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42. 간택 (42/118)


#42. 간택
2022.09.22.



 


“……으, 으악!”

원석의 짧은 비명이 어둑한 골목에 울려 퍼졌다.

안개를 뭉쳐놓은 듯한 검은 형상이 허공에 둥둥 떠 있는 걸 발견한 그의 심장이 바짝 졸아들었다.


“너, 누, 누구……!”

그것은 빠르게 날아와 강원석의 목을 틀어쥐었다.


“커헉!”

숨통이 막힌 그가 뱉던 말도 맺지 못하고, 헐떡였다.

온몸을 사로잡는 공포심에 눈동자가 넘어가 버렸다.

찰나의 순간이었다.

바지도 제대로 추스르지 못한 그가 그대로 벽을 타고 미끄러지며 쓰러졌다.

벌어진 입에서는 게거품과 함께 침이 질질 흘렀고, 바지 앞섶은 오줌에 흥건히 젖어 지린내가 폴폴 났다.

원석은 그렇게 기절해버리고 말았다.

강원석이 발견된 건 그로부터 얼마 후였다.


“으잉?”

쓰레기를 버리러 나온 가게 직원 하나가 그를 발견한 것이다.

눈가를 가늘게 늘이며 다가간 중년의 여성은 이내 반쯤 드러난 원석의 둔부를 보곤 화들짝 놀라 소리쳤다.


“에그머니나! 망측해라!”

그녀는 잽싸게 가게 주방으로 돌아가 남자 직원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상황을 전달받은 남직원이 원석의 옷을 정리했고, 곁에 있던 중년의 여직원은 곧 쪼그리고 앉아 고무장갑을 낀 손으로 원석의 뺨을 두드려댔다.


“손님! 손님! 정신 좀 차려보세요! 여기서 주무시면 입 돌아가요!”

“아이고, 이 양반 꼼짝도 안 하네.”

두 사람이 고민하다가 일단 그를 일으켰다.

직원 둘에게 대롱대롱 매달려 거의 질질 끌려오다시피 한 원석이 홀 안에 모습을 드러내자, 근처에 있던 사람들 몇몇이 놀라 달려갔다.


“어머! 원석 선배님!”

“원석아!”

“이게 어떻게 된 일입니까?”

놀라서 눈이 휘둥그레진 그들에게 원석을 부축해온 남직원이 말했다.


“담벼락 아래서 주무시고 계시길래, 모시고 왔습니다.”

……주, 주무시고 계셔?

그 말에 모두의 시선이 바닥에 널브러진 원석에게로 향했다.


“푸, 크허…… 크허어어, 푸르르르.”

엉망이 된 몰골로 그가 코를 골고 있었다.

옷은 흙바닥에 뒹굴기라도 한 것처럼 엉망이었고, 토사물을 묻힌 건지, 오물을 묻힌 건지 구린내가 폴폴 났다.

그때 다가온 양은오 작가가 물었다.


“얘는 왜 또 바닥에 널브러져 있어?”

“아, 그게…….”

직원 하나가 상황을 설명하자, 그녀가 진저리난다는 듯한 표정을 짓고는 허공에 손을 휘저었다.


“어휴, 누가 좀 치워라. 집이든, 모텔이든 아무 데나 좀 보내버려.”

코를 틀어쥐는 은오의 말에 모여 있던 이들이 슬슬 눈치만 보며 쭈뼛대고 있을 때였다.


“제가 가겠습니다, 작가님!”

상황을 수습하기 위해 나선 건 꽤 의외의 인물이었다.

오른손을 번쩍 들며 씩씩하게 나선 주인공은 바로,


“요기 바로 옆에 모텔이던데, 거기에 모셔다 두면 될까요?”

로미였다.


“……자기가?”

놀란 은오가 되물었지만, 그녀는 걱정하지 말라는 듯 팔까지 걷어붙이며 나섰다.

그러고는 바닥에 퍼진 강원석의 옷깃을 잡아 곧바로 어깨에 맨 뒤, 자세를 바로잡았다.

장정 하나를 완벽히 업고 있는 작고 아담한 체형의 로미를 본 모두가 너무 놀라서 입만 떡 벌린 채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럼 다녀오겠습니다! 아, 제 수저 치우시면 안 돼용! 저 아직 다 못 먹었거든요!”

로미가 그렇게 말하고는 원석을 업은 채 척척 걸어 나갔다.

제일 가까이 있던 남자 스태프 하나가 놀란 얼굴로 재빨리 로미의 뒤를 따라나섰다.

멀찌감치서 그 광경을 지켜보던 강도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맞은 편에 앉아 있던 원로 배우 둘도 제법 놀라운 광경을 봤다는 듯 눈을 끔벅였다.


“요즘 젊은이들은 참 여러모로 대단하구먼.”

“가만있어 보자. 저 친구가 몸 쓰는 거 잘한다던 그 친군가? 맡은 배역이 뭐였지?”

그들이 로미에게 급격히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다.

강이 그들에게 그녀의 배역에 대해 설명해주었다.


“아, 황소미라고. 문성준 오른팔로 나오는 인물이에요, 선생님.”

“아아. 그 액션 담당한다는 친구가 저 친구야?”

“네.”

고개를 끄덕이자 두 배우가 저들끼리 말을 주고받기 시작했다.


“허허. 그럼 그렇지. 은오가 캐스팅한 이유가 있었구먼.”

“캐릭터 이름을 괜히 황소미로 지은 게 아니라니까. 황소처럼 힘이 센 아이라 그런 이름을 붙여준 거야.”

“그럼 미 자는 아름다울 미(美)인가?”

“듣고 보니 일리가 있네.”

그 말에 강도 새삼 로미가 합류할 수 있었던 이유를 조금은 알 것 같았다.

아무리 소속사 파워가 막강해도, 양은오 작가가 마음에 들지도 않는 배우를 작품에 넣지는 않았을 거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맞은편의 원로 배우 하나가 끌끌 웃음을 흘리며 잔을 들었다.


“이번 촬영, 아주 재미있겠어.”

그러더니 곧 아무 일 없었다는 듯 주변의 동료들과 술잔을 나누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신휘도 정신을 차렸다.

죽은 듯 얌전히 잠이 들었던 그는 화장실에 한 번 다녀오더니, 멀쩡해진 얼굴로 앉았다.


“괜찮아요?”

“네.”

강이 묻는 말에 신휘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자네. 어디 가서도 기 안 죽고, 사회생활 잘하겠구먼.”

맞은편에 앉아 있던 원로 배우가 건넨 말에 신휘가 무구하게 웃으며 답했다.


“과찬이십니다.”

“그럼 어떻게 내 술도 한잔 받아볼 텐가?”

“영광입니다.”

그가 얼른 무릎까지 꿇고 손을 내밀어 잔을 받았다.

옆에서 보던 강이 혀를 내둘렀다.


“오버하지 말아요. 그러다 훅 가서, 이불 차기 싫으면.”

작게 충고를 건넸지만, 그는 입꼬리를 말아 올린 채 어깨를 으쓱일 뿐이었다.


“괜찮아요, 선배님. 아직 주량 한 병 정도 남았으니까.”

그렇게 말하는 신휘에게 그녀도 더 뭐라고 할 수 없었다.

본인이 괜찮다는데, 그 이상 뭐라 할 것인가.

체념한 채 고개를 돌리려는데, 그가 작게 말을 이었다.


“그런데 선배님.”

“…….”

“지금 저 걱정해주신 거예요?”

다시 시선이 마주치자, 미소 짓고 있는 양신휘가 보였다.


“기분 되게 좋네요. 덕분에 오늘 술 좀 들어갈 것 같아요.”

신휘가 그렇게 말하고는 눈을 맞춘 채로 술 한 잔을 들이켰다.

지독할 정도로 지그시 시선을 맞추는 게, 꼭 누군가를 떠올리게 했다.


‘산이, 배 안 고프려나.’

양신휘와 눈싸움을 하다 문득 떠오른 산 생각에 강은 시계를 한번 확인했다.

그러고는 여전히 저를 바라보고 있는 눈빛을 외면한 채 조용히 식사를 이어갔다.

그 뒤로도 그녀는 무의식적으로 종종 시간을 확인했다.

그 모습을 유심히 지켜보던 신휘가 고개를 갸웃거리다 물었다.


“선배님, 혹시 다른 약속 있으세요?”

“왜요?”

“자꾸 시계 쳐다보시길래, 누구 기다리는 사람 있나 해서요.”

“…….”

아, 내가 그랬나?

속으로 그런 생각을 하며 눈만 굴리고 있는데, 그가 다시 물어왔다.


“아니면 혹시 집에 강아지나 고양이 키우시나?”

신휘의 말에 강은 저도 모르게 실없는 웃음을 흘렸다.

자꾸만 시계를 들여다보는 제 모습이 혹여 밥때 놓친 반려견이나 반려묘를 걱정하고 있는 주인의 모습으로 비췄을까 싶어서.

게다가 언젠가 제 어깨에 기대 배고프다고 하던 산을 보며, 커다란 짐승을 떠올렸던 기억이 나기도 했다.

조용히 웃기만 하는 그녀를 향해 신휘가 확신하듯 말했다.


“키우시는구나?”

강은 딱히 둘러댈 말도 없어 대충 고개를 끄덕였다.


“네, 키워요.”

“강아지요, 고양이요?”

되묻는 그의 말에 그녀가 답했다.


“크고 멋진 고양이요.”

사실 고양이보단 우아한 재규어나 흑범 쪽에 가까웠지만, 어찌 됐든 확실히 고양잇과긴 했다.

공통점을 발견해 신이 난 신휘가 말했다.


“오오! 저도 집사인데!”

그는 곧장 휴대폰을 열어 자신이 키우는 고양이 사진을 보여주며 마구 자랑했다.

액정 속엔 도도한 러시안 블루 한 마리가 앉아 있었다.


“너무 귀엽죠? 이름은 오삼이예요. 제가 얘 분양받은 날 오삼불고기를 먹었거든요. 선배님네 고양이는 사진 없어요? 보여주세요!”

“아, 저희 고양이는 낯을 많이 가려서 카메라만 들이대면 도망가요.”

“에? 잠잘 때 몰래 찍은 사진 같은 것도 없으세요?”

“……그게, 키운 지 얼마 안 돼서.”

“분양받으셨어요?”

“냥줍 했어요.”

“아아. 길고양이한테 간택당하셨구나.”

길고양이한테 간택이라니.

완전 사실은 아니지만, 어쩐지 현실과 척척 들어맞는 상황인 것 같아 웃음이 나오려 했다.

그런데 신휘가 돌발 질문을 던졌다.


“고양이 이름이 뭐예요?”

가장 기본적인 질문에 말문이 막혀버렸다.

우물대던 그녀가 고장 난 로봇처럼 말을 이었다.


“아, 이름이…… 산……이긴 한데.”

“산이요?”

“……두산이요.”

“두산이?”

“네. 백두산.”

한산이라고 할 순 없어서 급하게 지어낸 두산이.

얼떨결에 뱉은 것 치고는 그럴듯했다.


“아아. 두산이구나. 크고 멋진 고양이라더니, 이름도 웅장하네요. 멋져요.”

“고마워요.”

“다음에 꼭 사진 보여주세요.”

엄청난 애묘인인 듯 보이는 그의 말에 강이 조용히 미소로 화답했다.

.
.
.

얼마 지나지 않아 회식 자리가 마무리되었다.

로미와 신휘가 소속되어 있는 회사의 직원이 차를 가져왔고, 신휘는 조금 비틀거리긴 했지만, 그래도 제법 멀쩡해진 얼굴로 먼저 떠나는 사람들에게 인사를 했다.

그리고 로미는 여전히 술 한 방울 마시지 않은 사람처럼 씩씩했다.

그러는 동안 강도 산에게 전화를 했다.


“어디야? 나 회식 끝났는데.”

- 근처야. 5분 안에 갈게.

그렇게 말한 그가 정말로 딱 5분 있다가 자연스럽게 모습을 드러냈다.

그때까지 남아 있던 사람들이 산의 등장에 놀라서 술렁대기 시작했다.


“……뭐야? 배우야?”

“아닌 거 같은데. 강이 씨 매니저인가?”

“저 얼굴로 매니저겠냐?”

놀란 건 은오와 성 감독도 마찬가지였다.


“어머, 이쪽은 누구?”

산을 처음 본 사람들이 그에게 관심을 갖는 건 이제 강에게도 익숙한 상황이었다.

그녀가 자신의 경호원이라 소개하자, 산도 인사를 건넸다.

되돌아온 반응도 여느 때와 다를 바가 없었다.


“이 미모로 왜 연예인을 안 해요? 아니면 예전에 혹시 활동한 적 있었나?”

“그러게. 황 대표가 이런 훤칠한 미남을 경호원으로 계약한 게 더 놀랍네.”

적당히 웃음으로 상황을 마무리 짓던 산과 강이 막 자리를 뜨려던 참이었다.


“선배님!”

멀리서 강을 찾던 신휘가 그녀를 부르며 다가왔다.

금세 거리가 좁혀졌고, 강의 곁에 있던 산을 발견한 그의 걸음이 느려졌다.

표정이 사라진 두 남자의 시선이 허공에서 맞부딪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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