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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8. 줄다리기 (68/118)


#68. 줄다리기
2022.12.22.



 


“곧 죽을 놈이 그건 알아서 뭐 하게.”

남자의 대꾸에 그녀의 눈빛이 사나워졌다.

안 그래도 도둑고양이처럼 자신을 주시했던 모습이 거슬렸던 참인데, 차라리 잘됐다는 생각이 들었다.

죽여버릴 명분이 생겼으니까.

제인이 입매를 비틀며 비아냥댔다.


“죽긴 누가 죽어? 내가?”

“…….”

“아니면 네가?”

웃는 낯으로 빈틈을 노리는데, 남자가 다시 입을 열었다.


“목숨 부지하고 싶으면 시키는 대로 해.”

그가 건조하기 짝이 없는 말투로 명령했다.


“시간 끄는 거 질색이니까, 헛짓거리하지 말고.”

“…….”

“말 많은 건 더 싫으니까, 질문 안 받을 거고.”

오케이?

성의 없이 통보한 남자는 막았던 강의 앞을 비켜서며 말했다.


“너, 꿈의 문은 새길 줄 알지?”

“뭐?”

그녀가 어이없다는 듯 되묻자, 그가 턱짓했다.


“새겨.”

“…….”

“잔말 말고.”

남자의 고압적인 태도는 제인을 흥분시키기 충분했다.


“이게 진짜……!”

그녀가 당장이라도 그의 목을 꺾어버릴 듯 달려들었다.

그 속도가 총알처럼 빨랐지만, 뻗은 손이 채 그에게 닿기도 전에 복부에 주먹이 꽂혔다.

뻐억! 엄청난 소리와 함께 망치로 얻어맞은 느낌이 났다.


“컥!”

비명은커녕 숨도 제대로 쉬지 못한 제인은 그대로 다리가 풀려 주저앉았다.

그런데 이번엔 무릎이 채 바닥에 닿기도 전에 관자놀이를 향해 발이 날아왔다.

본능적으로 팔을 들어 막았지만, 그녀는 그 타격 한 방에 그대로 발코니 창을 뚫고 튕겨 나갔다.

와장창!

보기만 해도 아찔하고, 까마득한 높이였다.

한눈에 보이는 도시의 화려한 야경 위로 던져진 몸이 부서진 파편들과 함께 추락했다.


“……!”

충돌 직전, 간신히 몸을 틀어 충격을 최소화했지만, 떨어지는 속도를 이기지 못한 몸이 아스팔트 위를 한참이나 굴렀다.

쿵!

벽에 부딪힌 뒤에야 멈춘 제인은 하늘을 바라본 자세로 피를 토했다.

쿨럭!

코와 입에서 뿜어져 나온 검붉은 피가 비처럼 흩뿌려져, 다시 그녀의 얼굴 위로 후두둑 떨어져 내렸다.

멍하니 눈만 끔뻑이던 제인이 손을 들어 점점이 찍힌 붉은 핏방울을 문질러 닦았다.

너무 찰나에 벌어진 일이라 어안이 벙벙했지만, 곧이어 생생하게 느껴지는 통증이 현실을 자각하게 했다.

간신히 몸을 일으킨 제인이 복부를 감쌌다.


“제길. 더럽게 아프네…….”

떨어져서 입은 상처보다, 놈에게 맨 처음 얻어맞은 곳의 내상이 컸다.

천천히 고개를 들자, 발코니 난간에 선 놈이 아래를 내려다보고 있는 게 보였다.


“하?”

입꼬리를 길게 찢으며 실소하던 그녀가 곧 싸늘하게 얼굴을 굳혔다.


“어디서 저런 괴물 같은 새끼가 튀어나왔지?”

한바탕 혼이 쏙 빠졌다가 돌아오니, 뒤늦게 불붙은 분노가 치밀어 오르기 시작했다.

뿌드득.

이를 갈던 그녀가 그 자리에서 땅을 박차며 도약했다.

우지끈하는 소리와 함께 바닥이 꺼졌고, 제인은 단숨에 발코니 난간에 서 있던 놈의 멱살을 잡아채기 위해 손을 뻗었다.

여유롭게 그 손길을 피한 남자가 아까 주먹을 꽂아 넣었던 그녀의 복부를 다시 한번 가격했다.


“아악……!”

순간적으로 뿜어져 나온 엄청난 영압과 함께 제인의 몸이 다시 허공으로 튕겨 나갔다.

몸을 비틀어 방어한 덕에 아까보다 충격은 덜했지만, 팔다리가 트럭에 받히기라도 한 것처럼 얼얼했다.


“저 개새X가 비겁하게 깐 데를 또 까?”

화가 나서 속이 부글부글 끓고 눈앞이 하얗게 점멸했다.

그녀는 지금 이 싸움이 피할 수 없는 것임을 직감했지만, 어지간한 방법으로는 이길 수 없는 상대라는 것도 깨달았다.

선택의 기로에 놓인 제인의 머릿속이 분주해졌다.

지금 도망치면 목숨은 구제할 것이다.

그러나 강의 악몽과 정체 모를 기운은 저 녀석의 차지가 될 것이다.


‘하지만 어떻게든 놈을 제압하고 내가 먼저 차지한다면?’

그로 인해 얻어질 보상이 너무 굉장해 투지가 불타올랐다.

놈을 어떻게 갈아 마실지 고민하는 건, 그때 가서 해도 늦지 않겠다는 판단이 섰다.


‘우선은 어떻게든 서강을 손에 넣어야 해.’

필요하다면 그녀를 죽여, 혼을 취하는 방법이라도 택하겠다고 다짐했다.

제인이 물러설 기미를 보이지 않자, 로브에 가려진 남자의 눈매가 일그러졌다.


“약해빠진 게, 멍청하기까지 하네.”

“뭐라는 거야.”

“그렇게 상황 파악이 안 되냐?”

“그런 건 모르겠고, 내가 아는 건 하나야.”

제인이 피가 섞인 침을 뱉으며 양옆으로 팔을 뻗었다.


“네가 상대를 잘못 골랐다는 거.”

그녀가 손바닥을 펴고, 집중해 응축된 기를 내보내기 시작했다.

쿠구구구 -

땅이 진동하며, 작은 돌멩이들이 튀어 오르기 시작했다.

곧 안개처럼 퍼져나간 투명한 막이 사방에 깔리기 시작했다.

상급 몽마나, 부수장 이상의 힘을 가진 천인들이 칠 수 있는 결계였다.

주변의 눈으로부터 시야를 차단하고, 물리적 피해를 최소화하는 장치였다.

결계는 보통 그것을 펼친 자가 다시 거두었지만, 그러기 위해선 반드시 싸움에서 살아 남아야했다.

전투 불능 상태가 되면 저절로 사라지기도 했는데, 그것은 곧 사망이나 빈사 상태가 됨을 뜻했기 때문이다.

그러니 결계를 친다는 건, 전력을 다할 거라는 것.

이 싸움에 목숨을 걸 각오가 되어 있다는 뜻이기도 했다.

제인이 응축한 힘을 폭발시키듯 영압을 내뿜고는 남자에게 달려들었다.


“이야아아아!”

몇 번의 공격이 막혔지만, 집요하게 달려들며 틈을 노린 결과 놈의 옆구리에 마침내 제대로 주먹이 꽂혔다.

쾅 하는 굉음과 함께 놈의 몸이 맞은편 건물 옥상으로 떨어졌다.

하지만 그는 이내 자욱한 연기를 헤치며 단숨에 그녀의 코앞까지 다가왔다.

타격을 전혀 받지 않은 모습에 오히려 제인이 당황한 사이, 무자비한 반격이 이어졌다.

남자는 더 이상의 자비란 없다는 듯 머리통을 부수거나 심장을 날려버릴 기세로 집요하게 급소만 공격했다.

애초에 싸움을 길게 끌고 싶지 않아 하는 것 같았다.

혼신의 힘을 다 한 탓에 몇 번의 공격을 주고받았지만, 체력이 떨어지니 간신히 방어만 하기에도 벅찬 싸움이 이어졌다.

어지간해서는 부러지지 않는 팔의 뼈가 부러지고, 내상을 입은 복부는 연달아 이어진 공격에 회복할 틈조차 얻지 못했다.


“끄윽!”

이를 악물고 참던 그녀의 입에서 신음이 터졌다.

이대로라면 정말 죽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제인을 타깃을 바꿔 다시 강의 집 발코니를 향해 방향을 틀었다.

남자를 공격한 후, 그 틈을 타 강에게 접근하겠다는 계획이 애초에 잘못됐던 거였다.

노릴 거면 처음부터 그녀를 노렸어야 했다.

하지만 몸을 틀기가 무섭게 남자에게 발목이 잡혀버리고 말았다.


“어딜 가.”

“윽!”

발목을 당긴 그가 그녀를 올라탄 채 그대로 무게를 실었고, 엉킨 몸이 무서운 속도로 추락하기 시작했다.

후우웅-!

위협적인 바람 소리와 함께 곧 커다란 굉음이 번졌다.

콰과광!

굉음과 함께 연기가 자욱이 피어올랐다.

거미줄 모양으로 금이 간 아스팔트 바닥의 중심에 반쯤 눈이 돌아간 제인이 있었다.

간신히 정신을 차린 그녀의 눈동자엔 이글이글 타오르던 복수심 대신 혼란과 공포가 자리 잡고 있었다.

이기는 건 고사하고, 목숨도 부지하기 어려울 거라는 현실적 판단이 서자, 전의를 완전히 상실해버린 거였다.

화장이 지워져 엉망이 된 제인의 뺨에 591이라고 새겨진 숫자가 불씨처럼 빛났다.

그녀의 목을 한쪽 발로 밟고 서 있던 남자가 가만히 아래를 내려다보며 말했다.


“오구일(591)?”

가늘게 눈매를 늘여 숫자를 읽던 남자가 피식 웃음을 터트렸다.


“이 새파랗게 어린 게 위아래도 못 알아보고.”

“으윽……!”

“이제야 겁이 좀 나나 보지?”

그가 놀리듯 말했지만, 반항할 생각조차 들지 않았다.

힘의 격차가 너무 컸기 때문이다.

결국 제인은 항복을 선언했다.


“……그래, 내가 졌어. 저 악몽 네가 처먹든지 말든지 멋대로 해.”

제기랄!

분했지만, 어쩔 수 없었다.

깔끔히 강의 악몽을 포기하고 이제껏 살아온 대로 인간 남자의 악몽이나 먹으며 사는 게 마음 편한 일이었다.

그런데 남자는 무표정한 얼굴로 그녀를 내려다보며 이렇다 할 대꾸를 하지 않았다.

마른침을 꿀꺽 삼키는데, 그의 입이 떨어졌다.


“길이 덜 들었군.”

알 수 없는 말을 중얼댄 그가 제인의 발목을 잡으며 다리 한쪽을 들어 올렸다.


“뭐 하는…….”

그러고는 채 상황 파악이 끝나기도 전에 다리를 들어 그대로 그녀의 무릎을 찍어 내렸다.

우지끈!


“아아아악!”

그대로 다리가 반대로 꺾어지며 부러져버렸다.

남자는 거기서 멈추지 않고 제인의 멱살을 잡더니 다시 강의 집 발코니로 날아올랐다.

그러고는 잠든 강의 앞에 그녀를 던지듯이 내동댕이쳤다.

쿠당탕!


“으윽……!”

바닥을 구른 제인이 덜렁거리는 다리를 끌어안은 채, 겁에 질려 그를 올려다봤다.

그러자 남자가 무심히 이야기했다.


“인내심 테스트하지 말고, 꿈의 문이나 빨리 새겨.”

“도, 도대체 나한테 왜……”

“질문 안 받는다고.”

“…….”

“내가 분명히 말했을 텐데?”

일갈한 그가 피곤하다는 듯 얼굴을 쓸며 반대쪽 손을 휘저었다.


“새겨, 빨리.”

한 번 더 토를 달거나 망설였다가는 이번엔 팔이나 다리가 아니라, 머리통이나 심장이 뜯겨나갈 것 같았다.

제인은 태어나서 처음으로 뼛속까지 새겨질 공포를 경험했다.

아직 죽고 싶지 않았다.

여기서 소멸해버리기엔 인간 세상에 미련도 너무 많았고, 자신은 너무 어렸기 때문이다.

게다가 자신을 키워준 박만금도 눈에 밟혔다.

공포에 질려 눈물을 떨구던 그녀가 엉금엉금 기어 강에게로 향할 때였다.

딩동-

초인종이 울렸다.

남자와 제인의 시선이 동시에 돌아갔다.

시간이 멈춘 것처럼 짧은 침묵이 흘렀고, 다시 벨이 울렸다.

딩동, 딩동-

쿵쿵쿵!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점점 난폭해졌다.

그러다 잠시 소리가 끊기고, 문을 두드리던 이의 목소리가 울렸다.


“문 열어.”

산이었다.

귀신같이 그의 목소리를 알아들은 제인이 벌떡 상체를 세웠다.

그러자 곁에 서 있던 남자가 피곤하다는 듯 묵직한 한숨을 쉬며 말했다.


“하아. 그러게 내가 빨리 새기라고 했잖아.”

……돌아가면 또 욕 한 바가지 먹게 생겼네.

짜증스럽게 말을 잇던 남자가 손을 뻗었다.

현관문이 쾅 소리를 내며 요란하게 열렸고, 그와 동시에 남자는 제인의 뒷덜미를 잡아챘다.

그러고는 그대로 그녀를 데리고 도망쳤다.


“서강.”

집 안으로 들어선 산이 강의 이름을 부르다, 곧 엉망이 된 내부를 발견하곤 걸음을 멈추었다.

가슴이 선득했다.

고개를 돌리니 테이블에 엎어져 있는 강이 보였다.

재빨리 다가가 그녀의 의식을 확인해보니, 다행히 그냥 잠이 든 것뿐이었다.


“으음…….”

신음하는 강의 미간이 일그러졌다.

본격적으로 발현된 악몽에 힘겨워하고 있었다.

그는 그녀를 안아 침대로 옮긴 뒤, 곧장 악몽을 흡수하고 그녀의 기억에서 악몽을 지워냈다.

덕분에 강의 얼굴은 금세 다시 평안을 되찾았다.

하지만 엉망이 된 집은 그대로였다.

그때, 산의 눈에 무언가가 포착되었다.

카펫 위에 검은 연기의 형상이 피어오르는 걸 발견한 것이다.

그가 다가가 한쪽 무릎을 접고 앉았다. 그러고는 그 위를 손끝으로 쓸었다.

검붉게 묻어난 혈흔을 본 산의 눈이 가늘어졌다.


“이건…….”

몽마의 피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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