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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8. 아주 오래된 인연 (48/118)


#48. 아주 오래된 인연
2022.10.13.


열어둔 창문 틈새로 바람이 불어왔다.

창을 등진 채 누워 있던 강의 머리카락이 이마와 뺨으로 흘러내렸다.

산은 그것을 물끄러미 바라보다 손을 들어 그녀의 머리카락을 넘겨주었다.

강이 간지러운 듯 어깨를 움츠리며 웃었다.

눈이 마주치자, 그녀가 말했다.


“이러니까 어릴 때 생각난다.”

“어릴 때?”

“응.”

어떤 기억은 계절이나 날씨의 영향을 강하게 받아, 그날의 온도나 습도, 촉감 같은 걸로 새겨지기도 한다.


“내가 보육원에 처음 왔을 때가 네 살이었거든? 아마 처음으로 악몽을 꾸기 시작한 것도 그때쯤이었을 거야.”

남들은 너무 어릴 땐 잘 기억도 못 하던데, 자신은 왜 그렇게 그날의 기억이 선명한지 모르겠다며.


“엄마랑 둘이 오래된 놀이동산에 갔었어.”

집에서 놀이동산까지의 기억은 거의 없다.

그저 버스 창밖으로 펼쳐진 녹음이, 잘린 필름처럼 드문드문 떠오를 뿐.

하지만 매표소를 지난 후의 기억부터는 자신이 생각해도 말도 안 된다고 생각할 만큼 선연했다.

무지개색 파라솔을 달고 있던 솜사탕 가게.

거기서 하얗고 커다란 솜사탕을 먹었던 기억이 있고, 회전목마를 타기 위해 줄을 서다 엄마의 치마폭에 매달려 안아달라고 칭얼댄 기억도 있다.

엄마는 아무 말 없이 어린 자신을 안아주었고, 그러다 차례가 되어 내려달라고 했었다.

찜해뒀던 분홍색 목마를 타기 위해 발걸음이 조급했던 것 같다.

하지만 키가 작아 황금색 마차 옆에 있던 제일 작은 목마를 타야 했다.

줄을 서는 동안 눈여겨보았던 분홍색 목마는 보호자를 동반해야지만 탈 수 있는 커다란 말이었으니까.


‘엄마랑 같이 저 분홍색 말 타면 안 돼?’

제 물음에 엄마는 아무 말 없이 벨트를 단단히 채워주곤, 허리를 숙여 뺨을 한번 쓸어주었다.

그때 엄마의 얼굴이 어땠더라.

아무튼 그녀는 한동안 말없이 시선을 맞추고 있다가, 밖으로 나갔다.

오르골 소리와 함께 회전목마가 움직이기 시작했고, 나무 옆에서 손을 흔들어주던 엄마의 모습이 각인된 듯 뇌리에 박혀 있었다.

물론 엄마의 눈코입은 물에 번진 그림처럼 흐릿했지만, 그날의 풍경, 온도, 직접 느끼던 감각의 산물은 자신을 구성하는 몸의 일부가 된 것처럼 뚜렷했다.

커다란 나무를 지나 한 바퀴, 두 바퀴.

엄마의 모습이 사라진 건,


‘……엄마?’

세 바퀴째에서였다.


 
회전목마의 운행이 완전히 멈추고, 함께 타고 있던 모든 아이가 부모님의 손을 잡고 기구를 떠나는 동안, 강은 목마 위에 덩그러니 남겨져 있었다.

뒤늦게 자신을 발견한 직원과 몇 마디 대화를 나누었던 것 같고, 모른다는 대답을 몇 번 했던 것도 같다.

낯선 사람의 손을 잡고, 놀이동산 입구에 마련된 방송실로 향하던 길.

그곳에 놓인 낡은 주황색 소파와 회색 시멘트 바닥.


‘아- 아-, 미아를 보호하고 있습니다.’

몇 번의 방송이 울려 퍼지고, 시간이 흐를수록 직원들은 난감한 얼굴로 저를 흘깃거렸다.

그제야 무언가 잘못됐다는 생각에 형용할 수 없는 불안과 초조와 공포가 휘몰아치기 시작했다.

방송실에 앉아 엉엉 울었던 기억이 나고, 해가 뉘엿뉘엿 질 때쯤 경찰차가 도착했다.

여경 한 명이 우는 자신을 안아달랬다.

엄마는요? 하고 물었을 법도 한데, 왜 그때의 자신은 아무것도 묻지 못했던 걸까.

아마도 돌아올 대답이 담고 있을 무게에 본능적으로 두려움을 느꼈던 것 같다.

시간이 꽤 흘렀는데도, 엄마의 행방은 묘연했다.

어떤 단서도 찾을 수 없었고, 아예 세상에 존재하지 않았던 사람처럼 그렇게 자신의 인생에서 증발해버렸다.

정신을 차렸을 땐, 집이 아닌 낯선 곳에 도착해 있었다.

그렇게 강은 보육원 생활을 시작하게 되었다.

엄마가 찾으러 올 때까지 그저 하루 머무는 곳인 줄 알았던 그곳이 집이 됐고, 결국 그곳을 나오게 된 건 보호 종료 시점인 성인이 된 이후였다.


“숙희 이모 말로는 내가 사흘 내내 물 한 방울도 입에 안 대고 울기만 했었대.”

그날 이후로 아직도 놀이동산에서 회전목마를 타던 장면이 꿈에 나오곤 했다.

이리 오라며 손짓하는 흐릿한 엄마의 얼굴은 제 기억 속에서 뭉개져버린 것처럼 엉망인 형상이 되어 자신을 괴롭혔다.


“그때 숙희 이모는 그냥 식사만 준비해주시던 분이었는데, 내가 하도 못 먹고, 못 자니까 나 때문에 죽을 끓여오신 적이 있으셨어.”

그녀가 넋두리처럼 하는 말을 산은 말없이 들어주었다.

숙희는 본래 살가운 성격은 아니었다고 했다.

하지만 말수도 극히 적은 그녀가 그날 직접 끓여온 죽을 먹이고, 지친 듯 쓰러져 있는 자신의 머리를 만져주며 낮잠을 좀 자는 게 어떠냐고 묻기도 했다고.

아주 무더운 여름.

바람에 흔들리는 나뭇가지의 이파리들이 사락사락 부딪치는 소리와 창밖에서 들려오는 매미 울음소리.

숙희가 들고 있던 부채가 살랑살랑 움직일 때마다, 기분 좋은 바람이 머리카락을 어루만져주었었다.

그때의 온도가 참 좋았다.

너무 뜨겁지도, 차갑지도 않은 그 온도가 얼어 붙어 있던 마음까지 녹여주는 것 같아서.

그렇게 보육원에 온 지 나흘 만에 겨우 깊은 잠이 들었었다.

내내 조용히 듣던 산이 말했다.


“그래서 지금 내 손길이 숙희 이모 같다는 이야길 하고 싶은 거야?”

위로가 서툰 그 나름의 마음을 헤아리는 방식이었다.

그러자 강이 쿡쿡 웃음을 터트렸다.


“응. 그때 이후로 누가 재워주는 게 처음이라.”

“그런 거 말고, 좀 더 설렐 순 없는 건가?”

“오늘 잠이 잘 올 거 같아서 설레긴 해.”

“관두자.”

산이 한숨과 함께 푸념하자, 그녀가 연이어 웃었다.

그러고는 느리게 눈을 몇 번 깜빡이다 말을 이었다.


“내가 언제부터 매일 악몽을 꾼 줄 알아?”

“언제부턴데?”

“일곱 살에 차 사고를 당한 적이 있어.”

가드레일을 들이받고 뒤집힌 차 안에서 삶과 죽음의 경계를 밟았던 순간부터.

자신 앞으로 거액의 생명보험이 들어 있었다는 사실은 한참 후에 안 사실이었다.

사고는 우연이 아니었지만, 천사의 탈을 쓴 양부모의 계획에는 어긋났던 사고였다.

차라리 기절이라도 했으면 좋았을걸.

눈뜨고 마주해야 했던 참혹한 현장은 또 하나의 끔찍한 악몽이 되어 강을 찾아왔다.


‘쟤야, 쟤. 양부모 잡아먹고 파양된 애.’

‘가까이 가지 말자. 괜히 부정 탈라.’

단 한순간도 내 집이 아니었던 내 집에서 누군가가 그렇게 말했던 걸 얼핏 들었었다.

보육원 식구들은 아니었던 것 같고, 김장이나 큰 행사가 있을 때마다 종종 와서 도와주던 동네의 자원봉사자들로 기억한다.

잘은 모르지만, 큰 잘못을 한 것 같아 두렵고, 무서웠다.

하지만 목숨을 잃을 뻔한 사고에서 살아남은 건 처음이 아니었다.

보육원을 나오면서 전달받은 엄마의 편지.

처음 그곳에 갔던 날, 매고 있던 가방의 안 주머니에 들어 있었다고 했다.

편지엔 원치 않는 임신을 하는 바람에 지우려고 했지만, 태어날 운명이었는지 결국 강을 낳게 되었다는 글이 적혀 있었다.

부족한 엄마를 만나게 해 미안하고, 원망도 달게 받겠다는 말과 함께 죽을 때까지 죄인이 된 심정으로 아이의 건강과 안녕을 위해 기도하며 살겠다고도.

어떻게 제 배 아파 낳아 4년이나 기른 자식에게 이렇게까지 애정이 없을 수가 있을까.

이제는 가물가물해서 잘 떠오르지도 않던 엄마의 얼굴을 그려보다 문득 한 가지 사실을 깨달았다.

단 한 번도 엄마의 웃는 얼굴을 본 적이 없었다는 것.

나의 존재 자체가 누군가에게는 큰 고통이 됐다는 사실에 가슴이 망치로 맞은 것처럼 아팠다.

전부 모르는 게 나았을 진실이었다.

죽음에서 살아 돌아온 첫 경험을 이미 뱃속에서 하고 나왔다는 걸 알게 된 계기였으니 말이다.

이후 일곱 살에 겪었던 차 사고를 지나, 19세에 보육원에서 발생했던 화재 사고를 겪었다.

강은 건물 안에 갇힌 피해자 중 유일한 생존자였다.

세 번 모두 살아남은 게 죄가 되어버린 사건이었다.

불행은 그렇게 그녀 삶의 중간중간에 씨앗처럼 심어져 거대한 악몽을 만들어냈다.

조용히 듣던 산이 물었다.


“살아남은 걸 후회해?”

“……솔직히 말하자면, 후회했던 적도 있었어.”

“지금은?”

“지금은 당연히 아니지.”

“…….”

“왜냐하면, 나도 행복해지고 싶었으니까.”

사고 이후 받았던 상담에서 ‘너의 탓이 아니니, 행복해도 괜찮다.’라는 말을 듣고 펑펑 울었었다.

행복은 단 한 번도 제게 스스로 찾아온 적이 없었지만, 악착같이 살아내며 행복을 좇기 시작한 것도 그때부터였다.

타고난 운명 때문에 불행하기만 하다 죽기엔, 자신이 너무 가여웠으니까.

산은 그녀에게 그래서 지금은 행복하냐고 묻지 않았다.

언젠가 강에게 불행하냐고 물었을 때, 그녀는 살 만하지만, 행복한 건 아직 모르겠다고 답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불과 며칠 전에 제게 했던 말도 있었다.


‘나는 너 만나서, 이미 충분히 누렸어.’

그래서 고맙다던 말.

이제 막 보이기 시작한 희망에 강은 그렇게 인사했었다.

하지만 감사로 가득한 그녀의 태도 어디에도 진짜 행복은 없었다.

그렇게 지독히도 불행했던 여자라, 몽마인 자신이 그녀를 위해 약간의 행복을 빌어줬을지도 모른다.

산은 행복하냐고 묻지 않았지만, 행복하길 바란다는 말도 하지 않았다.

소소한 바람이라도 그걸 입 밖으로 내는 순간 간절한 소망이 될 수도 있다는 걸 알기 때문이었다.

자신이 바라서는 안 되는 바였다.

그는 대신 오늘 하려던 이야기에 대해 입을 열었다.


“예전에 보육원에 가던 길에 내가 했던 말 기억 나?”

“어떤 말?”

“우리가 조금 더 일찍 만났으면 어땠을까 한다는 네 말에, 내가 했던 말.”

“…….”

“우리 일찍 만났었다고 내가 얘기했었잖아. 예전에 만난 적 있다고.”

그말에 강은 이내 언젠가 그와 나누었던 대화를 떠올렸다.


‘무슨 생각해?’


‘그냥. 우리가 조금 더 일찍 만났으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


‘우리 일찍 만났었어.’


‘어? 그게 무슨 말이야?’


‘있어, 그런 게.’


‘뭔데! 왜 너만 알고 있어? 빨리 말해줘.’


‘다 왔다.’

그렇게 웃어버리고 말던, 보육원 앞에서의 산의 모습이 선명했다.

그녀가 침대에서 벌떡 몸을 일으키며 물었다.


“그래서?”

“…….”

“그래서 우리가 언제 만났는데?”

그가 옅은 미소를 띠며 강을 바라보았다.

현재.

스물일곱이 된 우리.

하지만 오래전부터 이어진 인연이었다.

호선을 그리던 입술이 천천히 떨어졌다.


“우린 이미 세 번이나 만났었어.”

“우리가 세 번이나 만났다고?”

산은 가장 최근의 만남을 시작으로 거꾸로 시간을 흘러가며 대답했다.


“마지막으로 만난 건 열아홉. 화재 사건 때.”

“……!”

말도 안 돼.

그 끔찍했던 하루 어디에도 타인이 비집고 들어올 틈 따위는 존재하지 않았다.

도대체 그날의 어느 순간에 우리가 만났다는 걸까.

하지만 그는 조용히 이야기를 이어나갈 뿐이었다.


“두 번째는 일곱 살. 네 양부모가 죽기 직전, 마지막으로 참여했던 후원인 모임에서.”

“…….”

“우리의 맨 처음은 나도 기억 못 하고, 너도 기억 못 하던 때.”

“그게 언젠데?”

“우리가 둘 다 엄마 배 속에 있었을 때.”

그녀의 동공이 떨려왔다.

세 번의 만남 그 무엇도 자신의 기억 속엔 없는 일이었다.

아니.

그보다 산의 말대로라면 우리의 첫 만남은 그의 기억에도 없어야 정상이었다.

잠잠했던 심장이 점점 크게 뛰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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