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9. 환상을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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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9. 환상을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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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9. 환상을 보았다.
2022.11.20.
제인이 제 뺨에 새겨진 숫자를 손끝으로 쓸자, 빨간 불씨가 일 듯 숫자가 붉어졌다 다시 검게 돌아왔다.
591.
그걸 본 그녀가 만족스럽게 웃으며 말했다.
“우리 핫가이가 문신에 관심이 많아 보이는데, 이것도 보여줄까?”
아쉽게 헤어져야 했던 그가 자꾸만 생각났다.
제인은 인간 남자의 악몽을 좋아하는 몽마였다.
그래서 마음에 드는 하룻밤 상대를 찾고, 그렇게 찾은 인간 남자들에게 쾌락이나 악몽을 취하며 살아왔다.
운이 좋을 땐 두 가지를 동시에 만족시켜줄 인간을 만나기도 했다.
대부분 삶의 벼랑 끝에 서 있는 인간들이었고, 어쩌다 그런 인간을 만나면 그의 환심을 사 꽤 오래 즐기기도 했다.
본의 아니게 저로 인해 마음의 위안을 얻은 인간들이 종종 악몽의 질이 낮아지는 우스운 일이 생기곤 했지만, 그건 그때마다 한 번씩 불행을 심어주거나, 직접 악몽에 침입해 꿈을 설계하면 그만이었다.
비명을 지르며 깨어난 남자들의 공포와 눈물은 그녀가 무척 좋아하는 특식이기도 했다.
사실 이곳으로 이사를 오게 된 것도, 순전히 기가 막히게 황홀한 악몽의 냄새를 맡았기 때문에 그 흔적을 쫓아 온 것뿐이었다.
제인은 꿈의 주인이 이 아파트에 살 거라고 확신했고, 기왕이면 남자이길 바랐다.
하지만 자신이 이사를 오던 날.
“거짓말처럼 그 모든 악몽의 흔적이 사라져버리고 말았지.”
다시 생각해도 어이가 없는 일이었다.
냄새도, 기척도 모두 사라져버려 악몽의 주인이 벌써 다른 몽마에게 먹혔거나 죽었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때 엘리베이터에서 우연히 만난 게 강이었다.
처음엔 단순한 호기심이었다. 연예인을 실제로 보는 건 그녀도 처음이었던 지라.
그러다 강의 경호원이라던 산을 만나게 되었고, 그 순간 그녀의 환심을 사두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마음 같아서는 처음 만난 그날 당장에라도 찾아가고 싶었다.
하지만 너무 흥분한 상태로 찾아갔다가는 어떤 사고를 칠지 몰라 신중할 필요가 있었다.
인간을 죽이면 바로 천인의 표적이 되는데, 그게 무척 골치 아픈 일이라 가능한 사고 치지 않고, 적당히 남자와의 만남을 지속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아야 했다.
그러다 결국 강을 매개체로 삼는 게 가장 좋은 방법이라는 걸 깨달았다.
“뭐…… 결국 성질 못 이기고, 찾아가 버렸지만.”
직업 때문인지 경계심이 짙은 그를 무너뜨리기가 쉽지 않았다.
그래서 다음에 만날 땐 반드시 끝장을 볼 계획이었다.
치약과 칫솔을 드는 그녀에게서 콧노래가 절로 흘러나왔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그런데 다음에도 문을 열어줄까?”
오늘 반응을 돌이켜보니, 솔직히 저와 같은 마음인 것 같다는 느낌은 아니었다.
제인은 그 이유가 자신의 매력이 부족해서가 아니라, 산이 굉장히 보수적인 성향의 인간이라 욕망을 도덕성으로 억누르고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스읍-
“쉽지 않겠는데.”
고개를 기울인 그녀가 심각한 표정으로 혼잣말했다.
“역시 리버랑 친해지는 게 먼저려나.”
산의 실체를 까맣게 모르는 제인의 고민이 깊어졌다.
.
.
.
한편.
악몽을 꾸고 펑펑 울던 강은 기진맥진한 채 소파에 쓰러져버렸다.
산은 말없이 강을 안아 침대로 데려다주었다.
조심히 그녀를 내려놓은 그가 곁에 앉아 이름을 불렀다.
“강아.”
그러고는 진지하게 말했다.
“나한테 서운한 게 있으면 그냥 말로 해.”
“없어.”
“근데 왜 이렇게까지 해?”
“너한테 서운한 게 있어서 그런 게 아니라…….”
말끝을 흐리던 강이 시선을 피하며 말을 이었다.
“그냥 너 없으면 안 되는 내 처지가 싫어서 그래.”
그 말에 잠시 대꾸가 없던 산이 조용히 미소를 지었다.
묘한 만족감을 주체하지 못한 탓에 입꼬리를 단속하는 게 쉽지 않았다.
그녀가 보기엔 그런 제가 너무 사악해 보이겠지만, 그렇다 해도 어쩔 수 없었다.
“그럼 그냥 받아들여.”
“…….”
“너한테 이제 내가 없으면 안 된다는 거.”
그가 다정히 웃으며 말을 이었다.
“인정하면 편하잖아.”
강은 어쩐지 분한 기분이 들었지만, 그렇다고 반박할 말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전부 맞는 말이었으니까.
그래서 그의 말대로 그만 인정하기로 했다.
더 아쉬워지는 게 제 쪽이라고 해도, 그 역시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그래, 맞아.”
“…….”
“나는 네가 필요해. 너 없으면 안 돼.”
결국 받아들이고 마는 그녀의 모습을 보고 있자니, 덫에 걸린 사슴이라도 보는 것 같았다.
어떻게든 벗어나 보려 발버둥 치지만, 그럴수록 목을 죄는 올무에 걸린 사슴.
그걸 보는 사냥꾼은 사슴이 안쓰러워 슬플까?
아니.
제 것이 된 사냥감에 기쁨의 노래를 부를 것이다.
산의 입가에 만족한 듯한 미소가 사라지질 않았다.
조금 더 욕심을 부려 듣고 싶었던 이야기를 마저 들을까도 싶었지만, 그러려면 강을 너무 괴롭히게 될 것 같아 오늘은 이쯤에서 그만두기로 했다.
밤이 얼마 남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녀는 잠이 필요했고, 자신은 더 이상 허기를 참을 수 없었다.
.
.
.
아침은 아무 일 없었다는 듯 찾아왔다.
강은 잠이 부족했는지 촬영장으로 이동하는 내내 짧은 잠을 청했고, 그때마다 산이 그녀의 곁을 지켰다.
마침내 촬영장에 도착했지만, 흐르는 공기가 여느 때와 달랐다.
하릴없이 시간만 흘렀다.
째깍, 째깍, 째깍…….
시계의 무거운 초침 소리가 확성기라도 가져다 댄 것처럼 무겁게 촬영장을 메웠다.
“아직도 연락 안 돼?”
“예.”
신휘가 무단으로 촬영장에 나오지 않았다.
“안 되겠다. B팀에 연락해서…….”
“감독님!”
일정을 조정하기 위해 일어선 성 감독에게 스태프 하나가 달려왔다.
“무슨 일이야?”
“신휘 씨 회사랑 연락 닿았습니다!”
“뭐래!”
“그게…….”
뒤늦게 그의 회사를 통해 전달된 소식에 촬영장이 발칵 뒤집혔다.
집 안에 쓰러져 있던 양신휘를 그의 매니저가 발견해 병원으로 이송 후, 안정을 취하고 있다는 거였다.
연예면은 순식간에 신휘의 소식으로 도배가 됐고, 회사 측에서는 단순 과로라는 입장이었지만, 억측이 난무했다.
그리고 뭐가 진실인지는 촬영장에 있던 누구도 알 수 없었다.
충격을 받은 건 강도 마찬가지였다.
분위기가 어수선했지만, 성 감독은 결국 그가 출연하는 장면을 빼고 먼저 조금이라도 촬영을 해두자고 했다.
안정을 찾아가고 있다고 하니, 일단은 믿고 상황이 나아지길 기다리는 수밖에 없었다.
“동선 체크 좀 할게요. 바닥에 붙여놓은 스티커 확인해주시고요.”
시작이 늦은 만큼 스태프들이 정신없이 움직였다.
“정각에 촬영 시작하겠습니다!”
FD가 외쳤고, 강은 자리에 앉아 며칠 전 봤던 신휘의 모습을 떠올렸다.
‘죄송해요. 사실 초콜릿이 아니라, 수면제예요.’
‘원래 그러지 않았는데…… 요즘 잠만 들었다 하면 꿈자리가 사나워서요.’
그의 턱에 선명했던 상처가 떠올랐다.
신휘가 우울증을 앓고 있는 것 같다던 반의 말도 차례로 생각났다.
……마음이 무거웠다.
‘왜 그때 한 번 더 살피지 못했을까.’
이럴 줄 알았으면, 신휘가 먼저 살갑게 다가올 때 좀 친해져 둘걸 그랬다는 생각도 들었다.
그녀 스스로 과거의 자신을 구할 순 없었지만, 타인을 위해 손을 내밀어주는 건 조금만 마음을 먹으면 충분히 할 수 있었던 일이라고 여겼기 때문이다.
그러면 이렇게까지 극단적으로 치닫는 일은 막을 수 있지 않았을까.
후회가 막심했다.
시계는 정각을 향해 다가가고 있었지만, 어수선해진 촬영장의 분위기는 좀처럼 나아질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사전제작을 목표로 달려오던 중이라, 일정을 미루기가 어려웠지만 신휘의 소식에 다들 마음이 착잡한 모양이었다.
잠시 자리를 비웠던 성 감독이 돌아오고, 삼영이 그와 멀리서 대화를 나누는 게 보였다.
이야기를 마친 그가 강에게 다가왔다.
“강아.”
“응, 오빠. 감독님 뭐라셔?”
그녀가 묻자 삼영이 애써 웃으며 답했다.
“오늘 촬영 접기로 했어.”
결국 촬영이 취소됐다.
.
.
.
주차장에서 황 대표와 통화를 마친 삼영이 운전석에 올라타며 말했다.
“강아. 대표님이 회사 들르지 말고, 바로 귀가하래.”
“응.”
그녀가 대충 고개를 끄덕였다.
손등 위를 덮는 감촉에 고개를 돌리니, 산이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게 보였다.
“괜찮아?”
“나야, 뭐.”
강이 억지로 웃어 보이곤, 다시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집으로 돌아가는 밴 안.
오늘따라 바쁘게 울려대는 휴대폰을 확인한 삼영이 한숨을 푹 쉬며 말했다.
“연예면 지금 난리다.”
양신휘 우울증.
양신휘 자살 소동.
온갖 자극적인 말로 올라오는 기사들을 보며 그가 고개를 저었다.
친분이 있던 몇몇 기자들은 그에게까지 전화를 걸어와 촬영장에서 평소 신휘가 어땠는지, 뭔가 이상하다고 느낀 건 없었는 지에 대해서도 물어왔다.
결국 휴대폰을 무음으로 돌려버렸다.
운전할 때만이라도 신경을 좀 덜 쓰고 싶었던 것도 있었지만, 유난히 마음이 무거워 보이는 강의 앞에서 그들의 연락에 일일이 대응해주고 싶지는 않아서였다.
내내 함께 있었던 산도 모든 정황을 알고 있었지만, 그는 딱히 별다른 언급이 없었다.
한강을 따라 차가 달리던 중이었다.
근처에 있던 커다란 대학 병원을 지나는데, 삼영이 무심코 입을 열었다.
“신휘 씨, 저 병원에 입원 중이래.”
그 말에 강이 고개를 들어 웅장한 병원의 건물을 바라보았다.
“저기?”
“응. 괜찮아지면 나중에 병문안이라도 가자.”
그가 하는 말에 그녀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창밖의 풍경은 눈에 담을 새도 없이 빠르게 스쳐 지나갔다.
차는 곧장 다리로 진입했고, 이내 한강을 가로질러 달리기 시작했다.
내내 창밖에 시선을 고정하고 있던 그녀가 별안간 벌떡 상체를 일으켜 세운 것도 바로 그때였다.
“오빠, 잠깐만.”
다리 위에 있던 누군가를 발견했기 때문이다.
“왜 그래?”
“나 방금 양신휘 본 것 같아.”
“뭐? 잘못 본 거겠지. 그 친구 지금 병원에 있다고…….”
“일단 차 좀 세워봐! 빨리!”
끼이익!
강의 요청에 삼영이 브레이크를 밟았다.
그가 곧장 비상깜빡이를 켠 채 멈춰 섰고, 강은 차가 서자마자 곧장 차 문을 열고 내렸다.
그녀의 시선이 지나온 길 어딘가를 향했다.
딱 봐도 환자복으로 보이는 옷에 멀리서도 튀는 백금발.
다시 봐도 신휘가 확실했다.
그때.
그는 넘실대는 한강 물을 바라보며 멍하니 중얼거리는 중이었다.
“재미도 없고, 감흥도 없고.”
한숨과 함께 끊임없이 혼잣말이 새어 나왔다.
“……그냥 여기서 콱 죽어버릴까.”
빛이 사라진 눈이 초점을 잃고 허공을 헤맸다.
그 순간, 강이 크게 소리쳐 외쳤다.
“신휘 씨!”
하지만 신휘는 그녀가 자신을 부르는 소리를 듣지 못했고, 강은 그에게 달리며 다시 한번 크게 그의 이름을 외쳐 불렀다.
“양신휘!”
그제야 초점이 없던 그의 눈동자에 이체가 돌았다.
반쯤 얼이 빠져 있던 신휘의 시선이 소리가 나는 곳을 향했다.
아무 감정이 없던 메마른 얼굴에 천천히 놀라움이 번지기 시작했다.
“……선배님?”
자신을 향해 미친 듯이 달려오는 그녀의 모습을 넋 놓고 보던 그가 눈을 몇 번 깜빡이며 인상을 썼다.
“내가 지금 뭘 보고 있는 거야.”
죽기 전 환영이라도 보고 있나 싶어서, 믿기가 어려웠다.
그리고 그 순간.
“하아, 하아…… 잡았다!”
신휘의 옷깃을 잡은 강이 터질 듯 뛰는 가슴을 움켜쥐며 말했다.
천천히 고개를 든 그녀와 마침내 눈이 마주쳤을 때.
그는 갑자기 시간이 늘어지는 것만 같은 기분을 느꼈다.
강의 이마 위에 송골송골 맺힌 땀방울.
넘실대는 한강 위로 쏟아지는 금빛의 붉은 햇살.
심지어 불어오는 바람마저…….
그동안 제가 알던 세상과는 전혀 다른 세상이 눈 앞에 펼쳐지는 것만 같은 기분을 느꼈다.
이건,
“…….”
환상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