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6. 환상 동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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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6. 환상 동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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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6. 환상 동화
2022.10.06.
강은 눈 앞에 펼쳐진 보고도 믿기 힘든 장면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바닥에 엎드린 로미가 앞발 사이에 몽마의 해골을 낀 채 그것을 핥다가 깨물고, 코로 굴리며 놀기를 반복했다.
그녀가 옆에 앉은 그에게 물었다.
“……수인도 악몽을 먹어?”
“아니.”
밥그릇 싸움할 일 있냐며 산이 웃었다.
“그럼 뭐 먹고 사는데?”
“쟤네는 잡식성이야. 사람 먹는 음식도 환장하고.”
로미는 특히 고기를 좋아한다는 그의 말에 식당에서 본 그녀의 모습이 떠올랐다.
아깐 그냥 잘 먹는구나, 싶은 정도였던 거 같은데 지금 와서 다시 떠올려보니 정말 고기를 어마어마하게 먹었던 것도 같다.
그런데 제 이야기를 하고 있는 걸 알았는지, 로미가 귀를 쫑긋 세우며 고개를 들었다.
눈이 마주친 강이 어깨를 움찔 떨었다.
그러자 혀를 길게 빼고 헤벌쭉 웃던 로미가 풍성한 꼬리를 살랑거린다.
마치 놀아달라고 엉덩이를 흔드는 강아지 같았다.
[월! 월!]
그녀가 개처럼 짖더니, 곧 인간 로미의 목소리로 말했다.
“같이 놀아요, 언니!”
주둥이의 모양이 그대로인 것을 보니 그녀가 하려는 말이 어떤 보이지 않는 매개체를 통해 전달되는 것 같았다.
그보다 언니라고?
제게 선배님이라고 부르는 커다란 짐승의 모습도 기묘했지만, 금세 호칭을 바꾸고 친밀감을 드러내는 로미의 넉살도 대단하다고 생각했다.
낯을 많이 가리는 성향의 강이 쉽게 받아들일 수 있는 스타일은 아니었다.
제인과도 이제 막 인사 이외의 대화를 나누는 사이가 된 참이었다.
그녀가 굳은 채로 가만히 있자, 눈치를 살피며 다가온 로미가 허벅지에 제 턱을 문지르며 애교를 부렸다.
기겁한 강이 양손을 든 채 입을 떡 벌렸다.
거침없이 거리를 좁혀오는 그녀의 모습에 순간 거부감이 든 것이다.
딱 봐도 저를 불편해하는 것 같은 모습에 로미의 얼굴이 울상이 됐다.
그녀가 쫑긋 세웠던 귀를 축 늘어뜨린 채 산에게 말했다.
“주인님. 언니가 로미 싫어하나 봐…….”
가만히 상황을 지켜보고 있던 그가 로미를 달래듯 머리를 쓰다듬어주며 말했다.
“처음이라 낯설어서 그럴 거야.”
“정말?”
“응. 오늘은 이만 돌아갈래?”
“알았어.”
벌떡 일어난 로미가 미련이 뚝뚝 묻은 얼굴로 몇 번이나 뒤를 돌아 강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그녀가 제대로 시선도 주지 않자, 어깨가 축 처져서는 곧 난간 위로 올라섰다.
하얀 늑대로 변한 로미가 훌쩍 뛰어내려 사라졌다.
둘만 남고 나니, 그제야 강의 입에서 묵직한 한숨이 새어 나왔다.
산이 고개를 살짝 기울였다.
“……마음에 안 들어?”
뿌듯함이 가득해 보이던 얼굴에 슬쩍 초조함이 깃든다.
그녀가 대답이 없자, 그가 고개를 숙여 눈을 맞추었다.
“오지 말라고 할까?”
“아니, 그런 건 아닌데…… 아무래도 친해지려면 시간이 조금 걸릴 것 같아. 오늘은 일단 내가 너무 피곤하기도 했고.”
말마따나 물어볼 게 많다며 눈을 빛내던 강의 모습은 오간 데 없었다.
사실 그녀가 직접 친구가 필요하다고 부탁했던 건 아니라, 산도 억지로 둘의 관계를 엮을 순 없었다.
그저 도움이 조금 되길 바랐던 게 아쉬울 뿐.
“이만 잘래?”
“응. 그게 좋겠어.”
강이 피곤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20년 전 사고에서 겪었던 일에 관해 묻고 싶었지만, 오늘은 날이 아닌 것 같았다.
그리고 오늘 꼭 건네려던 이야기를 미루게 된 건 산도 마찬가지였다.
.
.
.
드라마 첫 촬영 시작에 앞서, 무사 기원을 바라는 고사가 있었다.
콧구멍에 지폐를 꽂은 채 웃고 있는 돼지머리를 본 로미가 말했다.
“……돼지국밥 먹고 싶다.”
거의 의식의 흐름처럼 흘러나온 말이었다.
그녀는 촬영장에 온 순간부터 내내 강의 옆에 찰싹 달라붙어 있던 차였다.
로미가 조용히 서 있던 그녀에게 속삭였다.
“선배님.”
“응?”
“우리 촬영 끝나고 돼지국밥 먹으러 갈래요? 저 맛있게 하는 식당 아는데.”
“미안. 다이어트 중이라.”
강이 접대용 미소와 함께 칼같이 선을 그었다.
자리를 떠버리는 그녀를 보며 로미가 시무룩한 표정을 지은 채 산을 바라보았다.
멀리서 둘의 모습을 내내 지켜보던 그도 그저 웃어주는 것밖엔 할 수가 없었다.
그녀는 잠시 어깨가 처져 있었지만, 그것도 잠시, 다시 벌떡 일어나 씩씩하게 강의 뒤를 쫓아갔다.
“선배님! 같이 가요오오!”
강아지처럼 저를 졸졸 따라오는 로미를 본 강이 불편한 기색을 드러내며 말했다.
“로미야.”
“네?”
“미안한데, 나는 친해지려면 시간이 좀 걸리는 타입이라.”
“네에…….”
“네가 이렇게 빨리 거리를 좁혀오면, 나는 더 도망치게 돼.”
그러니까 우리 조금만 천천히.
조금만 시간을 갖고 자연스럽게 알아가자고, 그녀가 말했다.
가운데 낀 산의 입장도 있었기 때문에 막무가내로 로미를 밀어낼 순 없었지만, 그렇다고 안 되는 걸 억지로 받아줄 생각도 없었다.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그녀에게 말을 놓은 것만으로, 이미 엄청난 노력이었으니.
강이 다시 로미를 피해 자리를 옮겼고, 덩그러니 남겨진 그녀는 다시 산을 바라보았다.
멀찌감치 서 있던 그가 고개를 한번 저었다.
그냥 두라는 뜻이었다.
다시 고개를 돌린 로미가 멀어지는 강의 뒷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하지만 다시 그녀를 쫓아가는 일은 하지 않았다.
잠시 후.
성찬수 감독과 양은오 작가가 돼지머리에 절을 올린 뒤 차례대로 외쳤다.
“저희 드라마 대박 나게 해주세요!”
“대박까진 바라지도 않습니다. 그저 출연 배우들 사고 안 치고, 작가들 도망 안 가고, 종영 때까지 무사히 끝낼 수 있게만 도와주세요.”
그녀의 간절한 바람에 동감한 곳곳에서 탄식이 새어 나왔다.
그렇게 드라마 ‘비밀의 정원’ 촬영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반이 촬영장에 나타난 것도 그때쯤이었다.
겨울에 있을 사진전을 위해 정식으로 강의 회사와 계약을 체결하고, 촬영팀에 동의를 구해 온 참이었다.
그를 알아본 몇몇이 반과 인사를 주고받았다.
강이 반갑게 인사를 건네며 다가갔다.
“반아!”
“오오. 경장님. 스타일 멋지신데요?”
“그래?”
“첫 촬영이라 떨리겠다.”
그녀가 어깨를 으쓱이자, 반이 말했다.
“사진은 내가 알아서 찍을 거니까, 이쪽은 신경 쓰지 말고 그냥 평소처럼 해.”
“알았어.”
“그래, 그럼 파이팅.”
짧게 주먹을 흔들어 보인 그가 곧 촬영에 방해가 되지 않을 만한 곳으로 자리를 옮겼다.
겨울에 열릴 인물 사진전을 위해 오늘 반은 ‘배우 서강의 삶’을 카메라에 담을 예정이었다.
머리에 고정용 핀을 꽂은 채 대본을 들여다보고, 동선을 체크하고, 상대 배우와 호흡을 맞추며 자연스럽게 촬영장에 녹아들기 시작한 그녀의 모습이 차곡차곡 반의 카메라에 담겼다.
오늘은 신휘와 강이 첫 호흡을 맞추는 날이었다.
극 중 신휘가 맡은 배역의 문성준과 강이 맡은 배역의 신차희가 난장이 된 클럽 안에서 마주하는 장면이었다.
촬영 준비가 모두 마무리됐다.
메가폰을 잡은 성 감독이 날카로운 눈으로 카메라를 응시했다.
“슛 들어갑니다.”
조직 폭력배와 경찰들이 한대 뒤엉켜 쓰러진 클럽 안.
아수라장이 된 그곳에 권총을 든 차희와 피칠갑을 한 채 서 있는 성준이 대치 중이었다.
모두가 숨을 죽이고 있는 현장 속.
“레디.”
성 감독의 목소리가 첫 촬영의 신호탄을 쏘아 올렸다.
“고!”
동시에 차희의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문성준!”
피도 눈물도 없는 극악무도한 악인, 문성준의 손에 마지막 하나 남은 동료를 잃기 직전의 상황.
“꼼짝 마.”
그녀가 신중한 움직임으로 권총을 고쳐 잡으며 말했다.
손에 쥔 흉기로 막 경사 하나의 숨을 끊어놓으려던 성준이 삐딱하게 고개를 틀었다.
피로 물든 그의 얼굴에 웃음이 번졌다.
핏발이 선 차희의 눈동자가 카메라 앵글에 잡혔고, 파르르 떨리는 그녀의 속눈썹은 극한의 공포에 질린 상태였다.
“제발.”
“…….”
“제발 후회할 짓 하지…….”
차희의 간절한 부탁이 채 끝나기도 전에 성준의 손에 있던 흉기가 보란 듯이 최 경사의 심장을 관통했다.
“안 돼!”
탕!
처절한 외침과 함께 총성이 울렸다.
분노와 절규로 발사한 총알은 그대로 총알받이가 된 최 경사의 왼쪽 어깨를 관통하고, 바람 앞 등불처럼 스러진 그의 뒤론 어둑한 어둠만이 펼쳐져 있다.
첫 만남.
차희는 끝내 성준의 손에 가장 절친했던 동료이자, 결혼을 약속했던 연인을 잃게 되고 눈앞에서 그를 놓친 채 절규하게 되는 장면이었다.
“컷!”
성 감독의 사인이 울리고, 각도를 바꿔 몇 번의 촬영이 반복적으로 이어졌다.
첫 장면부터 어마어마한 에너지를 요구하는 신이었다.
곧바로 이어진 신에서 차희는 문성준의 손에 죽음을 맞이한 연인을 끌어안은 채 숨죽여 오열했다.
강이 해석한 신차희의 감정은 폭발 직전의 폭탄을 보듯 현장에 있던 모두를 숨죽이게 했다.
어떤 소리도 존재하지 않았지만, 그 어떤 감정의 무게보다 묵직한 무게를 가진 이별의 슬픔을 제대로 전달한 명장면이 탄생하는 순간이었다.
“오케이! 좋았어!”
성 감독의 외침과 함께 곳곳에서 박수가 터져 나왔다.
온몸에 힘이 풀린 듯 주저앉은 강의 어깨를 상대 배우가 두드려주며 수고했다 말했다.
그저 연기일 뿐이지만, 정말로 사랑하는 사람을 보내기라도 한 것처럼 진이 빠졌다.
그리고 그것은 반쯤 그녀의 경험에서 우러나온 것이었다.
길지도 않았던 강의 생엔 그동안 너무 많은 이별의 순간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강아!”
촬영을 지켜보던 삼영이 후다닥 뛰어왔다.
그러고는 물을 건네며 연신 수고했다 말해주었다.
“진짜 최고였어. 완전 물 올랐어. 으흐흑……!”
“오빠, 울어?”
“차희 울 때 나도 울었잖아. 흐으으으으.”
감정을 주체못한 그가 소매로 눈가를 훔치며 흐느꼈다.
그런 삼영을 달래고 있던 중이었다.
“강이 씨.”
“네, 감독님.”
“최고. 덕분에 촬영이 순탄할 것 같아요.”
쉬는 시간을 틈타 다가온 성 감독이 칭찬을 건네며 그녀를 치켜세웠다.
강이 해석한 차희의 캐릭터가 너무 만족스러웠기 때문이다.
기대하지 않았던 칭찬에 그녀의 기분도 좋아졌다.
대본이 닳도록 작품을 파헤치고, 캐릭터를 해석한 보람이 있었다.
“그럼 조금 쉬었다가 바로 다음 신 들어갈게요.”
“네, 알겠습니다.”
그렇게 짧은 대화를 마무리한 그녀가 밴으로 향했다.
삼영은 화장실에 다녀와야 할 것 같다며 퉁퉁 부은 눈으로 자리를 떴다.
차로 돌아온 강은 너덜너덜해진 대본을 다시 들여다보았다.
처음 읽었을 때도 그랬지만, 무척 흥미로운 이야기였다.
강의 극 중 인물인 신차희와 신휘가 연기하는 문성준은 성인이 된 이후 처음부터 끝까지 대립을 이루는 관계였다.
경찰과 범죄자로 만났으니 필연적으로 적이 될 수밖에 없는 운명이었지만, 사실 둘은 어린 시절 보육원에서 함께 자란 둘도 없는 친구 사이였다.
오늘 촬영했던 장면에서 문성준은 악마가 따로 없는 모습으로 가차 없이 차희의 연인을 죽이지만, 이미 그녀를 마주한 시점부터 차희를 알아본 상태였다.
반면 차희는 성인이 된 문성준을 전혀 알아보지 못하는 상황이었다.
문성준은 앞으로도 차희의 주변에 있던 그녀의 소중한 사람들을 전부 제 손으로 죽여 빼앗는다.
결국 차희의 곁에 오롯이 자신만 남게 될 때까지.
그렇게 둘의 관계는 회차가 거듭날수록 벼랑 끝까지 치닫다가, 절대 악이었던 문성준의 과거 서사가 드러나게 된다.
아마도 이루어질 수 없는 둘의 슬픈 앞날을 암시하는 구간일 것이다.
일부 사전제작이긴 하지만, 아직 강도 작품의 결말을 알지 못했다.
양은오 작가가 엔딩을 두고 많은 고심을 하고 있다는 정도만 알았다.
그런데 그때.
똑똑.
누군가 밴의 창문을 두드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