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3. 시나브로
(63/118)
63. 시나브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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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3. 시나브로
2022.12.04.
어둠이 내려앉은 서울.
전구색의 무드등 하나만 켜진 조용한 1인 병실 안.
“…….”
신휘는 말없이 창밖을 내다보고 있었다.
화려한 한강의 야경과 도로 위를 빠르게 달리는 자동차의 불빛이 어지럽게 흩어졌다.
머릿속에선 다리 위에서 제 손을 붙든 채, 용쓰던 강의 모습이 떠나질 않았다.
‘나도 알아. 죽을 용기보다 죽지 않을 용기를 내는 게 백만 배는 더 어려운 일이라는 걸.’
‘그래도 지금은 그 용기를 조금만……. 제발. 조금만 내줘. 부탁이야.’
촬영장에서 종종 마주치던 그녀의 눈빛이 잔상처럼 맴돌았다.
기복이 없어, 더 선명히 드러났던 우울의 잔재.
그 와중에 가뭄에 콩 나듯 보여주던 진짜 미소.
죽을 용기보다 죽지 않을 용기를 내는 게 백만 배는 더 어려운 일이라는 걸, 아는 여자.
밤의 호수처럼 늘 어둡고, 고요하기만 했던 눈빛에 강렬한 연민과 동질감이 피어오르던 걸 신휘는 분명히 느꼈다.
그래서 더 기분이 묘했다.
죽음이 더 이상 공포로 다가오지 않던 찰나에 다시 마음을 바꾼 것도 그 때문이었다.
서강을 조금 더 두고 보고 싶은 마음이 생겨서.
“재밌다니까.”
삶은 때때로 광야에서 보석을 찾는 일과 같다는 걸, 다시금 느끼던 그때였다.
똑똑.
누군가 병실의 문을 두드리며, 얼굴을 내밀었다.
“신휘야.”
매니저인 박선빈 실장이었다.
침대를 비운 채 창가에 서 있는 신휘를 본 그가 놀라서 후다닥 달려왔다.
“야, 인마……! 너 절대 안정이라는 말 못 들었어? 갈빗대 나간 놈이 서 있기는 왜 서 있어? 얌전히 안 누워 있고!”
박 실장이 안절부절못하며 호들갑을 떨었지만, 신휘는 여전히 창밖에 시선을 고정한 채 감흥 없는 대꾸를 이었다.
“누워만 있으려니까 답답해서.”
“옆구리 안 아파? 늑골 부러지면 움직이지도 못한다던데, 너는 어떻게 된 애가…….”
“견딜 만하니까 일어났겠지. 나 신경 쓰지 말고, 형도 퇴근해.”
“너 같으면 퇴근하겠냐?”
“…….”
“내가 오늘 아침에 얼마나……!”
어휴. 말을 말자.
박 실장이 허리춤에 양손을 짚은 채 크게 숨을 내쉬었다.
욕조에서 피를 철철 흘리며 쓰러져있던 그를 떠올리면 아직도 간담이 서늘했다.
그뿐인가.
쥐도 새도 모르게 빠져나간 신휘가 한강에 빠져 다시 병원으로 실려 왔을 땐, 정말이지 스스로 관을 짜고 들어가 눕고 싶은 심정이었다.
그런 박 실장을 보며 신휘가 조금 웃었다.
“나 안 죽어, 형.”
“…….”
“살고 싶어졌거든.”
그렇게 말해도 박 실장은 도통 얼굴에서 불안을 지우지 못했다.
신휘도 더 이상의 변명은 불필요하다고 여겨 말을 아꼈다.
“휴우.”
마음과 달리 변변한 위로조차 건네지 못한 박 실장이 한숨과 함께 시간을 확인했다.
“곧 이사님 들어오실 거야.”
“뭐하러.”
“걱정되니까 얼굴이라도 보러 오시는 거겠지. 아무튼 말 길어지지 않게, 앞으로 잘하겠다고 말씀드려.”
그가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어.”
병실을 나가려던 박 실장이 잊은 게 생각났다는 듯 덧붙였다.
“아, 맞다.”
신휘가 고개를 돌리자 그가 폭탄을 던지듯 말을 이었다.
“로미도 온대.”
“아! 걔는 또 왜!”
와락 짜증을 부려봤지만, 박 실장은 냉큼 문을 닫고는 병실을 나가버렸다.
정신 나간 똥개가 병실을 누빌 모습을 상상하니, 벌써 머리가 지끈거리는 느낌이었다.
잠시 후.
병실의 문이 다시 열렸다.
따라붙던 비서를 물린 지태가 홀로 병실 안으로 들어왔다.
“오셨어요.”
신휘가 무미건조한 인사를 건넸고, 곧 묵직한 구두 소리가 공간을 울렸다.
순식간에 그의 앞까지 다가온 지태는 한동안 말없이 신휘를 바라만 보았다.
특유의 위압감에 주변을 맴도는 공기가 금세 무겁게 내려앉았다.
지태가 손을 뻗어 신휘의 어깨를 짚었다.
“왜 그랬니.”
“…….”
“내가 생각하고 있는 이유가 맞을까?”
그가 묻는 말에, 신휘는 표정만큼이나 메마른 음성으로 답했다.
“죽는 게 그렇게 쉽나요.”
“…….”
“염려하지 마세요. 그냥 쇼였으니까.”
그의 눈을 말없이 주시하던 지태가 입꼬리를 조금 늘이며 물었다.
“몸은.”
“멀쩡합니다. 보시다시피.”
거기까지 대화를 나눴을 때였다.
두다다다다!
요란한 발걸음 소리가 복도 저 멀리에서부터 들려왔다.
두 남자의 시선이 동시에 돌아갔다.
올 것이 왔구나 싶던 순간.
드르륵!
힘차게 문이 열리고,
“야! 양신휘!”
예상대로 로미가 등장했다.
장군처럼 돌진해오던 그녀가 지태를 발견하고는 움찔해서 걸음을 멈췄다.
“어? 이사님도 계셨네?”
로미가 베시시 웃으며 인사를 건네자, 지태도 웃으며 받아주었다.
“병문안 왔니?”
“네. 이 철딱서니 없는 게 사고 쳤다고 그래서, 죽었나, 살았나 확인하러 왔어요.”
그런 그녀를 귀찮다는 듯 바라보던 신휘가 이마를 짚으며 한숨 쉬었다.
“너 때문에 없던 병도 생길 것 같으니까, 제발 좀 꺼져.”
“으이구, 이 개싸가지. 똥물에 빠져 죽어도 주둥이만 동동 뜰 호로새X.”
“……죽을래?”
“말로 천 냥 빚도 갚는다는데, 너는 하여간 매를 벌어요.”
필터 없이 욕을 날리던 로미가 지태를 보며 앓는 소리를 했다.
“이사님, 얘 말본새 좀 봐요. 맨날 나한테만 지랄염병이라니까요?”
“로미야…….”
차마 말을 잇지 못하던 지태가 네 말본새도 만만치 않다고 말해주려다, 부드럽게 달랬다.
“그래도 오빠한테 개싸가지, 호로새X가 뭐니. 너 촬영장에서도 이러는 거 아니지?”
“에이, 보는 눈이 있는데 이 정도는 아니죠. 아무튼 이 싹퉁바가지가…… 아니, 오빠새X가 나만 못 잡아먹어 안달이에요. 혼내주세요.”
그녀의 하소연에 그가 피식 웃었다.
“그러게. 우리 신휘가 왜 로미한테만 그럴까? 그만큼 네가 편해서 그러는 거 아니겠어?”
“그러니까요. 내가 잘해주는 줄도 모르고.”
“친하게 지내. 같은 회사 식구끼리 잘 지내야지.”
지태가 타이르자 로미가 못 이긴 척 눈을 흘기고는 들고 온 과일바구니를 테이블 위에 올렸다.
그러고는 포장을 뜯어 파인애플과 오렌지 하나를 꺼내 들며 말했다.
“대표님은 어떤 과일 좋아하세요? 뭐 깎아 드릴까요?”
그녀의 물음에 지태가 비스듬히 몸을 기댄 채 물었다.
“과일 깎을 줄은 알아?”
“몰라요.”
로미의 씩씩한 대답에 그가 예상했다는 듯 웃었다.
“……모르는구나.”
“괜찮아요! 과일은 껍질에 더 영양분이 많대요!”
“그래도 파인애플이랑 오렌지를 껍질째 먹는 사람은 없을 것 같은데.”
“그럼 멜론을 잘라볼까요?”
“멜론도 마찬가지겠지?”
“에이, 사과나 먹어야겠다.”
그녀가 과일바구니를 헤집으며 말했다.
그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던 지태가 몸을 일으켰다.
“그럼 적당히 놀다 가.”
“어? 벌써 가시게요?”
“늦었으니, 가 봐야지.”
“과일은요?”
“로미 많이 먹어. 나는 마음만 받을게.”
“아…… 그럼 조심히 가세요, 이사님. 오빠새X는 제가 잘 돌볼 테니까, 걱정하지 마시고요!”
“그래, 너만 믿을게. 회사에서 보자.”
“네엥!”
로미가 발랄하게 인사했고, 지태는 곧 병실을 나섰다.
침대에 걸터앉은 채 그 광경을 바라보던 신휘가 느리게 시선을 굴려 그녀를 바라보았다.
“너, 혹시 이사님 때문에 일부러 왔냐?”
“알면 대가리 박고 감사합니다, 누나 해.”
“…….”
“너 이사님 불편해하잖아. 내가 그거 알고, 내일이나 병문안 오려다 특별히 오늘 온 거야. 이사님 일찍 보내드리려고.”
“지랄. 나는 네가 제일 불편해.”
“과일은 뭐 먹을래? 사과? 파인애플? 아니다. 너 오렌지 좋아하지?”
“안 먹어. 너나 실컷 먹어.”
“아이고, 걱정하지 마세요. 반은 내 거예요.”
로미가 그렇게 말하고는 바구니를 통째로 들고 씻기 위해 병실을 나섰다.
신휘는 그녀가 사라진 문을 잠시 바라보았다.
‘너 이사님 불편해하잖아.’
맹한 게 눈치 하나는 빠르다니까.
어쨌든 그녀의 등장으로 지태와 오래 마주하진 않았으니, 정말로 로미에게 고마워해야 하는 건가 하는 마음이 들었다.
할 일만 마치고 빨리 사라져주면 더 고마웠겠지만.
신휘는 로미가 돌아올 시간에 맞춰 눈을 감고 자는 척을 했다.
“이야. VIP 병동이 좋긴 하다. 살림살이가 다 있어. 과도도 있고! 도마도 있고! 대박이야!”
그녀가 주절주절 떠들어대다가 반응이 없는 그를 바라보았다.
“양신휘, 벌써 자?”
대꾸가 없자 다가와 손을 휘젓는다.
“진짜 자?”
“…….”
“하긴. 아침부터 그 염병을 떨었으니 몸이 안 축날 리가 있나.”
……아, 일어나서 한 대만 팰까?
신휘는 잠시 갈등했지만, 다행히 금세 평정심을 되찾고 자는 척에 몰두했다.
로미는 서툰 솜씨로 깎아 온 과일을 반쯤 먹어 치우고, 반은 통에 담아 냉장고에 넣었다.
“아침에 일어나서 먹어. 잘 먹어야 얼른 낫지.”
그러고는 짐을 싸며 혼잣말을 이어나갔다.
“젊은 놈이 죽긴 왜 죽냐? 하여간 또 그러기만 해 봐. 대갈통에 구멍을 내줄 테니까.”
“…….”
“목숨은 다 귀해.”
“…….”
“그러니까 다시는 함부로 내던지지 마.”
그렇게 말한 로미는 슬쩍 눈을 흘기고는 이내 병실을 나갔다.
신휘가 눈을 뜨고는 한숨을 쉬었다.
“하여간 말 참 많아.”
그러고는 어이가 없어 웃음을 흘렸다.
.
.
.
산이 강의 집을 찾은 건 그로부터 얼마 뒤였다.
침대에 걸터앉아 있던 강이 조용히 그를 불렀다.
“산아.”
제 이름을 부르는 목소리에 느긋하게 다가온 산이 그녀를 마주 보고 앉았다.
그러고는 매끄럽게 입술 끝을 밀어 올리며 말했다.
“또 무슨 훈계를 하시려고, 이렇게 무게를 잡지?”
“훈계가 아니라…….”
“내가 양신휘 던져버린 것 때문에 그래?”
아무렇지도 않아 보이는 그의 목소리에 강이 미간을 좁혔다.
시선을 들자, 산이 빙긋 웃으며 손을 들었다.
“얼마나 마음고생을 하신 건지.”
“…….”
“눈 밑이 아주 퀭하네.”
푹 꺼진 강의 눈 밑을 엄지로 문지르며 그가 말했다.
하지만 그녀는 이내 고개를 돌려 산의 손길을 피했다.
“기분 별로야?”
“화내고 싶지 않아서, 마음 다잡는 중이야.”
감정을 쏟아내고, 다퉈서 해결될 일이 아니라는 걸 안다.
하지만 태생부터 다른 둘 사이의 입장 차를 좁히는 것만큼 어려운 일이 또 있을까?
생각을 정리하고, 신중히 단어를 골라도 입을 떼기가 쉽지 않은 일인 건 사실이었다.
고민에 고민을 거듭하던 강이었지만, 서로를 이해할 수 있을 때 문제를 바로잡아야겠다고 생각했다.
“있잖아, 산아.”
“응.”
“너한테 처음 몽마에 관한 이야기를 들었을 때, 나는 그냥 막연하게 무서웠어.”
몽마라는 존재가 내게 불행을 심고, 악몽을 꾸게 하고, 나아가 내 목숨을 위협할지도 모르는 존재라고 생각하니, 당연히 두려웠다.
그리고 그 두려움의 본질은 예측할 수 없고, 겪어보지 못했던 ‘낯섦’에서 오는 공포였다.
예측할 수 없어 두려운 건 지금도 마찬가지였다.
“그런데 알면 알수록 인간과 다를 바가 없다는 생각이 들어.”
그 말을 들은 산이 재미있다는 듯 웃었다.
“그래서? 이제 좀 친근하게 느껴져?”
“아니.”
고개를 저은 강이 답했다.
“그래서 더 무서워졌어.”
“…….”
“나랑 다를 게 없는 존재 같아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