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67. 검은 로브를 쓴 남자 (67/118)


#67. 검은 로브를 쓴 남자
2022.12.18.



 


‘……저게 뭐지?’

눈을 가늘게 늘인 제인이 정체불명의 누군가를 응시했다.

로브로 거의 가려진 탓에 얼굴을 제대로 볼 수 없었지만, 키로 보나 체격으로 보나 남자가 확실했다.

안 그래도 요즘 들어 부쩍 하급 몽마들이 주변을 알짱대는 일이 늘었다고 생각하던 참이었다.


‘저놈이 몰고 온 건가?’

힘없는 하급 몽마들은 대부분 자신보다 월등히 강한 몽마들을 두려워했지만, 그들이 가는 곳에 맛있는 악몽이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

스스로 그것을 감지해낼 능력이 없으니, 슬슬 눈치를 보며 꽁무니를 쫓는 것이다.

운이 좋으면 얻어먹는 게 생길 테고, 대부분은 그렇게 삶을 연명하며 몸집을 키웠다.


“아아. 귀찮게스리.”

마음 같아선 당장이라도 날아가 저 수상한 녀석의 목을 틀어쥐고 정체를 캐내고 싶었지만, 인간 행세를 하며 사는 동안엔 튀어서 좋을 게 하나도 없었다.

적어도 밥그릇 싸움을 하게 되지 않는 이상은 말이다.

능숙하게 기척을 감춘 제인이 못 본 척 창문을 닫으려던 때였다.

그런데,


“잠깐.”

다시 고개를 돌린 그녀가 어둑한 하늘을 바라보았다.


“저것들은 또 뭐야?”

새까만 하급 몽마들이 모여들어 먹구름 같은 형상을 만들고 있었다.


「끄에에에-」

「키엑!」

딱 보니 언어 구사가 불가해 보이는 건 물론이고, 뒷다리만 튀어나온 올챙이 같은 놈도 끼어 있는 걸 보니, 질 낮은 악몽 찌꺼기나 겨우 주워 먹고 사는 최약체들이었다.

하지만 숫자가 꽤 되다 보니, 신경을 안 쓸 수가 없다.

스산하게 불어오는 바람의 풍향이 불안정하게 흐트러지는 이유이기도 했다.


“또 왔어? 대체 왜들 저러는 거야? 이 근처에 뭐 엄청난 악몽이라도 있나? 오늘 잔치 열려?”

이쯤 되니 역시 로브를 뒤집어쓴 놈이 몰고 온 게 확실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재빨리 그가 서 있던 곳을 향해 시선을 옮겼지만, 녀석은 이미 모습을 감춘 뒤였다.


“뭐야. 그새 어디로 사라졌지?”

그녀는 잠시 고민했다.

개떼같이 몰려든 저 몽마들을 싹 쫓아버릴까 싶어서.

사납게 미간을 구기던 제인은 당장이라도 여긴 내 구역이니까 뒈지기 싫으면 썩 꺼지라고 외칠 태세였다.

하지만 곧 한숨을 뱉으며, 창문을 닫아버렸다.

어차피 말귀도 못 알아들을 수준의 놈들이었기 때문이다.

그 시각.

심상치 않은 바람은 강의 집 창문도 뒤흔들었다.

우웅- 휘우웅- 하는 위협적인 바람 소리가 좁은 창문 틈새를 비집고 들어왔다.


“어우, 갑자기 무슨 바람이 이렇게 불어?”

삼영이 창문을 닫기 위해 일어섰다.

발코니로 다가간 그가 거무죽죽한 하늘을 찌푸린 얼굴로 올려다봤다.

별은커녕 달도 제대로 보이질 않았다.

그는 주변을 훌으며 한동안 그곳에 못박힌 듯 서 있었다.


“밖에 비 와?”

“아니. 아직 비는 안 오는데, 하늘이 심상치 않네.”

“소나기라도 오려나? 오늘 비 소식 없었는데.”

“그러게. 예보가 믿을 게 못 되네.”

삼영은 강이 묻는 말에 답하며 꼼꼼히 창문을 닫았다.

다시 자리로 돌아온 그가 시계를 확인하고는, 슬슬 돌아갈 채비를 했다.


“나도 그만 집에 가봐야겠다.”

“제인 안 보고 그냥 가게?”

“금방 오겠다고 간 게 벌써 30분이 지났어. 오겠냐?”

삼영은 제인이 오늘 초면인 사람 앞에서 별 얘기를 다 떠들어대더니, 간식을 핑계로 그대로 줄행랑을 친 게 분명하다고 말했다.


“혹시나 오더라도 돌려보내. 아니면 그냥 네가 먼저 잔다고 연락이라도 남겨놓든가.”

그가 현관으로 향하며 신신당부했다.

강이 마중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어. 비 오기 전에 얼른 가. 운전 조심하고.”

“그래, 나오지 마. 오빠 간다.”

삼영이 손을 몇 번 휘젓고는 서둘러 현관을 나섰다.

그런데 그가 나간 지 채 몇 분이 지나지 않아 다시 초인종이 울렸다.

딩동-


“응? 뭐 놓고 갔나?”

당연히 삼영일 거라고 생각해 문을 여는데, 문밖엔 그가 아닌 제인이 서 있었다.


“미안. 내가 좀 늦었지? 크럼블이 덜 익어서 익혀 오느라 늦었어.”

그녀가 싱긋 웃더니 들고 온 간식 상자를 내밀었다.


“꼰대 오뽜는 어디 갔어?”

“늦어서 집에 갔어요.”

“그래? 그럼 간만에 리버랑 둘이 놀 수 있겠다. 늦었으니까 간식만 먹고 얼른 갈게. 괜찮지?”

강은 잠시 고민했지만, 간식까지 들고 온 그녀를 그냥 돌려보내기가 뭐해 안으로 들였다.

신이 난 제인이 함께 가져온 와인을 흔들며 말했다.


“짠! 내가 와인도 가져왔어. 비싼 거라 아껴두고 있었던 건데, 리버랑 같이 먹고 싶어서.”

사실 술을 즐기는 편은 아니었지만, 오늘 같은 날 와인 한 잔 정도는 함께 마셔주는 것도 괜찮겠다 싶었다.

적당한 음주는 몸에도 좋고, 분위기도 좋게 만들어주니까.

제인은 테이블 위에 가지고 온 크럼블과 와인을 세팅하더니 발코니 쪽을 한번 바라보았다.


“창문 잘 닫았어? 바람 엄청 부는 게 비 올 것 같던데.”

“네. 안 그래도 그럴 것 같아서 닫아뒀어요.”

“요즘 날씨 좀 이상하지? 멀쩡하다가 갑자기 막 바람 불고, 비 쏟아지고 그런다니까?”

산은 그게 자신의 몸 안에 있는 혼의 조각이 융합을 완성해간다는 증거라고 했다.

냄새를 맡은 몽마들이 모이기 시작하는 거라고.

하지만 제인에게 그런 말을 할 순 없어, 그냥 웃고 말았다.


“자, 마시자.”

와인잔을 높이 든 그녀가 치얼스를 외치고는 깔끔히 첫 잔을 비워냈다.

그러고는 구워온 크럼블을 먹어보라며 한 조각 잘라 접시에 담아주었다.

냄새가 나쁘지 않아, 조심스럽게 포크로 잘라 입에 넣어보았다.


“오.”

입을 가리고 고개를 끄덕이는 강을 본 제인이 눈을 반짝이며 물었다.


“어때? 괜찮아?”

“맛있어요.”

“그렇지? 이거 우리 엄마가 전수해 준 레시피야.”

그녀는 신이 나서 사실 아까 만들어 온 해산물 요리는 처음 해본 거라 자신도 맛이 별로인 걸 알고 있었다며 멋쩍게 웃었다.

가만히 이야기를 듣던 강은 와인을 한 모금 마시며 자연스럽게 물었다.


“어머니랑 많이 친한가 봐요.”

“친하지. 나 같은 사고뭉치를 이만큼이나 키워낸 우리 박만금 여사님, 정말 존경해.”

피식 웃던 제인이 덤덤히 말을 이었다.


“아. 내가 말 했었나?”

“뭐를요?”

“나 입양아인 거.”

“……아. 처음 들었어요.”

“내가 깜빡하고 얘기 안 했나 보다. 어쨌든 울 엄마 진짜 대단하지 않아? 친자식도 아닌데, 애를 이만큼이나 키워냈다니까? 심지어 아빠도 없이?”

뜻밖에 공통점을 찾게 됐지만, 강은 자신의 출생에 관련한 일은 밝히지 않았다.

그저 조용히 그녀의 이야기를 들을 뿐이었다.


“하여간 울 엄마 진짜 대단해.”

“…….”

“장난 아니게 억척스럽고.”

“…….”

“엄청나게 사랑스럽고.”

그렇게 말하는 제인은 정말로 사랑에 푹 빠진 듯한 모습이었다.

엄마 자랑에 얼마나 진심이었는지, 비가 오나 눈이 오나 유지해오던 콘셉트까지 잊은 듯했다.

술이 들어가면 들어갈수록 엉망인 영어도 사용하지 않았고, 심지어 그녀가 이렇게 한국어가 유창했나 싶을 만큼 발음이 또렷했다.

그렇게 주거니 받거니 마시던 중이었다.

긴장을 푼 채 제인이 떠들던 이야기를 듣던 강은 중간에 조금씩 웃기도 하며, 편안히 그녀와의 시간을 즐겼다.


“늦었다. 나 화장실 한번 다녀와서 집에 가야겠어.”

제인이 일어서더니 만족한 듯 웃으며 말을 이었다.


“우리 오늘 짧고, 굵게 잘 놀았지? 역시 스트레스 푸는 덴 수다가 최고라니까. 재밌었어.”

“저도 재밌었어요.”

“다음엔 리버 이야기도 들려줘. 오늘은 내가 너무 신나서 혼자만 막 떠들었네.”

강은 대답 대신 조용히 웃고 말았다.

그렇게 제인이 화장실로 향하고, 그녀는 제 팔을 벤 채 테이블에 엎드려 누웠다.

긴장이 풀린 몸에 술기운이 돌기 시작하니, 순식간에 정신까지 녹아내릴 것만 같은 기분이 들었다.


‘……산이 언제 부르지.’

속으로 그런 생각을 하던 강은 어느 순간, 자신의 의식이 멀어진다는 것도 인지하지 못한 채 잠이 들어버리고 말았다.

화장실에 다녀오던 제인이 놀라서 눈을 동그랗게 떴다.


“아휴. 리버는 진짜 생긴 대로 노네. 고작 와인 몇 잔에 뻗은 거야?”

침대로 옮겨주고 가야 하나 싶어 가까이 다가서던 그때였다.

척추를 흘러내리는 찌릿한 감각에 그녀의 몸이 우뚝 멈추었다.


“……뭐야, 이게.”

제인의 굳은 얼굴이 잠든 강을 향했다.

그녀의 몸 주위로 희미한 보랏빛 연기가 피어오르는 게 보였다.

악몽이 발현되기 시작한 것이다.

상황을 파악하지 못한 제인은 눈만 껌뻑대다가 곧 믿을 수 없다는 듯 표정을 굳혔다.

몽환적인 보랏빛 연기에 영혼이라도 빼앗긴 것처럼 도저히 시선을 뗄 수가 없었다.


“이게 무슨…… 말도 안 되는…….”

그녀의 두 눈이 붉게 빛났다.

생각지도 못한 현실에 눈가가 파르르 떨려왔다.

현존하는 인간 중 가장 맛있는 꿈을 꾼다는 인간 여자의 소문을 들었다.

기척을 찾아 이곳까지 오게 됐지만, 어느 순간부터인지 그 냄새가 완전히 사라져버려 죽은 줄만 알고 있었는데.

맙소사.


“……그게 너였어?”

 

 
이건 정말 꿈에도 상상 못 한 일이었다.

발현된 악몽은 아주 희미하게 뿜어져 나오고 있었지만, 인간 여자의 악몽을 별로 즐기지 않는 제인도 순간 이성을 잃을 만큼 매혹적인 꿈이었다.

그녀는 천천히 상체를 숙이고는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그러고는 아주 조심스럽고 신중한 움직임으로 아주 약간의 악몽을 흠향했다.

반쯤 풀려있던 동공이 바짝 조여들었다.

몸에 전율이 흐르고, 솜털이 바짝 서는 기분이었다.


“……악몽만 있는 게 아니잖아?”

제인은 확신했다.

평범한 악몽과는 다른 무언가가 분명히 강의 안에 존재하고 있다는 걸.

그것은 아주 익숙한 기운이기도 했고, 아주 낯선 기운이기도 했다.

연기를 자세히 관찰해보니 붉고, 푸른 기운이 얽히며 두 색이 섞인 보랏빛을 띠고 있는 거였다.

마치 물과 불이 섞여 세상에 존재하지 않던 결과물을 만들어내는 것처럼.


“이게 도대체 뭐지?”

악몽에 섞인 이 엄청난 기운의 정체가 뭔지는 알 수 없었지만, 제인은 본능적으로 그것에 끌렸다.


“어떡하지? 어떻게 할까…… 그냥 확 죽여버릴까?”

제어할 수 없는 충동적인 감각에 온몸이 잡아먹히는 기분이었다.

당장이라도 강의 악몽은 물론, 그녀의 영혼과 그 안에 존재하는 기운까지 모조리 삼켜버리고 싶었다.

살생을 하게 되더라도 말이다.

두방망이질 치는 심장을 달래며, 최대한 냉정을 유지하려 애썼다.

섣불리 달려들기 전, 주변을 살피는 게 우선이었기 때문이다.

그녀는 감각을 기민하게 세웠다.

아주 미약하게나마 이계 종족의 기운이 느껴졌다.

그것은 천인이거나 수인일 수도 있다.

그뿐 아니라, 아까 봤던 몽마를 비롯해 또 다른 실력자들이 근처에 포진되어 있을 가능성도 높았다.

하지만 가장 가까이 있는 건 자신이었으니, 먼저 차지해버리면 그만이었다.

그때.


“으음…….”

강의 입에서 괴로운 듯한 신음이 새어 나왔다.

악몽을 인지하기 시작한 그녀의 미간이 좁아지고, 얼굴이 일그러졌다.

제인이 손톱을 세우며 다가갔다.

광기 어린 미소를 띤 그녀가 막 허공에 손을 치켜들었을 때였다.

그런데 그 순간, 발코니 쪽 창이 열리며 누군가 날아들었다.

기척을 느낀 제인이 막 고개를 돌리려는 순간, 그녀의 뒤통수를 감싼 커다란 손이 그대로 제인의 얼굴을 테이블 위로 찍어 내렸다.

쾅!

기습을 당한 제인이 곧바로 빠져나와 거리를 벌렸다.

경계 태세에 들어선 그녀의 눈에 살기가 형형히 빛났다.

찢어진 이마에서 피가 흘러 한쪽 시야를 가렸지만, 제인은 아랑곳하지 않고 놈을 똑바로 마주 보았다.

아까 창 너머로 보았던 검은 로브가 확실했다.


“……너 뭐야.”

그녀가 묻자, 로브를 뒤집어쓴 남자가 강의 앞을 막아섰다.

그러고는 비웃듯 답했다.


“곧 죽을 놈이 그건 알아서 뭐 하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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