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9. 전조(前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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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9. 전조(前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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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9. 전조(前兆)
2022.10.16.
“우린 이미 세 번이나 만났었어.”
“우리가 세 번이나 만났다고?”
산은 가장 최근의 만남을 시작으로 거꾸로 시간을 흘러가며 대답했다.
“마지막으로 만난 건 열아홉. 화재 사건 때.”
“……!”
말도 안 돼.
그 끔찍했던 하루 어디에도 타인이 비집고 들어올 틈 따위는 존재하지 않았다.
도대체 그날의 어느 순간에 우리가 만났다는 걸까.
하지만 그는 조용히 이야기를 이어나갈 뿐이었다.
“두 번째는 일곱 살. 네 양부모가 죽기 직전, 마지막으로 참여했던 후원인 모임에서.”
“…….”
“우리의 맨 처음은 나도 기억 못 하고, 너도 기억 못 하던 때.”
“그게 언젠데?”
“우리가 둘 다 엄마 배 속에 있었을 때.”
그녀의 동공이 떨려왔다.
세 번의 만남 그 무엇도 자신의 기억 속엔 없는 일이었다.
“……태어나기 전이면, 너도 몰라야 맞는 거잖아.”
강이 떨리는 목소리로 묻는 말에, 그가 잠잠히 대답했다.
“어머니한테 들었어.”
듣고 있으면서도 잘 와닿지 않았다.
자신들이 이미 세 번이나 만남을 가졌다는 것도, 몽마인 산에게 어머니라는 존재가 있다는 것도.
산의 이야기를 들으면 들을수록 머릿속에 물음표만 가득 채워지는 기분이었다.
혼란에 빠진 자신을 앞에 두고 그가 다시 물어왔다.
“네가 태어난 이후에 가장 가까이서 죽음을 경험했을 때, 뭔가 이상한 일은 없었어?”
“이상한 일?”
“예를 들자면.”
“…….”
“어떤 계기로 네 삶에 큰 변화가 생기고, 그로 인해 대가를 치러야 했던 일.”
그녀의 머릿속에 산이 말한 단어들이 뒤죽박죽 나열되기 시작했다.
죽음의 기로.
어떤 계기와 변화.
그로 인한 대가.
강의 눈가가 파르르 떨려오기 시작했다.
이제껏 살아오면서 아무에게도 말하지 못했던 일이 목 언저리까지 차올랐다.
“차 사고를 당했던 그 날…… 그러니까 내가 일곱 살 때…….”
잠시 말을 멈춘 그녀가 마른침을 한번 삼키곤 아랫입술을 꼭 깨물었다.
눈을 감으면 아직도 그때 들었던 목소리가 선명히 떠올랐다.
“매일 밤 끔찍한 악몽에 시달리게 될 거야. 그래도 살고 싶니?”
“좋아. 내게 20년을 벌어주마. 부디 그때까지 죽지 말고 견뎌다오.”
환청이라기엔 너무도 선명한.
무시해버리기엔 너무나 예언처럼 새겨진 말.
강은 그때 들었던 여자의 말처럼 사고 이후, 매일 밤 끔찍한 악몽에 시달려야 했다.
그리고 20년을 벌어주겠다던 남자의 말처럼, 그로부터 딱 20년이 더 흐른 현재까지도 살아 있었다.
질끈 감았던 눈을 뜬 그녀가 산을 바라보며 떨리는 입술을 열었다.
“……그때 들었던 목소리가 있어.”
강은 차근히 기억을 되짚어 그들이 했던 말을 되짚었다.
“여자는 나한테 매일 밤 악몽에 시달리더라도 살고 싶냐고 물었고, 남자는 나한테 20년을 벌어줄 테니 죽지 말고…… 견뎌달라고…….”
말끝을 흐리는 그녀를 보며 산이 조금 웃었다.
많은 감정이 담긴 것만 같은 묘한 미소였다.
그러고는 말을 잇지 못하는 강을 대신해 다시 입술을 열었다.
“그들이 바로.”
“…….”
“내 부모님이야.”
산의 말에 강은 그대로 굳어버리고 말았다.
20년 전 그날.
내게 말을 걸었던 게 산이의 부모님이었다고?
이건 정말이지 상상도 못 한 일이었다.
한꺼번에 너무 많은 비밀을 알게 되어버린 기분이라 사고가 정지한 느낌이었다.
게다가 내 양부모를 알다니.
그리고 화재 사건과는 어떤 관련이 있는 건데?
묻고 싶은 게 너무 많은데, 입이 붙어버리기라도 한 것처럼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말을 잃은 그녀를 대신해 그가 덤덤히 말을 이었다.
“딱히 숨기려던 얘긴 아니었는데, 굳이 밝혀야 할 필요를 못 느껴서 안 했었어. 그럴 기회도 없었고.”
이제 와 이 모든 이야기를 속속들이 밝히는 이유는 강이 제 속마음을 그대로 제게 전달했을 때 느낀 바가 많았기 때문이다.
밀고, 당기고, 재게 되는 그런 골치 아픈 상황을 이어가는 것보다, 솔직한 게 가장 쉬운 방법일지도 모르겠다는 결론이 섰기 때문에.
그러니 앞으로는 너만이 내게 주어진 최고의 선택이자, 유일무이한 존재임을 인정하는 동시에 마음껏 집착하고 가감 없이 소유욕을 드러낼 생각이었다.
적어도 우리가 각자 원하는 것을 얻게 될 때까지는, 그 모든 게 정당화될 테니까.
그는 이어서 자신의 정체에 대해서도 밝혔다.
“너도 알다시피 나는 몽마야.”
“…….”
“그리고 천인이기도 해.”
이번엔 그녀의 입이 같이 벌어졌다.
“……그건 또 무슨 얘기야?”
산은 덤덤히 자신의 이야기를 이어갔다.
몽마인 아버지와 천인인 어머니 사이에서 금기를 깨고 태어난 최초의 존재가 바로 나라고.
덕분에 부모님은 둘 다 태어나고 자란 곳을 떠나, 이방인처럼 떠돌아야 했다.
천인들은 산의 존재를 천인으로 받아들이지 않았고, 그건 몽마들도 마찬가지였기 때문이다.
전례가 없다는 건 때론 가늠할 수 없는 위험 요소로 분리되기도 한다.
그리고 그건 곧 높은 확률로 제거 대상이 되기 마련이었다.
스스로 날개를 꺾고 인간세계에 내려와 평범한 인간처럼 아들을 키우던 부부는 끝없는 추적을 피해 조용히 살아가다가 결국 몽마의 왕에게 공격을 당했다.
천인들이 다스리는 5국 중 하나인 우국(雨國)에 가까스로 산을 숨긴 둘은 때가 되면 ‘그 여자’를 찾아오라는 말만 남긴 채 그의 곁을 떠났다.
그리고 빈사 상태가 되어 육체를 버리고, 일곱 살이던 강에게 깃들었다.
손을 뻗은 그가 손끝으로 그녀의 목 언저리를 스치고 쇄골 아래를 콕 짚었다.
“그래, 맞아.”
“…….”
“우리 부모님은 두 분 다 네 안에 계셔.”
선대(先代) 몽마의 왕이었던 이일리(212).
인간의 모든 긍정적 감정을 관장하는 화국(華國)의 수장이었던 모아.
산의 아버지와 어머니였다.
물리적 죽음에 이른 상태이지만, 완전히 죽진 않은 상태.
삶에 대한 강한 의지를 양분으로 삼아야 했을 어머니와, 아들에게 줄 수 있는 최고의 악몽을 찾았을 아버지.
두 가지 조건을 완벽히 갖추고 있는 인간이 바로 강이었다.
재처럼 흩날려 사라질 뻔한 그들의 마지막 혼은 그렇게 그녀의 몸 안에 잠들게 되었다.
이야기를 들은 강이 떨리는 목소리를 뱉었다.
“너희 부모님이 두 분 다, 내 안에…… 계시다고?”
“산 것도, 죽은 것도 아니라 다시 예전처럼 얼굴을 볼 순 없겠지만, 기운만큼은 분명히 네 안에 있어.”
죽음의 끝에서 그들이 택한 것은 아들인 산에게 또 다른 기회와 선택을 제공해주는 일이었다.
반쯤 얼이 빠진 강을 보며 그가 조금 웃었다.
“걱정하지 마. 내 수명을 갉아먹거나, 네 몸에 어떤 해를 끼치는 건 아니니까.”
산은 그렇게 이야기했지만, 사실 그때 살아남지 못했다면 자신은 일곱 살에 죽었을 운명이었다.
그러니 그 대가로 어떤 것을 취해가든, 할 말은 없는 상황이다.
매일 악몽을 꾸어도 괜찮겠냐는 질문에 응한 건 누구도 아닌 바로 그녀 자신이었기 때문이다.
그가 다시 말을 이었다.
“두 분의 혼이 온전히 융합할 만큼 회복을 마치면, 아무 일 없다는 듯이 빠져나올 거야.”
“그럼 그다음엔 어떻게 되는 건데?”
융합을 마친 혼은 어디에 사용되든 엄청난 에너지원이 될 것이다.
천인들은 그것이 천계로 인도되길 원했고, 몽마는 그것을 삼켜 불멸과도 같은 힘을 얻길 원했다.
그리고 산은 선택의 기로에 놓인 상태였다.
하지만 강이 묻는 건 아마 자신의 앞날에 관한 질문이었을 것이다.
그는 그녀의 입장에서 듣길 원하는 답을 골랐다.
“비로소 네가 원하는 삶을 살게 되겠지.”
“내가 원하는 삶?”
“더 이상 악몽을 꾸지 않는 삶.”
강은 마음속으로 산이 한 말을 되새겼다.
더 이상 악몽을 꾸지 않는 삶.
현실감이 없어, 당장에 그것이 큰 기쁨으로 다가오진 않았다.
그리고 그것보단 다른 게 궁금했다.
“그럼 너는?”
“…….”
하지만 내내 답을 들려주던 그는 그 질문만큼은 어떤 답도 내놓지 않은 채, 그저 침묵했다.
이유 모를 초조함이 엄습했다.
“대답해, 빨리! 너는 어떻게 되는 거야?”
불안한 듯 채근하는 그녀를 산이 의아하다는 듯 바라보았다.
“네 인생에서 악몽이 사라지길 간절히 바라지 않았어?”
그렇게 말한 그가 엄지로 강의 뺨을 쓸다가 그녀의 입꼬리를 살짝 당겨 올렸다.
“그럼 기뻐해야지, 강아.”
기쁘지 않았다.
자신이 바란 건 분명 매일 꾸던 악몽이 사라진 평범한 삶이었지만, 그게 산이 사라지길 바란다는 뜻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어렵게 입술을 뗐다.
“……너는 악몽이 아니잖아.”
“내 존재 자체가 악몽은 아니지만, 악몽을 먹고 사는 비현실적인 존재긴 하지.”
필연적으로 몽마와 악몽은 뗄레야 뗄 수 없는 관계였다.
그리고 강이 간절히 원했던 평범한 삶.
그 삶은 평범하지 못하고 비현실적인 자신의 존재가 사라졌을 때, 비로소 완성될 것이다.
말을 잃은 그녀에게 산이 계속해서 말했다.
그날이 머지않았을 거라고.
“내 안에 있는 내 부모의 혼의 조각이 온전해지는 날이 오면 나는 너를 떠날 거고, 너는 더 이상 꿈을 꾸지 않게 될 거야. 모든 기억을 잊고, 평범하게 살아가게 되겠지.”
너에게만 특별할 평범한 인간을 만나 사랑에 빠지고, 너 스스로 거머쥔 행복을 누리며 사는 그런 삶을 살게 될 것이다.
잠시 침묵하던 강은 질문의 방향을 바꾸었다.
“그럼 넌 어디로 떠나는 건데? 어떻게 살아갈 거야?”
그가 대답했다.
“생각 중이야.”
“…….”
“나는 선택지가 너무 많거든.”
.
.
.
그 시각.
로미는 짐승의 모습으로 변해 강과 산이 있는 곳 주변을 맴도는 중이었다.
대화가 길어질 것 같으니, 주변을 대신 좀 탐색해달라던 산의 부탁 때문이었다.
킁킁-
“아우, 냄새!”
밤이 되자 스멀스멀 모여들기 시작한 몽마의 냄새에 그녀가 얼굴을 찡그렸다.
상급 몽마들은 강한 놈일수록 냄새보다는 압(壓)을 통해 기척이 느껴졌지만, 하찮은 하급 몽마들은 시궁창 썩은 내가 강하게 났기 때문이다.
물론 그건 후각이 발달한 수인들만 맡을 수 있는 냄새였다.
바닥에 엎드려 앞발로 코 주변을 문지르던 로미가 지독한 냄새에 어질해진 머리를 좌우로 흔들었다.
그때였다.
「키에에-」
몽마의 울음소리 같은 게 들려 고개를 드는데, 하늘에서 끈적하고 냄새나는 무언가가 그녀의 미간으로 툭 떨어졌다.
이내 코를 찌르는 듯한 썩은 내가 진동했다.
화들짝 놀란 로미가 놀란 고양이처럼 폴짝 뛰어오르며 비명을 질렀다.
“악! 이게 뭐야!”
깨갱깨갱! 질겁을 하며 펄쩍대던 그녀가 전봇대 기둥에 마구 미간을 문질렀다.
몽마가 흘린 침이었다.
불쾌와 분노에 휩싸인 로미가 다시 고개를 들어 전봇대 위에 앉아있는 검은 몽마 한 마리를 노려보았다.
놈은 강이 사는 아파트를 바라보며 침을 질질 흘리는 중이었다.
크르르르-
이빨을 드러내며 으르렁대던 그녀가 외쳤다.
“감히 내 얼굴에 침을 흘려? 넌…… 죽었다.”
지면을 딛고 껑충 뛰어오른 로미가 단숨에 하급 몽마의 목덜미를 낚아챘다.
「키에엑! 끼익!」
인간의 언어도 구사 못 할 정도로 하찮은 몽마가 죽는다고 소리를 질러댔지만, 그녀는 인정사정없이 놈의 목을 물고 이리저리 흔들다 바닥으로 패대기쳐버렸다.
「끄엑……!」
새끼 노루만 한 크기의 녀석이 반항 한번 못 하고 죽어버렸다.
검은 연기의 형상을 띤 겉가죽이 흩날리는 재처럼 소멸하자 뼈만 덩그러니 남아버렸다.
그대로 두면 뼈도 시차를 두고 재가 되어 사라지겠지만, 몽마의 뼛조각은 로미에겐 가지고 놀기 좋은 장난감과 같았다.
게다가 겉가죽이 타면서 지독했던 냄새도 사라지니, 일석이조였다.
“아이고! 탄다! 탄다! 안 돼!”
다급해진 그녀가 불이 붙기 시작한 녀석의 두개골을 앞발로 팡팡 때리며 불씨를 꺼트렸다.
그러고는 따끈따끈하게 건진 신상 두개골을 공처럼 가지고 놀기 시작했다.
그런데 그때.
툭.
투둑.
투두둑.
무언가가 땅바닥과 로미의 등으로 후두둑 떨어지기 시작했다.
“응?”
……비 오나?
별생각 없이 고개를 들어본 하늘이 심상치 않았다.
별 하나 보이지 않을 정도로 새까맣게 뒤덮인 하늘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그녀의 동공이 바짝 조여들었다.
어느새 개떼처럼 모여든 몽마들이 허공을 빙빙 돌며 침을 흘려대고 있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