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6. 연애 가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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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6. 연애 가능
2022.11.10.
“누군데 그래요?”
“누군지 궁금해?”
분위기가 그렇게 흘러가서, 으레 물었을 뿐이다.
상대의 정체가 궁금했다기보단, 그녀의 이야기에 귀 기울이고 있다는 관심의 표현 정도.
그런데 제인은 그런 강의 반응에 아주 신이 난 듯한 얼굴이었다.
“알려줄까?”
눈을 빛내는 그녀를 보며 강이 고개를 끄덕였다.
“네, 뭐. 사실 제가 들어도 아는 사람일 것 같진 않아서 의미가 있나 싶긴 하지만…….”
“자기 아는 사람 맞아.”
“네?”
“그 핫가이말이야.”
“…….”
“자기 경호원이라던.”
그녀의 말에 순간 강의 얼굴이 굳었다.
“그 남자, 아직 자기 위층 살지?”
“…….”
“이름이 한산이랬나? 실장님 맞지? 한산 경호 실장님.”
세상에, 마운틴이라니! 이름까지 너무 멋지잖아!
제인이 두 손을 모아 얼굴 옆에 대며 흥분한 듯 떠들었다.
망치로 한 대 얻어맞은 듯한 충격 뒤로, 서서히 멈췄던 사고 회로가 돌아가기 시작했다.
그러니까 제인이 관심 있다는 남자가,
“처음 볼 때부터 끌렸는데, 아무리 봐도 내 스타일이야.”
……산이라는 얘기야?
예상치 못한 당혹감에 말문이 막힌 사이, 도착한 엘리베이터의 문이 열렸다.
“엘리베이터 왔다. 타자.”
제인이 싱긋 웃으며 석상처럼 굳어 있는 강의 등을 떠밀었다.
혼란에 빠진 그녀의 머릿속으로 갖가지 생각이 떠올랐다.
‘……소개해달라고 하면 어떡하지? 전화번호라도 물으면?’
그런데 당황스러운 일은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제인이 강이 사는 층의 버튼을 대신 누르고는, 당당히 산이 사는 층수의 버튼을 누른 것이다.
놀란 강이 그녀를 바라보았다.
“……지금 찾아가시게요?”
설마 하는 생각으로 던진 말에 제인이 호쾌하게 웃었다.
“쥐뿔도 단번에 당기라는 말이 있좌나.”
평소였다면 쇠뿔이라고 정정해줬겠지만, 지금 그런 걸 신경 쓸 여유는 없었다.
뭔가 이건 아니라는 생각에 말려야겠다는 생각부터 들었다.
하지만,
“그래도 갑자기 이렇게 연락도 없이 찾아가는 건-”
“노 프라블럼. 싫다고 하면 다시 내려오면 그만인데, 뭐.”
……씨알도 안 먹혔다.
강은 침착하게 생각을 정리한 뒤 제인을 설득했다.
“그러지 말고, 제가 한 실장님한테 먼저 여쭤보고, 괜찮다고 하면 그때 전화번호를 알려드리는 건 어떨까요?”
“내가 직접 물어보면 되는데, 뭐하러 일을 복잡하게 해? 빙 돌아가는 거, 내 스타일 아니야.”
“그래도-”
“그리고 나.”
“…….”
“실패한 적 한 번도 없어.”
빠진 목적어가 무엇일지에 대해 되묻기도 전에, 그녀가 곧장 말을 이었다.
“한밤중에 나처럼 끝내주는 여자가 제 발로 찾아왔는데, 마다하는 멍청이가 어디 있겠어.”
제인의 태도가 너무 당당해서 강의 당혹감은 배가 되었다.
이건 개방성의 문제가 아니었다.
남의 사생활에 훈수 두고 싶은 생각은 없었지만, 그녀가 저런 사고방식을 가지고 있는 상대가 산이라는 게 문제라면 문제였다.
강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제인 씨.”
“응?”
“마음에 드는 상대가 생기면 조금 더 진정성 있는 방법으로 다가가는 게 어때요? 그러다 제인도 상처받을 수 있잖아요.”
하지만 제인은 오히려 우스운 이야기라도 들었다는 듯한 표정이었다.
“Is it possible to see sincerity?”
과장된 몸짓으로 어깨를 으쓱인 그녀가 재차 확인하듯 되물었다.
“정말로? 자기 눈에는 그게 보여?”
“…….”
“진짜 그걸 볼 수 있다고 생각하는 궈야?”
그 말에 그만 말문이 막혀버렸다.
그리고 제인은 강이 건넨 조언을 비웃기라도 하듯 말을 이었다.
“마음보다 몸이 더 빨리 가까워지면 진정성이 없는 권가? 그게 순서가 정해져 있는 궈였어? 그런 건 누가 정하는 권데?”
“그런 건 아니지만, 그건 제인의 일방적인 입장이잖아요. 상대방은 아닐 수도 있어요.”
“아니면 뭐, 마는 궈지.”
어깨를 으쓱인 그녀의 폭탄 발언이 이어졌다.
“솔직히 한 실장님 정도면 하룻밤 상대로도 훌륭하니꽈.”
“!”
“자기는 보면서 그런 생각 안 해봤어? 이 남자가 낮일만큼 밤일도 잘하는지, 또 침대에서는 어떤 스타일일지…….”
“한 실장님은 그런 사람 아니에요!”
선을 넘는 노골적 발언을 더는 듣고 있을 수만은 없어진 강이 말을 잘랐다.
하지만 제인은 순진무구한 아이처럼 웃으며 말을 덧붙였다.
“그거야 두고 보면 알 거고.”
“…….”
“늙어서 썩어 문드러질 바디 뒀다가 뭐해? 젊고 탱탱할 때 열심히 즐겨야쥐.”
그러고는 조언까지 얹었다.
“자기도 좀 재미있게 살아.”
그렇게 말하는 그녀는 전혀 화를 내거나 비꼬는 태도가 아니었다.
그저 어제 먹은 메뉴가 무엇이고, 지난 주말에 본 영화가 어떤 거였는지에 관한 일상의 소소함이라도 나누는 듯한 태도였다.
강이 더 이상 말을 섞을 생각을 못 한 것도 그 때문이었다.
옳고, 그름을 떠나 자신과는 아예 가치관이 다른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어서.
그 사이, 엘리베이터가 강이 사는 층에 도착했다.
“오! 허니 집 도착했다. 잘 가.”
“아니, 잠깐만……!”
“작업 성공하면, 자기한테 제일 먼저 알려줄꿰.”
제인이 그녀의 등을 떠밀며 웃었다.
어쩔 틈도 없이 엘리베이터 밖으로 밀려 나와 버린 강을 보며 그녀가 윙크했다.
“행운을 빌어줘.”
닫히는 문틈 사이로 살랑살랑 손가락을 흔드는 제인의 모습이 보였다.
쿵-
엘리베이터의 문이 닫히는 소리와 함께 어쩐지 강의 심장도 철렁했다.
머릿속에선 제인이 폭탄처럼 던지고 간 말들만 빙빙 맴돌았다.
‘한밤중에 나처럼 끝내주는 여자가 제 발로 찾아왔는데, 마다하는 멍청이가 어디 있겠어.’
‘자기는 보면서 그런 생각 안 해봤어? 이 남자가 낮일만큼 밤일도 잘하는지, 또 침대에서는 어떤 스타일일지…….’
‘늙어서 썩어 문드러질 바디 뒀다가 뭐해? 젊고 탱탱할 때 열심히 즐겨야쥐.’
결혼까지 생각했던 남자친구와 헤어졌다고 울던 그녀의 모습이 아직도 선연했다.
그게 불과 얼마 전이었는데, 실연의 충격 때문에 막살기로 작정이라도 한 걸까?
아니면 원래 저런 성격이었나.
뭐가 진짜 제인의 모습인지, 아직 알 수는 없었지만, 확실한 건 결국 상처만 남을 만남이 될 거라는 거였다.
이불킥이나 안 하면 다행이게?
모든 걸 차치하더라도 일단 그녀가 점찍은 상대가,
“……한산은 인간이 아니란 말이야.”
연애를 할 수 있는 대상이 아니었다.
생각을 마친 강은 서둘러 집으로 향했다.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야. 산이한테 알려줘야 해.”
마음이 급해서 자꾸만 도어록을 누르는 손가락이 미끄러졌다.
삐비빅-
마침내 문이 열리고 현관으로 들어선 그녀는 불도 켜지지 않은 거실을 향해 냅다 산의 이름을 외쳐 불렀다.
“한산!”
전화 따위 할 겨를이 없었다.
“산아! 한산!”
달빛도 닿지 않는 어두운 거실 벽에서 긴 인영이 뻗어 나왔다.
기척을 느껴 고개를 돌려보니, 하반신에 수건 한 장만 달랑 두른 산이 물기를 뚝뚝 흘리며 서 있었다.
“악!”
놀란 그녀가 두 눈을 가리며 바닥에 주저앉았다.
빠르게 다가온 그가 무릎을 굽혀 강의 앞에 앉았다.
“무슨 일 있어?”
어지간해서는 그녀가 전화로 부른다는 걸 알기에, 산에게는 지금 자신이 반라든, 전라든 그게 중요한 게 아니었다.
그런데 강은 아닌 모양이었다.
“너 왜 홀딱 벗고 있는 건데! 왜 물 한 바가지 뒤집어쓴 비주얼인 건데!”
다른 게 눈에 들어올 정도로, 정신이 나가진 않은 것 같았다.
다행이라는 생각이 드는 것과 동시에 약간의 의아함이 밀려왔다.
빤히 그녀의 반응을 살피던 그는 이내 차분히 설명했다.
“샤워하는 중에 부른 건 너고.”
“!”
“나는 달려온 죄밖에 없어.”
그러고는 그녀의 손목을 잡아 내렸다.
청량한 보디워시 향이 불시에 콧속으로 훅 끼쳐 들었다.
“이제 말해봐.”
“…….”
“이렇게까지 다급하게 날 부른 이유가 뭔지.”
얼굴이 빨개진 강이 고개를 돌리며 말했다.
“아니…… 이, 일단 뭐라도 걸쳐, 좀!”
“집에 다녀오라고?”
“욕실에 샤워가운 있어! 그거라도 입어!”
아무 말이나 던지는 그녀의 반응에 그가 조용히 달랬다.
“강아.”
“…….”
“좀 진정해. 네 가운이 나한테 맞을 리가 없잖아.”
흥분을 좀 가라앉히라는 산의 말에 강은 뒤늦게 자신이 너무 호들갑을 피웠다고 생각했다.
열 오른 얼굴을 식히려 손부채질을 한 그녀가 숨을 한번 고르고는 그에게 말했다.
“아무튼 용건만 빨리 말할 테니까, 알고 있어.”
“그래, 듣고 있어.”
강은 최대한 그의 벗은 몸을 보지 않으려 애쓰며 입을 열었다.
“제인이 너한테 관심 있대.”
“……누구?”
“제인 말이야. 우리 아랫집 사는 제인.”
“그 도깨비 같은 여자가 나한테 무슨 관심?”
“여자가 남자한테 관심이 생겼다는데 뭐겠니?”
“…….”
산은 천천히 그녀가 하고 있는 말을 되짚었다.
그러다가 고개를 살짝 기울였다.
이토록 다급히 자신을 부른 이유가 고작 그런 것 때문이었다는 게 잘 이해가 가지 않아서였다.
그가 의아해한다는 걸 알았는지, 강이 다급히 말을 이었다.
“아무튼 나는 제인이 상처받는 것도 싫고!”
“무슨 상처.”
“인간이 아닌 네가 좋다잖아. 몽마가 어떻게 인간이랑 연애를 해?”
아.
내가 몽마인 게 문제였던 거야?
걔가 나한테 들이댄 게 문제가 아니라?
작게 실소를 뱉은 산이 뒤늦게 나지막이 답했다.
“몽마도 인간이랑 연애해.”
강의 눈이 동그래졌다.
제가 뭘 들었냐는 듯이.
“인간이랑 연애가 가능하다고?”
“연애가 별거야? 마음 맞는 남녀가 만나서 끌리는 대로 즐기면, 그게 연애지.”
결혼하자고 달려드는 것도 아닌데, 뭐가 문제냐며 그가 웃었다.
“너야말로 그게 왜 안 될 거라고 생각한 건데?”
“어, 그건…….”
“먹는 게 다를 뿐이야. 몽마도 인간이 하는 건 다 해.”
심지어 인간보다 더 인간 세상을 즐기는 몽마들도 많았다.
많은 몽마들이 특히 열광하는 게 대한민국의 밤 문화였고, 그들은 달콤한 악몽만큼 이성을 통해 얻는 쾌락을 즐겼다.
그런데 왜 연애는 못 할 거라는 생각부터 했냐는 듯, 이해가 안 되는 표정이었다.
순간 머리가 멍해졌다.
생각지도 못한 깨달음을 얻은 그녀가 다시 산을 바라보았다.
그러고는 머뭇거리다 물었다.
“그럼…… 너도 연애해봤어?”
“그럼 이 나이 먹고 내가 연애도 안 해봤을까 봐?”
“몽마 말고, 인간이랑?”
“그래. 인간이랑.”
“어디까지 가능한데……?”
의식의 흐름대로 튀어나와 버린 질문에 산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황당하다는 듯 웃던 그가 대답했다.
“어디까지 대답해야 하는데?”
“아. 미안. 내가 너무 나갔다…….”
자책하는 그녀를 가만히 바라보던 산이 되물었다.
“너는 여태 나를 뭐라고 생각한 거야?”
“그야, 당연히…… 몽마지.”
“남자기도 해.”
당연한 사실을 말했을 뿐인데, 강은 환상 속 유니콘 얘기라도 듣는 듯한 표정이었다.
“그럼 넌 몽마들이 자웅동체거나, 플라토닉이라도 하는 줄 알았어?”
“그, 그럼 몽마도…….”
“해. 네가 지금 상상하는 이런 거, 저런 거, 그런 거 다 해.”
“…….”
“안 그랬으면 내가 태어났겠어? 우리 부모님도 둘 다 인간이 아닌데?”
“알았으니까, 그만.”
거기까진 상상하고 싶지 않았다.
귀까지 빨개진 강이 산의 입을 두 손으로 틀어막았다.
“그래서 무슨 말을 하려고 불렀던 건데? 그 여자가 나한테 호감을 느끼고 있으니, 웬만하면 상처 주지 말라고?”
“그런 게…….”
“그럼 적당히 받아주다 헤어지면 되나?”
아닌데. 그런 걸 원한 게 아닌데.
어쩐지 쉴 틈 없이 궁지로 몰리는 기분이라, 입도 벙긋할 수가 없었다.
“어쨌든 내가 금욕주의일까 봐, 그래서 인간 여자랑은 연애도 못 하는 종자일까 봐 걱정스러워서 부른 거라면 걱정하지 마.”
“만나보게?”
말이 끝나기 무섭게 돌아온 질문에 그가 가만히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러다가 입술 끝을 올리며 웃었다.
“만나지 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