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64. 네가 원한다면 (64/118)


#64. 네가 원한다면
2022.12.08.


알면 알수록 인간과 다를 바 없는 존재 같아 더 무서워졌다는 강의 말에 산이 웃었다.

그 웃음의 의미가 뭘까, 그녀는 곰곰이 생각했다.

말도 안 된다고 느꼈던 걸까?

아니면 동조의 뜻이었을까.


“그래서? 이제 좀 친근하게 느껴져?”

“아니.”

고개를 저은 강이 답했다.


“그래서 더 무서워졌어.”

“…….”

“나랑 다를 게 없는 존재 같아서.”

그녀가 가진 불안이 공기를 통해 고스란히 그에게 전해졌다.

막연한 공포와는 확연히 다른 결의 두려움이었다.

산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강은 언젠가 그가 몽마와 인간은 단지 먹는 게 다를 뿐이라고 했던 말을 떠올렸다.

그때는 잘 이해하지 못했던 말의 의미를 이제야 좀 알 것 같았다.

오늘 낮에 벌어진 일이 유독 더 마음에 걸렸던 건 그 때문일지도 모른다.

타협이 필요할 때였다.

사람과 사건을 바라보는 관점이 너무나도 다른 것에 대해.


“널 이해하지 못하는 건 아니야.”

날 때부터 주변의 모든 게 위협이었을 그의 상황을 알기에 그랬다.


“그런데 평범한 인간인 나한테는 이 모든 게 너무 버겁고 어려워.”

이미 주변에 녹아든 사람을 갑자기 의심해야 하는 일도.

앞으로 다가올 숱한 인연들을 분리하고 경계부터 해야 한다는 것도.

모든 게 그녀한테는 감당하기 힘든 일이었다.

끊임없이 사람을 만나고, 대중 앞에 서야 하는 직업을 가진 탓에 더더욱 그랬다.

그래서 그녀는 진중히 제안했다.


“나도 위험한 상황은 만들지 않도록 최대한 노력할게. 그러니까 앞으로는 너도 내 주변인들이 평범한 인간이라는 전제하에 상대를 대해줬으면 좋겠어.”

상대를 무조건 몽마라고 의심부터 하는 그에게 전제를 바꿔달라는, 다소 무리가 있는 요구였지만, 적어도 이곳이 인간들의 세계인 이상 어쩔 수 없는 부분이었다.

그런데 가만히 이야기를 듣던 산이 말했다.


“강아.”

“응?”

“네가 뭘 좀 오해하고 있는 것 같은데.”

“…….”

“나는 양신휘 정체가 뭐든 상관없어.”

그의 말뜻을 한 번에 이해하지 못한 강이 느리게 눈을 한번 깜빡였다.


“인간이든, 몽마든 걸리적거리는 게 싫은 거니까.”

그저 정체가 뭐든지 간에 둘 사이에 끼어들 수 있는 ‘여지’를 가진 존재가 싫단다.

그러니 연애 상대로 발전할 일말의 가능성이라도 품고 있는 인간 남자 역시 그저 경계 대상일 뿐이라고.

비단 양신휘만의 이야기는 아니라는 뜻이었다.


“아…….”

강의 입이 스르르 벌어졌다.

애초에 타협을 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었다는 생각에 어딘가 기운이 빠졌지만, 사실 그리 놀랄 일도 아니었다.

이런 태도는 그가 반을 대하는 반응과 별반 다르지 않았기 때문이다.

협상 결렬.

네 글자를 떠올린 그녀가 속으로 한숨을 삼켰다.

그런데 산이 전에 없이 서늘해진 얼굴로 다시 물어왔다.


“그리고 양신휘가 인간이면 뭘 어쩌게?”

“그게 무슨…….”

“사귀기라도 하게?”

“뭐?”

사실 강은 거기까지는 생각도 해본 적 없었다.

물론 신휘가 자꾸 신경 쓰이고, 마음이 가는 건 맞지만 그건 이성 간의 호기심이라기보단 연민에 가까운 감정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걸 산에게 해명해야 할 이유도, 그에게 이런 구속감을 느낄 이유도 없었다.

게다가 오는 여자 안 막는다던 한산이 아니었던가.

목덜미에 립스틱이나 묻히고 다니던 그에게 이런 추궁을 당하고 싶지는 않았다.


“왜? 너는 연애해도 되고, 나는 안 돼?”

말투가 불퉁하게 나가버린 건 그 때문이었다.

그런데 산은 뭔가 의아하다는 듯한 반응이었다.


“연애……?”

“그래.”

“내가?”

“했잖아. 그러니까 나도 할 거야.”

되묻는 태도가 뻔뻔하다고 생각해 살짝 언성이 높아져 버렸다.

생각지도 못했던 부분에서 평정심을 잃어버린 기분이었지만, 이미 주워 담기엔 엎질러진 물이었다.

하지만 산은 여전히 모르겠다는 얼굴이었다.

강은 그가 다 알면서 저를 약 올리고 있는 게 분명하다고 생각했다.

그녀의 표정이 한층 싸늘해졌다.


“얼마나 됐다고 기억이 안 난다는 표정이야?”

“…….”

“아니면 너한테는 하룻밤 지나고 나면, 아무것도 아닌 일이라 그래? 너무 자주 있는 일이라?”

좀 알아듣게 얘기를 해달라고 말하려던 참이었다.

하지만 강은 도무지 끼어들 틈을 주지 않았다.


“그렇잖아. 목덜미에 보란 듯이 립스틱 자국이나 묻히고 다니는 게 연애가 아니면 뭐냐고.”

“…….”

“손톱자국은 왜 새기고 다녀? 그리고 뭐? 힘이 장난 아니야? 기술이 좋다고? 누가 그런 거 알고 싶대?”

개방적인 연놈(?)들은 원래 낯부끄러운 줄도 모르는 거냐며 그녀가 쏘아붙였다.

화내고 싶지 않아, 다잡으려던 마음은 이미 우주 밖으로 사라진 모양이었다.

씩씩대는 강을 앞에 두고, 산은 차분히 그녀의 말을 되새겼다.

그런 그의 뇌리를 스친 건, 얼마 전 제인이 집에 쳐들어왔던 날의 기억이었다.

정확히는 그날 강이 보였던 반응에 대한 기억.

뒤늦게 그녀가 한 말의 의미를 파악한 산은 잠시 황당한 기분을 느껴야 했지만, 이내 웃어버리고 말았다.


“웃음이 나오니?”

그렇게 묻는 강의 얼굴에선 완전히 웃음이 사라져버렸다.

그는 소리 내어 웃지 않도록 입꼬리 끝에 힘을 주어, 웃음을 삼켰다.

그러고는 거리를 좁혀 다가간 뒤, 사뭇 진지한 태도로 물었다.


“나 궁금한 게 있는데.”

“뭐, 뭐야.”

갑자기 좁혀진 거리에 당황한 그녀가 등을 물렀지만, 그가 벌어진 거리만큼 다가가며 도로 거리를 좁혔다.


“넌 내가 연애하는 게 싫은 거야, 아니면 네가 연애를 못 하는 게 싫은 거야?”

“……뭐?”

 

 
강은 말문이 턱 막혀버렸다.

둘 사이에 짧은 침묵이 흘렀다.

일순 공기의 흐름마저 묘하게 바뀌어버리고 말았다.

그리고 여기.

덩달아 숨을 죽이게 된 두 사람…… 아니, 한 명의 천인과 한 마리의 늑대개가 있었으니.


“쟤네 뭐 하는 거야?”

“저도 잘은 모르겠는데, 연애 어쩌구 하는 거 같아요.”

바로 설성과 로미였다.

강이 사는 아파트 건너편 건물의 옥상에 올라가 주변을 정찰 중이던 둘은 유난히 고요한 밤이 평화롭다고 여기던 중이었다.

그러다 산이 찾아온 걸 보게 되었고, 본의 아니게 두 사람의 모습을 훔쳐보는 중이었다.


“분위기가 좀 묘한 것 같은데, 나만 그렇게 느끼는 거니?”

설성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로미에게 물었다.

그러자 로미가 대답했다.


“저희 주인님 분위기가 워낙 야시꾸리한 것도 있는데, 확실히 일방통행은 아닌 것 같긴 해요.”

“그렇지?”

“네. 다투는 것 같긴 한데…… 느낌이 좀…… 사랑싸움 같달까?”

그녀는 저도 모르게 자꾸만 귀를 쫑긋거렸다.

하지만 지켜보던 설성이 로미의 양쪽 귀를 손바닥으로 막으며 말했다.


“그래도 우리 선은 넘지 말자. 남의 사생활이나 훔쳐보는 염탐꾼이 된 것 같잖아.”

“그러려고 내려오신 거 아니에요?”

“저런 거 훔쳐보려고 온 건 아니야.”

크흠!

설성이 주먹을 말아 헛기침을 하더니, 다시 말을 이었다.


“분위기로 보아하니, 네 주인이 살상할 것 같진 않구나.”

“살상이요? 어휴, 무슨 그런 무서운 말씀을 하세요. 저게 어딜 봐서 살상할 것 같은 눈빛이에요? 당장이라도 잡아먹을 것 같은…….”

로미가 나오는 대로 말을 하다가 앞발로 제 입을 턱 막았다.

그러자 설성이 안경을 추어올리며 눈을 빛냈다.


“역시 살상이려나?”

“아니에욧!”

그녀가 마구 고개를 저었다.

그러자 설성이 피식 웃으며 말했다.


“농 한번 던져봤다. 놀라기는.”

그렇게 말한 그녀가 로미의 머리를 쓰다듬어주며 물었다.


“그런데 넌 어디 다녀오는 길이지? 평소보다 늦은 것 같은데?”

“아. 회사 식구 하나가 다쳐서 병문안 다녀오는 길이에요.”

“회사 식구? 너 회사도 다니니?”

“후후. 제가 이래 봬도 인간 세상에선 꽤 유명하답니다.”

로미가 자신의 아이돌 시절부터 배우까지의 필모를 장황하게 떠들어댔다.


“연예인을 하고 있다고?”

“네. 제 인간형 외모가 꽤 깜찍하거든요. 한번 보실래요?”

그녀가 일어나 공중제비를 한 바퀴 돌았다.

순식간에 안개가 흩어지는 형상과 함께 인간 로미의 모습이 드러났다.


“짠. 어때요? 깜찍하죠?”

“세상에…….”

설성이 눈을 동그랗게 뜨며, 그녀의 모습과 재롱을 귀여워했다.

주변을 한번 살피던 로미가 다시 늑대의 모습으로 돌아와서는 얌전히 설성의 옆에 앉았다.


“주변 정찰은 네 주인이 부탁한 거니?”

“정찰은 그냥 의무적으로 하고 있고, 주인님이 부탁한 건 사실 따로 있어요.”

“어떤 거?”

“강이 언니의 친구가 되어달라는 거요.”

앞발에 턱을 괸 채 강의 집 발코니를 바라보던 로미가 조금 시무룩해진 얼굴로 말을 이었다.


“그런데 언니가 곁을 잘 안 내줘서, 쉽지 않아요. 제가 별로 마음에 안 드나 봐요.”

“그럴 리가. 이렇게 귀여운데.”

설성이 그녀의 처진 귀를 쓰다듬어주며 위로했다.

로미는 시무룩해진 와중에도 그녀의 손길이 좋았는지, 꼬리를 살랑살랑 흔들어댔다.

그 모습이 또 귀여워 설성도 웃어버렸다.


“아무튼 오늘은 네 주인이 저리 딱 달라붙어 있으니, 우리가 바쁠 일은 없을 것 같구나. 그렇지?”

“네. 그렇긴 하지만, 딱히 집에 가도 할 게 없는걸요.”

“그럼 밤새 저 둘을 지켜볼 생각이야?”

“음…….”

로미의 고민이 길어지자, 그녀가 간단명료한 해답을 내주었다.


“네 주인도 그건 불편하지 않을까? 이쯤에서 반려 수인의 센스도 필요할 것 같긴 한데.”

“그럼 집에 갈까요? 아니면 멀리 주변 정찰이나 한 번 더…….”

“우리 집에 가지 않을래?”

“천계요?”

“아니. 나도 여기에 터를 잡았거든.”

“네?!”

“당분간은 인간들 틈에 섞여 살아야 할 것 같아서.”

그녀가 의미심장한 미소를 띠며 웃었다.

.
.
.

한편.

말문이 막혔던 강은 바로 반격하지 못하고 눈만 깜빡거렸다.

그리고 산은 느긋하게 그녀를 또 한 번 몰아세우는 중이었다.


“말해봐. 내가 연애하는 게 싫은 건지, 아니면 네가 연애를 못 하는 게 싫은 건지.”

갑자기 얘기가 왜 거기로 튀냐고 외칠 뻔했지만, 흥분이 앞서 감정을 드러내 버린 건 한 번으로 족했다.

그래서 그녀는 애써 목소리를 더 누르며 대답했다.


“네 연애를 싫어할 이유도 없고, 내가 연애 못 할 이유도 없어. 그게 답이야. 됐어?”

당연하게도 서로가 침범해서는 안 될 영역이었다.

아니, 자신이 그에게 구속감을 느낄 이유가 없는 것처럼 자신도 그에게 그럴 권리가 없었다.

없는데……. 그럴 권리가 없다는 거 머리로는 너무 잘 아는데…….

왜 이렇게 낯이 뜨거워지는 걸까.

마치 겉 다르고, 속 다른 사람이 된 것 같은 기분이었다.

그래서 더 마주한 시선이 버거웠지만, 강은 꿋꿋하게 산의 눈을 바라보았다.

여기서 먼저 시선을 피해버리면, 제 말에 진정성이 의심받을 거라 여겼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도 만만치 않았다.

마치 속내를 꿰뚫기라도 할 요량으로 빤히 그녀를 바라보았다.

치열한 눈싸움이 오간 후.

한참을 물러서지 않던 산이 못 이긴 척, 먼저 거리를 벌려주며 웃었다.


“그래, 무슨 말인지 알겠어.”

“…….”

“그럼 이제 내가 널 위해 뭘 해주면 될까?”

“뭐를 더 해달라는 게 아니야. 그냥…….”

“역시 정체를 확실히 아는 편이 더 낫겠어?”

산이 꽤 상냥하게 물어왔다.


“말만 해.”

“…….”

“네가 원하면 어떻게든 알아 올 테니까.”

그렇게 말한 그는 손목에 찬 시계를 한번 확인한 후, 말을 이었다.


“병원엔 보는 눈이 너무 많으니까 양신휘는 일단 패스하고, 제인부터. 그럼 됐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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