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45. 신의 개(犬) (45/118)


#45. 신의 개(犬)
2022.10.02.



 


“아. 이거였구나.”

“뭐가?”

“샴푸 냄새가 아니라.”

“…….”

“그냥 네 살 냄새가 좋은 거였어.”

목덜미에 내려앉은 바람 같은 웃음.

취기라도 오른 것처럼 기분 좋아 보이는 목소리와 묘하게 야릇한 산의 얼굴.

몸속 어딘가에 퍼지는 간지러운 감각이 그녀를 당황스럽게 했다.

하지만 침착히 산의 어깨를 밀어냈다.

버티지 않고 순순히 밀려나 준 그가 자신의 눈을 빤히 바라보았다.

강도 피하지 않고 바라보았다.

언젠가 산이 했던 말을 기억하고 있었다.

몽마는 본능에 충실한 종족이라, 자제력 같은 건 잘 안 키운다고 했던 말을.

하지만 몽마는 인간이 갖는 모든 욕구와 감정을 느끼는 존재였다.

다른 게 있다면 절제가 별로 중요하지 않아, 오직 본능에 더 충실한 존재라는 것뿐.

그러니 몽마인 그가 욕구 충족을 위해 끌리는 대로 행동하는 건 전혀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그녀는 마른침을 꼴깍 삼켰다.

하지만 여기서 밀려버리면 분위기가 더 이상해질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어, 최대한 뻔뻔히 답했다.


“나도 알아.”

강의 당당한 대꾸에 산이 되물었다.


“뭐를?”

“내 살냄새 좋은 거.”

“…….”

“타고났달까?”

도도하게 턱 끝을 치켜올린 그녀가 그대로 산을 쭉 밀어냈다.

허무하게 밀려나 버린 그가 한 대 맞은 사람처럼 느리게 눈을 깜빡였다.

그러고는 뒤늦게 조금 웃었다.

뭐에 잠깐 홀리기라도 했던 것처럼.

자칫 진득한 접촉사고로 이어질 뻔했던 아찔한 상황은 그렇게 마무리됐다.

어쨌든 서강의 살냄새가 악몽만큼이나 달콤하다는 건 사실이었다.

타고났다며 새침을 떠는 그녀의 모습은 어이가 없을 만큼 귀여웠고.

마음이 물러지니, 웃음도 헤퍼지려고 했다.

산은 시도 때도 없이 올라가려는 입꼬리를 의식적으로 누르며 물었다.


“그래서 뭐가 궁금한데?”

오늘은 이쯤에서 한발 물러서기로 한 것이다.

몸이 반응하는 대로 뒀다간, 크게 사고라도 쳐버릴 것 같아서.

그 말에 강이 이리저리 눈을 굴리다, 떠오르는 대로 물었다.


“일단 원석 선배님은 괜찮은 거지? 잘못되는 거 아니지?”

“걱정 안 해도 돼. 그냥 기절한 거야.”

“음, 그리고 또…….”

“…….”

“또…….”

차에 있을 때만 해도 물어봐야지 싶었던 숱한 질문들이 연기처럼 사라져버렸다.

그런 그녀의 마음을 헤아린 듯 그가 먼저 물어왔다.


“그보다 같이 일할 사람들은 어땠어?”

“음, 대체로 다 좋은 사람들인 것 같아.”

강원석 빼고.

강이 뒷말을 삼켰다.

그가 무사하길 바라는 건 진심이었지만, 밉상인 것도 사실이었으니까.

그러자 산이 다시 느긋하게 물어왔다.


“노란 머리도?”

“노란 머리?”

“양신휜가 뭔가 걔.”

“아, 으응.”

그녀가 저도 모르게 슬쩍 눈을 피하며 긍정했다.

다행히 그는 더 이상 신휘의 이야기를 이어가지 않았다.


“그럼 그 노란 머리한테 소리 빽 지르던 여자애는?”

여자애?


“아…… 로미 말하는 거야? 단발머리에 반은 하얀 머리고 반은 흑발인 여자애?”

“응. 걘 어땠어?”

부드럽게 흘러나온 산의 목소리에 강이 눈을 몇 번 깜빡였다.

그도 그럴 것이 그가 자신 외에 다른 여자에게 저런 호의적인 관심을 보인 게 처음 있는 일이었기 때문이었다.


“글쎄…….”

“별로야?”

“아니. 그런 건 아니고, 사실 제대로 대화를 나눠보지 못해서 어떤 사람인지 잘 모르겠어.”

“보기엔 어떤데?”

“그냥 뭐…… 귀여운 것 같아.”

비록 발연기로 유명한 아이돌이긴 하지만, 분위기 메이커가 되어줄 것도 같고, 게다가 힘도 세고, 술도 센 것 같다는 이야기는 덧붙이지 않았다.

그런데 산은 계속해서 그녀에게 관심을 보였다.


“그래? 친구가 될 수 있을 거 같아?”

“친구?”

“너 친구 없다고 그랬잖아. 로미랑 친하게 지내.”

……로미? 친하게 지내라고?

그의 입에서 흘러나오는 이름이 꽤 친근하게 느껴져 기분이 묘했다.

제 주변 모두에게 까칠하던 한산이 왜 유독 그녀에게만 저렇게 너그러운 걸까?

강은 복잡한 생각을 밀어내며 웃었다.


“네가 웬일이야? 왜? 로미는 몽마가 아니라 인간 같아?”

그 말에 산이 의미심장하게 웃었다.

그러고는 곧 제 귀를 의심할 만한 발언을 했다.


“걔는 인간도 몽마도 아니야.”

“응?”

“수인(獸人)이거든.”

강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뭐라고?”

“반인반수(半人半獸)라고.”

신의 개(犬)라고도 불리며, 충성심이 높아 천인들이 반려처럼 기르는 종족이기도 하다는 설명이 덧붙었다.

몽마 하나로도 충분히 비현실적인 삶을 살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생각보다 다양한 종족이 인간들과 섞여 있다는 이야기에 마치 꿈이라도 꾸는 것 같은 기분이었다.

살짝 얼이 빠져 있는 그녀에게 산이 말했다.


“로미, 한번 불러볼까?”

“……지금? 여기로?”

그가 고개를 끄덕였고 강은 잠시 망설였지만, 곧 조심스럽게 응했다.

산이 열려 있는 발코니를 향해 걸었다.

불어오는 바람이 그의 머리칼을 부드럽게 헤집고 지나갔다.

난간을 짚은 그가 까마득한 밤하늘을 향해 휘파람을 불자, 곧 안개 같은 형상이 모여들기 시작했다.

마치 하늘에 떠 있던 구름이 순식간에 빨려와 형체를 구성하는 듯 보이기도 했다.

쿠구구구!

거대한 바람이 밀려오더니, 토끼 눈을 뜨고 있는 강의 머리카락이 뒤로 휘날렸다.

이윽고 보름달을 등진 커다란 늑대가 발코니에 모습을 드러냈다.


[아오오오-!]

짐승의 하울링이 짙푸른 어둠으로 퍼져나갔다.

녀석은 곧 사뿐히 내려와 산의 곁에 섰다.

하얀 은백색의 털을 가진 늑대는 네 발이 부츠를 신은 것처럼 까맸고, 꼬리가 풍성했다.

그리고 목에는 파란 꽃이 수놓아진 하늘색 손수건이 둘러있었다. 아기의 턱받이 같았다.

강은 그 모습을 보며 넋이 나간 듯한 표정을 지었다.

검은 옷을 입고 있는 산과 그의 곁에 서 있는 커다란 은백색 짐승의 모습이 마치 환상 동화에서나 나올 법한 풍경을 자아냈기 때문이다.

산이 손을 뻗어 녀석을 쓰다듬어주었고, 그것은 마치 애교를 부리듯 커다란 머리통을 그의 가슴팍에 비비적댔다.

둘의 뒤로 쏟아지는 달빛이 그 광경을 더욱 신비롭고 아름답게 비추었다.


“…….”

 

 
그녀는 순간, 어쩌면 자신이 아주 긴 꿈을 꾸고 있는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잠시 후. 주변으로 뿌연 안개가 서리더니, 짐승이 로미로 변했다.

그리고 그녀가 매고 있던 손수건은 인간의 옷이 되었다.

로미가 강을 보며 활짝 웃었다.


“반가워요, 선배님. 앞으로 우리 친하게 지내요.”

그녀가 거리낌 없이 다가와서는 산에게 한 것처럼 머리를 비비며 애교를 부렸다.

강은 너무 놀라서 양손을 허공에 든 채 그대로 굳어버리고 말았다.

하지만 로미는 신이 나서 그녀의 넓은 집을 운동장 삼아 뛰어다녔다.

그러다 신기한 물건을 발견하면 코를 가져가 킁킁대며 냄새를 맡기도 했다.

……내가 지금 뭘 본 거지?

그나마 산은 인간이라고 해도 전혀 이상할 게 없을 만큼 이질감이 들지 않는 존재였다.

하지만 눈앞에서 사람으로 변하는 짐승의 모습을 본 건 지금 이게 꿈인지, 생시인지 의심하게 만들기 충분했다.

2차로 얼이 빠져버린 강을 보며 산이 작게 웃음을 터트렸다.


“어때? 내가 물어다 준 여자친구.”

“……어?”

“마음에 들어?”

그녀는 그제야 그가 말했던 친구가 로미였음을 깨닫게 되었다.

정말이지, 상상도 못 한 서프라이즈에 입이 다물어지질 않았다.

그런데 그때. 갑자기 벌떡 일어선 로미가 발코니를 향해 코를 벌름거렸다.

킁킁.

바람에 실려 오는 냄새를 맡던 그녀가 고개를 돌리며 말했다.


“근처에 몽마가 있어요! 저 잠깐 나갔다 올게요!”

그러더니 잡을 새도 없이 발코니 난간으로 뛰어내려 버렸다.

순식간에 눈앞에서 사라진 로미는 곧 커다란 짐승의 모습으로 나타나, 새까만 밤하늘을 내달리기 시작했다.

그걸 본 강이 물었다.


“……저러고 다니면 금방 사람들 눈에 띄지 않을까?”

“짐승의 모습일 때 로미는 자유자재로 모습을 감출 수 있어. 당연히 인간들 눈엔 안 보일 거고.”

“몽마를 냄새로 알아채기도 해?”

“수인들은 후각이 발달했거든. 상급 몽마들은 워낙 기척을 감추는 게 능숙해서 힘들지만, 하급 몽마 정도는 1Km 밖에서도 찾아내.”

“찾아내서 어떻게 하는데?”

“죽이겠지.”

“죽인다고?”

“천적이니까.”

신의 반려동물로 사는 수인과 몽마는 견원지간이나 다름없는 관계였다.

그 이야기를 들은 강이 되물었다.


“잡아먹는 거야?”

“아니. 먹지는 않고, 사냥해서 가지고 놀아.”

거기서 강하게 드는 의문이 하나 있었다.


“근데…… 너도 몽마잖아.”

그녀의 말에 그가 조용히 웃다가 말을 이었다.


“몽마를 섬기는 유일한 수인이 로미야.”

“그게 가능해?”

“그렇게 됐어. 사정이 있어서.”

“무슨 사정?”

“로미가 어릴 때 죽을 뻔한 걸, 내가 구해준 적이 있거든.”

강이 눈을 깜빡이자 산이 말했다.


“그 얘기는 나중에 로미한테 물어봐. 둘이 대화거리 하나는 있어야 친해지지.”

잠시 후.

발코니에 나타난 로미가 왠 공 같은 걸 하나 물고 돌아왔다.

그것은 딱딱했고, 주변엔 검은 연기가 오라처럼 피어오르고 있었다.

로미가 그것을 산에게 던진 뒤, 앞발을 바닥에 낮게 깔고 엎드려 엉덩이를 높이 든 채 꼬리를 살랑거렸다.

놀아달라는 강아지 같았다.

산이 그것을 던져주자, 점프한 로미가 그것을 물고 바닥에서 놀았다.


“저게 뭐야?”

“사냥한 몽마 같은데? 모양 보니까, 머리통 같고.”

그제야 로미가 가지고 놀고 있는 동그란 공이 두개골의 형상과 비슷하다는 걸 알아차린 강이 하얗게 질렸다.

한산이 둘이 친구나 하라며 물어다 준 녀석을…… 자신이 감당할 수 있을까 싶었다.

몽마의 두개골을 가지고 노는 로미의 모습은 겉보기엔 장난감 공을 가지고 노는 덩치 큰 개 같았지만, 실체를 아는 강은 그저 이 광경이 소름 끼칠 뿐이었다.

아마 저 검은 연기를 뿜어대는 해골의 형상이 끔찍한 꿈속에서나 보던 것과 비슷해 그럴지도 모른다.

그녀는 뻣뻣하게 굳은 고개를 돌려 산을 바라보았다.

그는 다리를 꼬고 턱을 괸 채, 로미를 흐뭇하게 바라보고 있었다.

마치 키우는 반려견의 재롱이라도 보듯.

강의 시선을 느꼈는지, 산이 고개를 살짝 틀었다.

그러고는 물었다.


“귀엽지 않아?”

“……저게?”

되묻는 말에 응, 하고 대답하던 그가 말을 이었다.


“내 강아지다, 생각하고 잘 지내봐.”

그렇게 말하며 웃는 산의 얼굴엔 묘한 뿌듯함마저 서려 있었다.

아마 제게 친구를 만들어줬다는 사실에 보람을 느끼는 것 같았다.

강은 난감했다.

그의 성의를 봐서라도 로미와 잘 지내고 싶은 마음은 굴뚝 같았지만, 인간 여자하고도 잘 못 어울리는 게 자신이었다.

하물며 수인이라니.

그것도 몽마의 두개골을 가지고 노는 수인이라니!

결국 친해지길 바란다는 산의 바람에는 아무런 대답도 들려줄 수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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