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3. 포커페이스
(43/118)
43. 포커페이스
(43/118)
#43. 포커페이스
2022.09.25.
“선배님!”
강을 찾아 온 신휘가 산을 발견하고는 걸음을 늦추었다.
시선이 마주친 두 남자가 서로를 잠시 바라보았다.
양쪽 다 표정의 변화는 크지 않았지만, 묘한 경계심을 드러내고 있었다.
하지만 신휘는 금세 웃음을 띤 채, 희미하게나마 비쳤던 감정을 능숙하게 지워냈다.
“이 아우라 엄청나신 분은 누구……?”
그가 그렇게 물어온 덕분에 그녀는 재차 산을 소개해야 했다.
“제 경호원이에요.”
“경호원이요?”
“네.”
강이 복귀 전에 사고를 당한 건, 연예계에서도 워낙 큰 이슈였던 탓에 그녀의 모든 일정에 경호원이 동행하는 건 그다지 놀라운 일은 아니었다.
그리고 신휘도 그 이유를 알고 있었는지, 더 묻지 않았다.
다만 다른 이들과는 조금 다른 반응을 보일 뿐이었다.
“아, 다행이다. 나는 또 선배님 남자친구인 줄 알고, 식겁했네.”
그가 가슴을 쓸어내리는 시늉을 하며 웃었다.
별 감흥이 없어 보이는 산에 비해 신휘는 꽤 감탄을 금치 못하는 얼굴이었다.
“와, 근데 엄청 미남이시네요. 남자한테 반할 뻔한 건 처음이에요.”
빈말이라도 예의상 반응해야 하는 게 맞는데, 산은 이상하게 별로 그러고 싶지 않았다.
강의 주변에 몰려드는 모든 인간이 몽마로 의심되는 건 그렇다 치더라도, 남자친구인 줄 알고 식겁했다는 그의 말이 마음에 들지 않았기 때문이다.
조금 더 정확히는 ‘다행이다.’라는 말이 거슬렸던 것도 같고.
어쨌든 신휘는 곧장 강에게 용건을 전했다.
“조심히 들어가시라고 인사하려고 왔어요, 선배님.”
“신휘 씨도 조심히 들어가요.”
“다음에 뵐 때는 말 놓아주실 거죠?”
“그건 천천히 할게요.”
“어…… 선배님 혹시 저 불편하세요?”
“초면인데, 편하지는 않죠. 그리고 제가 원래 말을 잘 못 놓는 성격이라 그래요.”
초면이라 당연히 낯설고 불편하다는 얘기는 산도 이미 들었던 얘기였지만, 사람 가리지 않고 칼 같은 입장을 고수하는 그녀의 모습이 오늘만큼은 왠지 마음에 들었다.
돌아온 반응에 조금 서운하다는 듯 웃어 보이던 신휘는 잠시 자리에 선 채 강을 바라보다가, 살짝 더 거리를 좁혀 다가왔다.
그러고는 귓속말이라도 하듯 작게 속삭였다.
“선배님. 아까 제가 흑기사 해드린 거 잊으시면 안 돼요.”
“……?”
“소원 적립이요.”
그렇게 말한 신휘가 다시 거리를 벌리곤 제자리로 돌아가 싱긋 웃었다.
“그럼 이만 들어가 보겠습니다.”
그가 그렇게 인사하는데, 먼저 차에 올라타 있던 로미가 문을 열고 빽 소리쳤다.
“양신휘! 빨리 오라고! 너 때문에 출발 못 하고 있잖아!”
“……하하, 저게 혼나려고 오빠 이름을 막 부르네.”
가볍게 한마디 뱉던 그가 피식 웃고는 다시 강과 산에게 꾸벅 인사하고 멀어졌다.
“왜 이렇게 늦게 와!”
“꼬우면 네 차 타고 가든가. 얻어타는 주제에 말이 많아.”
두 사람이 티격태격하며 차에 올랐다.
눈이 마주치기 직전, 강과 눈이 마주친 로미가 신나게 손을 흔들어댔다.
“선배님! 조심히 들어가세요! 안녕! 오늘 만나 뵙게 돼서 너무 반가웠고, 함께 일할 수 있게 돼서 영광……!”
하지만 인사가 채 끝나기도 전에 신휘가 가차 없이 문을 닫아버렸다.
굴하지 않고 창문을 연 로미가 동네가 떠나가라 외쳤다.
“앞으로 잘 부탁드려요! 저희 친하게 지내요, 선배님! 사랑해요!”
목에 핏대를 세우며 외친 고백이 화려한 밤거리를 수놓았다.
강은 아쉬운 대로 손을 몇 번 흔들어주었다.
막판에 급하게 마무리가 되는 바람에 그녀와는 제대로 말 섞어볼 기회도 없었다.
하지만 로미가 어떤 캐릭터인지는 알 것도 같았다.
그녀의 발랄함과 씩씩함이 마치 제인을 떠올리게 해서, 강의 입가에 옅은 웃음이 번졌다.
그런데 옆에 있던 산이 물었다.
“뭐라고 한 거야?”
“응? 뭐가?”
강이 고개를 돌리며 묻자, 그가 말했다.
“저 노란 머리. 너한테 뭐라고 속닥거렸잖아.”
“아, 그거…….”
말끝을 흐리던 그녀는 주변을 한 번 둘러보고는 대답했다.
“가면서 얘기해줄게. 일단 여기 좀 뜨자.”
그 말에 산은 순순히 강을 차로 안내했다.
.
.
.
그녀는 돌아오는 길에 회식 자리에서 있었던 일을 간략히 설명해주었다.
하지만 그가 관심 있는 건 오로지, 마지막에 양신휘가 건넨 귓속말이 뭐에 관한 거였냐는 것뿐이었다.
“그래서 마지막에 한 말은 뭐였는데?”
“아, 그건…….”
강은 신휘가 원석이 주는 술을 대신 마셔준 것 때문에 농담 삼아 소원 이야기를 꺼낸 것 같다고 말해주었다.
그 이야기를 들은 산은 노란 머리가 술자리에서부터 개수작을 부렸구나 싶었지만, 별다른 말은 하지 않았다.
서강이 이 문제를 또 일과 엮어 오지랖으로 치부해버리면, 이번엔 와플 따위로 화를 풀어줄 수 없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어쩔 수 없이 화제의 중심은 다시 강원석이 되었다.
그가 오줌을 누다 봉변당한 일은 근처에서 모두 지켜봤던 탓에 산이 더 자세한 내막을 알고 있었다.
그는 그녀에게 강원석이 기절한 이유가 그의 곁에 맴돌던 하급 몽마 때문이었다는 사실을 알려주었다.
“몽마 짓이었다고?”
“응.”
놀란 강이 되물었다.
“왜? 원석 선배한테도 뭔가 악몽의 냄새가 났나?”
“근래 꽤 자주 악몽을 꿨을 거야. 그것 때문에 몽마 하나가 달라붙었을 가능성이 크고.”
“그럼 기절은 왜 시킨 거야?”
“가까이서 지켜보니, 겁이 많은 놈인 걸 안 거지.”
인간 하나에게 작정하고 들러붙은 몽마들은 가끔 그런 식으로 장난질을 친다.
그렇게 해서 순간적으로 발생하는 극도의 공포심을 먹어 치우고, 악몽을 제공해주던 인간이 계속해서 악몽을 꿀 수 있도록 불행을 심는 작업을 하는 거다.
이미 그녀가 당해온 것과 같은 패턴이었다.
“아…….”
남 일 같지 않은 사건이라 강은 기분이 묘해졌다.
보이지 않아 익숙하게 느껴지지 않았을 뿐, 몽마는 생각보다 일상에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었다.
“그 남자. 모르긴 몰라도 정신적으로 편안한 상태는 아니었을걸? 온몸에서 불안이랑 분노가 줄줄 흘렀어.”
산의 말에 그녀는 구석에 앉아 술만 퍼마시다 불만이 가득한 얼굴로 괜히 시비를 걸어대던 원석의 모습을 떠올렸다.
그러다 문득 궁금증이 생겨 물었다.
“근데 그런 장난을 치다 사람이 잘못되면? 심장이 약한 사람은 너무 놀라서 죽을 수도 있잖아.”
“뭐, 그렇게 되면 겁 많은 하급 몽마야 줄행랑칠 거고.”
“…….”
“겁대가리 없는 놈이 힘도 좀 있는 상태면, 혼을 먹어 치우려 들겠지?”
본능에 충실한 몽마들이 살인도 불사한다는 얘기는 예전에 산에게 들은 적이 있어 알고 있었다.
물론 그것은 금기로 정해진 일이었다.
그러니 표면적으로는 몽마가 인간을 죽이는 일까지 벌어져서는 안 되는 거였지만, 성공하면 그에 합당한 대가를 얻으니 살인은 이미 금기 아닌 금기가 되어 버린 지 오래라고 했던 말도 떠올랐다.
“상급 몽마들은 다들 그렇게 힘을 얻는 거야?”
“제일 좋은 건 좋은 악몽을 먹는 거야. 꿈의 질에 따라서 살인하지 않아도 충분히 강해질 수 있거든.”
물론 그만한 가치를 가진 꿈을 찾는다는 게, 무척 어려운 일이긴 했다.
지금으로선 그 정도의 악몽을 꾸는 건 강이 유일했고.
그런데 이야기를 듣던 그녀의 안색이 급속도로 창백해졌다.
“그럼 내 꿈을 먹고 살아남은 몽마들은…….”
강이 채 말을 맺지 못했다.
인간을 죽이는 걸 불사할 만큼 힘을 키우게 된 몽마에게 자신이 마치 원인 제공이라도 한 것만 같은 기분이 들었기 때문이다.
그녀의 반응을 살핀 산이 말했다.
“걱정하지 마. 인간 죽이고 살아남은 몽마들은 손에 꼽으니까.”
“……어떻게?”
“이미 말했지만, 살인은 명백히 금기된 일이야. 운이 좋아서 사고 치고 빠져나가는 놈들이 있긴 해도, 대부분은 천인한테 현장 검거돼서 죽도록 얻어터지다가 그 자리에서 소멸돼.”
천인.
출처를 알 수 없는 책에서도 읽은 적이 있다.
그들은 하늘의 일을 도맡아 하는 신의 사자들이며, 인간이 인간답게 살도록 세상의 모든 이치를 관장하는 존재라고.
비유가 마치 범인 잡는 경찰 같은 느낌이었다.
그런 생각이 드니, 한 가지 의문이 더 생겨났다.
“그런데 만약에 살인을 저지른 몽마가…… 엄청 힘이 센 몽마면?”
강의 질문에 산은 잠시 침묵하다, 느리게 말을 이었다.
“그런 경우는 싸워봐야 아는 거지.”
“몽마와 싸운 천인이 죽을 수도 있다는 얘기야?”
“상대에 따라 충분히.”
……그렇구나.
강은 다른 세상의 이야기를 듣듯 고개를 끄덕였다.
제 일상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이라고는 하지만, 아무리 들어도 좀처럼 현실감이 느껴지지 않아서였다.
그도 그럴 것이 이제껏 몽마는 봐왔어도, 천인의 존재는 단 한 번도 마주한 적이 없어 더 그랬다.
“천인들도 몽마처럼 인간 세상에 섞여 살아?”
“몽마처럼 많지는 않지만, 없다고도 할 수 없지.”
인간의 이해로 따진다면 출장 같은 개념이라고 할까?
“그럼 천인도 몽마처럼 기척을 숨기고, 평범한 사람의 모습으로 지내는 거야?”
“응.”
그가 고개를 끄덕였다.
몽마든 천인이든 작정하고 기척을 숨긴 채 인간들 틈에 섞여 살면, 그 정체를 드러내거나 친분이 있는 게 아닌 이상 서로를 알아볼 수는 없다고.
이 역시도 언젠가 했던 말이었다.
강은 문득 궁금해졌다.
제 곁에 달라붙어 있던 몽마들의 숫자만큼은 아니더라도, 혹시 저를 스쳐 간 이 중 천인들이 있지는 않았을까 하는 그런.
그리고 그와 동시에 기억을 스친 목소리가 있었다.
‘매일 밤 끔찍한 악몽에 시달리게 될 거야. 그래도 살고 싶니?’
‘좋아. 네게 20년을 벌어주마. 부디 그때까지 죽지 말고 견뎌다오.’
죽음의 끝에서 생생히 들었던 한 쌍의 남녀 목소리.
그들의 존재는 그녀에게도 여전히 풀리지 않는 의문이었다.
그러는 사이, 차는 어느새 아파트 주차장에 도착했다.
“있잖아. 집에 바로 와줄 수 있어?”
강은 안전벨트도 풀기 전에 산에게 부탁했다.
그에게 묻고 싶은 게 너무 많았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오늘은 꼭 그에게 자신이 20년 전 들었던 목소리에 관해 물어볼 생각이었다.
산도 고개를 끄덕였다.
“씻고 바로 갈게.”
그 역시 오늘 강에게 꼭 들려줘야 할 이야기가 있었기 때문이다.
아니, 정확히는 소개해주고 싶은 이가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