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8. 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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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8. 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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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8. 틈
2022.09.08.
황 대표의 말은 사실이었다.
예고했던 대로 얼마 지나지 않아 바로 현소영의 기사가 터진 것이다.
그녀는 내로라하는 대한민국의 대표 톱스타였지만, 이미 두 번의 음주운전 전적까지 있던 탓에 매우 조심스러운 복귀를 앞둔 상태였다.
그런데 무려 마약 스캔들이라니.
실로 어마어마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청순한 이미지로 모든 연령층의 사랑을 받던 여배우에겐 너무 치명타였다.
“아이고, 이 양반 삼진아웃이네.”
옆에 있던 삼영이 탄식했다.
그러자 옆에 있던 직원들도 다 같이 고개를 끄덕이며 동요했다.
“그러니까요. 회생하기는 글렀네요.”
“저번에도 한창 잘나갈 때 고꾸라진 거라 우울증이 심했다던데, 그 여파 아닐까?”
“맞아. 공백 기간 때 병원에 실려 간 적 있었잖아. 그때 자살소동이었다는 얘기가 있던데.”
“자기 팔자 자기가 꼰 거지 뭐. 누굴 탓하겠어.”
사실이라면 정말 안타까운 일이었다.
하지만 현실은 냉정했다.
광고업계는 이미 빠르게 그녀와의 계약을 파기하며, 사실상 현소영 지우기의 수순을 밟고 있었으니까.
그녀가 출연하기로 했던 드라마와 영화 제작사 측에서도 대체 배우를 찾기 위한 물밑 작업을 이미 진행 중이라는 소문이 돌았다.
‘현소영이 왜 그랬을까…….’
강은 물밀듯 쏟아져 나오는 기사 속 그녀의 모습을 가만히 응시했다.
행복한 것처럼 웃고 있는 소영의 가면 뒤 진짜 세상이 문득 궁금해졌다.
직원들에게 이런저런 이야기를 듣고 보니, 밝게만 보이던 모습 아래 묵직한 슬픔과 공허를 안고 있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이따금씩 정점에 다다른 톱스타들이 이런 안타까운 소식을 전하곤 한다.
연예인들의 화려한 겉모습 뒤에 숨겨진 그늘.
보이는 게 다가 아닌 그들의 진짜 속사정.
강도 모르는 게 아니었기에, 이번 일에 마냥 황 대표처럼 기뻐할 수는 없었다.
하지만 그게 양은오 작가의 작품을 거절할 이유가 될 순 없었다.
아픔은 누구에게나 있지만, 모두가 같은 선택을 하진 않으니까.
현소영의 하차가 자신의 기회로 이어진 건 사실이었으나, 그녀는 또 그녀의 길을 나아가야 했다.
언제나 그래왔듯이.
그날 저녁.
강은 회사에서도 내내 시나리오와 대본을 검토하다 집에 와서도 그 일을 계속했다.
“잠 안 잘 거야?”
“이것만 보고.”
“나 배고픈데.”
소파에 앉아 대본을 읽던 그녀의 어깨 위로 산이 턱을 기대며 말했다.
고개를 돌려보니 제 어깨에 기댄 채 불만스러운 얼굴로 저를 올려다보고 있는 그가 보였다.
산을 내려다볼 기회는 좀처럼 없던 탓에 저도 모르게 빤히 바라보았다.
그러자 그가 물었다.
“왜?”
“그냥. 신기해서.”
“뭐가?”
“한집 사는 식구 같잖아. 어색하고 불편했던 게 엊그제 같은데.”
사실이 그랬다.
편한 옷차림에 스스럼없는 스킨십.
가장 놀라운 건 그 모든 게 이제 너무 익숙해졌다는 거다.
그런데 그녀의 말을 들은 산이 되물었다.
“나 어색하고, 불편했어?”
그 말에 강이 잠시 고민했다.
“음……. 어색하다기보단 무서웠지. 처음엔 낯서니까 당연히 불편했고.”
이번엔 그가 빤히 자신을 올려다보는 게 느껴진다.
다시 시선을 맞춘 강이 물었다.
“너는 나 안 불편했어?”
“안 불편했는데.”
“처음 만났을 때부터?”
“응. 나는 너 처음 만났을 때부터 맛있었어.”
“야.”
“미안.”
“…….”
“멋있었다고 말하려던 게 말이 헛나갔네.”
제 어깨에 뺨이 살짝 눌린 채 산이 나른하게 웃었다.
그 모습을 보니 정말로 한집 사는 식구가 생긴 기분이 들었다.
물론 그게 인간이라는 말은 안 했다.
산은 사람이라기보단 대형견…… 아니, 개보다는 덩치 큰 고양잇과에 속하는 반려동물 느낌이 더 강했다.
맛있었다는 말에 대한 복수로 들려줄까 하다가 말았다.
그랬다가는 그와 장난치고 노느라 집중해서 대본 읽는 일은 포기해야 할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녀가 시계를 한번 확인하고는 말했다.
“산아.”
강의 다정한 부름에 산이 기댔던 몸을 바로 세우며 소파에 등을 기댔다.
“왜 갑자기 상냥해졌지? 무섭게?”
하여간. 눈치는 얼마나 빠른지.
움찔한 그녀가 망설이다 말을 이었다.
“나 오늘 대본 보느라 늦게 잘 거 같은데, 오늘만 나가서 다른 꿈 먹고 오면 안 될까?”
“…….”
“미안.”
강이 빠르게 사과했다.
그도 그럴 것이 시나리오는 이미 가볍게 검토한 뒤였고, 잠잘 준비를 마치고 산을 부른 것도 자신이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가 대본에 관심을 보인 탓에 설명을 해주다 조금 더 들여다본다는 게 이렇게 됐다.
“벌써 두 번이나 봤잖아.”
“좀 더 자세히 보고 싶어서. 나 양은오 작가님 작품 정말 좋아하거든.”
그녀가 그렇게까지 말하니, 산의 입장에서도 더 자리를 지키고 있기가 어려워져버렸다.
“그럼 잘 때 다시 불러. 집에 가 있을게.”
미련 없이 일어서는 그에게 강이 말했다.
“그러려면 너무 배고프지 않을까? 나가서 대충 허기라도 달래고 오는 게 어때?”
“싫어.”
“…….”
“너 때문에 입만 비싸져서, 이제 다른 건 먹지도 못해.”
삼시세끼 5성급 호텔 음식만 먹다가 흙이나 퍼먹으라는데, 누가 그럴 수 있겠나.
살기 위해 허겁지겁 배만 채우던 시절은 이미 지나갔다.
근데 그 이야기를 들은 강의 입꼬리가 실룩였다.
반대로 산의 눈매는 가늘어졌다.
“왜 웃어?”
“내가? 웃었어? 아닌데. 나 안 웃었는데.”
그녀가 황급히 입술을 말아 물었지만, 그는 확신했다.
강은 웃으려던 게 분명했다.
산이 아예 돌아서서 팔짱까지 끼고 추궁하듯 바라보자, 그녀가 마지못해 입을 열었다.
“실은…….”
간신히 평정심을 유지한 강이 실토했다.
“이제 네 식사를 책임질 수 있게 된 게 나뿐인 것 같아서.”
“…….”
“솔직히 기뻤어.”
그녀가 애써 미안한 표정을 지었지만, 새어 나오는 웃음까지는 어쩔 수 없는 모양이었다.
그 모습을 본 그가 한쪽 입술 끝을 비죽 올렸다.
“그래?”
이번엔 강의 표정이 굳었다.
“너는 왜 또 그렇게 웃어? 사람 불안하게?”
“생각도 못 한 데서 해답을 찾은 거 같아서.”
“뭐가?”
“아니야. 너는 읽던 거 계속 읽어.”
“너는?”
“나는 이참에 새로운 인간이나 찾아보려고.”
“……뭐?”
당황한 듯 되묻는 그녀에게 그가 덤덤히 답했다.
“혹시 알아? 너보다 끔찍한 악몽을 꾸는 인간이 존재할지.”
산은 가벼운 미소만 남긴 채 그렇게 강의 집을 떠났다.
그리고 현관문을 나서는 순간 그의 입가에 번져 있던 웃음은 흔적도 없이 사라져버렸다.
기껏 마음을 놓게 된 그녀에게 유치하게 굴었다고 해도, 심술을 부렸다고 해도 어쩔 수 없다.
이렇게나마 자신이 처한 현실을 깨우치지 않으면, 결국 손해 보는 건 제 쪽이 되고 말 테니까.
강이 없으면 안 되는 건 자신이었지만, 아직까진 그녀만이 그의 유일한 희망임을, 가능하다면 평생 알게 하고 싶지 않았다.
세상에 영원한 건 없으니까.
언제 죽어도 이상하지 않을 삶에서, 지키고 싶은 게 생긴다는 것, 아쉬운 게 생긴다는 것, 목메는 게 생긴다는 것은 스스로 불안을 자초하는 일이었다.
산은 그만큼 위험한 건 세상 어디에도 없다고 생각했다.
그런 세계에서 살아왔고, 그게 익숙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왜 이렇게 기분이 더럽지?”
그 말도 안 되는 불안의 웅덩이에 스스로 발을 담그고 나온 것만 같은 기분이 들었다.
늪처럼 빠져드는 위험한 일이라는 걸 알면서도.
결국 삼켜지는 건 제가 될 거라는 걸 알면서도.
인간을 홀려만 봤지, 홀렸던 적은 없었는데 지금은 정말 뭐에 홀리기라도 한 느낌이다.
이제라도 정신 차려 다행이라 여겨야 할 일인 것을.
‘솔직히 기뻤어.’
왜 이렇게 마음이 불편한지 모를 일이었다.
한편.
뒤도 안 돌아보고 나가버린 그를 보내고 난 후.
강은 멍하니 거실 한복판에 서 있었다.
느슨해져 있던 산에게 무언가를 일깨워준 게 다름 아닌 자신이라 어디 하소연할 곳도 없었지만, 그의 입장을 충분히 이해했기 때문에 붙잡을 수가 없었다.
몽마들에겐 인간의 목숨이 한낱 바람 앞의 등불 같을 텐데.
아무리 제 꿈의 가치가 높다고 해도, 제게만 목매는 건 산에게 위험한 일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것과는 별개로,
“……그렇다고 뒤도 안 돌아보고 나가냐?”
서운함이 드는 인간적 감정 또한 어쩔 수 없는 노릇이었다.
거리낌 없이 좁혀졌다고 생각했던 그와의 관계는 이렇게 잊을 만하면 다시 벌어지곤 한다.
그럴 수밖에 없는 사이였다.
강은 애써 안타까움을 거두며 돌아섰다.
몇 시간이 더 흐르고 잠자리에 들 때쯤 산을 부를까 고민했지만, 결국 그만두었다.
그가 다른 악몽을 먹거나, 다른 인간을 찾는 일이 자신에게도 결코 반가운 일은 아니었지만, 막을 수도, 막아서도 안 되는 일이었기에 그랬다.
강은 휴대폰 액정을 몇 번이나 만지작대다 메시지를 작성했다.
[나 이제 자려고.]
고민 끝에 나온 최선이었다.
선택은 그에게 맡겨야 했다.
.
.
.
산은 결국 그녀가 잠이 드는 순간까지 나타나지 않았다.
깨어난 후에도 그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다만 그가 다녀갔다는 사실 만큼은 선명히 알 수 있었다.
아니라면 이렇게 멀쩡히 자고 일어날 순 없었을 테니까.
“…….”
강은 가만히 자신의 손바닥을 내려다봤다.
희미한 기운이 느껴졌다.
열기도, 한기도 아닌 새벽의 바람 같은 산의 흔적이.
그녀는 씁쓸한 미소를 한번 짓고는 이만 자리에서 일어섰다.
새벽이 밝았고, 또 하루를 살아낼 시간이었다.
“좋은 아침!”
밴의 문을 연 강이 씩씩하게 인사했다.
“굿모닝!”
운전석에 있던 삼영이 화답했고, 산도 같은 자리에 앉아 늘 그녀를 맞이하던 모습으로 인사를 건넸다.
“왔어?”
다리를 꼬고 한쪽 턱을 괸 채 인사하던 그가 웃는다.
너무 다정하지도, 너무 딱딱하지도 않은 평상시의 모습으로.
원상태로 벌어진 거리를 실감하게 하는 미소 같아 가슴 한 구석이 따끔했다.
하지만 강은 별다른 내색 없이 마주 웃었다.
자고로 오래가는 건 변하지 않는 법이니까.
우리의 관계는 흔들려서도, 뒤틀려서도 안 된다.
적당한 거리를 유지하는 것만이 서로가 살길이라는 걸, 알아버린 후였기에 그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