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3. 설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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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3. 설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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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3. 설성
2022.10.30.
벼락처럼 내리꽂히던 금빛 섬광이 금세 사라졌다.
하지만 저렇게 화려하게 등장한 걸 보니 정체를 숨길 생각이 아예 없는 것 같았다.
이렇게 대놓고 자신의 등장을 알린다는 건, 타깃이 된 몽마에게 선전포고를 하는 거나 마찬가지였다.
누굴까?
‘……내가 아는 얼굴이려나.’
열여섯에 보았던 몇몇 천인들의 얼굴을 떠올린 산이 조금 웃었다.
그리고 이 모든 광경은 당연히 인간인 강의 눈에는 보이지도, 느껴지지도 않는 것들이었다.
못 박힌 듯 자리를 지킨 채 서 있는 산을 보며 강이 다가와 물었다.
“왜 그래?”
“…….”
그는 한동안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고, 조용히 천인의 흔적을 쫓았다.
하지만 기척이 곧 귀신같이 사라져버리고 말았다.
천천히 고개를 돌린 산이 그녀에게 말했다.
“방금 하늘에서 천인이 내려왔어.”
눈이 동그래진 채 저를 바라보는 강을 향해 그가 부드럽게 웃었다.
“아마 널 보호하려고 온 걸 거야.”
“……나를 보호하러 왔다고?”
“몽마들이 인간을 살상하는 걸 막는 것도 천인의 일이니까.”
궁극적으로는 강의 몸 안에서 융합 중인 이일리와 모아의 혼을 지키기 위해 내려왔을 것이다.
몽마의 왕이었던 자와 천계의 수장이었던 자의 영혼 결합.
금기를 깨고 서로를 사랑했던 그들이 물리적 죽음을 불사하고도 이뤄낼 기적.
그것은 불사의 힘을 가진 에너지원이 될 것이므로.
몽마와 천인은 서로 그것을 차지하기 위해 싸우는 중이고, 양쪽이 이렇게까지 존재감을 드러내기 시작했다는 건 융합 중인 혼의 조각이 완전해질 날이 가까워졌다는 뜻이었다.
그리고 그건 놈들이 시도 때도 없이 강을 노릴 일이 늘어날 거라는 뜻이기도 했다.
산은 어떻게 해야 사파로의 정체를 숨기고, 그간의 이야기를 할 수 있을까 잠시 고민하다 다시 입을 열었다.
“얼마 전에 네 몸에 꿈의 문을 새겼던 놈을 찾았어.”
그 말에 강의 눈빛이 크게 흔들렸다.
“……그게 누구였는데?”
떨림이 선연한 목소리에 산이 담담히 거짓을 고했다.
“너랑은 전혀 관계없던 놈이야.”
“…….”
“잠들어 있던 네 몸에 꿈의 문을 새기고, 악몽이나 야금야금 주워 먹던 놈이었거든.”
감영희가 사파로였다는 사실만큼은 강이 죽을 때까지 모르게 할 셈이다.
그러니 놈의 정체를 숨기기 위한 거짓말 정도는 눈 하나 깜빡이지 않고도 태연히 할 수 있었다.
예상대로 그녀는 안심한 듯 작게 숨을 뱉었다.
아마 자신의 측근이 아니었다는 사실에 안도하는 거겠지.
살며시 입꼬리를 올렸다 내린 그가 조용히 말을 이어갔다.
“어쨌든 죽은 그놈을 대체할 놈이 나타난 것 같아.”
“…….”
“지금 내려온 천인은 아마 그놈을 대적하기 위해 온 걸 테고.”
그리고 저 정도로 강한 기운을 가진 천인이 내려왔다는 건, 상대도 그에 상응하는 힘을 가졌을 가능성이 컸다.
가만히 이야기를 듣던 강이 물었다.
“그럼 천인은.”
“…….”
“아군이야, 적군이야?”
그녀의 질문에 그가 고민할 것도 없다는 듯 대답했다.
“너한테는 아군이지. 널 죽이려는 세력들로부터 널 지켜주는 존재들이니까.”
그런데 강은 고개를 저으며 재차 질문을 던졌다.
“나는 저 존재들이 너에게 아군인지, 적군인지를 묻는 거야.”
“……?”
“몽마나 천인이나 네 존재를 인정해주지 않은 건 똑같잖아. 나는 저들이 절대 선(善)이라고 생각 안 해.”
그 말에 산이 고개를 살짝 기울이며 그녀를 바라보았다.
동정인가?
어느 곳에도 속하지 못하고 떠돌다 목숨을 걸고 널 만나러 온 내가 가여워서?
마치 편이라도 들어주려는 것 같은 반응에 그가 궁금해서 되물었다.
“그게 중요해?”
“당연히 중요하지.”
“왜?”
“왜라니? 그들이 널 타깃으로 삼기라도 하면…….”
다소 흥분한 듯 말이 빨라지던 강이 우뚝 말을 멈추었다.
그녀를 빤히 바라보고 있던 산의 시선이 강의 붉어진 귓불로 향했다.
“삼기라도 하면, 뭐.”
“그러면…….”
“그러면?”
느긋하게 압박해오는 그의 시선을 피해 잠시 침묵하던 그녀가 다시 말을 이었다.
“네가 없는 난 다시 악몽을 꿔야 할 테니까.”
“…….”
“천인들이 내 목숨을 지켜줄 순 있을지 모르지만, 악몽을 먹어 없앨 순 없잖아.”
빠르게 평온을 되찾은 강이 눈을 똑바로 마주 보며 말했다.
그걸 본 산이 피식 웃었다.
“아, 그런 거였어? 난 또 뭐라고.”
“…….”
“하마터면 어마어마한 착각을 할 뻔했네.”
전혀 타격 없는 얼굴로 웃는 그를 슬쩍 흘겨본 강이 중얼거렸다.
“뭘 기대한 거야?”
“그러게. 내가 서강한테 뭘 기대한 걸까.”
그렇게 답한 산이 그녀의 뺨을 가볍게 꼬집으며 말했다.
“어쨌든 그런 거라면 걱정 마. 적어도 천인들한테 목숨을 위협받을 정도로 미움받고 있진 않으니까.”
그것도 곧 자신의 선택에 따라 달라지겠지만.
뒷말을 삼킨 산이 쥐고 있던 강의 보드라운 뺨을 조금 세게 잡아당겼다.
“아……! 뭐 하는 거야?”
순식간에 웃음을 지운 그가 답했다.
“벌이야.”
“무슨 벌!”
“솔직하지 못한 벌.”
“내가 뭘 솔직하지 못했다고 그래?”
“진심이었으면, 더 나쁘고.”
미간을 좁힌 산이 양쪽 뺨을 잡으려 들자, 그녀가 얼른 그의 손목을 붙들었다.
“알았어! 알았으니까 말로 해. 아파!”
“이참에 조금 솔직해지는 게 어때?”
“…….”
“내가 사라지는 게, 슬플 것 같다고.”
“…….”
“못 살 정도는 아니지만, 한동안 내 빈자리가 그립고, 많이 생각날 거라고.”
장난처럼 물어왔지만, 그렇게 묻는 산의 표정만큼은 장난 같지 않았다.
강은 여전히 한쪽 뺨이 붙들린 채 그를 바라보았다.
차마 전하지 못한 말들이 서로의 눈 안에 담겨 있는 것만 같은 착각이 들었다.
우리는 서로가 너무도 필요하고, 고마운데.
하지만 그게 다가 아닌데.
우리는,
“…….”
“…….”
무엇을 전하지 못하고 있는 걸까.
상황이 급변하기 시작했다는 건 피부로 느낄 수 있었다.
산이 애써 좋게 말하고는 있었지만, 자칫 저를 노리는 몽마의 손에 죽을 수도 있을 날이 가까워졌다는 걸 모르지 않았다.
끝이 다가온 느낌인데, 어쩐 일인지 그에게 전하고 싶은 진심은 늘 반밖에 꺼내놓지 못하는 기분이었다.
밤이라 감성적이 된 걸까?
이유를 알 수 없는 슬픔이 불현듯 가슴에 맺히는 것 같은 이 기분도, 그저 자고 일어나면 낯간지러워질 그런 감성일까?
강은 그런 생각을 하며 잡고 있던 그의 손목을 잡아 내렸다.
그러고는 제법 얼얼한 뺨을 문지르며, 일부러 다른 말을 꺼냈다.
“날 보호해주러 온 천인까지 나타났으니까, 당분간은 마음 놓고 있어도 된다는 거지?”
“아마도.”
“그래. 밖에 로미도 있으니까.”
“로미를 믿어?”
“내 눈으로 봤거든. 힘센 거.”
원석을 들쳐 매던 모습이 아직도 눈에 선하다는 그녀의 말에 산도 웃음으로 수긍했다.
아마 지금 나타난 천인과 사파로를 대신하려는 몽마의 실력이 비슷하다면 충분히 마음 놓을 수 있는 일이었다.
천인과 수인 둘이 붙어 편을 먹는다면, 어지간한 몽마 하나 정도는 거뜬히 상대할 수 있을 테니까.
산이 발코니 창문을 닫으며 돌아섰다.
.
.
.
한편.
강렬했던 천인의 기운을 감지한 건 로미도 마찬가지였다.
눈앞에서 폭죽이 터진 것만 같은 기분에 시야가 새하얬고, 머리가 빙빙 돌았다.
“으아! 눈뽕 맞았다! 빙글빙글 돈다!”
어벙벙한 표정으로 눈을 끔뻑이던 그녀의 곁으로 낯선 목소리가 들려왔다.
“안녕, 멍멍아.”
발소리도 내지 않고 다가온 천인의 등장에 놀란 로미가 펄쩍 뛰었다.
“으악! 깜짝이야!”
“어머나, 미안해. 놀랐니?”
놀랐다.
그냥 놀란 것도 아니고 심장이 바닥까지 떨어졌다가 올라온 기분이었다.
로미의 커다래진 눈이 제 앞에 선 낯선 여자에게 향했다.
짧은 앞머리를 한 여자는 긴 검은 생머리를 반으로 나눠 동그랗게 올려 묶은 머리에 멋진 비녀를 꽂은 채, 빨간 뿔테 안경을 쓰고 있었고, 붉은 매화가 수놓아진 도포 자락을 걸치고 있었다.
그런데 도포 안에 걸친 하얀 제복 스타일의 슈트가 무척 눈에 익었다.
미간에 힘을 준 로미가 영안(靈眼)을 열었다. 그러고는 제 앞에 선 낯선 여자의 기를 읽었다.
그녀의 온몸에서 금빛 기운이 후광처럼 쏟아져나오고 있었다.
역시나!
“당신…… 천인이군요!”
예상이 맞았다.
의지를 배반한 꼬리가 헬리콥터의 프로펠러처럼 마구 돌아갔다.
격하게 저를 반겨주는 로미를 본 천인이 싱긋 웃으며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어주었다.
“그래, 맞아. 나는 설성이라고 해.”
“설성……?”
분명 들어본 적이 있는 이름인 것 같은데, 정확히 기억이 나질 않는다.
“혹시 수장이신가요?”
로미가 묻자, 설성이 고개를 끄덕였다.
“응. 난 화국(華國)의 수장이야.”
그녀의 정체가 밝혀지자, 로미의 눈이 커다래졌다.
“화국의…… 수장이시라고요?”
“응.”
“아, 그렇구나.”
“왜 그래?”
설성이 되묻자, 머뭇거리던 로미가 말을 이었다.
“화국의 전(前) 수장이었던 모아 님이 떠나시고, 그 자리가 공석으로 오래 비어 있었다고 들었어요. 그런데 새로운 수장을 뵙게 되니 감회가 새로워서…….”
“모아 님을 아니?”
“네. 저도 우국(雨國) 출신이라 천계에 관한 소식은 익히 들어왔거든요. 인간 세상에 온 지 그렇게 오래되지 않았어요.”
“그렇구나.”
그녀가 온화하게 웃어주었다.
“나는 원래 설국(雪國)의 부수장이었어. 화국의 수장이 된 지 그리 오래되지 않았지.”
“아. 설국의 부수장님이셨군요! 어쩐지 기백이 남다르시다고 생각했어요!”
천상의 5국인 화국(華國), 설국(雪國), 우국(雨國), 일국(日國), 월국(月國)은 각각 인간의 생사와 관련된 일을 도맡는데, 그중에서도 설국은 인간의 꿈을 관장하는 곳이었다.
인간이 꾸는 길몽, 흉몽, 예지몽, 태몽 등이 설국의 천인들이 주관하는 것들이었고, 전쟁 시에 설국의 천인들은 전투를 위한 토벌대로 구성된다.
그만큼 전면으로 나서는 싸움에 특화된 천인들이 많아, 전투 기술이 뛰어난 엘리트들의 집합소라고도 불리었다.
눈을 반짝반짝 빛내며 저를 우러러보는 로미의 시선에 설성이 가볍게 손을 저었다.
“그것도 옛날 말이지. 말했듯이 나는 이제 화국천인이니까.”
“실력이 좋으시니, 차출되신 거죠!”
“어머나. 몸 둘 바를 모르겠는걸?”
그녀가 입을 가리며 우아하게 웃었다.
애교 많은 강아지처럼 설성의 주변을 한 바퀴 빙글 돈 로미가 다시 물었다.
“그런데요. 설성님.”
“응?”
“그렇게 기척을 마구 뿜어내셔도 돼요? 저는 하늘에서 벼락이 떨어진 줄 알았어요.”
대부분 인간 세상에 살아가는 천인들은 기척을 숨기기 마련이다.
비밀스러운 업무를 수행하러 내려온 경우에도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설성은 그 반대였다.
보란 듯이 영험한 기운을 내뿜으며 웃던 그녀는 빨간 뿔테 안경을 밀어 올리며 말했다.
“잠복근무보다는 전면전이 체질에 맞아서.”
“……일부러 알리신 걸까요?”
“시간 끌어서 좋을 것 없잖니.”
“아아. 그렇군요. 아마 주변에 몽마가 있었다면 단번에 알아챘을 거예요.”
“그럼. 진작 알아채고 이쪽을 노려보고 있는걸?”
“네에?!”
“어제부터 여기 있었는데, 몰랐어?”
“어, 어디요?”
당황한 로미가 정신없이 주변을 훑어보자, 설성이 서늘한 미소를 머금으며 손끝으로 어딘가를 가리켰다.
“저기.”
그녀가 가리키는 곳에 검은 로브를 뒤집어쓴 몽마 하나가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