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4. 오감을 자극
(44/118)
44. 오감을 자극
(44/118)
#44. 오감을 자극
2022.09.29.
그 시각.
로미와 신휘가 타고 있던 벤 안.
운전석에 앉아 있던 박 실장이 룸미러를 보며 물었다.
“로미는 회사에 내려주면 되지?”
“네!”
서울 한복판에 있는 고급 오피스텔에 사는 신휘에 비해 로미는 아직 회사에서 제공해주는 숙소를 사용하고 있는 신세였다.
와작 와작 와작.
대용량 감자칩을 품에 안고 있던 로미가 입안으로 끝없이 칩을 밀어 넣었다.
깊은 빡침에 미간을 누르고 있던 신휘가 더 참지 못하고 말했다.
“야.”
“응?”
“내 차에선 음식물 금지인 거 몰라?”
“알았어. 이것만 먹고.”
그녀가 봉지 안에 들어 있던 남은 감자칩을 한입에 털어 넣었다.
하지만 봉지를 거꾸로 들고 털어대는 바람에 떨어진 부스러기들이 시트며 바닥에 더 떨어져 버리고 말았다.
“야!”
참다가 못한 신휘가 버럭 소리치자, 로미가 얼른 물티슈를 뽑아 시트에 떨어진 감자칩 부스러기를 닦았다.
“아유, 화내지 마. 너는 꼭 나한테만 까칠하더라? 다른 사람들한텐 세상 친절하면서.”
“……너?”
“응.”
“……세 살이나 많은 오빠한테, 너?”
“응, 왜?”
하아.
차가 지구 핵까지 꺼질 듯한 한숨을 흘린 그가 마지막 남은 인내심을 쥐어짜며 말했다.
“……좋은 말로 할 때, 오빠라고 부르자?”
그 말에 그녀가 약 올리듯 눈을 까뒤집으며 혀를 내밀었다.
“싫은데?”
메롱, 메롱, 메롱.
그 모습을 본 신휘의 눈길에 불꽃이 스쳤고, 운전석에서 땀만 뻘뻘 흘리던 박 실장이 외쳤다.
“하하하! 우, 우리 로미가 오빠를 너무 좋아하는구나! 어? 그래서 막 치, 친근하게 느껴지다 보니까, 자꾸 너라고, 하하! 요 장난꾸러기!”
울기 직전의 얼굴로 웃고 있는 그를 보며 신휘가 이마를 짚었다.
‘관두자. 상대해봤자 나만 피곤하지.’
차를 통째로 엎어버릴 수도 없는 노릇이니 무시가 답이었다.
그러자 슬슬 눈치를 보던 로미가 말했다.
“내가 내부 세차 한번 해주면 되잖아.”
“내부 세차해줄 돈은 있고?”
“누가 세차장 간대? 내가 하면 되지.”
“됐다. 차에 흠집 낼 일 있냐.”
그 말에 그녀가 재차 강조했다.
“아니야. 네 차는 내부 세차 좀 해야 해. 무슨 썩은 내도 아닌 게, 똥방구 냄새 같은 게 나거든.”
“네 인중 냄새야.”
“아니거든?”
“맞을걸? 너 타고 나서 웬 젖은 똥개 냄새가 진동하잖아.”
그 말에 로미가 눈을 부릅뜨던 순간이었다.
부우욱-!
소란을 틈타 들려온 위험한 소리에 두 사람의 시선이 동시에 운전석으로 향했다.
부우욱?
부우욱이라니?
“……미안해, 얘들아.”
썩은 내도, 똥방구도, 젖은 똥개 냄새도 다 나 때문인 거 같다며 박 실장이 조용히 사과했다.
“웁! 냄새!”
로미가 황급히 코를 틀어막았고, 싸늘하게 얼굴이 굳은 신휘가 이내 상냥하게 웃는 얼굴로 박 실장에게 말했다.
“형.”
“응?”
“얘 데리고 둘 다 꺼져.”
그렇게 졸지에 차에서 쫓겨난 박 실장과 로미가 멀어지는 밴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다행히 회사 근처였으니 망정이지, 고속도로 한복판이었으면 답도 안 나올 뻔했다.
“……실장님 때문에 나까지 쫓겨났잖아요오오.”
로미의 불평에 박 실장이 고개 숙인 죄인처럼 어깨를 늘어트렸다.
“……미안해, 로미야.”
“아우! 됐어요! 뭘 또 그렇게까지 풀 죽고 그래?”
그의 등을 퍽퍽 때리던 그녀가 멀어지는 신휘의 차를 향해 힘껏 가운뎃손가락을 올렸다.
“하여간 까칠하긴! 너는 방귀 안 뀌냐? 너는 뭐 이슬만 먹고 살아? 가다가 차나 확 긁혀버려라!”
.
.
.
한편.
차에서 내린 강은 엘리베이터에서도 거듭 강조했다.
“씻고 옷만 갈아입고 바로 와야 해. 알았지?”
온종일 붙어 있고도 보채는 게 퍽 보기 드문 태도였다.
모르는 사람들이 언뜻 봤다면, 이제 막 연애를 시작한 연인쯤으로 볼 수 있을 법한 장면이었달까.
산은 이 진귀한 풍경을 느긋하게 감상하며 뇌리에 새겨넣었다.
문득 오늘을 떠올리고 싶을 땐, 언제든 꺼내어 볼 수 있도록.
그녀는 산이 미소만 지을 뿐, 대답을 시원히 안 하자 마음이 급해졌다.
“나 오늘 물어볼 거 정말 많단 말이야.”
그동안은 제대로 물어볼 기회도 없었고, 그만큼 자세히 알려는 의지도 없었다.
질문도 뭘 알아야 할 수 있는 건데, 그가 나타난 이후의 삶 자체가 너무도 비현실적이었기 때문에 무엇을 어디서부터 물어야 할지도 잘 몰랐던 탓이다.
띵-
엘리베이터가 강이 사는 층에 도달했다.
그녀가 다급한 마음에 산의 손가락을 붙들고 채근했다.
“바로 와. 알았지?”
“바로 갈 거야. 나도 할 말 많아.”
“무슨 말?”
“소개해줄 사람이 있어,”
“소개?”
되묻는데, 그가 가볍게 등을 떠밀었다.
“문 닫힌다.”
“…….”
“이따 봐.”
떠밀려 나간 상태로 뒤를 도는데, 스르륵 문이 닫혔다.
좁아지는 문틈 사이로 보이던 산이 손을 흔들며 웃었다.
엘리베이터 안에 있던 그도 닫히는 문 사이로 눈이 동그래진 강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궁금증만 던져주고 떠나는 제게 무척이나 할 말이 많은 듯한 얼굴이었다.
산은 그녀가 동성 친구 하나 없는 팔자라며 자조하던 모습을 떠올렸다.
그런 강이 제인에게 어떤 기대를 걸고 있는 건지도 잘 알고 있다.
낯도 많이 가리는 그녀가 타인을 향한 마음의 빗장을 조금씩 열어가는 모습을 그는 그동안 말없이 그저 지켜봐 왔다.
그러다 고민하기 시작했다.
자신이 무얼 해줄 수 있는지에 대해.
‘여자친구 하나 만들어줄까?’
‘어떻게?’
‘한번 찾아볼게.’
‘찾아본다고? 그게 찾는다고 찾아져?’
‘나는 마음 먹으면 뭐든 해.’
‘…….’
‘너한테 친구 하나 물어다 주는 거야, 일도 아니지.’
그리고 산은 오늘 그때 했던 약속을 지킬 생각이었다.
사실 주변과 교류하며 살아온 삶은 아니라, 누굴 소개해주는 경험 자체가 처음이었다.
더군다나 오늘 강에게 소개해줄 이는 자신이 유일하게 교류를 하고 지내는 존재였다.
그녀와는 워낙 성향이 달라 잘 맞을지는 모르겠지만, 제인도 마음에 들어 하는 눈치였으니 아마 싫어하진 않을 거라고 생각했다.
부디 좋은 친구가 되어줘야 할 텐데.
그저 그렇게 바랄 뿐이었다.
그리고 또 하나.
오늘은 그동안 강에게 미처 말하지 못했던 진실을 건넬 생각이었다.
의미 없는 일이라고 생각했던 것에 마음을 바꾸게 된 건,
‘나는 너 만나서, 이미 충분히 누렸어. 그래서 고마워.’
자신과는 다른 방법을 택했던 그녀의 말 한마디 때문이었다.
그가 손목시계를 확인했다.
밤이 길 것 같았다.
.
.
.
산이 다시 강의 집을 찾았을 때, 그녀는 젖은 머리도 채 말리지 못한 상태였다.
정말로 급하긴 급했던 모양.
머리에 수건을 얹은 채 다가온 강이 소파에 앉아있던 산의 옆에 털썩 앉았다.
그러고는 조금 더 거리를 좁히기 위해 몸을 당기곤, 눈을 빛냈다.
물기가 채 마르지 않아 말갛게 젖은 그녀에게서 달콤한 향기가 났다.
샴푸나 바디클렌저 냄새일 것이다.
플로럴 계열의 향이 나는 제품으로 강이 늘 사용하던 거였고, 그도 익숙하게 맡아오던 향이었다.
그런데 오늘따라 그 냄새가 너무 강하게 느껴져, 산은 순간 코를 틀어막을 뻔했다.
그래서 그녀가 막 입을 열던 순간.
“있잖아……!”
얼른 손을 뻗었다.
그러고는 강의 말랑한 뺨을 아프지 않게 꼬집으며 말했다.
“일단 머리부터 말리고 와. 감기 걸려.”
“거의 말랐어. 그냥 얘기부터 하면 안 돼?”
“머리 다 마르면. 그때 네가 궁금해하는 거 다 대답해줄게.”
능숙하게 저를 달래는 산을 보며, 그녀가 입술을 삐죽였다.
마지못해 일어서서 가는 강의 뒷모습을 보며 산은 간신히 붙들고 있던 얼굴 근육을 풀었다.
미간이 좁아지고 얕은 한숨이 나왔다.
‘……왜 이러지?’
씻고 나온 그녀를 보는데, 묘하게 감각이 뒤틀렸다.
마치 깊은 잠에 빠진 강이 끔찍한 악몽을 꿀 때나 내뱉는 공포의 향기처럼 자신을 흥분 상태로 몰아붙이는 무언가와 마주한 기분이었다.
지금 그녀는 잠을 자지도, 꿈을 꾸지도 않고 있는 상태였다.
그렇다고 극한의 공포에 몰린 상황도 아닌데, 왜 이러는 걸까.
악몽도 아닌, 고작 비누 냄새 따위에.
잠시 후.
강은 머리를 완벽히 말리고, 로션까지 꼼꼼히 바른 후에 다시 그의 앞에 나타났다.
“됐지? 머리 다 말리고, 로션도 발랐어.”
그녀가 확인해보라는 듯 손가락으로 머리를 직접 빗어 내리며 보여주자, 아까 맡았던 향기가 더욱 진하게 풍겨왔다.
산은 또다시 기분이 묘해지는 걸 느끼며, 턱에 힘을 줬다.
당황스러웠다.
몽마에게 가장 자극적인 향기는 인간의 공포가 극에 달했을 때 풍기는 냄새였는데, 감흥도 없던 샴푸 냄새가 이토록 신경을 자극할 줄은 꿈에도 몰랐기 때문이다.
‘몸에 이상이 생겼나?’
그래서 그런 생각을 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아니고서야 고작 인공적인 화학 제품 냄새에 이렇게까지 반응할 리가 없었다.
그도 물론 인간세계에 섞여 살기 시작하면서 향수를 사용했다.
하지만 어떤 향을 맡아도 그게 좋다는 생각은 해본 적이 없었다.
심지어 꽃이 만발하는 봄의 한 가운데 있을 때도 감흥이 없긴 마찬가지였다.
그런데 그녀에게서 풍기는 샴푸 냄새나 비누 향기는 오감이 바짝 곤두설 만큼 저를 자극했다.
그래서 저도 모르게 자꾸만,
“…….”
거리를 좁히게 됐다.
“왜…… 그래?”
강은 아무런 대꾸 없이 저를 바라보기만 하는 산을 보며 눈을 깜빡였다.
그의 눈빛이 마치 취한 것처럼 몽롱했다.
피할 새도 없이 다가온 산이 목덜미에 코를 묻었다.
물러설 곳도 마땅치 않았고, 워낙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었다.
커다랗게 눈을 뜬 그녀는 반쯤 소파에 누운 상태로 제게 몸을 겹쳐오는 그의 어깨를 짚었다.
산은 저를 밀어내는 손목을 느긋하게 그러쥔 채, 천천히 숨을 들이켰다.
급하지 않은 몸짓과 달리 욕구는 당장이라도 달려들어 강의 살갗을 베어 물기를 원했다.
하급 몽마가 그녀의 목숨을 노리고 달려들려 했던 것과는 전혀 다른 결의 욕망이었다.
저를 극한으로 몰아붙이는 자극적인 향기의 원천을 알게 된 그가 살짝 입꼬리를 올렸다.
“아. 이거였구나.”
뭔가 깨달음을 얻은 것처럼 작은 혼잣말이었다.
“뭐가?”
강이 묻자, 바람처럼 흘러나온 산의 웃음이 목덜미에 내려앉았다.
“샴푸 냄새가 아니라.”
“…….”
“그냥 네 살 냄새가 좋은 거였어.”
기분 좋게 취한 듯한 그의 입꼬리가 위험하게 올라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