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55. 둘만의 사인 (55/118)


#55. 둘만의 사인
2022.11.06.



“어떻게든 얼굴을 봐둘 걸 그랬어.”

“……왜?”

“마주치면 바로 죽여버리게.”

반쯤 장난이 섞인 듯한 말투였지만, 강은 그 안에 담긴 산의 분노를 어렴풋이나마 이해할 것 같았다.

그는 분명 천인이기도 하고, 동시에 몽마이기도 하다.

그런데 그의 뿌리는 그가 천인도 아니고, 몽마도 아니라고 주장했다.

태생적으로 타고나는 건 선택할 수 있는 게 아닌데, 존재만으로 누군가의 불편함이 된다는 건 가슴 아픈 일이었다.

바로 그녀가 그녀의 모친에게 그리되었던 것처럼.


“산아.”

아직 하려던 말이 정리된 것도 아닌데, 불쑥 이름을 불러버리고 말았다.

저를 부르는 목소리에 산이 시선을 내려 강을 바라보았다.


“…….”

“…….”

잠시 시선이 엉켰다.

나는 네게 어떤 위로를 건네야 좋을까?

그가 기운 낼 만한 말을 전해주고 싶은데, 어떤 말을 떠올려도 딱히 그럴 듯한 위로라는 생각이 들지 않는다.

침묵하던 그녀는 고민 끝에 거리를 좁혀 다가갔다.


“있잖아, 산아.”

다시 한번 이름을 부르니 그가 웃었다.


“왜 자꾸 불러. 무슨 말을 하려고.”

그녀는 부드러운 눈빛으로 시선을 맞추며 산을 따라 웃었다.

그러고는 서툴게나마 느린 위안을 건넸다.


“우리는 누구의 인정도 필요 없고, 누구도 우리를 판단할 권리가 없어.”

“당연한 거 아니야?”

산이 다 안다는 듯 대답했지만, 완전히 제 마음이 닿은 느낌은 아니었다.

사실은 그저 내가 잘못을 저질러서 받아야 하는 응당한 대가가 아닌 것들에 상처받지 말자는 말을 하고 싶었던 건데.

조금 더 멋지게 말을 할 수 있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그랬다면 굳은살처럼 배겨 버린 그의 아픔을 조금은 녹여줄 수 있었을 텐데 말이다.

그래서 그녀는 고민 끝에 얼마 전처럼 산의 손가락을 쥐었다.

그러고는 그의 손끝에 가볍게 입을 맞추었다.

저번에 한 번 너에 대한 나의 애정이라며 장난식으로 입을 맞추고 난 후, 꽤 마음에 드는 인사가 되어버린 탓이다.

때론 힘내라는 말보다, 가만히 안아주는 게 더 큰 위로가 되니까.

손끝에 입을 맞추는 행위는 전하는 사람도 자신의 진심을 가장 잘 전달할 수 있는 방법이었다.

적어도 제게는 그랬다.

그리고 산도 다행히 자신이 어떤 마음으로 이런 행동을 하는지 잘 헤아리는 것 같았다.

진심을 다한 위로를 건네는 중이라는 걸, 이 순간만큼은 누구보다 널 응원한다는 걸.

분명 네가 알 거라고 믿었다.


“내가…… 뭘 가르친 건지 모르겠네.”

 

 
살짝 굳었던 그가 애한테 이상한 걸 가르쳐버렸다며 웃었다.

따라 웃던 강이 물었다.


“위로가 좀 됐을까?”

“네 마음은 알겠어. 충분히.”

산이 어깨를 으쓱이며 답했다.

그렇게 둘만의 사인이 생겼다.

말로 전하기 힘들 때가 오면 오늘 같은 방법을 종종 써먹어야겠다고, 그녀는 생각했다.

강은 쥐고 있던 손가락을 만지작거리다 천천히 놓아주었다.

그러고는 다소 진지한 얼굴로 물었다.


“한국인이 제일 싫어하는 게 뭔지 알아?”

“뭔데.”

“첫 번째는 말을 하다 마는 것이고…….”

“…….”

침묵이 흐른다.


“뭐야. 왜 말을 하다 말아.”

산이 말하자, 강이 기다렸다는 듯 받아쳤다.


“말을 하다 만 건, 내가 아니라 너지.”

“?”

“계속해봐. 그래서 일국이랑 월국은 뭐 하는 곳이야?”

그녀가 팔짱을 끼며 눈을 날카롭게 빛냈다.

오늘은 말이 나온 김에 저쪽 너머의 세상에 관해 관심을 좀 가져볼 생각이었다.

그제야 강의 말장난을 이해한 산이 작게 웃으며, 다시 입을 열었다.


“일국은 인간의 탄생을, 월국은 인간의 죽음을 관장하는 곳이야.”

태어날 생명을 인간 세상에 내려보내기 위한 탄생을 준비하는 곳, 일국.

그리고 인간의 죽음을 관장하고, 죽은 이의 영혼을 상천계로 인도하는 곳이 바로 월국이었다.


“그럼 우국은?”

“우국은…….”

무슨 이유에선지 그가 길게 숨을 고른 뒤, 말을 이었다.


“우국은 인간의 모든 부정적인 감정을 관장하는 곳이야.”

슬픔, 분노, 우울, 괴로움, 고독 등 모든 인간의 부정적 감정을 다스리는 그곳은 단 한 순간도 비가 멈추지 않는 영지였다.

꽃도, 나무도, 흐르는 물과 숲도 온통 흑백으로 이루어진 무채색의 세상이기도 했다.

그곳은 어둡고 침울하여, 아름다움과는 거리가 먼 곳이었고, 비록 천인이 다스리고는 있었지만, 이계나 지하계와 맞물린 경계에 있어 각계의 혼종들이 드나드는 곳이었다.

한 마디로 매우 위험한 곳이었다.

하지만 아름답지 못하고, 위험한 땅은 오히려 쉽게 발길이 닿질 않아, 도망자들이 몸을 숨기기 좋은 곳이기도 했다.


“거기서 많은 혼종들이 태어나고, 자랐어.”

“…….”

“내가 태어났고, 로미가 태어난 것처럼.”

그의 말에 강이 놀라서 눈을 동그랗게 뜨며 물었다.


“……로미도 혼혈이야?”

“어머니가 인간이었어.”

로미 역시 수인인 아버지와 인간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난 혼혈이었다.

물론 최초는 아니었고, 유일하지도 않았다.

전례가 없던 몽마와 천인의 혼혈과는 달리, 아주 드물긴 했지만, 인간과 수인의 혼혈은 꾸준히 존재해왔기 때문이다.

하지만 성체까지 살아남는 건 1% 정도에 불과했다.

그만큼 우국에서 태어난 혼종들이 세상의 빛을 본 순간부터 목숨을 위협받으며 사는 건 필연적 운명이었다.

이야기를 듣는 강은 무척이나 마음이 아팠다.

로미나 산이 자신이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외롭고 힘겨운 삶을 살아왔을 거라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그런 그녀의 마음을 알 리 없는 산은 천천히 이야기를 이어나갔다.


“그리고 거기엔 석간(石間)이라고 불리는 감옥도 있어.”

죄를 짓거나 위험한 괴수들을 가두어 두는 곳으로, 우국의 수장은 그곳을 관리하는 역할을 동시에 수행해야 했다.

그 역할을 해낼 만큼 까다로운 조건이 요구되는 자리였지만, 인간 세상으로 따지자면 3D직종과도 다를 바 없어 많은 수장 후보들이 꺼리는 직책이었다.

그래서 한번 공석이 생기면 좀처럼 적임자가 나타나지 않는다고.

이야기를 듣는 강은 판타지 영화의 시나리오라도 듣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그래서 눈을 빛내며 귀를 쫑긋 세운 채 질문도 마다하지 않았다.


“지금은 누가 수장인데? 너도 본 적 있어?”

“천계에 끌려갔을 때 한번 봤었어.”

“그분이 우국의 수장인 건 어떻게 알았는데?”

“딱 봐도 험한 일 하게 생겼거든.”

스치며 지나가도 잊지 못할 비주얼을 떠올린 산이 어깨를 부르르 떨며, 질색했다.

못해도 190cm는 될 것 같은 장신에 깡마른 몸.

거뭇하게 푹 팬 눈가와 광대가 도드라진 해골형 얼굴.

긴 장발에 음침한 로브까지 쓰고 있던 그는 사신처럼 커다란 대낫을 들고 서 있었다.

……솔직히 말하면 천인보다는 악당에 가까운 비주얼이었다.


“몽마들 사이에서도 소문이 자자하다고 들었어. 인정머리라고는 눈곱만치도 없는 미치광이라고.”

“……캐릭터가 참 뚜렷하신 분이구나.”

영화 속 캐릭터가 머릿속에서 돌아다니는 것처럼 모습이 그려졌다.

키득 웃던 강이 말했다.


“기회 되면 나중에 한번 보고 싶다.”

“나는 기회가 백번 와도 보기 싫어.”

설국의 수장에 의해 천계에 끌려갔을 때, 가장 먼저 제게 사형을 외치던 작자가 그였다.


‘회의를 하고 말 것도 없습니다. 혼종은 죽여 없애는 게 답이지요.’

구석에 처박혀 있던 그가 음침하게 중얼거리고는 귀신처럼 웃던 장면이 머릿속에 생생했다.

별로 떠올리고 싶지 않은 장면이었다.


“밥맛 떨어진다. 다른 얘기 하자.”

산이 무표정한 얼굴로 던진 이야기에 강이 크게 웃었다.


“궁금한 건 더 없어?”

“음. 그냥 네가 아는 이야기를 조금 더 들려줘.”

그녀의 요청에 그는 우국에 관한 이야기를 조금 더 이어갔다.

온갖 괴수들이 출몰하는 그 땅은 영지를 이루는 모든 요소가 불안정해 무간(無間)으로 연결되는 지진이 일어나기도 한다고.


“무간은 뭔데?”

“종종 열리는 블랙홀 같은 건데, 한번 빨려 들어가면 아무도 살아나오지 못해.”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는 세계라 하여 무간(無間)이라 불리는 그곳은 지옥문과도 같은 곳이었다.

그리고 그곳은 로미를 만난 곳이기도 했다.

아주 오래전.

어린 로미가 석간에서 탈옥한 괴수를 피하다가 무간으로 떨어져 갇힐 뻔한 걸 산이 구해주면서부터 둘의 인연이 시작됐었으니까.

그날 밤.

둘은 천계에 대해 꽤 오랫동안 이야기를 나누었다.

날이 새는 줄도 모르고.

.
.
.

제인을 다시 만난 건, 모처럼 촬영이 일찍 끝난 저녁의 로비에서였다.

마침 생리대가 똑 떨어진 강이 편의점에 다녀오는 길이었다.

월경통 때문에 미간을 좁힌 채 구부정하게 서 있는데, 익숙한 목소리가 그녀를 불렀다.


“허니!”

돌아보니 제인이 손을 붕붕 흔들며 막 로비를 가로지르고 있었다.


“세상에! 잘 지냈어? 나 자기 완전 보고 싶었좌나!”

그녀는 변함없는 텐션으로 강을 끌어안으며, 격한 헐리우드식 인사를 건넸다.

여전히 적응 안 되는 하이 텐션이었지만, 강은 그래도 예전보다는 능숙하게 그녀의 에너지를 받아냈다.


“덕분에 잘 지냈어요. 제인도 잘 지냈어요?”

“나는 완전 잘 지냈지! 내가 누구야! 파워 요가 강사! 줴인이잖아?”

결혼까지 생각한 남자친구에게 차였다며 울고불고하던 게 엊그제 같은데, 다행히 마음 정리를 잘한 것 같았다.


“좋아 보여 다행이에요.”

“하하! 사람은 사람으로 잊는 법이니꽈!”

강이 건넨 말에 제인이 경쾌하게 답하며 윙크를 날렸다.


“혹시 애인 생겼어요?”

“아니, 애인은 아직 아니구우…….”

가볍게 던진 질문이었는데, 그녀는 몸까지 비비 꼬며 얼굴을 붉혔다.

제인의 그런 모습은 처음이라, 강이 저도 모르게 소리를 내어 웃었다.


“제인, 얼굴 빨개졌어요.”

“어, 리얼리? 아, 어떡해! 진짜 부끄럽좌나! 난 몰라!”

누구기에 저 씩씩한 제인이 저렇게 안달복달일까?

전에는 알지 못했던 그녀의 꽤 귀여운 면을 알게 됐다.

흐름상 누군진 몰라도 물어야 할 것만 같은 타이밍이었는데, 제인이 먼저 입을 열었다.


“있잖아, 허니.”

“네.”

“우리 친구지?”

난데없이 무슨 말일까?

뜬금없는 그녀의 물음에 강은 잠시 고민했지만,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아직 친해지는 단계긴 하지만……, 이 정도면 친구 맞죠.”

그 말에 제인의 얼굴에 엄청난 화색이 돌았다.

울먹거릴 만큼 기뻐하는 그녀의 모습에 그간 연락 한번 주지 못했던 게 조금 미안해질 지경이었다.


“아, 사실 제가 일부러 연락처를 안 드린 건 아니었는데, 일이 바빠서 잊고 지냈어요. 미안해요.”

“아니야! 아니야! 우리 허니는 탑스타잖아. 바쁠 수 있지. 충분히 그럴 수 있어.”

열심히 손을 내젓던 제인이 환하게 웃으며 말했다.

강은 세컨폰을 꺼내 그녀에게 내밀었다.


“죄송해요. 제가 사실 명함은 어디에 뒀는지 잊어버려서, 번호가 따로 저장되어 있지는 않아요.”

솔직히 털어놓은 말에 괜찮다고 손사래를 치던 제인이 얼른 제 번호를 입력하곤 통화버튼을 눌렀다.

기대감에 콧구멍을 벌렁이던 그녀는 쥐고 있던 휴대폰에서 벨이 울리자마자 기뻐서 껑충껑충 뛰었다.


“왔다! 왔어! 이거 자기 번호 맞지?”

“네, 맞아요.”

“고마워. 나 너무 행복해!”

방방 뛰며 강을 끌어안은 그녀가 강의 이름을 ‘Liver’라고 적은 뒤 하트를 붙여 저장했다.

그러고는 액정을 내밀며 굳이 확인까지 시켜주었다.


“어때? 애칭 마음에 들어?”

“네.”

그걸 본 강이 R을 L로 고쳐주었다.


“아. 리버가 아니고, 뤼버였구나. 마이 미스테이크. 히힛.”

호방한 그녀의 반응에 강이 웃으며 말했다.


“번호 너무 늦게 알려줘서, 미안해요.”

“아니야. 나는 그냥 자기랑 친구가 됐다는 거에 충분히 감사하고, 행복하거든.”

“…….”

“나를 응원해 주는 사람이 한 명 더 생긴 거잖아? 그치?”

“그럼요.”

아직 누군지는 모르지만, 그녀의 뉴페이스 썸남과의 사랑은 이미 마음속으로 응원하고 있었다.

그러자 그녀가 기다렸다는 듯 말을 이었다.


“나 사실 그것 때문에라도, 자기 빨리 만나고 싶었어.”

“……어떤 거요?”

“내 썸남…… 아니다, 아직 나 혼자 짝사랑이니까 짝남이라고 해야 맞지.”

연애 상담이라도 하려는 걸까?

그쪽은 별로 자신 없는데.

그렇게 생각한 강이 애써 입꼬리를 당겨 웃었다.


“아무튼 그 짝남이 사실 알게 된 지는 조금 됐거든? 근데 영 기회가 없어서 못 들이대고 있었지 뭐야. 전화번호도 모르고.”

“누군데 그래요?”

그녀가 묻자 제인이 강의 눈을 빤히 바라보았다.

그러더니 입꼬리를 씨익 올리며 고개를 기울였다.


“누군지 궁금해?”

고개를 끄덕이자, 그녀가 반대로 고개를 기울이며 다시 물었다.


“알려줄까?”

“네, 뭐. 사실 제가 들어도 아는 사람일 것 같진 않아서 의미가 있나 싶긴 하지만…….”

“자기 아는 사람 맞아.”

“네?”

“그 핫가이말이야.”

제인의 말에 순간 강의 얼굴이 굳었다.


“자기 경호원이라던.”

“…….”

“그 남자, 아직 자기 위층 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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