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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7. 고백
2022.10.09.
똑똑.
누군가 밴의 창문을 두드리는 소리에 강이 고개를 돌렸다.
신휘였다.
문을 열자, 그가 다짜고짜 외쳤다.
“선배님!”
“……신휘 씨?”
분장도 지우지 못하고 달려온 신휘의 얼굴이 꽤 상기되어 있었다.
놀란 그녀가 물었다.
“무슨 일이에요?”
“아, 제가 너무 흥분해서…… 깜짝 놀라셨죠? 죄송해요.”
싱겁게 웃던 그가 말을 이었다.
“사실 아까 컷 사인 떨어지자마자 바로 찾아뵈려고 했는데.”
“……네?”
“마지막 장면 진짜 최고였어요.”
그렇게 말하는 신휘의 얼굴엔 진심 어린 감탄이 서려 있었다.
팬심과 감동을 주체하지 못해 이렇게 달려온 것만 봐도 알 수 있었다.
현장에서 이 정도까지 유난스러운 반응을 보인 건 삼영 외엔 처음이라 그녀가 조금 웃었다.
“신휘 씨 덕분이에요.”
스스럼없이 칭찬을 건넸지만, 진심이었다.
비록 연기긴 했어도, 당장이라도 달려가 문성준을 죽이고 싶을 만큼 제 몰입도를 끌어 올려준 게 바로 신휘였기 때문이다.
그는 얼굴 여기저기 붉은 물감이 묻은 모습 그대로 들고 온 이온 음료를 건넸다.
“이거 드세요.”
“아……, 고마워요.”
강의 인사에 눈매를 휘며 웃던 그는 뭔가 더 할 말이 있는 눈치였다.
“저기 선배님.”
“네?”
“혹시…….”
그런데 그때 자리를 비운 삼영과 산이 돌아왔다.
“오오오! 신휘 씨다!”
요란하게 그를 부르며 다가온 삼영이 다짜고짜 신휘의 손을 악수하듯 잡고 위아래로 흔들어댔다.
“아까 연기하는 거 봤어요! 어떻게 연기를 그렇게 잘해요? 선생님들이 천재라고 난리예요.”
졸지에 손이 붙들린 신휘는 좀 당황한 눈치긴 했지만, 금세 겸손히 답했다.
“아닙니다. 저는 아직 한참 멀었죠.”
“에이, 아까 현장 반응 못 봤어요? 기립 박수치고 난리였어요. 나는 진짜 소름 돋아서 아직도 팔에 닭살이! 이거 봐요!”
그가 앙상한 팔뚝을 내보였고, 신휘가 쑥스러운 듯 목을 쓸었다.
“좋게 봐주셔서 감사합니다.”
“농담 아니에요. 그래서 사실 신휘 씨랑 이렇게 마주 보고 서 있는 거 너무 후달려. 무서워서 오줌 쌀 거 같다고.”
“어우, 과찬이세요.”
몸 둘 바를 몰라하던 신휘가 삼영에게 몇 번이나 감사하다고 인사하고는, 결국 강에게도 아쉬운 인사를 건넸다.
“그럼 선배님. 저 가볼게요.”
“그래요.”
신휘는 아쉬움에 돌아가면서도 몇 번이나 뒤를 돌아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 모습을 산이 탐탁지 않게 바라보았다.
멀어지는 신휘에게 열심히 손을 흔들던 삼영은 시야에서 그가 사라지자마자, 강이 들고 있는 음료수를 보며 물었다.
“근데 이건 뭐야?”
“신휘 씨가 마시라고 줬어.”
그러자 그가 자연스럽게 그것을 가져가며 인자한 웃음을 띠었다.
“강아, 너는 다이어트 중이니까 물 마셔. 이건 오빠가 대신 마셔줄게.”
“그래, 오빠 마셔.”
마침 삼영이 좋아하는 음료수였던지라, 그녀가 스스럼없이 들고 있던 걸 내밀었다.
신휘의 마음만큼은 이미 충분히 받았기 때문이다.
음료를 받아든 그가 바로 그것을 따 마셨다.
“오빠가 네 거 뺏어 먹으려는 게 아니고, 오빠가 또, 우리 강이 기미 상궁이잖아? 남이 주는 거 아무거나 마시면 안 되지.”
삼영은 이따금씩 팬에게 받은 음료나 간식거리도 독이 들었는지 확인해본다며, 얻어먹곤 했다.
365일 관리가 운명인 강도 늘 마음만 받아 챙길 뿐, 받은 걸 직접 먹는 경우는 거의 없었다.
그러니 매번 먹을 만한 건 모조리 그의 차지였다.
운전석에 앉아 단숨에 음료수를 비운 삼영이 탄성을 뱉었다.
“캬아! 시원하다!”
뒷좌석에 나란히 앉은 강과 산이 음료수를 맥주처럼 마시는 그를 보며 조금 웃었다.
그러자 음료수 캔을 만지작대던 삼영이 말했다.
“근데 신휘 씨가 너 진짜 어지간히 좋아하나 봐.”
“팬이래.”
강이 무미건조하게 대꾸했지만, 삼영은 거기서 그치지 않았다.
“혹시 사심 있는 건 아닐까?”
“에이, 무슨.”
“왜애. 신휘 씨 정도면 괜찮지 않아? 얼굴 잘생겼지, 키 크지, 자기 일 열심히 하지, 주변 사람들 너나 할 것 없이 인사도 싹싹하게 잘하고, 성격도 좋은 거 같던데.”
“아, 오빠. 무슨 소릴 하는 거야.”
“아니, 내 말은 꼭 신휘 씨랑 뭘 해보라는 게 아니고, 괜찮은 사람 나타나면 이참에 너도 연애도 좀 하고 그러라는 거지.”
“연애할 시간이 어디 있어. 일하기도 바쁜데.”
“다른 연예인들은 알게 모르게 뒤에서 다들 연애하고 다니던데, 너는 왜 그 예쁘고 창창한 나이에 썸도 안 타? 일만 하다 죽을 거야?”
“뭐, 꼭 그런 건 아닌데…….”
“이참에 나도 오작교 역할 좀 해보자. 짜릿하게.”
그때까지 가만히 듣고만 있던 산이 말했다.
“형.”
“응?”
“연애는 본인이 때 되면 알아서 하겠죠. 애도 아닌데.”
“왜? 너는 강이 연애하는 거 싫어?”
“네, 싫어요.”
“왜?”
“연애는 서강이 하겠지만, 일거리 늘어나는 건 형이랑 나일 테니까요.”
“나는 일 늘어나도 괜찮은데?”
“저는 안 괜찮아요.”
그의 대답을 들은 삼영이 음흉하게 물었다.
“이유가 뭘까아? 정말로 일거리 늘어나는 게 싫어서 그런가아? 정말로 그게 다일까아? 응? 응?”
당연히 다는 아니다.
강이 연애라도 시작해버리면, 여러모로 골치 아파지는 건 제 쪽이니까.
당장에 그녀의 집을 마음대로 드나드는 일부터 제약이 걸리는 일 아닌가.
하지만 삼영에게 그런 사실을 모두 털어놓을 순 없었다.
그래서 산은 대답 대신 침묵을 택했다.
하지만 삼영은 그의 침묵에 뭔가 대단한 놀림 건수라도 잡은 사람처럼 집요하게 굴었다.
“왜 대답이 없지? 정말로 그게 다야?”
“…….”
“혹시 우리 강이한테 사심 있는 건 아니구우우?”
간신처럼 깐족대는 그의 얼굴이 무척 얄미웠다.
“오빠, 그만 좀 해.”
보다 못한 강이 말렸지만, 산은 룸미러를 통해 저를 압박해오는 그의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강을 위해서도 적당히 침묵해주려던 생각이 바뀌었다.
그래서 그는 팔을 무릎 위에 얹은 채 깍지를 끼고, 상체를 내밀며 삼영의 눈을 똑바로 보았다.
그러고는 이참에 똑똑히 새겨들으라는 듯 말을 이었다.
“형.”
“응?”
“제가 강이 좋아해요.”
예고도 없이 던져진 폭탄 선언에 삼영의 눈이 동그래졌다.
놀란 건 강도 마찬가지라, 그녀도 고개를 돌려 산을 바라보았다.
두 사람의 시선을 느긋하게 받아낸 그가 다시 한번 못 박듯 말했다.
“제가 강이 많이 좋아한다고요.”
“나, 나도 강이 좋아해.”
뒤늦게 뭔가 이상함을 감지한 삼영이 수습에 나섰지만, 이미 엎질러진 물이었다.
“아니요.”
그가 단호히 말했다.
“여자로 보고 있다고요.”
화기애애하던 차 안의 분위기가 순식간에 얼어붙었다.
“야, 산아. 너 무슨 말을…… 내가 농담해서 화났냐?”
“어쩌죠? 저는 농담하는 거 아닌데.”
“가, 가족끼리 이러는 거 아니다, 너?”
피식.
비웃음이 흘러나왔다.
“피 한 방울 안 섞인 사이에 무슨 가족을 운운해요.”
덕분에 삼영은 얼굴이 더 하얗게 질려버렸다.
“산아. 지, 진정하고 일단 내가 잘 알았으니까…….”
“아셨으면 앞으로 제 앞에서 그런 얘기 하지 마세요.”
상냥하게 경고한 산이 특유의 느긋한 미소를 띠며 말했다.
“강이가 다른 남자랑 연애하는 거.”
“…….”
“상상만으로도 돌아버릴 거 같거든요.”
충격에 입이 함지박만 하게 벌어져 버린 삼영과 달리, 강은 금세 평정심을 되찾았다.
산이 보기 좋게 삼영을 구워삶은 거라고 여겼기 때문이다.
대놓고 저런 소리까지 들었으니, 당분간은 제게 다시는 저런 얘기를 꺼내지 못할 거다.
.
.
.
촬영을 마치고 집에 돌아왔을 땐 자정이 거의 다 된 시간이었다.
피곤한 하루였다.
그녀는 녹초가 된 몸을 침대에 누였다.
곁에 있던 산이 대본을 턱 끝으로 가리키며 말을 걸었다.
“오늘은 일 늦게까지 안 해도 돼?”
“괜찮아. 다 끝냈어.”
그렇게 답한 강이 자연스럽게 물었다.
“너는 찾았어? 나보다 더 지독한 악몽을 꾸는 사람.”
불편한 주제였지만, 어정쩡하게 마무리된 이야기라 이후가 궁금했다.
잠시 대답이 없던 그는 큰 동요 없이 고개를 저었다.
“아직.”
“그럼 허기는 좀 채웠어? 오늘 촬영 길어져서 배고팠을 텐데.”
“아니.”
“……하긴. 내가 집에 오고 바로 부르는 바람에 그럴 시간도 없었겠구나.”
“나 이제 다른 꿈 안 먹어도 돼. 적응했어.”
“정말?”
되묻는 그녀의 얼굴엔 묘한 반가움이 번졌지만, 이내 강은 자신이 또 너무 기뻐한 마음을 드러낸 것 같아 얼른 표정을 정리했다.
그걸 본 산이 말했다.
“좋아해도 돼.”
“응?”
“너는 늘 아쉬운 쪽이 너라고 했지만, 사실 나도 마찬가지였으니까.”
서로에게 서로가 유일하다는 현실을 산은 이제 가감 없이 드러냈다.
대답 없이 그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강이 옆으로 누운 채 손을 뻗었다.
그러고는 산의 손을 달래듯 쓰다듬으며 말했다.
“그래서 기분은 좀 풀렸어? 내가 다른 꿈 먹고 오라고 한 것 때문에 서운해했었잖아.”
“너한테 서운한 게 아니라, 그냥.”
“…….”
“나한테 화가 났던 거였어.”
“너한테? 왜?”
“몰라.”
사실은 기쁘다고 말하던 네게 너무 가차 없이 군 것 같아서.
조금은 행복해져도 될 것 같다고 여겼으면서, 그 한마디 때문에 네 소소한 기쁨을 빼앗아버린 속 좁은 놈이 된 것 같아서.
그저 너를 슬프게 한 나에게 화가 났던 것 같기도 한데, 그 말을 할 수는 없었다.
잠시 침묵이 이어졌다.
산은 어색해져 버린 분위기를 조금 풀어보려고, 가벼운 농담을 건넸다.
“너한테는 악몽 말고도 다른 능력이 있는 거 같아.”
“무슨 능력?”
“몽마 홀리는 능력.”
그의 진지하고도 엉뚱한 대답에 강이 웃음을 터트렸다.
“내가 사람 홀리는 건 어디 가서 안 지는데, 이상하게 너한텐 그게 안 먹혀.”
“…….”
“반대로 내가 홀리는 거 같기도 하고.”
“네가 나한테 홀린다고?”
“그러니까 자꾸 안 하던 짓을 하게 되지.”
산은 그렇게 제 진심을 애써 돌려 말했다.
인간의 감정에 동요하지 않던 내가 너의 웃고, 우는 얼굴에 동요하게 되고, 인간의 불행과 공포만을 간절히 바라던 태생적 성향이 자꾸만 순리를 거스르려 한다고.
가만히 그의 이야기를 듣던 강이 조금 웃었다.
“귀한 대우 받는 것 같아, 기분이 나쁘진 않은데?”
산도 그녀를 따라 미소 지었다.
오늘 그는 지난번에 미처 말하지 못했던 이야기를 해야겠다고 마음먹었다.
일부러 숨기려던 건 아니었지만, 굳이 밝힐 필요가 없는 진실이라고 생각했던 이야기.
바로 자신의 태생적 비밀에 관해서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