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0. 이제 시작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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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 이제 시작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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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 이제 시작이니까
2022.10.20.
하늘을 까맣게 뒤덮은 게 먹구름이 아니라 몽마떼라는 걸 안 그녀의 주둥이가 떡 벌어졌다.
“자, 잠깐.”
하얗게 질린 로미가 고개를 내려 바닥을 적시고 있는 의문의 액체를 바라보았다.
“그럼 설마 이게 다……?”
순간 코를 확 찌르고 들어오는 냄새에 그녀가 비명을 질렀다.
“으악!”
오줌에 절인 썩은 물고기 두 마리가 양쪽 콧구멍에 사이좋게 박혀 들어 온 기분이었다.
앞발로 코를 감싼 채 좌우로 데굴데굴 구르던 그녀가 급히 숨을 참고 일어섰다.
그 짧은 시간에도 어슬렁어슬렁 모여들기 시작한 몽마들은 빠르게 숫자를 늘리고 있었다.
“대체 저게 다 몇 마리야? 삼십, 아니 오십……?”
족히 오십 마리는 되어 보였다.
점점 짙어지기 시작한 강의 악몽 냄새를 맡고, 너도나도 개떼처럼 모여들기 시작한 게 분명했다.
어쩌면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닐 수도 있다.
이대로라면 앞으로 숫자가 늘어나는 것 역시 불 보듯 뻔한 일이었다.
지금은 그저 산이 떡하니 지키고 있는 탓에 접근은 못 하고, 군침만 흘리며 내내 근처만 배회하는 것일 테지.
“저것들을 어떻게 하지?”
고민하던 그녀가 미간을 좁힌 채 하늘을 노려보았다.
그나마 다행인 건 전부 하급 몽마들이라, 로미 혼자서도 충분히 승산이 있는 싸움이라는 사실이었다.
“좋아! 1분 안에 승부 본다!”
그녀가 동선을 체크하며 눈에 바짝 힘을 주던 그 순간이었다.
거대한 구름처럼 모여들던 몽마들이 갑자기 혼비백산해 뿔뿔이 흩어지기 시작했다.
“뭐지?”
막 뛰어오르려던 로미가 잠시 움직임을 멈춘 채 사태 파악에 나섰다.
대개 이런 경우는 세 가지였다.
첫 번째는 수인의 기척을 눈치채고 도망친 경우.
수인과 몽마들은 몇천 년이 넘는 긴 시간을 서로 죽고, 죽이는 천적으로 지내왔기 때문에 하급 몽마들은 수인의 기척을 느끼면 도망치는 경우가 대다수였다.
그리고 두 번째는 저들같이 하찮은 몽마들을 인정사정없이 말살해버리는 자비 없는 천인을 마주한 경우인데, 모든 짐승과 인간들이 그렇듯 천인들도 성격이 제각각이었다.
저렇게 인간에게 해를 끼칠 수 없는 하찮은 몽마들은 조용히 살려 보내주기도 하는 천인들이 있는 방면, 몽마의 몽 자만 들어도 치를 떨며 씨를 말려버리는 천인들도 있었다.
그러니 만약 천인의 기척을 알고 저렇게 흩어진 경우라면 상대가 어마어마한 살기를 내뿜는 폭군 같은 천인일 가능성이 높다는 얘기다.
그리고 마지막 세 번째는 월등히 기량이 뛰어난 상급 몽마를 마주쳤을 때다.
힘의 격차가 분명한 동족과 밥그릇 싸움을 벌여봤자, 개죽음당하는 건 시간문제였기 때문이다.
그건 떼로 덤벼도 안 되는 일이었다.
그리고 로미는 지금 이 상황이 단언컨대, 첫 번째 이유 때문일 거라고 생각했다.
놈들이 뒤늦게 자신의 존재를 눈치채고, 꽁지가 빠지도록 도망친 거라 여겼다.
“히히. 하여간 쫄보들이 수인 무서운 줄은 알아가지구.”
할 일이 없어 심심했다면, 얼른 쫓아가 한 놈이라도 물어왔을 거다.
하지만 지금은 막 잡은 장난감이 있으니, 굳이 그럴 필요가 없었다.
로미는 다시 고개를 내리고는 가지고 놀던 몽마의 두개골을 앞발로 잡은 채 그것을 핥고, 깨물며, 굴리고 놀았다.
지면에 드리워진 모든 그림자를 지우던 안개가 사라졌다.
차가운 은색 달이 다시 구름 위로 모습을 비추었고, 먹구름처럼 몰려 있던 몽마 떼가 사라진 자리.
검은 로브를 뒤집어쓴 누군가가 그보다 훨씬 더 높은 빌딩 위에 우뚝 서서 발밑에 깔린 풍경을 내려다보았다.
그는 노느라 정신이 빠진 로미를 보며 작게 웃었다.
기척을 숨긴 탓에 자신의 존재를 전혀 눈치채지 못한 것 같았다.
“멍멍이 너, 운 좋은 줄 알아.”
제게 덤벼들었으면, 인정사정없이 죽여버리려던 참이었다.
로미에게서 시선을 거둔 그가 강이 있는 아파트를 바라보았다.
“소문난 맛집이라고 그래서 와봤더니.”
무표정한 얼굴로 한 곳을 응시하던 그의 입술이 열렸다.
“잠은 안 자고, 여태 연애질이네?”
아쉬움에 입맛을 다시던 붉은 입술 사이로 푸념이 새어 나왔다.
남자는 제 자리에 정승같이 박힌 채 오래도록 그곳을 떠나지 않았다.
* * *
같은 시각.
강과 산은 여전히 못다 한 이야기를 나누다, 잠시 대화가 끊겨 있던 참이었다.
그녀의 안에 잠든 이일리와 모아의 혼이 융합을 마치고 온전한 힘을 되찾아 자신을 떠나는 날.
그 이후의 계획에 대해 묻는 강에게 산은 제게 주어진 선택지가 너무 많아 생각 중이라는 대답을 했고, 더는 대화에 진전이 없었다.
“나 물 한 잔만 마시고 올게.”
결국 침대를 벗어난 그녀에게 그가 물었다.
“잠 안 자고?”
“지금은 대화를 더 하고 싶어.”
이런 어마어마한 비하인드 스토리를 듣고 잠이 올 리가 없었다.
오던 잠도 달아나버린 차였으니까.
“너는 뭐 마실래?”
“난 괜찮아.”
“그래.”
고개를 끄덕인 강이 말없이 주방으로 향했다.
사실 묻고 싶었다.
네가 가진 선택지는 어떤 것들이냐고.
하지만 그런 질문을 던져도 될까 싶었다.
그가 영영 자신을 떠난다는 게 아쉽기도 했지만, 산이 사라짐으로 인해 비로소 자신의 행복이 완성될 거라는 말에 반박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이별은 정해진 수순이었고, 아쉬운 마음이 드는 건 함께해온 시간과 함께 헤쳐나가야 할 고난이 있기 때문이었다.
그래.
그러니까 말하자면 이건 애정이 담긴 우정.
종족과 성별을 떠나 산에게 느끼는 감정은 아마 그런 종류의 것일 거라고, 강은 생각했다.
자신이 삼영이나 반을 특별히 생각하는 것처럼, 이제는 그도 제게 그런 존재가 되어버렸으니까.
쪼르르 -
정수기에서 떨어지는 물줄기가 컵을 채우는 장면을 가만히 바라보던 그녀는 단숨에 물 한 잔을 비우고 돌아갔다.
침실로 돌아갔을 때, 산은 여전히 침대 곁에 있는 의자에 앉아 있었다.
강은 그를 지나쳐 침대에 걸터앉았다.
둘은 잠시 시선을 맞추었다.
그녀는 여전히 궁금한 게 많았지만, 이 순간 가장 묻고 싶은 걸 묻기로 했다.
“근데 왜 나한테 이런 이야기를 전부 말해주는 거야?”
강의 질문에 산이 고요히 웃었다.
“솔직한 게 가장 쉬운 방법이라는 걸 깨달았으니까.”
“…….”
“그러니까 네 행복은 나한테서만 찾아. 다른 데 눈 돌리지 말고.”
목표에 애정이 생기면 전투력은 배가 된다.
“우리가 원하는 걸 얻게 되기까지, 나는 다른 놈이 널 죽이거나 빼앗지 못하도록 지킬 거고, 너는 그런 나를 믿고 따라주기만 하면 돼.”
인간의 모습으로 오래 살아온 사파로(485)만 봐도 알 수 있었다.
그것이 완전한 선의나 인간에 대한 애정일지는 몰라도 사파로는 분명 자신이 살아가는 세계와 돌보고 있는 것들에 충분히 마음을 쓰고 있었다.
그때는 이해하지 못했던 것들이 이제는 조금 이해될 것도 같았다.
“우리는 살아야만 할 이유가 너무 확실하잖아. 그런 둘이 만났으니 어떻게든 원하는 걸 이룰 때까진 최선을 다해야 하지 않겠어?”
“나는 늘 최선을 다 해왔어.”
진지한 그녀의 대꾸에 그가 웃음을 터트렸다.
맞는 말이었다.
삶에 대한 의지가 더 강했던 것도 강이었고, 의지나 목표가 분명한 쪽도 분명 그녀였다.
외려 이유도 모른 채 살아남기 급급했던 건 제 쪽이었다.
산은 고개를 끄덕여 인정하며, 말을 이었다.
“그러니까 앞으로는 내가 떠나도 붙잡을 수 없을 것 같다는 말은 하지 마. 나 만나서 충분히 누렸다는 생각도 하지 말고.”
너는 어떻게 해서든 나를 네 곁에 묶어두어야만 한다.
다른 어떤 상황에도 나를 놓아서는 안 되며, 당연히 네 것이라 여겨야 할 것이다.
내가 그렇게 할 거니까.
“너는 죽음까지 불사하겠다는 패기가 있던 애잖아.”
“…….”
“그러니까 넌 여기서 만족하면 안 돼. 나도 아직 만족 못 했으니까.”
너의 행복은 이제 시작일 거라는 산의 말에 강이 뒤늦게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어.”
그러고는 그를 보며 다짐하듯 말했다.
“우리 둘 다 원하는 걸 이룰 때까지, 반드시 살아남아서 행복해지자.”
산은 본인의 행복이 뚜렷한 목표인 그녀의 말에 완전히 동감할 순 없었다.
그저 그날이 오기까지 무탈하게 강을 지켜내야겠다는 생각은 강해졌지만, 자신의 행복에 관한 그림은 좀처럼 제 머릿속에 그려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고개를 끄덕여주었다.
당장의 목표는 너의 안전이었으니까.
1차 목표는 생긴 셈이니, 아무것도 그리지 못하던 때보다는 낫다고 생각했다.
“이제 자자. 배고프다.”
그렇게 말한 산이 조용히 자리에서 일어나 창가로 걸어갔다.
그런데 창문을 닫으려던 그의 시선이 저 멀리 높게 솟은 빌딩 옥상으로 향했다.
인간보다 월등히 뛰어난 시력은 작은 점처럼 보이는 누군가를 명확히 담아냈다.
어렴풋이 기척을 느끼긴 했지만, 역시나.
‘…….’
예상이 맞았다.
자연스럽게 시선을 내려 로미를 찾았다.
보이진 않지만, 기운이 감지되는 걸로 봐선 이곳에서 멀지 않은 근처에 있는 것 같았다.
산의 시선이 다시 빌딩을 향했다.
로미가 알아채지 못한 걸 보니 상급 몽마가 분명했다.
검은 로브를 뒤집어쓰고 있어 정체를 알 수는 없었지만, 느껴지는 기운을 보니 로미가 섣불리 덤빌 상대가 아니었다.
아마 그랬다면 목숨을 장담할 수 없었을 것이다.
모른 척 조용히 창문을 닫으려던 그때였다.
하얗고 가느다란 팔이 허리를 파고들며 뒤에서 그를 끌어안았다.
강이었다.
“무슨…….”
고개를 돌리려는데, 그녀가 천천히 그의 등에 얼굴을 기댔다.
그러고는 몸을 밀착해 오며, 조금 더 틈 없이 산을 끌어안았다.
“고마워.”
강은 늘 그랬듯 자신의 가장 진솔한 마음을 전달했다.
“뭐가?”
산이 되묻자, 그녀가 다시 말다.
“그냥. 전부 다.”
“…….”
“너 아니었으면, 나는 여전히 매일 고통 속에서만 살았을 거야.”
돌아본 자신의 삶은 풀 한 포기 자라지 않는 메마른 사막 같았다.
제게 주어진 작은 것에 감사하고 싶어도, 최소한의 것조차 누리고 살 수 없었기에 그러지 못했다.
계절이 바뀔 때마다 다채롭게 물드는 풍경도 제게는 늘 무채색이었고, 산해진미를 먹어도 아무 맛도 느낄 수가 없었다.
자신의 탄생은 어머니의 고통이었고, 원망도, 슬픔도 향할 곳이 없어 늘 가슴속에 맺히곤 했다.
언젠가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 결혼을 하고, 자식을 낳고, 온전한 가정을 이루는 꿈은 오히려 망상에 가까웠던 게 현실이었다.
하지만 산의 존재로 인해 희망을 품을 수 있게 됐다.
이제 막 세상을 알기 시작한 아이처럼, 텅 비어 있던 가슴은 하고 싶은 일들로 점점 채워지기 시작했다.
어둠뿐이던 삶에 빛이 들기 시작한 것이다.
그리고 그는 자신에게 여기서 만족하지 말라고, 진짜 네가 원하던 행복을 찾을 때까지 바라고 또 바라라고 용기를 북돋아 주었다.
그러니 고맙다는 말로는 부족했다.
가만히 이야기를 듣던 산은 천천히 창문을 닫고, 커튼을 쳤다.
그러고는 뒤를 돌았다.
그녀는 자연스럽게 거리를 벌리며 멀어졌지만, 이내 자신의 어깨를 당겨 안은 힘에 도로 그의 품에 갇히게 되었다.
“……산아?”
백허그에 돌아온 보답치고는 너무 뜨거운 포옹이라 살짝 당황스러웠다.
하지만 산은 어떤 대답도 하지 않은 채 그저 강을 꽉 끌어안고, 그녀의 머리카락에 입술을 묻었다.
그러고는 허공에 어정쩡하게 떠 있는 그녀의 손을 직접 잡아 제 허리를 감싸게 했다.
자연스럽게 몸이 맞붙었다.
조금의 틈도 없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