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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9. 비밀의 정원 (39/118)


#39. 비밀의 정원
2022.09.11.



 
차는 늘 그랬듯 익숙한 길을 지나 회사를 향해 달렸다.

겉보기에 평소와 다를 건 아무것도 없었다.

물론 잠시 상념에 잠기긴 했지만, 그래도 다행이라 여겼다.

하마터면 속도 없이 곁을 내어주고, 친해질 뻔했지만, 그래선 안 되는 사이라는 걸 어젯밤 여실히 깨달았기 때문이다.

철저히 필요로 인해 맺어진 관계.

그것도 생존과 직결된 문제.

언제든 원하는 게 사라지면, 미련 없이 끝나버리고 말 관계였다.


‘비즈니스에 사심 섞어봤자, 피곤하기만 하지.’

강은 그런 생각을 하며 창밖으로 시선을 고정했다.

오늘따라 따라붙는 시선도 느껴지지 않았다.

늘 자신을 빤히 쳐다보곤 했던 그도 오늘만큼은 시선을 주지 않는 것 같았다.


‘그래. 그냥 이대로만 지내자. 그래야 모두가 편할 테니까.’

그런 생각을 하는데, 순간 저도 모르게 한숨이 나왔다.

그리고 복병은 지나치게 귀가 밝은 삼영이었다.


“강아. 무슨 일 있어?”

한숨 소리를 들은 그가 득달같이 반응했다.


“어? 아, 아니.”

“어디 아픈 건 아니지?”

“아프긴. 괜찮아. 잠도 잘 잤고, 컨디션 아주 좋아.”

당황스러운 마음에 대답이 길어졌다.

그러자 그의 관심이 이번엔 산에게로 향했다.


“산이 너는 또 왜 그래? 뭐 안 좋은 일 있었어?”

“네.”

그가 망설임 없이 실토하는 탓에 더 놀란 건 강이었다.

얘가 무슨 생각으로 저런 얘길 하나 싶어 돌아보는데, 산은 여전히 창밖으로 시선을 고정한 채였다.


“무슨 일 있었는데?”

삼영이 묻자, 그가 대답했다.


“어제 먹었던 저녁 메뉴가 마음에 안 들어서요.”

강은 그 말에 담긴 속뜻과 사정을 모두 알았지만, 아무것도 모를 삼영은 한 대 맞은 얼굴이 되었다.

그가 황당하다는 듯 핀잔했다.


“……너 은근히 먹는 거에 진심이더라.”

산은 부정하지 않았다.

그러자 호기심이 동한 삼영의 질문이 다시 이어졌다.


“뭐 먹었는데?”

“원래는 집에 가서 맛있는 거 먹으려고 했는데, 너무 배고파서 길에서 군것질한 게 화근이었어요.”

“군것질 어떤 거?”

“음…… 핫도그요.”

핫도그 같은 소리하네.

아무렇게나 지어냈을 그의 핫도그 발언에 강이 속으로 타박했다.

하지만 먹을 거에 진심인 건 삼영도 별반 다르지 않아 보였다.


“이야. 핫도그 맛있지. 나는 감자 박힌 거 좋아해!”

“맛없었어요.”

“아, 그래? 배고플 때 먹었다며. 어지간해선 맛없기 힘든 음식인데?”

“아니던데. 욕 나올 정도로 맛없던데.”

“그, 그래?”

“네. 흙 퍼먹는 기분이었달까.”

핫도그 하나에 살기를 내뿜는 산을 보며 삼영은 입술이 버석버석 마르는 기분이었다.

괜히 물었다 싶은데, 그는 여전히 분이 안 풀린 듯 말을 이어갔다.


“주변에 괜찮은 레스토랑도 없고.”

“…….”

“유일하게 잘 먹던 음식은 언제 떨어질지 몰라서 불안하고.”

“쟁여두면 되잖아.”

“워낙 귀한 음식이라 생산량이 적어요. 아무 때나 나오는 것도 아니고.”

고개를 돌린 산이 강을 쳐다보며 느리게 말을 이었다.


“무엇보다.”

“…….”

“신선도가 생명인 음식이라 쟁여둘 수가 없네요.”

저도 모르게 그를 쳐다보고 있던 그녀는 불시에 시선이 엮여 차마 고개를 돌릴 수도 없었다.

삼영만 분주하게 떠들어댈 뿐이었다.


“그래서 그게 뭔데? 회야? 참치? 아니면 생간이나…… 뭐, 그런 거야?”

그의 추측에 산은 가벼운 미소로만 화답했다.

그러자 강이 끼어들었다.


“우리 먹는 얘긴 그만하자. 나까지 배고파지려고 해.”

“맞다. 우리 강이 다이어트 중이라 예민할 텐데, 오빠가 너무 떠들었다. 미안, 미안.”

삼영이 입을 닫으니, 차 안이 금세 조용해졌다.

.
.
.

강은 간단한 미팅을 마친 뒤, 시간에 맞춰 회사를 나왔다.

양은오 작가와의 선약 때문이었다.

하나둘씩 불을 밝히기 시작한 서울의 풍경이 장관을 이루었다.

차는 서울에 위치한 호텔의 중식당에서 이루어졌다.

프리이빗한 룸으로 안내를 받아 들어가자, 양은오 작가와 성찬수 감독이 반갑게 그녀를 맞이해주었다.


“어서 와요.”

흰머리가 듬성듬성 난 단발머리를 호방하게 쓸어넘기던 양은오 작가가 악수를 청했다.

강도 실제로 은오를 만난 건 처음이라 설레는 마음을 숨기지 못했다.


“안녕하세요, 작가님.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그녀는 얼굴까지 붉히며 평소 은오의 팬이었음을 밝혔다.

호탕하게 웃던 양은오 역시 꼭 한번 함께 일해보고 싶었다며, 그녀가 출연했던 전작을 인상 깊게 보았노라 언급했다.

감독과는 황 대표와도 인연이 있던 터라, 이미 만난 적이 있는 사이였다.


“강이 씨, 양 작가님한테 적극 추천한 거 나야.”

“감사합니다, 감독님.”

“우리가 고맙지. 나머지는 식사하면서 천천히 얘기 나눕시다.”

“네.”

사실상 거의 출연을 확정 지은 상태에서 이루어진 만남이라 분위기가 무척 훈훈했다.

드라마 제목은 ‘비밀의 정원’으로 범죄수사물이었고, 강은 극 중 마약수사대 여형사인 신차희 경장 역을 맡을 예정이었다.

또 이번 드라마의 특이한 점은 모델이나 아이돌 출신 연기자들이 꽤 많이 출연한다는 사실이었다.

일단 여주인공 역할을 맡은 강부터가 그랬고, 상대 배우인 문성준 역의 양신휘도 꽤 파급력 있던 모델 출신 배우였다.

그리고 그는 무서운 상승세로 강보다 더 빠른 기간에 스타덤에 오르고 있는 괴물 신인이기도 했다.


“신휘 씨랑은 안면이 좀 있나?”

“아니요. 아직 실제로 만나 본 적은 없습니다.”

그녀의 대답에 은오가 감탄사를 뱉으며 답했다.


“그 친구 아주 물건이야. 어디 있다가 이제 나타났는지, 진흙 속에 아주 제대로 파묻혀 있던 보석이라니까?”

극찬을 아끼지 않는 그녀의 모습에 강도 상대 배우가 무척 궁금해졌다.

어쨌든 양은오 작가의 작품에 이렇게 많은 모델이나 아이돌 출신 배우들이 출연한 건 처음 있는 일이었다.

듣기로는 그들이 속한 소속사의 파워가 한몫했다는 소문이 있었다.

신휘를 처음 만나게 된 건, 그로부터 얼마 후의 대본 리딩 현장에서였다.

생각보다 일찍 도착한 탓에 강이 먼저 와있긴 했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그도 바로 모습을 드러냈다.


“안녕하세요. 양신휘입니다.”

확실히 신휘는 등장만으로 시선을 빼앗기 충분한 아우라를 가졌지만, 도회적이고 개성 강한 외모와 어울리지 않게 무척 깍듯하고, 살가운 스타일 같았다.

겉모습이 튀는 건 말할 것도 없었던 게, 일단 머리카락 색부터가 백금발이었다.

게다가 피어싱을 비롯한 화려한 액세서리와 패턴과 색채가 강렬한 옷차림.

누가 입어도 부담스러웠을 옷을 너무 잘 소화하고 있는 게 신기할 정도였다.

그 정도로 신휘는 어떤 옷을 입혀놔도 핏이 살고, 태가 났다. 모델이었을 때도 유명한 이유가 있었다.

하지만 그의 이미지를 형성하는 것 중 가장 큰 부분을 차지하는 건 무엇보다 저 입꼬리였다.

양신휘는 가만히 있어도 웃고 있는 것처럼 입꼬리가 말려 올라가 있었는데, 실제로도 잘 웃는 성격 같았고, 웃을 때 입 모양이 시원하게 벌어져 보기에도 좋았다.

과연 웃는 얼굴 하나로 남녀노소 불문하고 여럿 쓰러트린다는 소문이 헛소문은 아닌 듯싶었다.


“…….”

강이 말없이 그를 바라보는데, 고개를 돌리던 신휘와 눈이 마주쳤다.

그의 눈매가 바로 초승달처럼 휘었다.

나이도 두 살 어리고 경력으로도 후배인 신휘가 먼저 웃으며 인사를 건넸다.

거리가 멀어서 소리를 내진 않았지만, 강도 조용히 눈인사로 화답했다.

그는 이내 모든 자리를 돌아다니며, 촬영팀과 배우들에게 일일이 인사를 건넸다.

그렇게 룸 안에 있던 모든 자리를 돈 신휘가 강에게 막 다가오려던 순간.


“안녕하세요!”

작은 체구에서는 도저히 뿜어져 나올 것 같지 않은 엄청난 성량을 자랑하며 인형 같은 여자 하나가 나타났다.

바로 현직 아이돌이자 배우로 갓 데뷔한 로미였다.

덕분에 사람들의 시선이 다시 입구로 쏠렸다.

반은 백발이고 반은 흑발인 헤어스타일을 한 그녀도 만만치 않은 개성을 지니고 있었다.

귀여운 외모에 아담한 체형을 가진 천상 아이돌이었지만, 특이사항이 하나 있었다.

연기는 두 번째 도전이었는데, 희대의 발연기로 더 이상 까일 수 없을 만큼 까인 인물이라는 게 바로 그거였다.

강도 로미의 출연 사실은 알고 있었지만, 실물을 마주하는 건 그녀도 처음이었다.


“쟤는 용케 또 드라마 땄네.”

“그러니까. 소속사 파워가 엄청 나다던데?”

“양신휘랑 로미 같은 소속사 아니야?”

“맞아.”

“아, 우리 드라마…… 괜찮을까?”

주변에 있던 스태프들이 작게 수군거렸다.

어쨌든 양신휘와 로미를 나란히 놓고 보니, 둘 다 어찌나 화려한지 시선을 떼기가 힘들었다.

맡은 역할이 강렬한 것도 한몫하겠지만, 일단 비주얼로만 봐도 눈도장 하나는 제대로 찍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하지만 두 사람은 같은 소속사라면서도 정작 별로 친해 보이지는 않았다.

단순히 친분의 문제라기보단, 일단 서로를 보는 시선이 별로 살갑지 못했다.

그런데 그때였다.

룸에 있던 모두에게 인사를 마친 두 사람이 앞다투듯 다가와선 각각 강의 왼쪽과 오른쪽에 자리를 잡고 앉는 게 아닌가.

신휘가 먼저 인사했다.


“처음 뵙겠습니다, 서강 선배님.”

“안녕하세요.”

“만나 뵙게 돼서 영광이에요.”

그가 한 팔로 테이블을 짚고는 거리를 좁히며 다가왔다.

그러고는 빤히 저를 올려다보며 눈웃음을 살살 쳤다.


“저 진짜 선배님 팬이거든요.”

“아…….”

“꼭 한번 같이 일해보고 싶었어요.”

붉은 입술이 호선을 그리며 올라섰다.


“앞으로 잘 부탁드립니다.”

그런데 그때 로미가 불쑥 끼어들었다.


“선배님!”

아, 깜짝이야.

화통을 삶아 먹은 듯한 우렁찬 외침에 신휘에게 닿아 있던 강의 시선이 단숨에 로미를 향했다.


“저도 진짜 선배님 왕 팬이에요! 앞으로 잘 부탁드립니다!”

그녀가 솜방망이 같은 두 주먹을 불끈 쥐며 외쳤다.

강의 관심을 빼앗긴 신휘가 싸늘한 얼굴로 로미를 쳐다봤지만, 그녀는 보란 듯이 잇몸을 만개하며 웃었다.

덕분에,


‘……뭐지, 이 상황?’

가운데 낀 강만 난감한 상황이 되어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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