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1. 소원 적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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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 소원 적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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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 소원 적립
2022.09.18.
“생긴 건 계집애같이 생겨서, 술 좀 하나 보다?”
“네. 제가 생긴 건 이래 봬도 술 좀 마십니다.”
“주량이 어떻게 되는데?”
“음. 한 소주 서너 병 정도는 마시는 것 같습니다.”
“그래?”
그때 원석의 눈빛에 어려 있던 건 분명 불쾌감이었다.
“아줌마. 여기 국그릇 하나만.”
강이 순간적으로 당황한 기색을 드러낸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하지만 정작 신휘는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가만히 있어도 웃고 있는 것 같은 표정 때문인지는 몰라도, 그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도통 알 수 없었다.
옆에 있던 나이가 지긋한 배우 하나가 상황을 지켜보다 입을 열었다.
“어이, 이 사람아.”
그는 시대가 어느 시댄데 짓궂게 구냐며 만류했지만, 강원석은 능글맞은 웃음으로 어물쩍 넘겨버렸다.
“아이, 선생님. 저희 때는 더 하지 않았습니까. 그리고 이게 제 나름의 후배를 사랑하는 방식입니다.”
“두 번 사랑했다가는 사달 나겠구먼.”
“하하하! 좋은 게 좋은 거 아니겠습니까? 제가 이 친구가 참 마음에 들어서 그럽니다. 선생님.”
그가 그렇게까지 나오니 더는 원석을 면박할 수 없었다.
자칫 잘못했다가는 까마득한 후배 앞에서 그의 면을 상하게 할 수도 있는 일이기 때문에, 그저 적당히 하고 넘어가길 바라야 했다.
잠시 후.
소주 반병은 족히 다 들어가고도 남을 커다란 그릇에 술이 담겼다.
원석이 그걸 내밀며 작게 말했다.
“소주 서너 병? 이게 어디서 싸가지 없게 술부심이야.”
“아…… 하하.”
“웃지 마, 이 X끼야.”
맹수 같은 그의 눈빛에 순식간에 공기가 얼어붙었다.
조용히 밥을 먹던 성 감독이 귀를 쫑긋 세우고 있다가 끼어들었다.
“아이, 원석이 형. 왜 그래.”
“찬수야.”
으름장 놓듯 성 감독의 이름을 부른 그가 으르렁대듯 말을 이었다.
“어정쩡하게 끼어들면 분위기 더 개판 되는 거 알지?”
“…….”
“네가 그러면 내가 꼭 나쁜 사람 된 거 같잖아.”
그가 뭉개진 발음으로 네가 선배인 나를 꼽주면 후배들 앞에서 본인이 뭐가 되냐고 항변했다.
은근히 긴장감이 맴도는 분위기였지만, 어딜 가든 섞인 사람에 따라 으레 있을 수도 있는 일이라 다들 조용히 넘어가자는 분위기였다.
강원석의 눈빛이 다시 신휘를 향했다.
“야.”
“네, 선배님.”
“주인공이라고 다들 빨아주니까 네가 뭐라도 된 거 같냐?”
“아닙니다.”
“너 주량이 서너 병이랬지? 내가 주량이 두 병이거든?”
“네.”
“무슨 말인지 알겠어? 나보다 먼저 고꾸라지면 아주 그냥 뒤지는 거예요. 네? 알아들었어요, 잘난 후배님?”
“알겠습니다.”
기분이 나쁠 법도 한데, 그는 넉살 좋게 원석의 비유를 맞춰주며 적당히 그의 심술을 받아주었다.
옆에 앉아 있던 강이 외려 긴장했다.
‘……저거 다 마시면 그냥 쓰러질 거 같은데.’
그런 생각을 하며 조마조마하게 바라보는데, 신휘가 고개를 돌리곤 그 술을 단숨에 들이켰다.
꿀꺽꿀꺽.
술을 물처럼 넘기는 소리가 무거운 정적을 대신했다.
그의 고개가 점점 뒤로 꺾일수록, 상황을 지켜보는 이들의 입도 점점 벌어졌다.
탁.
이윽고 말끔히 비워진 잔이 테이블 위에 놓였다.
강원석의 눈썹이 꿈틀거렸고, 신휘는 술잔을 내려놓은 뒤 손등으로 젖은 입술을 훔쳤다.
그걸 본 양은오 작가가 크게 웃음을 터트렸다.
“하하! 신휘 씨, 그걸 진짜로 다 마셨어?”
“대선배님이 주신 건데 마셔야죠.”
“아야, 자기 사회생활 잘한다. 합격!”
그녀의 반응에 주변에서도 소심한 웃음과 함께 박수가 터져 나왔다.
하지만 강원석은 성에 차지 않는 듯했다.
“어이, 양 작가. 누구 마음대로 합격을 줘? 이제 한 그릇 비웠는데.”
그러고는 웃기만 하는 신휘에게 들으라는 듯 말했다.
“너 주량 소주 서너 병이라며.”
“네. 그렇습니다.”
“그럼 아직 반도 못 채운 거잖아. 그렇지?”
그렇게 말한 원석이 다시 국그릇에 술을 따르려 하자, 호쾌하게 상황을 넘기려던 양은오 작가의 얼굴에도 웃음이 사라졌다.
“그만하지?”
방금과는 다소 다른 투로 흘러나온 말에 강원석이 인상을 썼다.
“뭐라고?”
“원석아. 개가 똥을 끊지, 아직도 술버릇 못 고쳤니?”
웃는 낯으로 날아온 강력한 한방에 찬물을 끼얹은 듯한 분위기가 됐다.
강원석이 한 대 맞은 듯한 표정이 된 건 말할 것도 없었다.
“적당히 해. 너 때문에 촬영 시작도 전에 분위기 개판 나면 내가 곤란하잖아. 선생님들도 계시는데.”
“…….”
“알코올 중독 다 치료한 거 아니었어? 내가 그 조건으로 너 합류시킨 걸로 기억하는데.”
그제야 강원석이 정신이 번쩍 든 듯 주변의 눈치를 살피기 시작했다.
“야, 은오야. 우리 친구잖아. 왜 이래. 나도 웃자고 한 거야.”
“너만 웃긴 거 같아서 그래, 원석아. 알지? 우리 친구라서 해주는 말이야. 너 내일 아침에 기사 뜰까 봐.”
나긋나긋 흘러나오는 경고에 그의 얼굴이 점점 붉어졌지만, 곧 머쓱한 듯 웃고 말았다.
“아이, 참! 그래, 내 생각 하는 거 너밖에 없다!”
문제는,
“근데 나 이거 서강 씨 주려고 한 거야!”
졸지에 타깃이 바뀌어버린 것.
신휘에게 준 것처럼 소주로 꽉 채워진 국그릇이 방향을 틀어 강을 향했다.
“내가 주는 거 한 잔은 마셔야지, 안 그래? 남자 주인공만 챙기면 서운하잖아.”
“아, 선배님. 제가 술을 잘 못 해서…….”
“아이, 그러지 말고 이것만 좀 받아주라. 여기서 자기가 빼버리면 나 진짜 병X 될 거 같아서 그래. 이것만 마셔주면 나 조용히 꺼질게. 응?”
그의 사정에 양은오 작가도 더 이상 끼어들지 않고, 시선을 돌렸다.
슬슬 눈치를 살피던 원석은 난감해하는 강에게 잔을 밀었다.
“고마워, 후배님. 내 체면 세워줘서. 나 이제 진상 안 떨게.”
그런데 그 잔을 대신 받아든 건 신휘였다.
“선배님.”
“어?”
“한 잔 주면 정 없다던데, 이거 제가 대신 마시면 안 될까요?”
“…….”
“괜찮으시죠?”
……이 새X 봐라?
강원석은 순간 험상궂은 표정을 지었지만, 확실히 당황한 듯 보였다.
하지만 결국 주변의 시선을 무시할 순 없던 탓에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뭐, 흑기사 좋지. 감당할 수 있으면 마셔.”
“네! 감사합니다!”
“야, 근데 마시기 전에 이건 확실히 하자. 내가 억지로 등 떠민 거 아니다? 너 나중에 딴말하지 마. 여기 있는 사람들 다 증인이야.”
“그럼요. 남자가 어떻게 한 입으로 두말합니까.”
속도 좋은 양신휘가 눈매를 휘며 웃었다.
하지만 강은 이 상황이 반가울 리 없었다. 괜히 저 대신 나서다가 탈이라도 나면 큰일이었기 때문이다.
“저기, 신휘 씨. 억지로 안 마셔도…….”
“괜찮아요, 선배님.”
걱정된 그녀가 말리려 했지만, 그가 웃는 얼굴로 말했다.
정말로 괜찮다고.
눈을 똑바로 마주한 상태에서 한 말이라,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는 그의 진짜 속뜻을 내비치는 것 같았다.
하지만 좀처럼 그녀의 안색이 나아지지 않자, 신휘는 살짝 고개를 숙여 다가왔다.
그러고는 강에게 귓속말하듯 말했다.
“대신 나중에 소원 하나 들어주세요.”
“…….”
“아셨죠?”
느긋하게 웃던 그가 두 번째 잔도 비워냈다.
그러더니 빈 잔을 머리 위에 터는 퍼포먼스까지 보이며 상황을 마무리 지었다.
은근한 긴장감 속에서 지켜보던 주변에서도 가벼운 안도의 한숨이 흘러나왔고, 그는 보란 듯이 원석에게 빈 잔을 돌려주며 웃었다.
못마땅하게 신휘를 보던 강원석은 마지못해 상황을 받아들이면서도 끝까지 꼬투리를 잡았다.
“야. 근데 너 웃지 좀 마.”
“아, 죄송합니다. 제가 입꼬리가 원래 이렇게 생겨서.”
“참나. 그래. 생겨 먹은 게 그런 걸 어쩌겠냐. 먹던 거 맛있게 먹어라.”
그가 그렇게 말하고는 자리에서 엉덩이를 뗐다.
그런데 막 일어서려는 원석을 신휘가 도로 붙잡았다.
“선배님?”
강원석이 어리둥절한 얼굴로 내려다보자 그가 씨익 웃으며 말했다.
“어디 가세요.”
“…….”
“제 잔도 받아주셔야죠.”
받았으니, 돌려드리는 게 후배 된 도리 아니겠냐는 신휘의 넉살에 사방에서 웃음이 터졌다.
하지만 양은오 작가가 만류했다.
“신휘 씨, 아서라. 그러다 진짜 오늘 뭔 일 난다?”
“하하. 농담입니다.”
그가 국그릇을 거두며 웃었지만, 원석은 이미 심기가 꼬인 뒤였다.
신휘의 행동을 도발로 받아들인 것이다.
“너……!”
“강원석.”
양은오 작가가 끼어들었다.
“너 진짜 마지막 경고야. 네 자리로 돌아가. 대본에서 파버리기 전에.”
호적에서 파버린다는 경고보다 무시무시한 소리였다.
원석은 어쩔 수 없이 신휘를 한번 흘겨보고는 잽싸게 내뺐다.
오늘만 날이 아니니, 언제 한번 날 잡아 제대로 콧대를 눌러주면 그만이었다.
옆에 있던 강은 얼떨떨한 얼굴로 양신휘를 바라보았다.
‘뭐지? 맥인 건가? 아니면 진짜 호의였나?’
눈치가 없는 건지, 겁이 없는 건지 도통 알 수가 없었다.
하지만 덕분에 강원석이 사라진 테이블은 꽤 편안한 분위기가 됐다.
그렇게 얼마나 지났을까.
앞에 앉은 원로 배우들이 어딘가를 보며 대화했다.
“어이구, 저 처자는 술이 그냥 물처럼 들어가네.”
“그러게 말이여. 저거 물 아니여? 진짜 술이여?”
고개를 돌려보니, 저 멀리 앉은 로미가 사발에 소맥을 말아 물처럼 마시고 있었다.
그리고 그녀의 맞은편엔 술이 떡이 된 강원석이 테이블에 머리를 박고 고꾸라진 채 뻗어 있었다.
그걸 지켜보는 다른 이들도 그 광경이 좀처럼 믿기지 않는 듯했다.
분위기로 보아하니 술로 강원석을 진작 보내버린 것 같았고, 영웅이 된 로미는 주변 사람들을 구한 것도 모자라 일어나서 춤이며 노래며 장기자랑을 마구 늘어놓으며 분위기를 달구고 있었다.
주는 대로 술도 얼마나 넙죽넙죽 잘 마시는지.
저러다 위에 구멍이 나는 건 아닌지 걱정될 정도였지만, 얼굴도 빨개지지 않고 술을 즐겼다.
아마 이 자리에 있는 최고의 술꾼은 양신휘와 로미인 걸로 예상……
쿵!
‘쿵?’
저 혼자 이런저런 상념에 잠겨 있던 강의 시선이 제 옆으로 향했다.
멀쩡한 얼굴로 술을 마시던 신휘가 별안간 테이블에 머리를 박고 고꾸라진 것이다.
“아이고. 이 양반 갔네, 그려.”
“주님. 한 놈 또 올라가유.”
술에 취해 쓰러진 그를 보며 맞은편에 앉은 선배들이 중얼거렸다.
강이 화들짝 놀라 신휘의 상태를 확인했지만, 다행히 숨은 쉬고 있었다.
이로써 최종 승자는 로미로 결정 났다.
.
.
.
“에이, 씨X.”
간신히 정신을 차린 원석이 비틀비틀 가게를 빠져나와 후미진 골목으로 들어갔다.
그러고는 담배를 입에 물고 벽에 가까이 붙어 바지를 내렸다.
도대체 언제 정신을 잃었던 걸까?
앞에 앉은 쥐방울만 한 여자애랑 신나게 주고받던 기억은 나는데, 저도 모르는 사이에 고꾸라진 게 영 자존심 상했다.
“요즘 것들은 하여간 싸가지가 없어. 나 때는 말이야, 어?”
횡설수설하던 그가 노상방뇨를 하고 있을 때였다.
잔뜩 취한 강원석의 뒤로 검은 그림자가 길게 드리워졌다.
기척을 느낀 원석이 앞뒤로 비틀거리며 슬쩍 고개를 돌렸다.
반쯤 풀려 있던 그의 눈이 무언가를 발견하고는 커다래졌다.
“……으, 으악!”
원석의 짧은 비명이 어둑한 골목에 울려 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