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40. 나는 너를 만나서 (40/118)


#40. 나는 너를 만나서
2022.09.15.



 


‘……뭐지, 이 상황?’

강을 가운데 둔 로미와 신휘의 묘한 신경전 때문에, 졸지에 그녀는 고래 싸움에 새우 등 터질 위기에 처해버렸다.

하지만 그 광경을 지켜보던 원로 배우들은 그저 껄껄 웃을 뿐이었다.


“아이고. 우리 주인공이 인기가 아주 많네.”

“그러게 말이야. 너무 잘나도 피곤하다니까?”

“꼭 젊을 때 내 모습 보는 거 같구먼.”

까마득한 대선배들의 반응에 강은 몸 둘 바를 몰랐다.


“앗! 저는 최순미 선배님이랑 백운호 선배님 왕팬이기도 합니다! 하핫!”

애교 많은 로미가 얼른 말을 덧붙이자, 그들이 말했다.


“할머니나 할아버지가 우리 왕팬이겠지.”

“맞아. 내 손녀딸이 자네보다 더 나이 많을 거 같은데? 몇 살인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선 그녀가 왼손가락 두 개와 오른손가락 두 개를 펼쳐 보이며 발랄하게 외쳤다.


“스물두 살입니다!”

로미의 대답에 갖가지 반응이 터져 나왔다.


“좋을 때다. 좋을 때야.”

“스물둘이면 몇 년 생이지?”

“신생아구먼.”

하지만 대체로 그녀를 귀여워하는 느낌이었고, 애교 넘치는 로미의 활력에 분위기는 전체적으로 훈훈했다.

……물론 그녀의 연기를 보면 어떤 반응을 보일지는 아직 알 수 없는 일이었지만.

그나마 다행인 건 로미의 대사가 한 줄 남짓이었다는 거였다.


“그럼, 정각에 리딩 시작하겠습니다.”

스태프가 자리를 정리하며 말했다.

잠시 후.

강은 다소 긴장된 분위기 속에서 대본 리딩을 시작했다.

첫 타자인 신휘의 눈빛이 순식간에 돌변했다.

그는 마약범죄 조직의 최연소 조직원이자 이인자로 등장하지만, 1회에서 자신을 거두어준 우두머리의 등에 칼을 꽂고 그 조직의 일인자가 되는 빌런 문성준 역을 맡았다.

캐스팅이 신의 한 수였다는 기사를 얼핏 본 것도 같은데…… 인정하지 않을 수가 없을 만큼, 이미지가 정말 찰떡이었다.

웃음기가 완전히 사라진 그의 삼백안과 웃고 있는 듯한 입꼬리는 정말로 약이라도 한 사람처럼 미친 광기를 뿜어내고 있었다.

그가 등장하는 첫 신의 리딩이 시작되었다.


“사장님.”

신휘가, 아니 문성준이 입을 열었다.

실제로 촬영이 시작된 게 아니었는데도, 현장은 순식간에 긴장감이 맴돌았다.


“약속은 지키라고 있는 거잖아요. 그렇죠? 내 말이 맞아요, 틀려요?”

맞은편에 있던 배우가 비중이 크지 않은 엑스트라의 대사를 대신 쳐주었다.


“서, 성준아. 왜 이래, 정말. 네가 나한테 이러면 안 되는 거잖아. 응?”

“뭘 이러면 안 돼.”

“제발…… 응? 나 좀 살려주라.”

“이거 봐. 꼭 사고치고 딴말한다니까?”

“성준아!”

엑스트라의 대사는 그게 다였다.

이후엔 문성준에게 곧장 죽임을 당하는 인물이었기 때문이다.

그가 잔혹하게 죽임당하는 묘사를 한 지문이 지나고, 문성준의 마지막 대사를 양신휘가 읊었다.


“잘 가요.”

몇 줄 되지 않는 짧은 등장이었지만, 무척 강렬한 신이 아닐 수 없었다.

실제로 대본에는 ‘얼굴에 피칠갑을 한 성준이 후련하다는 듯 웃으며-’ 라는 지문이 적혀 있었다.

분장까지 더해진 그의 얼굴을 상상하니 실로 오싹할 정도였다.

하지만 리딩을 마친 양신휘는 언제 그랬냐는 듯 웃는 얼굴로 싹싹하게 인사를 건넸다.


“저 친구, 이름이 양신휘라고 했나?”

가장 연장자인 배우 하나가 그를 눈여겨보다 성 감독에게 물었다.


“네, 선생님.”

“모델이었다고?”

“네, 맞습니다.”

성 감독이 얼른 고개를 끄덕이며 답하자, 그가 너털웃음을 터트리며 말했다.


“배우 안 했으면 어쩔 뻔했어? 아주 물건이네.”

“그렇죠, 선생님? 저도 딱 그렇게 생각했었습니다.”

곁에 있던 양은오 작가가 동요했다.

원로 배우는 이내 강을 보면서도 이야기했다.


“저 친구는 내가 안 그래도 기대가 컸는데, 실망시키지 않는구먼.”

“어쩜 저랑 그렇게 생각이 똑같으세요.”

“허허. 그런가? 이 바닥 오래 있던 사람들이야 뭐, 다들 보는 눈이 비슷하겠지.”

촬영팀과 배우들은 하나같이 입을 모아 두 사람을 칭찬하고, 드라마 속 그들의 케미를 기대하는 분위기였다.

훈훈한 마무리와 함께 예정되어 있던 회식이 이어졌다.


“근처에 있을 거니까, 무슨 일 생기면 바로 불러.”

산이 이동하는 차 안에서 건넨 말에 강이 대답했다.


“알았어.”

“전화 잘 챙기고.”

“그럴게. 너무 걱정하지 마.”

그녀는 웃는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삼영이 먼저 차에서 내렸고, 강은 뒤따라 내리려다 말고 잠시 망설였다.


“왜 그래?”

눈치 빠른 그가 묻자, 그녀가 한 박자 늦게 입을 열었다.


“계속 가게 근처에 있을 거야?”

“응.”

“배고픈데 참을 수 있겠어?”

산과 조금 어색한 일이 있고 난 후, 강은 기대를 조금 내려놓기로 했다.

물론 그가 제 꿈만 찾는다면 저로서는 다행인 일이지만, 언제든 산이 사라질지도 모를 상황을 영원히 모른 척하고 살 수는 없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저 딴에는 배려를 한답시고 물은 말이었다.

그런데 그는 다리를 꼬고 앉은 채 턱을 괴고 온몸으로 불편한 심기를 내뿜고 있었다.


“너는 내가 하루라도 빨리 다른 사람 꿈 찾아서 떠났으면 좋겠어?”

“당연히 아니지!”

“그런데 왜 못 보내서 안달이지?”

“그런 게 아니라, 내 일 때문에 너무 기다리게 하는 거 같으니까 미안해서 그러는 거잖아.”

“안 미안해도 되니까, 신경 쓰지 마. 못 견딜 만큼 배가 고프면, 그것도 내가 알아서 해결할 거니까.”

“…….”

물끄러미 산을 바라보던 그녀가 손을 뻗었다.

그러고는 가만히 그의 손등 위를 덮으며 말했다.


“산아.”

다정한 부름에 산이 살짝 미간을 좁혔다.

강이 상냥하게 이름을 부를 때마다 얘가 또 무슨 무서운 말을 하려고 분위기를 잡나 싶어, 불안한 마음이 들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녀는 그의 불퉁한 표정에도 전혀 동요하지 않았다.

외려 가볍게 눈을 흘기더니, 작게 웃음까지 터트렸다.


“내가 자꾸 떠미는 거 같이 느껴져서, 서운했어?”

“…….”

“서운했네.”

“서운하긴 뭘 서운해.”

“아니면, 아직 나보다 좋은 계약자를 못 찾아서 심기가 불편한 거야?”

산이 누구 놀리냐는 듯한 눈빛으로 쳐다봤지만, 강은 덩치 큰 짐승을 보듯 웃기만 했다.

그러더니 곧 달래듯 말을 이었다.


“나는 너 없으면 안 돼.”

그녀의 말에 그의 눈빛이 급격히 흔들렸다.


“나는 대체가 가능한 인간이지만, 너는 대체가 안 되는 몽마니까.”

“…….”

“그래서 항상 아쉬운 쪽은 내 쪽이야.”

강이 차분히 말을 이었다.


“하지만 언젠가 때가 되면 내가 등 떠밀지 않아도, 너 스스로 떠날 수도 있다는 걸 알아.”

한편으론 그날이 너무 빨리 올까 봐 무섭기도 하지만, 그렇다고 내 욕심으로 널 잡아둘 생각은 없다고.

맞닿은 손이 조금 더 밀착했고, 그녀는 진심을 담아 마음을 전했다.


“나는 너 만나서, 이미 충분히 누렸어.”

“…….”

“그래서 고마워.”

덕분에 늘어지게 잠도 자고, 세상에 맛있는 게 참 많다는 것도 알았으니 얼마나 꿈 같은 일이냐고.

그렇게 생긋 웃던 강은 너무 늦지 않게 돌아오겠다는 말을 마지막으로 차에서 내렸다.

한마디도 하지 못하고 덩그러니 남겨진 산은 어딘가 한 대 맞은 사람처럼 옴짝달싹도 하지 못했다.

문득 그녀도 자신과 같은 불안을 늘 안고 살고 있었다는 당연한 사실이 뒤통수를 친 것처럼 강렬하게 느껴졌기 때문이다.

대체할 수 있는 이가 없어 더 아쉬운 건 늘 제 쪽이라는 강의 말을 떠올려보면 두려움의 무게는 아마 그녀 쪽에 조금 더 쏠려 있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서로의 목에 족쇄를 채워버린 듯한 건 마찬가지인데, 강은 어떻게 저런 마음가짐으로 자신을 대할 수 있는지 그로서는 알 수 없었다.

인간이기 때문일까?

아니면 그냥 그녀가 따뜻한 성정을 가졌기 때문일까.

모든 걸 알 수는 없었지만, 한 가지는 확실히 알게 되었다.

오늘 강이 한 말이 자신의 마음속 초조함을 한 움큼은 거두어 냈다는 걸.

산은 시선을 내려 그녀의 온기가 남아있는 자신의 손등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그러다가 느리게 제 살갗을 쓸어보았다.

가슴 한구석이 묘하게 욱신거렸다.


 

.
.
.

강은 가게 앞에서 팀에 합류했다.

가게 하나를 통째로 빌려 회식 자리를 마련해준 덕에 다들 신이 난 분위기였다.

주연급 배우들과 대선배인 원로 배우들이 가까운 테이블에 자리했고, 그곳엔 성찬수 감독과 양은오 작가도 함께였다.

아쉽게도 로미가 낄 자리는 없었다.


‘아, 저기 내가 딱 끼어 있어야 하는데.’

그녀는 분위기가 좀 흐트러질 틈을 노려 그때 자연스럽게 합석할 계획을 세웠다.

강은 술을 그렇게 잘 마시는 편은 아니라, 적당히 몸을 사렸다.

술자리 분위기도 예전 같지 않아 강압적인 느낌은 없었지만, 하나둘씩 술이 들어가니 흐트러지는 사람들도 나오기 시작했다.

중년 배우인 강원석이 강과 신휘가 있던 테이블로 온 것도 그때였다.


“아이고, 우리 주인공님들.”

딱 들어도 얼큰하게 취한 것 같은 말투였다.


“꼰대가 술 한잔 올립니다. 두 분 다, 제 잔 한 잔씩 받으시죠.”

“네, 선배님. 제가 먼저 드릴게요.”

강이 말했지만, 얼큰하게 취한 그가 입으로 스읍- 소리를 내며 붉어진 눈을 부릅떴다.


“까불지 말고, 내 잔 먼저 받아.”

“아, 네…….”

그녀가 마지못해 잔을 들자, 원석이 술이 넘치도록 따라주곤 신휘에게도 술병을 내밀었다.


“너도 받고.”

“네!”

그가 얼른 두 손으로 잔을 들었고, 곧 술이 가득 채워졌다.


“마셔.”

“선배님은 안 드세요?”

“말대꾸하지 말고 마셔.”

원석이 정색을 하고 말하는 바람에 분위기가 살짝 얼어붙었다.

하지만 신휘가 이내 웃는 얼굴로 강에게 말했다.


“선배님. 저희 짠 할까요?”

“그래요.”

그녀가 술잔을 들자 그가 와서 가볍게 잔을 부딪치고는 고개를 돌려 술을 마셨다.

그 모습을 빤히 쳐다보던 강원석이 두꺼운 입술을 삐죽거렸다.


“생긴 건 계집애같이 생겨서, 술 좀 하나 보다?”

“네. 제가 생긴 건 이래 봬도 술 좀 마십니다.”

“주량이 어떻게 되는데?”

“음. 한 소주 서너 병 정도는 마시는 것 같습니다.”

“그래?”

사냥감을 발견한 짐승처럼 눈을 빛내던 그가 손을 들어 종업원을 불렀다.


“아줌마. 여기 국그릇 하나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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