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52. 천인(天人) (52/118)


#52. 천인(天人)
2022.10.27.



 


“이게 뭐지? 껌은 아닌 것 같은데.”

혹시나 신휘의 매니저라도 있을까 싶어 주변을 둘러보았지만, 아무도 보이질 않았다.

그래서 그가 앉아 있던 의자 위에 올려놓으려고 했다.

그런데 그마저도 쉽지 않았다.


“실례합니다. 동선 때문에, 자리 정리 좀 할게요.”

“아, 네.”

불쑥 등장한 스태프의 등장에 그녀가 한 걸음 물러났다.

의자가 사라져버린 자리에 남겨진 강은 들고 있던 통을 주머니 속에 집어넣었다.

그가 돌아오면 직접 돌려줘야겠다고 생각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신휘가 돌아왔다.

강과 시선이 마주친 그가 습관처럼 입꼬리를 올리고 눈매를 휘며 웃었다.

타인의 시선이 닿으면 자동으로 웃음 버튼이 눌리는 사람처럼.


“선배님.”

반갑게 저를 부르며 다가온 신휘에게 강이 주머니 속에 넣어둔 것을 꺼내 내밀었다.


“이거. 신휘 씨 거 맞죠?”

“어? 이게 왜 선배님한테 있어요?”

“바닥에 떨어졌는데, 모르고 그냥 가길래 챙겨뒀어요.”

“아…… 그랬구나. 감사합니다.”

어색하게 웃던 그가 그것을 받아들었다.

그러고는 내용물을 확인이라도 시켜주듯 병을 흔들어 보였다.

달그락달그락 소리가 났다.


“초콜릿인데, 하나 드실래요?”

“좋아요.”

“어…….”

흔쾌히 손바닥을 내미는 그녀를 보며 신휘가 고장 난 로봇처럼 움직임을 멈추었다.

당황하는 표정을 보니 딱 ‘어라, 이게 아닌데.’ 하는 표정이었다.

아마 거절이 돌아올 줄 알았던 모양이다.

멋쩍게 콧등을 긁던 그는 이내 사실을 고백하며 사과했다.


“죄송해요. 사실 초콜릿이 아니라, 수면제예요.”

“불면증 있어요?”

“원래 그러지 않았는데…….”

말끝을 늘이던 신휘가 조심스럽게 말을 이었다.


“요즘 잠만 들었다 하면 꿈자리가 사나워서요.”

며칠 내내 그러다 보니 수면 패턴이 엉망이 되어버려서 약을 먹는다고.

그 말에 강은 가슴이 철렁했다.

과거에 그녀의 곁에 있던 사람들이 비슷한 이유로 불행을 겪다 하나둘씩 자신을 떠났던 게 떠올랐기 때문이다.

이별은 언제나 큰 고통이었지만, 더 힘든 건 그들에게 느껴야 했던 죄책감의 무게였다.

그래서 선뜻 말을 잇지 못했다.

고개를 들어 신휘를 보는데, 턱 아래에 아까는 보지 못했던 희미한 멍 자국이 보였다.


“여기는 어쩌다 그랬어요?”

“네? 어디…… 아, 이거.”

그가 당황하며 턱 아래를 몇 번 문질렀다.

메이크업으로 커버한다고 한 모양인데, 다 가려지지 않은 걸 보니 제법 큰 상처 같았다.


“진아 씨.”

신휘가 손을 들어 부르자, 근처에 있던 메이크업 아티스트가 다가왔다.


“여기 커버 조금만 더 해줄래요?”

“앗, 네. 가린다고 가렸는데, 그새 좀 지워졌나 봐요.”

그녀가 허둥지둥 퍼프를 들고 와선 바쁘게 그의 얼굴을 두드려댔다.

메이크업을 고치는 동안 바닥만 보고 있던 신휘는 여전히 자리를 지키고 서 있는 강을 흘끔 바라보았다.

그러다 시선이 딱 마주쳤다.


“술 먹고, 넘어졌어요…….”

마지못해 진상을 고한 그가 민망한 듯 웃었다.

강은 그저 조용히 그를 따라 웃을 수밖에 없었다.

제 곁에 머물다 떠난 많은 이들이 이런 일을 겪곤 했다.

갑자기 꿈자리가 사나워진다거나, 신변에 문제가 생기거나.

산은 이 모든 것들이 그녀의 불행을 계획하는 몽마의 짓이라고 했다.

그녀로 인해 주변인들을 떠나게 만들고, 그로 인해 강을 심리적으로 더욱 압박하기 위함이라고.

그런 일들이 여전히 계속되고 있는 걸까?

혹시나 신휘가 겪고 있는 일들이 자신이 원인이 된 건 아닐까 하는 생각에 걱정스러웠다.


“선배님?”

“아, 네.”

“어디 불편하세요? 안색이 안 좋으신데.”

신휘의 말에 그녀가 황급히 고개를 저었다.


“아무것도 아니에요.”

그러고는 저도 모르게 좁히고 있던 미간을 폈다.

때마침 조연출이 외쳤다.


“5분 후에 촬영 들어가겠습니다!”

일에 방해되는 상념은 빨리 지워버리는 게 답이었지만, 소란한 마음은 쉬이 사그라지질 않았다.

타인의 불행이 자신 때문이라면 마냥 덮어놓을 수 없는 문제였기 때문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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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외촬영을 마치고, 뒤늦게 A팀에 합류한 로미가 귀신같이 신휘의 상처를 알아보곤 물었다.


“너 턱 왜 그래? 기어이 어디서 한 대 얻어터진 거야?”

“응. 못난이는 오빠한테 관심 좀 끄자.”

“이게 누구보고 못난이래?!”

방방 뛰며 달려드는 그녀의 조그만 머리통을 가볍게 밀어내며 그가 말했다.


“넌 약속도 없냐? 네 촬영 끝났으면 집에 가서 발 닦고 잠이나 잘 것이지, 여긴 왜 기웃거려?”

“누가 너 보러 온 줄 알아? 나 강이 선배님 보러 온 거거든?”

“그럼 조용히 있어. 촬영 방해하지 말고.”

둘은 여전히 투닥거렸다.

멀리서 그 모습을 보고 있는데, 반이 다가와 말했다.


“저 둘은 만나기만 하면 싸우네.”

하지만 그 모습이 마냥 귀엽게 보였는지, 꼭 어린 조카들이라도 보는 듯한 표정이었다.


“꼭 주인한테 덤비는 하룻강아지 같아.”

하룻강아지라는 그의 표현이 재미있어 그녀가 조금 웃었다.

로미의 정체가 하룻강아지 수준이 아닌 커다란 늑대라는 걸 알면, 어떤 반응을 보일지 궁금하기도 했다.

그런데 반이 넌지시 덧붙였다.


“그래도 저편이 훨씬 좋아 보인다.”

“그게 무슨 말이야?”

“리딩 때 저 친구 보고, 나중에 기회 닿으면 꼭 한번 같이 일해보고 싶다고 생각했거든. 그래서 SNS 한번 찾아봤었어.”

“…….”

“근데 거기서 느낀 게 뭐랄까. 왠지 좀…… 위태로워 보였달까?”

위태로워 보인다니?

반은 조금 조심스러워하면서도 자신이 느낀 것들을 덤덤히 이야기했다.


“우울증 있는 거 같더라고.”

“왜 그렇게 느꼈는데? SNS에 뭐 이상한 말이라도 적혀 있었어?”

“글이야 뭐 해석하기 나름이긴 한데, 그냥 풍기는 느낌이 그래. 저 웃는 얼굴 뒤로 엄청난 우울감이 있을 것 같은 그런 느낌.”

“…….”

“꼭 예전에 너 보는 것 같더라.”

무심코 흘러나온 그의 말이 그녀의 가슴에 박혔다.

강은 악몽에 시달려 수면 시간이 부족하다던 신휘의 말을 떠올렸다.

꽤 묵직했던 약병의 무게도.

수면제를 한꺼번에 저렇게 처방해줬을 리는 없고, 아마 몇 군데서 처방을 받아 꽤 오랫동안 모아온 것일 테다.

반은 곧 아무렇지 않게 이제껏 찍어온 강의 사진들을 보여주었다.


“사진 한번 볼래?”

“아, 응.”

“어때?”

“……내가 일할 때 이런 얼굴을 하고 있어?”

“응. 너 집중할 때 입술 깨무는 버릇 있거든.”

“그렇구나. 몰랐어.”

나름 성실히 대답은 하고 있었지만, 사실 사진에 대한 감흥은 금세 사그라져버렸다.

그녀의 신경이 이미 다른 곳으로 쏠려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후에 반이 한 말들은 귀에 잘 들어오지 않았다.

고개를 든 강이 대본을 훑고 있는 신휘를 흘끔 바라보았다.

피곤한 탓인지는 몰라도, 눈가가 퀭한 것 같기도 하고, 동공이 빛을 잃은 채 텅 비어 있는 것 같기도 한 느낌이다.

그녀는 그런 그의 모습에서 지난날 자신의 모습을 투영했다.

예전의 저를 보는 것 같다는 반의 말 때문이었을까?

양신휘가 부쩍 신경 쓰이기 시작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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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날 밤.

강은 산과 나란히 소파에 앉아 촬영장에서 있었던 일에 대해 이야기했다.


“이반이 그랬다고?”

“응. 뭔가 풍기는 느낌이 꼭 예전의 나를 보는 것 같대.”

“그래서 신경 쓰여?”

“아무래도 그렇지. 악몽에 시달리는 게 얼마나 괴로운 일인지 잘 아니까. 그리고 그게 나 때문이라면 뭐…… 말할 것도 없고.”

그녀의 말에 그가 작게 탄식했다.


“하여간 도움이 안 되는 인간이군.”

사진을 찍으러 왔으면 일이나 할 것이지, 괜히 사람 마음을 들쑤셔 놓고 가는 꼴이 영 마음에 안 들었다.

이럴 줄 알았으면, 그때 병원 신세 좀 지도록 내버려둘 것을.

바에서 습격당하던 그를 도와주는 게 아니었다.

하지만 강은 산이 대놓고 반을 씹어대도 별다른 반응이 없었다.

뭔가 생각이 많은 모양이다.

그런 그녀의 모습을 보고 있자니, 그도 마음이 좋지 않았다.

강에게 직접적으로 일어나는 불행은 어느 정도 막아줄 수 있었지만, 그녀의 주변 인물들로 인해 강이 감정적으로 겪어야 하는 고통은 자신이 어떻게 해줄 수 있는 부분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러다 문득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 제 모습이 우습다고 느꼈다.

애초에 그녀에게 자신의 정체를 밝히지 않으려 했던 이유가 변질해버렸다는 걸 깨달았기 때문이다.

산이 막으려던 건 강의 죽음이었다.

그녀의 몸 안에 있는 부모의 혼이 온전한 에너지원이 되기 위해서는 시간을 벌어야 했고, 그때까지 질 좋은 악몽을 독식하려면 그녀의 생존은 반드시 보장되어야 했기 때문이다.

경호원을 택한 것도 그래서였다.

정체를 숨긴 채 접근해 목적을 이루기에 그만한 직업이 없었으니까.

제게는 강의 불행을 막을 이유가 전혀 없었다.

그녀가 죽지 않을 만큼의 불행을 겪는 일은 오히려 악몽의 질을 높이는 일이었으니 말이다.


“……하.”

들릴 듯, 말 듯한 한숨이 샜다.

당연히 바라선 안 되는 일에 자꾸만 그럴듯한 이유를 가져다 대는 자신을 저조차 이해할 수 없었다.

공기가 무거웠다.

강은 여전히 상념에 잠겨 있었고, 산은 이만 잡념을 털어내며 일어섰다.


“어디 가?”

그제야 멍하니 넋을 놓고 있던 그녀가 물었다.


“창문 닫으려고.”

“좀 후덥지근하지? 에어컨 틀까?”

“그게 낫겠다.”

발코니 밖으로 나간 그의 시선이 저 멀리 어딘가를 향했다.

어젯밤.

멀찌감치서 이곳을 지켜보던 놈은 오늘 그곳에 없었다.

하지만 어디서 기척을 숨긴 채 강을 노리고 있을지 모를 일이다.

산이 그런 것처럼, 녀석도 자신의 정체를 드러낼 생각이 없다는 뜻이었다.

놈은 꽤 신중한 타입 같았다.

자신과 강이 함께 있는 장면을 보면서, 관계를 유추하려는 동시에 자신의 정체가 평범한 인간이 맞는지에 대해서도 주의 깊게 살피고 있는 것 같았다.

아마 그는 높은 확률로 이미 강의 측근에 자리하고 있을 가능성이 컸다.

최근에 나타난 인물일 수도 있고, 어쩌면 아주 오랫동안 그녀의 곁에 머무르며 평범한 인간인 척 살아온 놈일 수도 있겠지.

강의 삶에 아주 밀접해 있던 사파로만 봐도 그랬다.

그가 그녀의 모든 주변인에게 경계를 늦추지 않는 이유였다.

하늘을 밝힌 달이 기울었다.

언제 공격해올지 모를 것을 대비해 자신도 슬슬 마음의 준비를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아무것도 모르고 있을 강이 너무 오래 두려움에 떨지 않도록.

산은 난간에 팔을 얹은 채 천천히 로미의 흔적을 찾았다.

미지근한 열기를 품은 바람을 통해 근처에 있던 그녀가 신호를 보내왔다.

다행히 아직까진 아무 일이 없는 것 같았다.

주변을 정찰하는 일은 강의 신변 보호를 위해 그가 직접 명령한 일이었지만, 오늘 밤도 조용히 넘어갈 거란 보장은 없었다.

언제 기습이 닥쳐와도 전혀 이상할 게 없는 밤이었다.

그런 생각을 하며 돌아서는데, 순간 그의 걸음이 우뚝 멈추었다.

고개를 돌린 그의 동공이 붉고, 푸른 빛을 띠며 바짝 조여들었다.

시야에 섬광이 번쩍였다.

하늘에서 벼락이 떨어져 내린 듯한 금색의 빛이 어둠을 가르며 천지를 울렸고, 그것은 곧 강렬한 기운을 내뿜으며 땅에 정착했다.

몽마는 아니었다.


“……이건.”

천인의 기운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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