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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7. 키스 마크 (37/118)


#37. 키스 마크
2022.09.04.



 
강이 몇 개의 질문을 던지는 동안 산은 침묵으로 일관했지만, 입을 열지 않았을 뿐 대부분은 그녀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수긍했다.

하지만 마지막 질문만큼은 어떤 답도 떠올릴 수가 없어 침묵한 경우였다.


“내가 불행하길 바라는 거 아니었어? 그래야 내 꿈이 더 맛있어지잖아.”

맞아.

나는 네가 죽지 않을 만큼만 불행하길 바랐어.


“왜? 내가 너무 큰 불행을 견디다 못해 다 포기하고 죽어버릴까 봐? 그래서 그래?”

그래. 그게 네 곁을 지키는 이유야.

불행을 못 견딘 네가 삶을 놓아버릴까 봐.


“아니면 희망 끝에 더 큰 절망을 맛보여주려는 너의 큰 그림인가?”

내 방식은 아니지만, 대게 몽마들이 선호하는 방법인 건 맞고.


“그것도 아니면…….”

“…….”

“내가 행복해졌으면 좋겠어?”

그녀가 물었다.

자신이 행복해지길 원하느냐고.

웃긴 일이지.

갑자기 입이 붙어버리기라도 한 것처럼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질문에 대한 어떤 답도 떠올리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침묵 끝에 강은 대답 듣기를 포기한 채 잠을 청해야 했다.


“나 잔다.”

그녀는 그에게 즐거운 식사가 되길 바란다는 인사도 잊지 않고 건넨 채 눈을 감았다.

하지만 강은 한동안 쉽게 잠이 들지 못했다.

그러더니 결국 눈을 감은 채 그에게서 얻지 못한 답을 대신하듯 말했다.


“나도 알아.”

“뭐를.”

“너한테 나는 그냥…… 사랑스러운 치킨 같은 존재라는걸.”

그 말에 바람 같은 웃음이 샜다.

하필 비유를 해도 치킨 같은 거에 비유한 것도 웃겼지만, 자신이 사랑스럽다는 걸 이미 너무 잘 알고 있는 것 같아서.

근데 그 모습이 밉지 않아서.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강이 다시 강조했다.


“하지만 잊지 마.”

“…….”

“나한테도 너는 사랑스러운 치킨이라는걸.”

웃픈 현실이 아닐 수 없었다.

산은 새삼 자신과 그녀의 관계에 대해 생각해보게 되었다.

반박할 것도 없이 강의 말이 맞았다.

우리는 서로에게 갑이자 을인 관계.

혹은 악어와 악어새 같은 공생 관계.

결국엔 너를 지키는 일이 곧 나를 지키는 일인 것.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한참이나 치킨 운운하며 떠들던 그녀의 목소리가 잦아들었다.


“나 이제 정말 잔다…….”

정말로 잠이 온 모양이었다.


“잘 자, 치킨.”

산의 나지막한 인사에 피식 콧바람을 내뿜던 강은 얼마 지나지 않아 깊은 수면의 늪으로 빠져들었다.

잔잔히 번져 있던 미소가 곧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악몽이 발현되기 시작한 그녀의 몸에서 보랏빛 안개 같은 연기가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산이 턱을 괸 채 다른 쪽 손바닥을 들었다.

몸에 가까이 가져다 대자 강에게서 뿜어져 나온 연기가 빨려 들어오듯 흡수됐다.

악몽을 먹는 산의 표정은 이제 무척이나 평온해 보였다.

온전히 꿈을 먹는 게 버거워서 매일 탈이 날 만큼 애를 먹으면서도, 꾸준히 노력한 결과였다.

손바닥으로 그녀의 팔을 잡고 쓸어내리자, 더 많은 연기가 더 빠르게 흡수됐다.


“…….”

그의 눈썹이 아치형으로 솟았다 내려왔다.

흡수하는 속도를 올리고, 양을 늘려도 전혀 무리가 없었기 때문이다.

덕분에 강의 꿈을 한 조각도 남김없이 먹을 수 있었고, 꿈을 흡수하는 시간을 단축한 건 말할 것도 없었다.

그리고 이 모든 불가능의 영역이 가능으로 변화한 시간은 매우 빨랐으며, 산의 생명력과 힘을 비약적으로 상승시켰다.

들은 적도, 본 적도 없는 이례적인 일이었지만, ‘최초’를 경험하는 건 그에게 그리 놀랍거나 낯선 일은 아니었다.

질 좋은 악몽이 주는 짜릿한 쾌감에 전율하던 산은 아예 그녀의 옆에 누웠다.

그러고는 두 팔로 잠든 강을 끌어안았다.

닿는 면적이 넓어지자, 폭발할 듯 뿜어져 나오는 꿈의 기운이 블랙홀처럼 그에게 빨려 들어가기 시작했다.

조용히 웃던 산이 그녀의 이마에 턱을 댄 채 속삭였다.


“나를 이렇게 행복하게 하는 널.”

“…….”

“어떻게 사랑하지 않을 수 있겠어.”

악몽이 주는 에너지와 쾌감은 세상 어느 것에도 감히 비할 것이 없었다.

여러 가지 이유로 강이 아니었다면, 자신은 여전히 숨어 살기 급급했을 것이다.

어쩌면 벌써 다른 몽마 손에 죽고 없었을지도 모를 일이고.

그러니 자신을 살게 해주는 이 작고 사랑스러운 인간을 어찌 소중히 여기지 않을 수 있겠나.

악몽의 질만 떨어지지 않는다면 네가 행복해질 수 있는 일을 천 개 정도는 만들어주고 싶다는 생각도 드는데.

아마 너의 존재를 알게 된 세상의 모든 몽마들이 너를 사랑할걸.

산은 자신이 그중 하나일 뿐이라는 결론을 내렸다.

아까는 대답하지 못한 것들에 대한 답이 조금은 정의되는 듯했다.

그때.

품에 안긴 강이 신음하기 시작했다.


“……으.”

그는 팔을 세워 제 손바닥으로 턱을 괸 채 그녀의 얼굴을 살폈다.

요즘에도 여전히 보육원이 악몽의 배경으로 나오곤 한다.

얼굴도 제대로 알아볼 수 없는 검은 형체에 쫓기던 강의 얼굴이 괴로움으로 일그러졌지만, 잠시 후 그 형체가 감영희가 됐을 땐 무기력하게 울기만 했다.

실제로도 미간을 좁힌 그녀의 눈가가 촉촉해졌다.

다 포기한 사람처럼.

엄청난 공포를 넘어, 상실감을 느낀 것 같았다.


“또 사파로(485)야?”

그건 참 살아서도 죽어서도 거슬린다.

작게 한숨을 쉬던 산은 바로 엄지를 들어 그녀의 이마에 가로로 선을 그었다.

그녀의 기억에서 빠르게 악몽을 지워내는 방법이었다.

그러고는 조금 더 힘을 줘 강을 깊이 끌어안았다.

뿜어져 나오는 공포와 슬픔이 닿아있는 산의 온몸으로 빠르게 흡수되었다.


“나는 네가 불쌍해.”

“…….”

“꼭 나를 보는 것 같아서.”

조용히 혼잣말하던 그가 잠시 침묵하다 다시 말을 이었다.


“그래서 네가 조금은 행복해져도 좋을 거 같다고 생각한 거 같아.”

자장가를 불러주듯 속삭이며 계속해서 악몽을 지워냈다.

다행히 얼마 지나지 않아 그녀의 얼굴이 평온을 되찾았다.

더 이상 공포도, 슬픔도 느끼지 않은 채 편안한 잠에 빠져든 것이다.

산은 힘주어 안았던 팔에 조금 힘을 풀었다.

그러고는 한쪽 팔을 그녀에게 내어준 채 조금 떨어져서 잠든 강을 마주 보았다.

그는 자기도 모르게 손을 뻗어 촘촘히 뻗은 속눈썹을 만지고, 곧게 뻗은 콧대 아래 동그랗고 귀여운 콧방울을 어루만졌다.

허공에 멈추었던 손끝이 가볍게 입술에 닿았다가, 이내 그녀의 아기 같은 뺨을 만졌다.

잠잠하던 그의 얼굴에 균열이 일었다.


“……아. 또 생각나네.”

제인이 강의 뺨에 쪼오옥 소리가 나도록 입을 맞추었던 게 떠올라버린 탓이다.

산은 몸을 돌려 허공을 바라보다 커다란 손바닥으로 제 얼굴을 덮어버렸다.

그러고는 상념을 지우듯 한숨과 함께 얼굴을 쓸어내렸다.

간신히 평정심을 되찾은 그가 다시 강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악몽을 모두 잊은 그녀의 얼굴도 평온하기 그지없었다.

그리고 언제나처럼 아름다웠다.


“…….”

“…….”

존재하던 모든 소음이 사라진 공간.

마치 시간이 멈춘 기분.

눈도 깜빡이지 않고 강의 얼굴을 눈에 담던 산은 자기도 모르게 천천히 고개를 내렸다.

그러고는 보드라운 뺨에 입술을 살짝 가져다 댔다.

맞닿은 살갗의 감촉이 너무 부드럽고 달콤해서 혀를 내밀어 맛보고 싶은 충동이 일었다.

녹여 먹어도 좋을 것 같았고, 잘근잘근 깨물어보고 싶기도 했다.

너는 살에서도 단맛이 날 것만 같은데.


 
후각을 자극하는 샴푸 냄새에 살짝 눈매를 늘이던 그가 한 번 더 입술을 눌렀다 미련 없이 멀어졌다.

악몽을 먹다 영혼까지 먹어 치우고 싶은 욕구는 이제 충분히 누를 수 있게 됐다.

문제는 다른 욕구가 참기 힘들어졌다는 데 있지만.


“내가 연애가 고팠나?”

혼잣말로 되뇌다 어이가 없어, 피식 웃음을 터트리고 말았다.

그러고는 자신의 입술이 닿았던 하얀 뺨을 가볍게 손끝으로 쓸어주었다.


“강아. 오해하지 마.”

살짝 시선을 내린 그가 말을 이었다.


“그러니까 이건.”

“…….”

“그냥 영역표시 같은 거야.”

내 거에 남의 침이 발라져 있으면, 기분 더럽잖아.

그뿐이야.

.
.
.

아침부터 연예면이 떠들썩했다.

회사가 한바탕 뒤집힌 건 말할 것도 없었다.


“제가 아는 그 양은오 작가님이요?”

강이 눈을 동그랗게 뜨며 물었고, 황 대표가 흥분한 얼굴로 말했다.


“그래! 너도 알고, 나도 알고, 모두가 아는 그 양은오 작가님! 이거 무조건이야. 강아! 알지? 이 작가님 작품은 묻지도 따지지도 말고 해야 해! 머리를 밀고 나오는 캐릭터를 맡는 한이 있더라도 해야 한다고!”

그가 침까지 튀겨가며 거듭 강조했다.

그도 그럴 것이 양은오 작가의 명성은 두말하면 입 아플 정도였다.

대강 추려지던 차기작 선정이 한순간에 의미가 없어질 정도였으니 말 다 했지.

하지만 그렇다 쳐도 어떻게 이 작품이 제게 들어온 걸까?

이미 편성도 된 작품이고, 캐스팅도 끝났다고 들었는데 말이다.


“근데 이거 이미 캐스팅 끝나지 않았어요?”

그녀가 묻는 말에 황 대표가 기다렸다는 듯이 박장대소했다.


“하하하! 말도 마라! 현소영이 아주 거하게 한 건 하셨단다.”

현소영은 양은오 작품의 여주인공 역으로 발탁된 톱배우였다.


“현소영이 왜요?”

“이번에 사생활 논란 제대로 한 방 터졌거든.”

사생활 논란이라니.

황 대표가 저렇게 자신하는 걸 보니, 아마 보통 큰일이 아닌 듯싶다.


“양은오 작가, 그런 거에 얄짤 없는 양반인 거 알지?”

“기사 나온 거 없던데요?”

“기다려봐. 한 시간 안에 기사 쏟아질 테니까.”

“……대표님은 그걸 어떻게 아셨어요?”

“내가 이 바닥에 소식통이 좀 많잖냐. 어휴, 어찌 됐든 이 얼마나 기쁘고 감사한 일인지!”

타인의 불행 따위, 제 행복이 되면 그만인 사람이었다.

물끄러미 그를 바라보던 강이 말했다.


“일단 대본 한번 보고…….”

“보고 말고 할 것도 없다니까? 너 양은오 작가 작품 좋아하잖아. 이건 진짜 하늘이 준 기회라고!”

황 대표는 그렇게 말하며 이미 양은오 작가와 성찬수 감독과의 식사 자리까지 마련되어 있다고 했다.


“내일 저녁 6시야. 알았지?”

입꼬리가 귀에 걸린 그가 휘파람을 불며 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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