야 일도 아니지.”

은혜 갚은 호랑이도 아닌데, 뭘 물어다 준다는 거야.

황당한 그의 대답이 그녀를 웃게 만들었다.

그렇게 강은 한참이나 웃었다.

그러다가,


“근데 너 말이야.”

“…….”

“내가 불행하길 바라는 거 아니었어?”

불시에 허를 찔렀다.


“그래야 내 꿈이 더 맛있어지잖아.”

산은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아니, 못 했다.

그러자 그녀가 시선을 거두며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그런데 나는 왜 네가 자꾸 나한테 잘해주려고 애쓰는 것처럼 느껴지지?”

그러더니 답도 얻지 못할 질문을 계속해서 던져댔다.


“왜? 내가 너무 큰 불행을 견디다 못해 다 포기하고 죽어버릴까 봐? 그래서 그래?”

“…….”

“아니면 희망 끝에 더 큰 절망을 맛보여주려는 너의 큰 그림인가?”

“…….”

“그것도 아니면…….”

천장을 향해 있던 시선이 다시 느리게 그에게 향했다.

바쁘게 떠들던 예쁜 입술이 마지막 질문을 던졌다.


“내가 행복해졌으면 좋겠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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