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 두 얼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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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 두 얼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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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 두 얼굴
2022.12.01.
“기사 그딴 식으로 쓸 거면 때려치워요.”
“…….”
“사람 엿 먹이지 말고.”
노지태의 경고에 윤 기자는 마치 귓가에 독이 흘러드는 것만 같은 기분을 느껴야 했다.
굳어버린 그녀를 향해, 그가 조용히 고개를 숙여 시선을 맞추었다.
먹구름이 잠시 걷힌 사이로 내려앉은 햇살이 지태의 얼굴을 비추었다.
그의 눈동자에 아주 희미한 포도주 빛깔의 붉은 이체가 맴돌다 사라졌다.
순간, 시선이 닿아 있던 그녀의 눈동자도 빛을 잃고, 까맣게 가라앉았다.
긴장감과 불쾌함이 뒤섞여 있던 표정 역시 멍하니 풀어졌다.
“……죄송합니다.”
버석하게 마른 입술이 기계처럼 뻐끔댔다.
“……이사님 말씀은 명심하겠습니다.”
그녀의 사과에 지태가 입꼬리를 약간 올리며 멀어졌다.
“대화가 통하는 분이셔서 다행이네요. 제 뜻은 헤아려주신 거라 믿겠습니다.”
보는 것만으로 가슴을 선득하게 만들던 그의 눈빛도 부드럽게 풀어졌다.
이후 노지태는 근처에 몰려든 이들과 몇 마디의 대화를 더 주고받았다.
멀리 있던 산은 그가 무슨 이야기를 하는지 알 수 없었지만, 곧 대화를 마친 기자들이 순순히 걸음을 돌리는 장면을 목격할 수 있었다.
불편함에 떠밀리듯 자리를 떴다기보다는, 열의라도 식은 듯 무기력한 반응이었다.
그렇게 득달같이 달려들었던 게 무색할 만큼.
노지태는 곁에 있던 비서와 함께 다시 차에 올랐고, 병원 내로 진입한 그들이 향한 곳은 VIP 병동의 주차장이었다.
‘……뭐지?’
산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분위기만으로 보는 이를 압도하게 만드는 남자의 아우라가 범상치 않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얼핏 본 그의 얼굴.
어딘가 낯설지 않았다.
.
.
.
한편.
그녀는 신휘가 있는 병실 앞에 선 채 조용히 숨을 고르고 있었다.
똑똑.
“들어오세요.”
노크 후 돌아온 답에 강이 병실 안으로 들어섰다.
아까보다 수척해진 그의 얼굴을 보는데, 마음이 복잡했다.
웃기는 또 왜 웃어?
저도 모르게 새어 나오려는 한숨을 삼키고 다가서자, 신휘가 그녀를 불렀다.
“선배님.”
“왜.”
원래는 자신이 걱정돼서 안 간 거냐고 물으려고 했다.
그런데 반말이 돌아와, 그는 질문을 바꾸기로 했다.
“이제 말 놔주시는 거예요?”
“언제는 말 놔달라면서. 다시 높일까요?”
“하하, 아니요. 좋아서 그래요.”
“내가 정말…….”
눈을 흘기던 강이 손을 저었다.
“관두자. 말씨름할 기운도 없으니까.”
십 년은 늙은 것 같다며, 한숨 쉬는 그녀를 보고 신휘가 웃었다.
“너는 이 상황에서 웃음이 나오니?”
“그러니까요. 저 완전 미친놈 같죠.”
부정하지 않았다.
확실히 미친놈 같았기 때문이다.
그러자 그가 입꼬리를 길게 늘이며 말했다.
“어쨌든 살아 돌아왔으니까, 앞으론 눈길 많이 줘요.”
“…….”
“주실 거죠? 약속했잖아요.”
“그래.”
마지못해 대답했지만, 신휘는 성에 차지 않는 듯 계속해서 채근했다.
“관심도 주고요.”
“알겠어.”
“애정도 주고.”
“알았다고.”
“이왕이면 사랑도 좀…….”
“그게 그거잖아! 눈길이 관심이고, 애정이 사랑이지!”
화끈한 그녀의 애정에 그가 크게 웃음을 터트렸다가, 옆구리를 부여잡았다.
“……아, 아! 내 옆구리!”
넌 좀 아파도 싸다고 말할 줄 알았던 강이 화들짝 놀라 다가왔다.
그러고는 안색을 살피며, 물었다.
“괜찮아? 간호사 불러올까?”
그 모습을 보니, 신휘는 괜히 더 엄살을 피우고 싶었다.
그래서 일부러 앓는 소리를 더 냈다.
“아아. 너무 아파요…….”
“잠깐만 있어 봐. 내가 금방 사람 불러올…….”
“그 뜻이 아니라.”
그가 손을 뻗어 강의 손목을 붙들었다.
“가지 말고, 그냥 옆에 있어 달라는 거였어요.”
신휘가 그렇게 나오는 바람에 그녀도 더 어쩌지 못하고, 다시 곁에 앉았다.
그러자 그도 곧 안정을 찾은 듯 편안한 표정이 되었다.
숨을 몰아쉰 강이 이만 자리에서 일어섰다.
“깨어난 거 봤으니까, 그만 가볼게. 너도 푹 쉬어.”
“벌써 가게요?”
“계속 여기 있을 순 없잖아.”
“있으면 어때서.”
신휘가 투정을 부려봤지만, 그녀는 아랑곳하지 않고 일어섰다.
“내가 그렇게 한가한 사람이 아니거든?”
“아무렴요.”
악의 없는 얼굴로 웃던 그가 시간 빼앗아 미안하다며 싱거운 사과를 건넸다.
“쉬어, 그럼.”
그녀가 돌아서 병실을 나가려는데 신휘가 다시 넌지시 강을 불렀다.
“선배님.”
고개를 돌리자, 그가 기대감이 가득한 표정으로 물어왔다.
“사석에선 누나라고 불러도 돼요?”
“부르지 말라고 하면 안 부를 거야?”
“아니요.”
그의 청개구리 같은 모습에 자꾸만 눈이 뾰족해진다.
하지만 신휘는 확답을 받아내고야 말겠다는 듯 질문을 던지기 급급했다.
“힘들 때 연락해도 돼요?”
“도움이 될진 모르겠지만, 이야기 들어주는 정도라도 괜찮으면.”
“나는 선배 목소리만 들어도 괜찮아질 거 같은데.”
“양신휘.”
엄하게 그를 부른 강이 쌀쌀맞게 경고했다.
“느끼한 발언 금지. 개수작 금지.”
상대가 남매의 연 따위를 바라고, 저를 대하는 게 아니라는 건 눈치가 있다면 누구나 알 것이다.
아니, 설령 정말로 순수하게 이야기를 들어줄 사람이 필요했다고 해도 일찍이 입장을 확실히 하는 게 나중을 위해서도 좋았다.
“나 작품 하는 동안은 같이 출연하는 배우랑 썸 같은 거 안 타.”
그가 무얼 가지고, 협박하든 안 되는 건 안 되는 거니까.
그런 그녀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신휘는 다시 물었다.
“그럼 작품 끝나면?”
“복귀부터 하고 까불자?”
웃는 낯으로 일갈한 강이 냉정히 뒤돌아 나갔다.
그녀의 박력에 넋을 놓고 있던 신휘가 뒤늦게 입을 가리며 피식 웃었다.
“……얽히기 싫었는데.”
묵직한 한숨을 길게 뱉은 그가 혼잣말을 이었다.
“아주 제대로 얽히게 생겼네.”
.
.
.
강이 대기실로 다시 돌아왔을 때.
삼영과 산은 진작에 돌아갈 채비를 마친 뒤였다.
“그만 가자, 강아.”
“응, 오빠.”
그녀가 삼영의 말에 대답하며 핸드백을 챙겨 들 때였다.
“오늘 신세 많이 졌습니다. 언제 식사라도 한번…… 아, 잠시만.”
따라 일어난 박 실장이 인사를 하려다 말고, 걸려온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함 비서님? 네, 네. 지금요? 아, 알겠습니다.”
급히 통화를 마무리한 그가 세 사람에게 말했다.
“저희 이사님이 지금 주차장에서 올라오시는 중인데, 괜찮으시면 얼굴 뵙고 인사드리고 싶다고 하시네요.”
그에 강은 시계를 한번 확인한 후 대답했다.
“알겠습니다.”
노지태가 모습을 드러낸 건 얼마 지나지 않아서였다.
그는 룸 앞에 미리 나와 있던 박 실장에게 신휘의 안부부터 확인했다.
“신휘는?”
“의식은 진작 돌아왔고, 쉬는 중입니다. 의사가 절대 안정이라고…… 면목이 없습니다.”
신휘가 감시를 피해 병원을 빠져나간 게 제 탓인 것 같아, 박 실장의 고개가 한없이 내려갔다.
하지만 지태는 오히려 그의 어깨를 두드리며, 위로했다.
“애쓰셨어요.”
“아닙니다. 제가 더 잘 살폈어야 하는데, 죄송합니다. 이사님.”
“배우가 유별난 걸 어쩌겠습니까. 박 실장은 할 만큼 했습니다.”
그렇게 말한 노지태가 서둘러 대화를 마무리 짓고는 룸 안으로 들어가 강과 삼영, 산에게 다가왔다.
“안녕하십니까. 문 엔터 대표, 노지태라고 합니다. 도와주셨다는 말씀 들었습니다.”
그는 감사의 인사를 전한 뒤, 강에게 따로 말을 건넸다.
“촬영이 한창인데, 이런 일이 발생하게 되어 송구스럽네요.”
“아닙니다.”
가볍게 화답한 그녀가 말을 이었다.
“신휘 씨가 무사히 복귀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럼요. 저희 쪽에서도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그럼.”
강이 인사를 건네려는데, 그가 다시 말했다.
“잠시만.”
지태의 시선이 산에게 닿았다.
“한산 경호 실장님 맞으시죠?”
“네.”
“실장님께서 저희 배우를 직접 구조해주셨다고 들었습니다.”
다가가 손을 내민 그가 악수를 청했다.
“이 은혜를 어떻게 갚아야 할지 모르겠네요. 언제 괜찮으시면, 좋은 곳에서 식사 한번 대접하겠습니다.”
“괜찮습니다.”
산은 조금 늦은 대답을 하며 지태가 내민 손을 마주 잡았다.
두 남자의 시선이 허공에서 맞부딪쳤다.
먼저 미소를 지어 보인 지태가 인사했다.
“그럼 조만간 다시 뵙겠습니다.”
.
.
.
“강아. 오늘 고생 많았다. 들어가자마자 푹 쉬어.”
“알겠어. 오빠도 조심히 들어가.”
“아, 그리고 성 감독님이 회사에 연락하셨더라. 촬영 다음 주부터 재개한대.”
“이번 주도 다 갔으니까, 뭐.”
“그래도 푹 쉬어.”
“그럴게.”
그녀가 고개를 끄덕였다.
삼영은 이번엔 산에게 말했다.
“산아. 오늘 네가 제일 고생했다. 다 건져놓은 놈, 도로 빠트려서 입수까지 하고.”
뼈가 있는 말에 그가 코웃음을 쳤다.
“성인 남자 맨손으로 붙들고 있는 게 쉬운 줄 알아요?”
“그럼 그럼. 우리 산이는 잘못 없지. 손이 미끄러져서 놓쳤을 뿐이지. 그렇지?”
“놓칠 일 없게 애초에 안 잡을 걸 그랬어요.”
양신휘 회사에 고용된 것도 아닌데, 왜 엄한 놈 목숨이나 붙들고 있었는지 모르겠다며 산이 볼멘소리를 했다.
그 까칠한 모습을 밉지 않게 바라보던 삼영이 말을 이었다.
“그래도 오늘 너 아니었으면 양신휘 죽었을지도 몰라.”
제 말에 피곤하다는 듯 손끝으로 이마를 짚어버리는 산을 보며, 그가 웃었다.
“아무튼 고생했다. 애썼어.”
그 말을 끝으로 삼영은 두 사람을 내려준 뒤, 떠났다.
“씻고 바로 와. 얘기 좀 하게.”
엘리베이터에서 내내 말이 없던 강은 산에게 그 말만 남긴 채, 먼저 내렸다.
또 무슨 이야기를 하려고 저렇게 무게를 잡나 싶었지만, 대충 무슨 얘기가 나올지 알 만했다.
닫히는 문 사이로 뒤도 돌아보지 않고 사라지는 그녀의 뒷모습이 보였다.
집으로 돌아온 강은 심신이 지칠 대로 지쳐 있었다.
“아. 너무 피곤해.”
씻을 기운도 없었지만, 꾸역꾸역 일어나 욕실로 향했다.
보통 아무리 피곤해도 시원한 물로 샤워를 좀 하면 정신이 들곤 하는데, 오늘은 그마저도 어려웠다.
긴장이 잔뜩 들어갔다가 풀린 몸은 침대에 누우면 그대로 물에 녹은 솜사탕처럼 사라져버릴 것만 같았다.
그녀는 손을 뻗어 협탁에 놓아둔 초콜릿 통을 집어 들었다.
피곤할 때 하나씩 약처럼 먹곤 했는데, 무게가 가벼워 흔들어보니 초콜릿이 얼마 남지 않은 듯했다.
뚜껑을 열어 안을 들여다보자, 작은 주사위만 한 다크 초콜릿 세 개가 보였다.
그걸 보는데 문득 촬영장에서 봤던 신휘의 모습이 떠올랐다.
‘초콜릿인데, 하나 드실래요?’
‘죄송해요. 사실 초콜릿이 아니라, 수면제예요.’
초콜릿을 약처럼 먹곤 하는 제 모습이 문득 그의 모습과 겹쳐 보이는 건 왜일까.
‘내가 지금 여기서 뛰어내리면.’
‘내 손 잡아주나?’
그렇게 말하던 그의 눈에 비쳤던 건 간절함이었을까?
강은 산에게 제 목숨을 담보로 그를 협박했던 일을 떠올렸다.
‘내가 오늘까지 버텨온 건 언젠가는 행복해질 거라고 믿었기 때문이었어. 하지만 내 의지대로 할 수 있는 게 앞으로도 영원히 없는 거라면, 더 살아야 할 이유가 없겠지.’
물론 신휘와 자신의 상황은 다를 수 있었지만, 본질 자체는 다를 게 없었을 것이다.
그가 괘씸하다가도, 마음이 욱신거리는 이유였다.
양신휘도, 자신도 별반 다를 게 없는 인생이라.
아직 신휘의 정체를 알 수는 없었지만, 적어도 그녀가 마주한 그의 외로움은 인간의 그것과 본질적으로 같았다.
게다가 정체를 떠나 몽마를 알면 알수록, 그들도 인간과 다를 바 없는 존재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니 육안으로 그들은 분간해내기란 거의 불가능에 가까운 일일 것이다.
창에 비친 제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강은 초콜릿 하나를 입에 넣고는 두어 번 씹다가 천천히 그것을 녹여 먹었다.
첫맛은 달콤했고, 마지막은 쌉쌀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