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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7. 관심 있으니까 (57/118)


#57. 관심 있으니까
2022.11.13.



 


“만나지 말까?”

그가 기다렸다는 듯 되물었지만, 그녀는 바로 대답할 수가 없었다.

그러다 고심 끝에 어렵게 입을 뗐다.


“그건.”

“…….”

집요하게 저를 바라보는 눈빛이 뭔가 기대하는 답이 있는 것만 같은 표정이었다.

허락을 구하려는 걸까?

아무래도 연애를 하게 되면, 자신한테 100% 신경을 쏟지 못할 테니, 그래도 괜찮겠냐고 묻는 건가 싶었다.

혼란스러웠다.

애초에 초점을 완전히 잘못 맞추고 있었던 문제라는 생각이 들어서.

그래서 강은 침묵을 지키다, 결국 내키지 않는 답을 억지로 뱉어냈다.


“그건 네 자유지.”

그 반응에 3초 정도 굳어 있던 산이 뒤늦게 작은 탄식을 뱉었다.

그러고는 고개를 숙인 채 김빠진다는 듯 웃었다.

스스로 생각해봐도 제가 뭘 기대한 건가 어이가 없어서였다.

그걸 보지 못한 그녀는 바로 말을 이었다.


“하지만 굳이 관심도 없던 사람이랑…….”

“관심 있었어.”

“……뭐?”

“정체가 뭔지 궁금했거든.”

차라리 잘됐다며, 그가 말을 덧붙였다.


“이참에 확인해볼 수 있겠네. 수월하게.”

가슴에 풍선 하나가 둥실 떠오르는 것만 같던 기분을 억지로 누르며, 산은 스스로 되뇌었다.

냉정을 되찾자. 어차피 확인해야 할 일이었으니, 밀린 숙제나 하자는 심정으로.

그리고 강은 그의 말에 몽마는 신체 어딘가에 숫자로 이루어진 진짜 이름이 새겨져 있다고 했던 걸 떠올렸다.


“확인해본다니, 그게 무슨 뜻이야?”

“무슨 뜻이긴. 말 그대로지.”

“…….”

“나 좋다고 찾아온 여잔데, 마다할 이유가 없잖아.”

산이 그렇게 나오니 더 이상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손을 뻗은 그가 그녀의 머리를 길게 쓰다듬었다.


“더 할 말 없으면, 나 간다?”

강은 말없이 산을 빤히 쳐다보기만 했다.

그도 가만히 시선을 맞추며 기다렸다.

할 말이 많은 얼굴인데, 입술이 열리질 않는 것 같아서였다.

하지만 끝내 말이 없는 그녀를 보며, 이만 자리에서 일어섰다.

쓸데없는 미련은 빨리 접는 게 답이었다.

그가 다시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어둑한 거실에 홀로 남은 강은 뒤늦게 말라붙은 입술을 뗐다.


“……가지 마.”

바람처럼 새어 나온 혼잣말만 허공에서 바스러졌다.

이미 늦어버렸지만, 유일한 진심이었다.

그녀는 일어날 생각도 하지 않고, 한동안 그 자리를 지켰다.

제인이 엘리베이터에서 했던 온갖 외설적인 말보다, 심장에 콕 박힌 말이 있었다.

마음이 있다면 조금 더 진정성 있게 다가가 보는 게 어떻겠냐는 제 말에 그녀는 진정성을 보는 게 가능한 거냐고 되물었었다.


‘Is it possible to see sincerity?’

타인의 진심을 보는 게 가능한가.

그건 곧 너는 타인의 내면을 꿰뚫어 볼 수 있냐고 묻는 것과 같은 말이었다.

그녀는 그저 질문을 던졌을 뿐일 테지만, 강은 자신의 교만이 꼬집힌 느낌이었다.

어쩌면 자신이 보아왔던 타인의 진정성이란 그 사람의 속내가 아닌 태도였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실은 내가 보려던 걸 본 게 아니라, 그 사람이 보여주려던 모습을 본 것.

의외를 마주했던 게 아니라, 착각에 빠져 있던 것.


‘자기도 좀 재미있게 살아.’

제인도 제인이었지만, 더 놀랐던 건 산의 반응이었다.


‘나 좋다고 찾아온 여잔데, 마다할 이유가 없잖아.’

그건 어쩌면 그를 잘 안다고 생각했던 오만.

내 멋대로 가능한 일을 불가능일 거라고 못 박았던 무지.

제인도, 산도 오직 나만을 원하고 있을 거라는 교만.

그 모든 착각이 불러온 결과였다.

분명 둘의 연결고리는 자신인데, 두 사람이 선을 그어버린 그들의 사생활 어디에도 제가 끼어들 틈은 존재하지 않았다.

문제는,


“왜 이렇게 속이 답답하지?”

신경 꺼버리면 그만일 그 일이 무척이나 거슬린다는 것.

이러쿵저러쿵 낯뜨거운 말들을 아무렇지도 않게 떠들어대던 제인에게 산은 그런 사람이 아니라고 항변했던 게 떠올랐다.

내가 왜 그랬을까?

뭘 안다고 그렇게 흥분해서 떠들었을까?


“나 좋다고 찾아온 여자를 마다할 이유가 없지 않냐고? 뭐, 여자면 다 좋다는 거야?”

그거야 두고 보면 알 일이라며 웃던 제인에게 보기 좋게 한 방 먹은 것 같아, 얼굴이 화끈거렸다.

괜히 바보가 된 느낌이었다.

강은 자리에서 일어나 초조하게 거실을 왔다 갔다 했다.

자신이 산을 그렇게 다급히 불러야만 했던 이유가 뭐였는지에 대해, 다시 한번 곰곰이 생각해보게 되었다.

‘가지 마.’에 대한 자신의 진심을.

저야말로 진정성 있게 돌아볼 때였다.

* * *

같은 시각.

집으로 돌아온 산은 지치지도 않고 울려대는 초인종 소리를 들으며 월 패드 앞에 서 있었다.

강의 집에 다녀오고, 여유롭게 옷까지 입고 나왔지만, 그때까지 제인은 돌아가지 않고 여전히 문앞을 지키는 중이었다.

그가 팔짱을 낀 채 스크린을 바라보았다.

뭐가 보일 리도 없을 텐데, 부채 같은 인조 속눈썹과 컬러 렌즈를 낀 눈이 부담스러울 만큼 카메라를 들여다보고 있었다.

실제로 그녀가 눈앞에 있는 것도 아닌데, 절로 어깨를 뒤로 뺄 정도였다.


“아무리 봐도…….”

미간을 구긴 그가 넌지시 혼잣말했다.


“내 취향은 아니란 말이지.”

산이 한숨처럼 실소하며 현관으로 나갔다.

기척을 숨긴 채 인간 세상에 섞여 사는 몽마의 정체를 알아낼 방법은 정해져 있었다.

스스로 정체를 밝히거나.

아니면 신체 어딘가에 새겨진 숫자로 된 진짜 이름을 찾아내거나.

강의 몸에 꿈의 문을 새겨놓고 지속적으로 그녀의 악몽을 차지했던 사파로는 제게 입은 내상 때문에 보육원에서 마주쳤을 때, 그 기척을 완전히 숨기지 못하고 걸린 케이스였다.

자신을 모른 척해야 했을 놈이 뻔뻔하지 못해, 식은땀을 뻘뻘 흘리던 것도 한몫했었고.

어쨌든 그런 관점에서 보면 오늘이야말로 그녀의 정체를 알아낼 기회가 될지도 모른다.

원래 충동적이고 감정적인 성향을 지닌 이들은 금세 자신을 드러내기 마련이니.

썩 내키지는 않지만, 제인을 맞이하려는 이유였다.

달칵.

문을 열자마자 그녀와 시선이 마주쳤다.

들뜬 기색을 숨기지 못한 제인이 상기된 얼굴로 산을 바라봤다.


“집에 계셨구나? 딱 한 번만 더 눌러보고 돌아가려던 참이었는데!”

“한 번만 더 참을 걸 그랬네요.”

애써 마음먹고 문을 열어준 게 무색해질 만큼 진심이 튀어나와 버렸다.

하지만 그녀는 그가 웃는 낯으로 빈정대도 그저 좋다는 얼굴이었다.


“그나저나 저희 집엔 무슨 일로?”

“괜찮으시면 잠깐 들어가서 이야기하고 싶은데요. 캔 아이……?”

제인의 돌직구에 산은 잠시 그녀를 바라보았다.

서로를 탐색이라도 하는 듯한 시선이 진득하게 얽혔다.

그렇게 잠깐의 시간이 흐르고.

입가에 미소를 띤 산은 옆으로 비켜서며 흔쾌히 말했다.


“들어오시죠.”

놀라움도 잠시.

제인의 얼굴에 만족스러운 미소가 피어올랐다.

그럴 줄 알았다는 듯한 얼굴이었다.

그렇게 두 사람은 나란히 집 안으로 사라졌다.

철컥.

무겁게 닫힌 문에서 난 소리가 고요한 복도를 울렸다.

전체적으로 채도가 낮은 산의 집을 둘러본 제인이 감탄하듯 말했다.


“분위기 좋네요. 어두컴컴한 게 딱 내가 좋아하는 스타일이야.”

“용건이 뭡니까?”

그가 묻자 그녀가 고개를 돌렸다.

그러고는 산을 빤히 바라보다 거리를 좁혀 다가왔다.


“용건?”

“…….”

“집까지 들여놓고, 정말 몰라서 묻는 거야?”

제인은 천천히 산의 주위를 한 바퀴 돌았다.


“향수 뭐 써요?”

“알아서 뭐 하게.”

“꺅!”

짜릿하다는 듯 소리를 지른 그녀가 어쩔 줄 몰라 하며 말했다.


“까칠해서 더 내 스타일이야.”

호들갑을 떨던 제인이 비즈가 박힌 검지 손톱을 세워 그의 어깨를 콕 찔렀다.

그러고는 그대로 쭉 훑듯이 내리며 속삭였다.


“있잖아.”

“…….”

“나는 나한테 함부로 대하는 남자가 그렇게 좋더라.”

산이 피식 웃으며 대답했다.


“취향 한번 특이하시네요.”

그 말에 생긋 웃던 그녀가 반 바퀴를 더 돌아 그의 등 뒤에 섰다.

그러고는 양손을 뻗어 산의 허리를 뱀처럼 감으며 몸을 밀착해왔다.

하지만 그가 곧 그녀의 손목을 잡아당겼다.


“……아!”

순식간에 앞으로 끌려간 제인의 코앞에 서늘한 표정의 산이 있었다.


“뭐 하자는 거지?”

하지만 그녀는 전혀 당황하지 않고 오히려 다른 손으로 그의 허리를 끌어안은 채, 벽에 밀어붙였다.

입이라도 맞출 것처럼 거리를 좁힌 제인이 낮은 웃음을 터트리며 말했다.


“뭐 하자는 거긴.”

“…….”

“같이 재미 좀 보자는 거지.”

산은 이상하게 속이 뒤틀렸다.

어차피 안으로 들인 거 마음만 먹으면 쉬운 일인데, 뭐가 이렇게 내키지 않는지 영 기분이 별로였다.

그래서 목덜미에 입술을 문지르던 그녀를 밀쳐버렸다.


“앗!”

뒤로 넘어가던 제인이 순간적으로 산의 셔츠 깃을 잡았고, 그 바람에 목까지 채워져 있던 그의 셔츠 단추가 두두둑 떨어져 나갔다.

콰당!

정신을 차렸을 땐 등이 바닥에 닿은 뒤였다.

바닥에 누운 그녀는 잠시 얼이 빠진 듯한 표정이었지만, 곧 언제 그랬냐는 듯 웃었다.

그러고는 단추가 뜯어져 벌어진 셔츠 사이로 드러난 산의 몸을 향해 손을 뻗었다.

하지만 닿기도 전에 손목이 잡혀버리고 말았다.

아쉬움에 입맛만 다시고 있는데, 제인을 위에서 내려다보던 그가 말했다.


“손버릇이 안 좋으시네.”

“어머나, 누가 할 소리.”

멱살을 낚아챈 제인이 그대로 다리를 뻗어 순식간에 산의 목을 감았다.

그가 재빨리 팔 한쪽을 넣어 목이 압박되는 걸 막았지만, 전세가 금세 뒤바뀌어 버렸다.


“……운동 신경 장난 아니시네요.”

“제가 요가를 오래 해서 코어 힘이 좋답니…… 어어!”

생긋 웃으며 대꾸하던 제인의 몸이 붕 뜨더니, 다시 바닥에 꽂혔다.

쿠당탕!

충격에 다리가 풀린 틈을 타, 그가 빠져나갔다.

그녀가 재빨리 자세를 바로잡으려 했지만, 손목이 뒤로 꺾였고, 그 상태에서 그대로 바닥을 향해 엎어지고 말았다.


“으윽!”

제인의 등 뒤를 점령한 산이 나긋하게 말했다.


“움직이면, 다쳐요.”

“아! 진짜 아프다고……!”

“왜. 함부로 대해주는 게 좋다며.”

그러고는 손끝으로 제인의 목 뒤에 새겨진 문신을 짚었다.

첫 만남에서 언뜻 봤던 바코드 형태의 문신.

그리고 그 아래 새겨진 숫자인 591111.

엄지로 문질러봤지만, 그것은 그저 평범한 문신이었다.

바닥에 깔린 제인이 말했다.


“저번에도 느낀 건데, 취향이야? 왜 이렇게 내 문신에 집착해?”

“관심 있으니까.”

“그래?”

“…….”

“그럼, 말만 해. 당신이 원하면 몸에 있는 문신 다 보여줄게.”

 

.
.
.

그 시각.

아래층의 강은 무언가가 바닥으로 강하게 떨어지는 듯한 소리를 듣고는 소스라치게 놀랐다.

쿠당탕!

소음은 연이어 또 한 번 들려왔다.

우당탕쿵탕!

어지간해서는 소리가 바닥을 뚫고 내려오는 경우가 드물었는데,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건가 싶었다.


“도대체 둘이 뭘 하는 거야……?”

결국 그녀는 곧장 집을 나가 계단을 향해 뛰었다.

뭘 때려 부수고 있는 건지는 몰라도 무슨 일이 벌어졌다고 확신했기 때문이다.

단숨에 위층에 도달한 강이 산의 집 초인종을 마구 눌렀다.


“산아! 한산!”

정신없이 그의 이름을 외쳐 불렀다.

문은 오래 지나지 않아 열렸다.

하지만 이내 마주한 광경은 그녀의 얼굴을 굳게 만들기 충분했다.


“너…….”

간신히 입을 뗐지만, 흐트러진 산의 모습을 보니 더 이상 말이 나오질 않았다.

단추가 다 뜯겨나간 셔츠에, 언뜻 보이는 손톱자국.

혈흔인 줄 알았던 목과 셔츠 깃의 붉은 흔적은 분명 립스틱 자국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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