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6. 흑야(黑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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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6. 흑야(黑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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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6. 흑야(黑夜)
2022.12.15.
“허니, 혹시 한 실장 좋아해?”
그 말은 잔잔한 호숫가에 던져진 돌멩이였다.
그리고 거기에 얻어맞은 건 강이 아니라, 삼영이었다.
경악으로 물든 그의 표정이 딱, 돌에 얻어맞은 개구리 같았기 때문이다.
“맞네, 맞네. 이 오뽜 표정 보니까 맞네.”
삼영의 반응을 본 제인이 더 놀려먹고 말겠다는 듯 사악하게 웃었다.
“세상에, 진짜야? 진짜라면 너무 로맨틱한 이야기잖아! 여배우와 경호원의 러브 스토리라니!”
두 손을 모아 얼굴 옆에 가져다 댄 그녀는 꿈꾸는 듯한 표정을 짓더니, 이내 웃음기를 지우며 심각한 표정을 지었다.
“잠깐.”
그러더니 입꼬리가 다시 올라간다.
“러브 스토리가 아니라 대형 스캔들인가? 기자들이 물어뜯기 딱 좋은 먹잇감이잖아?”
제인의 짓궂은 화법에 화들짝 놀란 삼영이 들고 있던 숟가락을 떨어트렸다.
“무, 무,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는 겁니까?!”
“뭐야, 이 오뽜. 똥 싼 놈이 성낸다더니, 왜 이렇게 오버해? 오뽜보고 좋아하냐고 물어본 것도 아닌데?”
“너무 터무니없는 소리를 하니까, 그렇죠!”
스캔들이라니.
이제 막 날개 달고 날기 시작한 20대 여배우에게는 너무 치명적인 단어라 지나치게 날 선 반응을 보이고 말았다.
삼영은 말려버린 자신을 탓하며, 얼른 화제를 돌렸다.
“그리고 똥이 아니라 방귀입니다!”
“왓에버. 방귀나 똥이나.”
그녀의 말처럼 지레 더 놀란 삼영과 달리 강은 이렇다 할 표정의 변화도 없었다.
그저 조용히 되물었다.
“내가 좋아한다고 하면, 제인은 마음을 접을 건가요?”
놀란 삼영이 눈빛으로 ‘먹이 투척 금지’를 외쳐댔지만, 강은 아랑곳하지 않고 담담한 표정으로 제인의 대답을 기다렸다.
“……오오?”
당연히 아니라는 대답이 돌아올 줄 알았는지, 그녀는 꽤 놀란 표정이었다.
그러다 재미있다는 듯 웃으며 다시 입을 열었다.
“애인이 있는 놈이든, 마누라가 있는 놈이든 난 그런 거 신경 안 써.”
역시나 실망스러운 대답이었지만, 예상을 크게 벗어난 답도 아니라 놀라지는 않았다.
그런데 그녀의 답은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하지만.”
……하지만?
거기까지 말한 제인은 꽤 오래 말을 고르는 듯했다.
그렇게 잠시 침묵이 이어졌고, 그녀는 곧 썩 내키지는 않지만, 어쩔 수 없다는 듯한 표정으로 마저 말을 이었다.
“상대가 리버라면 이야기가 달라질 거 같아.”
“…….”
“나는 리버도 좋아하니까.”
강은 의외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건 제인도 마찬가지였는지, 제가 뱉어놓고도 믿을 수 없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오 마이 가쉬. 내가 이런 촌스러운 대답을 하다니.”
제 머리를 쥐는 시늉을 하던 그녀는 곧 무언가를 깜빡했다는 듯 호들갑을 떨었다.
“아! 맞다! 오븐에 크럼블 구워놓고 안 가져왔어! 얼른 가서 가져올게!”
벌떡 일어난 그녀가 구워놓은 디저트를 가지고 오겠다며 부리나케 자리를 벗어났다.
정말로 잊은 게 생각났던 건지, 아니면 괜히 낯부끄러운 마음에 자리를 피하려 한 건지는 알 수 없었다.
현관에서 신발을 구겨 신던 제인이 외쳤다.
“참! 스캔들 얘기는 농담인 거 알지? 어우, 웃자고 한 말에 죽자고 달려드는 저 오뽜 때문에 나만 썅X 됐잖아.”
그녀가 삼영을 슬쩍 흘겨보다가 다시 손을 번쩍 들었다.
“아무튼 나, 금방 다녀올게! 조금만 기다려!”
그러더니 요란하게 문을 열고 나가다가 어깨를 부딪쳤다.
제인은 죄 없는 문을 향해 가운뎃손가락을 들며 뻐킹을 외치고 사라졌다.
그렇게 한바탕 폭풍이 지나간 자리.
삼영이 10년은 늙은 듯한 얼굴로 말했다.
“강아.”
“응?”
“쟤도 정상은 아닌 것 같다. 친하게 지내지 마.”
그녀는 그저 웃고 말았다.
상대가 자신이라면 이야기가 달라질 것 같다는 대답은 확실히 의외였지만, 그뿐이었다.
말이라는 게 마음먹기 따라 얼마나 달콤해질 수 있는지 잘 알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한편으론 차라리 잘된 걸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제인이 오히려 너무 괜찮고, 자신과도 잘 맞는 사람이었다면, 계속되는 의심과 죄책감 속에서 불편한 만남을 이어갔을 테니까.
삼영은 제인이 다시 올 거라는 게 영 내키지 않았는지, 현관문을 가늘게 노려보며 말했다.
“그냥 문을 잠가버릴까?”
“아니야. 어차피 오늘 이후로는 잘 못 볼 것 같은데, 마무리라도 잘해야지.”
강이 걱정하지 말라며 그를 다독이고는 곧장 말을 이었다.
“아. 그리고 오빠.”
“응?”
“제인이 산이를 찾아갔던 건 사실이지만, 둘이 아무 일도 없었대. 그러니까 아까 제인이 했던 말 곧이곧대로 믿지 마. 산이 그런 애 아니야.”
굳이 해명한 건 혹시라도 산이 오해를 받는 게 싫어서였다.
그런데 그 이야기를 들은 삼영이 웃으며 말했다.
“당연하지. 산이는 너를 좋아하잖아.”
그의 말에 강은 얼마 전 산이 차 안에서 삼영에게 했던 말을 떠올렸다.
신휘를 칭찬하며 은근슬쩍 분위기를 종용하던 삼영에게 산은 자신이 강을 좋아하고 있으니, 앞으로는 제 앞에서 그런 이야기는 꺼내지 말라고 했었다.
‘강이가 다른 남자랑 연애하는 거. 상상만으로도 돌아버릴 거 같거든요.’
그땐 그냥 입이 무거운 삼영을 상대로 꽤 영리한 대처를 했다고만 생각했다.
아마 그게 삼영을 절대적 아군으로 만들 가장 빠르고 확실한 방법이었을 테니까.
그녀는 조용히 그를 바라보다 물었다.
“오빠.”
“응?”
“산이가 나 좋아한다는 말, 믿어?”
“음…….”
삼영은 꽤 진지하게 고민하다 대답을 이었다.
“처음엔 그냥 너 연애 못 하게 하려고 수작 부리는 건 줄 알았어. 일거리가 많아지면 골치 아파질 테니까.”
“근데?”
“근데 지금 보면 산이가 확실히 널 좋아하는 것 같긴 해.”
“…….”
“널 보는 눈빛이나, 너한테 하는 모든 행동에 애정이 있는 게 느껴지거든.”
그의 말과 동시에 어젯밤 산이 했던 말이 떠올랐다.
‘너는 내 희망이니까.’
여러 가지 일을 종합해보니, 삼영이 느꼈던 게 어떤 건지 알 것도 같았다.
산이 자신을 어떤 눈빛으로 바라봤을지 너무나 눈에 선했기 때문이다.
조금 의외인 건, 그걸 주변에서 알아챌 만큼 티를 냈다는 거고.
그런데 삼영이 바로 말을 보탰다.
“산이 걔 진짜 여우야.”
“왜?”
“다른 사람 앞에서는 절대 티 안 내는데, 꼭 내 앞에서만 그래.”
그의 말에 강이 웃으며 말했다.
“오빠가 편한가 보다.”
“사람을 꿰뚫어 본 거지. 너희들 사이에 어떤 비밀이 생기든 내가 결국엔 너희 편을 들어줄 수밖에 없다는 걸 아는 거야, 걔도.”
그녀가 눈을 빛내며 진지하게 물었다.
“그래서?”
“뭐가 그래서야?”
“만약에 우리가 정말 엄청난 비밀을 갖고 있다면, 오빠는 그게 뭐든 끝까지 우리 편 들어줄 거야?”
그에 삼영이 눈을 부라렸다.
“……뭐가 있길래, 엄청난 비밀이래?”
“아니, 꼭 뭐가 있다는 게 아니라.”
“너희 진짜 사귀어?”
“안 사귀어.”
“그럼 뭐야. 그런 말은 왜 하는데, 갑자기?”
“그냥 궁금해서. 어떤 일이 있어도, 오빠만큼은 끝까지 우리 편이 되어줄지.”
“범법행위까지 감싸준다는 뜻은 아니었는데.”
하여간 사고만 치고 와보라고.
못된 짓 하고, 숨겨달라고 찾아오면 제 손으로 끌고 가 법의 심판을 받게 할 테니, 그게 뭐든 나쁜 짓 할 생각은 꿈도 꾸지 말란다.
강은 어이가 없어 웃다가, 지그시 그를 보며 미소 지었다.
“오빠가 나 아껴주는 건 알았는데, 산이도 이렇게 좋아할 줄은 몰랐어.”
“산이 정도면 괜찮지. 내가 가만히 지켜보니까 걔는 진짜 괜찮은 애야.”
“정말?”
“그럼. 너도 알지? 오빠가 사람 보는 눈 하나는 확실한 거. 연장자의 연륜을 믿어 봐.”
“그럼, 말 나온 김에 진짜 사귀어 볼까?”
그녀가 장난스레 던진 말에, 삼영이 오른손을 허공에 들어 보이며 선서라도 하듯 답했다.
“나는 찬성.”
강이 오오 소리를 내다가 웃음을 터트렸다.
그에게 본의 아니게 비밀을 만들어버렸지만, 그래도 그녀에게 삼영은 언제나 든든한 아군이자, 가족이었다.
한결같이 자신을 아껴주고 지지해주는 그가 강은 무척이나 고마웠다.
.
.
.
한편.
집으로 돌아온 제인은 오븐을 열어 구워놓은 크럼블을 꺼냈다.
“음. 냄새 죽인당.”
만족한 듯 콧노래를 부르던 그녀가 젓가락을 가져와 가운데를 푹 찔렀다 뺐다.
반죽이 속까지 다 익었는지 보기 위해서였다.
그런데 젓가락에 밀가루 반죽이 그대로 묻어나왔다.
“……뭐야. 왜 이래? 설마 예열만 하고 그냥 나갔었나?”
당황한 눈빛으로 크럼블과 오븐을 번갈아 보던 제인이 허둥댔다.
예열이 끝난 뒤 버튼을 안 누른 게 확실했다.
어쩔 수 없이 다시 오븐을 예열하는 동안 그녀는 저장고에서 와인 한 병을 꺼내 잔에 따랐다.
그러고는 그것을 냉수 마시듯 단숨에 비워냈다.
“어으, 좋다.”
인간의 음식이나 문화를 꽤 즐기는 그녀였기에, 인간 세상에 산다는 것 자체가 제인에겐 꽤 커다란 즐거움이었다.
아쉬운 게 한 가지 있다면.
“리버 보디가드만 어떻게 넘어와 주면 더할 나위 없이 즐거울 텐데.”
아직 산을 유혹하지 못했다는 것.
“스읍. 너무 어렵단 말이지.”
제인이 입안에 맴도는 쌉쌀한 포도주를 음미하며 중얼거렸다.
어떻게 된 일인지는 몰라도, 그날 이후 산을 만나는 게 쉽지 않아 도통 진전이 없었기 때문이다.
사실 오늘 강의 집을 찾아간 것도 혹시나 그를 볼 수 있을까 하는 마음 때문이었다.
그런데 보고 싶은 산은 보이질 않고, 꼰대 같은 매니저 나부랭이랑만 실컷 떠들다 돌아왔다.
“그나저나 리버랑 마운틴이랑 진짜 그렇고 그런 사인가?”
제인은 가만히 강이 했던 말을 떠올렸다.
‘내가 좋아한다고 하면, 제인은 마음을 접을 건가요?’
생각할수록 웃긴 말이었다.
“접긴 뭘 접어. 그게 종이냐? 접는다고 접어지게?”
그렇게 말은 했지만, 사실 자신이 한 대답도 썩 이해가 가진 않았다.
‘하지만 상대가 리버라면 이야기가 달라질 것 같아. 나는 리버도 좋아하니까.’
평소의 저였다면 꿈도 못 꿀 대답이었다.
왜 그랬을까.
내가 왜 그랬지?
답도 없는 자문만 되뇌던 그녀가 주먹으로 제 머리통을 쥐어박았다.
“아니, 왜 그렇게 븅신 같은 대답을 했냐고. 어? 완전 흑역사잖아.”
한참이나 자책하던 제인은 어쩔 수 없이 강과 사이가 나빠져서 득 볼 게 없으니 됐다는 결론으로 마무리했다.
와인 한 잔을 더 따른 그녀는 또 한 번 술을 비워낸 뒤, 저장고에 있던 새 와인도 한 병 챙겨 들었다.
“아끼는 술인데 특별히 나눠주는 거야. 다른 뜻은 없고, 원래 술은 다 같이 먹어야 맛있는 거니까.”
다 같이 술 마실 생각에 금세 기분이 좋아진 그녀가 콧노래를 부르던 때였다.
“……응?”
순간 등 뒤에서 불어오는 묘한 한기를 느낀 제인이 뒤를 돌아봤다.
“내가 발코니 문을 열어놨었나?”
그녀가 고개를 기웃거리다, 눈가를 가늘게 늘이며 창 너머를 응시했다.
무언가 이상한 낌새를 눈치챈 제인은 챙기던 것들을 그대로 내려놓고, 천천히 걸음을 옮겨 발코니로 향했다.
창문을 닫으려던 그녀의 시야에 저 멀리 자신을 주시하고 있는 누군가가 담겼다.
‘……저게 뭐지?’
정체불명의 존재는 검은 로브를 뒤집어쓰고 있었다.
며칠 전, 같은 위치에서 강을 지켜보았던 의문의 남자였다.
그 사실을 알지 못하는 제인은 그의 존재를 눈치챈 게 처음이었으나, 하나는 확신했다.
지금 그가 주시하고 있는 게, 바로 자신이라는 사실.
뺨을 스치는 바람이 스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