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5. 너는 내 희망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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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5. 너는 내 희망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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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5. 너는 내 희망이니까
2022.12.11.
“말만 해.”
“…….”
“네가 원하면 어떻게든 알아 올 테니까.”
그렇게 말한 그는 손목에 찬 시계를 한번 확인한 후, 말을 이었다.
“병원엔 보는 눈이 너무 많으니까, 양신휘는 일단 패스하고, 제인부터. 그럼 됐지?”
“어떻게 알아 올 건데?”
“전에 말했잖아.”
몽마의 정체를 밝혀낼 방법은 두 가지.
스스로 밝히던가.
신체 어딘가에 새겨진 숫자를 찾아내는 것.
그러니 그가 어떻게 제인의 정체를 밝혀낼 것인가에 대한 답은 뻔했다.
“……너는 그게 쉬워?”
꽤 오랫동안 입이 떨어지지 않았던 걸 생각하면, 꽤 허무하고도 우스운 질문이었다.
의미 없는 반복에 불과했으니까.
산은 강의 얼굴이 복잡미묘하게 일그러지는 장면을 말없이 눈에 담았다.
그러다 조금 늦은 대답을 했다.
“쉽든, 안 쉽든 나는 네가 원하는 일이면 할 거야. 기꺼이.”
그렇게 말하는 그의 표정이 너무나 진중해서 혹시 내 핑계 대고 거나하게 즐기다 오려는 건 아니냐는 반문은 쏙 들어가 버렸다.
혼란으로 물든 눈동자가 잘게 떨렸다.
그리고 그 떨림은 고스란히 음성에 묻어나왔다.
“왜 나 때문에 그렇게까지 하려고 해?”
뭉그러지듯 흘러나온 말에 그가 가까이 다가가 허리를 숙였다.
거리가 조금 더 가까워졌고, 부드러운 표정으로 강을 바라보던 산은 느리게 입을 뗐다.
“너는.”
“…….”
“내 희망이니까.”
대답이 없는 그녀를 보며, 그가 조금 웃었다.
“그러니까 다른 거 생각하지 말고, 너만 생각해.”
“…….”
“네가 하고 싶은 거, 네가 원하는 거, 네가 얻고 싶은 결과만 생각하라고. 과정은 내가 알아서 할 테니까.”
산이 자리에서 일어서며, 강의 뺨을 제법 아프게 꼬집었다.
“아야!”
따끔함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꿈에 잠겨 있다가, 급격히 현실로 되돌아온 것처럼.
“하여간, 너는 생각이 너무 많아서 문제야.”
“…….”
“좋으면 좋다. 싫으면 싫다. 그게 어려워?”
그가 의미심장한 말과 함께 돌아섰다.
“한 시간 안에 끝내고 올 테니까, 잠들지 말고 있어.”
산이 그대로 문을 열고 나가려고 할 때였다.
하지만 강은 이번만큼은 그를 이대로 보내선 안 된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망설임 없이 산을 불러세웠다.
“산아.”
그가 걸음을 멈추고 뒤를 돌아보았다.
빠르게 다가간 그녀가 산의 옷깃을 붙들며 비장하게 눈을 빛냈다.
그가 한 말처럼 때론 장황한 이유보다 단순하고 명료한 답을 골라야 할 때가 있다.
그녀는 지금이 바로 그때라고 생각했다.
“가지 마.”
“뭐?”
강은 또렷한 음성으로 다시 한번 말했다.
“가지 말라고.”
그때는 차마 건넬 수 없어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던 말이지만, 오늘도 이 말을 하지 못하면 후회할 것 같았다.
조용히 그녀를 응시하던 그가 이유를 물었다.
“왜?”
당연한 질문이었다.
하지만 그 당연한 질문에 준비된 답은 없었다.
“싫으니까.”
“네가 내 연애를 싫어할 이유가 없다며.”
이유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래도 그를 붙든 건 어떤 일이든 제 손으로 후회할 일을 만들고 싶지 않아서였다.
산이 어떤 형태의 연애를 하든, 또 어떤 방식으로 여자를 대하고, 어떤 모습으로 사랑을 하게 되든.
그 마음이 너무도 진중해 정말로 그를 보내줘야 하는 게 아니라면.
적어도 저와 함께 있는 동안은 스스로 후회가 될 만한 일은 만들지 말아야겠다고 생각했다.
“네가 끄덕일 만한 이유 같은 거 없어. 그냥 싫어서 싫다고 한 것뿐이야.”
그녀의 답에 산은 방금 자신이 했던 말을 강이 제법 잘 알아들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기특해서 머리라도 쓰다듬어줘야 하나 생각하는데, 그녀가 다시 말을 이었다.
“그리고 네가 하려는 거 연애 아니야.”
“…….”
“말 그대로 연애(戀愛)잖아. 그건 즐기는 게 아니라, 사모하고, 그리워하고, 사랑한다는 거니까.”
몸을 주는 게 아니라, 마음을 주는 일이라고.
“나를 고리타분하고, 재미없는 애라고 생각해도 상관없어.”
산이 이걸 어떻게 받아들일지는 모르겠지만, 더 이상 다른 신념 앞에서 움츠러드는 건 하지 않기로 했다.
마음을 굳힌 강이 눈을 부릅뜨며 그의 손목을 세게 잡았다.
그러고는 훈계라고 느껴도 좋다는 다짐으로 말했다.
“잠은!”
“…….”
“사랑하는 사람이랑 자는 거야!”
알겠니?
그렇게 외친 그녀가 홱 돌며 말했다.
“빨리 와. 나 졸려.”
산은 강에게 잡혔던 손목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발을 구르며 멀어지는 그녀의 뒷모습을 길게 바라보았다.
한바탕 혼쭐이 난 학생이 된 것 같은 기분이었다.
하지만 이내 어깨를 한번 으쓱인 그가 항복하듯 양손을 들고는 그녀를 뒤따랐다.
“그래, 뭐. 네가 싫다면 하지 말아야지.”
복잡할 이유 있나.
나의 ‘갑’이 싫으시다는데.
그렇게 수긍은 했지만, 어쩐지 웃음이 났다.
산이 문을 열고 들어갔을 때, 강은 이미 침대 위에 누워 턱 끝까지 이불을 덮은 채였다.
곁에 앉은 그는 이쯤에서 그날의 진실을 고백해야겠다고 마음먹었다.
“믿어줄지 모르겠지만.”
“…….”
“그날 네가 생각하는 일 같은 건 없었어.”
그녀는 산이 제인과의 일을 이야기하고 있다는 걸 단번에 알아들었다.
그래서 이불을 홱 내리고는 제법 날카롭게 쏘아붙였다.
“그럼 립스틱 자국은 뭔데? 손톱자국은? 뜯어진 셔츠는?”
기다렸다는 듯 강이 맹공을 퍼부었지만, 산은 크게 동요하지 않았다.
잘못한 게 없으니, 찔릴 이유가 없어서였다.
“혹시 방어흔이라고 알아?”
“방어흔?”
“말했잖아. 한판 떴다고.”
“그 말은…… 제인이 일방적으로 덤비기라도 했다는 거야?”
“너한테 거짓말해서 뭐 하게.”
그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이었다.
“걔 내 취향 아니야. 취향 아닌 여자 안을 만큼, 굶주리지 않았고.”
이렇게까지 말하는데, 좀 믿어주는 게 어떻겠냐고 했지만, 강은 좀처럼 의심의 눈초리를 거두지 못했다.
결국 산이 쐐기라도 박듯 말했다.
“만약에 내가 겉모습만 보고 즐기는 놈이었으면.”
“…….”
“제일 먼저 너부터 잡아먹었을걸.”
나름의 결백이었다.
그런데 예고도 없이 폭탄을 맞은 그녀는 얼굴이 새빨개져 버리고 말았다.
“누가 잡아먹게 둔대?!”
버럭 외친 강이 이불을 뒤집어쓰고 돌아누워 버렸다.
얼굴이 식지를 않았다.
.
.
.
제인이 연락을 해온 건 바로 다음 날이었다.
모처럼 요리를 했는데, 혹시 아직 식사하지 않았으면, 같이 먹는 게 어떻겠냐는 거였다.
때마침 쉬는 날이었고, 삼영이 집에 와 있던 터라 이야기했지만, 제인은 사람은 많을수록 좋다고 했다.
그러면서 슬쩍 산이 함께 있는지 확인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 그럼 혹시 핫가이 씨도 같이 있나?
“실장님은 오늘 쉬는 날이라, 외출하신 걸로 알고 있어요.”
볼일이 있어 집을 비울 거라는 이야기를 들은 탓에 그대로 전달하니, 제인의 목소리에선 못내 아쉬움이 묻어나왔다.
- 그으래? 그럼 어쩔 수 없지, 뭐. 허니가 먹어보고 맛있으면, 나중에 내 요리 실력이나 좀 전해줘.
“그럴게요.”
예의상 대답을 하곤 전화를 끊었다.
강은 이미 통화가 끊어진 휴대폰을 물끄러미 바라보며 생각했다.
‘혹시 방어흔이라고 알아?’
‘말했잖아. 한판 떴다고.’
그렇게 말했던 어젯밤 그의 말이 자꾸 생각났다.
이제라도 알게 되어 다행이었다.
이참에 산의 입장을 확실히 알게 되었으니, 제인에게도 그의 입장을 제대로 전달하는 편이 낫겠다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세상에, 웬일이야. 나 제인 실제로 처음 봐.”
아무것도 모를 삼영은 그저 신기하다며, 발을 동동거렸다.
얼마 지나지 않아 제인이 등장했다.
“헤이, 허니. 롱 타임 노씨. 하와–ㄹ 유.”
오늘도 버터 한 바가지를 말아먹은 듯한 발음으로 경쾌하게 나타난 그녀가 삼영을 보곤 격하게 반응했다.
“오우, 왓 어 미스터 큐티!”
특유의 친화력으로 아무 말이나 하던 제인이 삼영을 왼쪽, 오른쪽으로 끌어안으며 뺨을 비비고 웅와웅와 소리를 내며 서양식 인사를 했다.
“아이고, 아이고. 이거 참, 몸 둘 바를.”
종이 인형처럼 흔들리던 그가 그녀의 풍만한 가슴에 파묻혀 앓는 소리를 냈다.
한바탕 요란한 인사가 끝났다.
상기된 얼굴의 삼영이 땀이 흥건한 손바닥을 허벅지에 벅벅 문지른 뒤 내밀었다.
“마이네임 이즈 삼영 리. 암 유어 팬. 리얼 팬.”
아는 영어를 총동원해 대화를 시도하는 걸 보니, 그녀의 고향이 충남이라고 까발리며 웃던 건 새까맣게 잊은 듯한 모습이었다.
“예아. 나이스 투 밋유.”
“아이 보우트 유어 마늘 절구.”
“왓?”
“라방으로 파시던 절구 있잖아요. 마늘 빻는 거. 갈릭! 찹찹! 저, 그거 샀거든요. 바이의 과거형. 보우트. 헤헤.”
“오우, 땡큐, 땡큐. 포테이토 필러도 샀어요? 감자 깎는 칼.”
“아, 그건 있어서…… 하하.”
“노노. 데얼 이즈 셋뚜셋뚜. 같이 사야 훨씬 저렴한데.”
“지금 쓰는 거 망가지면 꼭 살게요.”
“말이라도 땡큐, 스윗.”
한국말이 반 이상인 이상한 대화를 듣고 있던 강이 작게 웃음을 터트렸다.
둘은 제법 죽이 잘 맞는 것 같았다.
옹기종기 모인 셋은 나란히 앉아 제인이 만들어온 해산물 요리를 먹었다.
엄마에게 살림 하나는 야무지게 배웠다고 자부하던 그녀였던지라 제법 기대했지만, 솔직히 음식 맛은 별로였다.
덜 익고, 싱겁고, 비린내 나고.
하지만 만들어 온 성의를 생각해 강은 군말 없이 음식을 먹었다.
삼영도 레몬과 청주와 소금 생각이 간절했지만, 제 허벅지를 필사적으로 꼬집으며 내색하지 않았다.
제인이 산의 이야기를 떠들어대기 시작한 건 얼마 지나지 않아서였다.
“한 실장님 말이야. 진짜 보면 볼수록 내 스타일인 거 있지? 너무 섹시해.”
“에? 산이를 아세요?”
“그럼요. 우리 네이버후드인걸.”
“아…….”
삼영도 전혀 듣지 못했던 이야기라 조금 놀란 듯했지만, 이웃이라는 말에 곧 수긍했다.
오며 가며 자주 봤겠구나 싶어서.
그런 그의 반응을 빤히 주시하던 제인이 픽 웃었다.
“더한 일도 있었는데, 알려줄까요?”
“네? 무슨 더한 일이요?”
설마 그날 밤 일을 말하려는 건가 싶어 강이 끼어들려고 했지만, 그녀의 입은 촉새만큼이나 빠르고 가벼웠다.
“내가 밤에 찾아갔었잖아.”
“어디를요?”
“핫가이네 하우스.”
“……산이네 집을 찾아갔다고요? 왜요?”
“한번 자고 싶어서.”
“어머! 미친……!”
말릴 틈도 없어 쏟아진 제인의 폭탄 발언에 삼영의 얼굴이 경악으로 물들었다.
튀어나올 뻔한 욕을 간신히 삼켰으니 말 다 한 셈이었다.
내내 호감 어린 시선으로 그녀를 바라보던 그의 눈빛과 태도가 짜게 식어버린 것도 그때부터였다.
“밤새 어찌나 생각나던지. 근래 만났던 남자들 중에 최고인 거 같아. 아, 생각만 해도 또…….”
위험수위를 아슬하게 넘나드는 제인의 화법에 그날의 진실을 모두 알고 있는 강도 슬쩍 미간을 찌푸렸다.
아마 자신이 그날 일에 대해 모른다고 여기는 것 같았다.
자존심이 있으니 진실을 밝힐 생각은 없더라도, 이렇게까지 자랑할 일인가 싶을 만큼 과했다.
순식간에 산을 문란한 사람으로 만들어버린 건 둘째 치더라도, 꼭 듣고 있는 자신의 반응을 떠보기라도 하려는 것처럼.
정적을 깬 건 의외로 삼영이었다.
“이상하네요.”
“뭐가?”
“그쪽은 별로 산이 스타일 아닌 거 같은데.”
“그래요? 그럼 한 실장님 어떤 스타일 좋아하는데?”
“몰라요. 근데 그쪽은 확실히 아니에요.”
“어뭐뭐! 별꼴이야! 이 오뽜 되게 웃긴다!”
제인이 깔깔대고 웃었다.
강은 그런 그녀의 모습을 가만히 지켜봤다.
그녀가 이제껏 봐왔던 제인은 밝고 호탕한 사람이었다.
하지만 그게 다였다.
좋은 친구는 될 수 있을지 몰라도, 산에게 좋은 여자친구가 되어줄지는 잘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니, 이 이상으로 계속 얽혀도 되는 사람인지조차 모르겠다.
정체를 떠나 자신과는 신념이 너무 다른 사람이었다.
게다가 그녀의 말처럼 진정성은 눈으로 볼 수 있는 게 아니지 않은가.
더 이상 제인의 무엇도 읽히지 않는다는 느낌을 받았다.
고민하던 강이 조용히 입을 열었다.
“있잖아요, 제인.”
“응?”
결혼은 왜 하려던 거예요?
그렇게 물으려다 질문을 바꾸었다.
“한 실장님한테 진심이에요?”
“진심이야. 자고 싶어.”
“아니, 그런 거 말고 정말 진지하게 만나보고 싶은 생각 있냐고요.”
“그건 아직 모르겠지만, 맛은 보고 싶어.”
말이 안 통했다.
삼영은 이제 완전히 그녀에게 오만 정이 뚝 떨어진 얼굴이 되었다.
하지만 그가 자신을 어떻게 보든 말든 전혀 개의치 않던 제인은 강을 빤히 바라보다 물었다.
“이제 내가 물어봐도 돼?”
“뭐를요?”
“허니, 혹시 한 실장 좋아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