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9. 문(Moon) 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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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9. 문(Moon) 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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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9. 문(Moon) 엔터
2022.12.25.
“이건…….”
몽마의 피였다.
산의 손끝에 묻어난 혈흔은 곧 재가 되어 사라졌고, 곳곳에서 피어오르던 검은 연기도 마찬가지였다.
강을 살피느라 보지 못했던 것들이 그제야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그는 천천히 일어나, 맨 처음 강을 발견한 아일랜드 식탁으로 다가갔다.
곳곳에 닿던 시선이 한곳에 머물렀다.
테이블 위의 깨진 접시와 형체를 알아볼 수 없을 만큼 뭉개진 크럼블.
그 위에 점점이 찍혀 있던 혈흔과 약간의 술이 남겨진 두 개의 와인잔.
그리고…… 박살이 난 발코니 창문.
산은 그 모든 흔적을 차례로 훑으며 이곳에서 벌어졌을 일들을 예측해보았다.
안쪽에서 바깥으로 충격이 가해진 창의 흔적을 보면 대략의 동선을 유추해볼 수 있었다.
테이블 위에 처박힌 누군가가 개처럼 얻어맞고 발코니 밖으로 던져졌을 것이다.
아니면 발코니 밖으로 던져졌다가 다시 끌려와 얻어맞았을 수도 있고.
꽤 큰 소동이었을 거란 생각에 의문은 쉬이 가시질 않았다.
“이렇게 난장을 쳐놨는데.”
그의 시선이 다시 잠든 강에게 향했다.
“……안 깼다고?”
상식적으로 이해가 가지 않는 일이라 산의 눈매가 날카로워졌다.
침대로 되돌아간 그가 그녀의 상태를 살피며 이마를 어루만졌다.
고요하게 감긴 눈과 평온한 표정은 잠든 여느 때와 다를 게 없었다.
악몽을 꾸던 것도.
그리고 그 악몽의 질과 향기도.
달라진 건 아무것도 없는데, 너는 왜 이렇듯 죽은 사람처럼 깊은 잠에 빠진 걸까.
약에 취하기라도 한 건가?
아니면,
“…….”
신변에 어떤 변화가 생긴 건가.
검지와 중지를 들어 강의 코끝에 가져다 대보았다.
미약하지만, 일정한 숨결이 느껴졌다.
강박적으로 그녀가 ‘살아 있음’을 확인한 산이 이불을 여며주었다.
그러고는 한참이나 더 그녀를 바라보다 발코니를 향해 걸어갔다.
깨진 창문으로 불어든 시린 바람이 그의 머리카락을 흩트렸다.
몇 시간 전.
산은 로미와 함께 직접 토벌에 나섰었다.
하루가 다르게 개체를 늘리던 하급 몽마가 얼마 전과는 비교도 안 될 만큼 커다란 무리가 되어 나타난 탓에, 로미 혼자 처리하기엔 무리였다.
그는 분명 그것들을 다루는 중급 이상의 몽마가 우두머리로 있을 거라 생각했다.
예상은 적중했다.
눈치를 채자마자 도망치는 녀석을 막무가내로 쫓다 보니, 뒤늦게 강과 너무 멀리 떨어져 버리고 말았다.
급히 돌아온 건 그 때문이었다.
하지만 강은 물론 함께 있다고 했던 삼영도 전화를 받지 않았다.
느낌이 좋지 않아 내려와 보니, 집이 이 상태였다.
발코니 창이 박살 날만큼 큰 소동이었는데도 불구하고, 빨리 알아챌 수 없었던 이유라면 한 가지뿐이었다.
“결계.”
바로 결계 때문일 것이다.
소란을 일으킨 이들의 정체가 전부 몽마였는지, 아니면 천인이 끼어 있었는지는 몰라도 그들 중 하나가 결계를 쳤을 게 분명했다.
밖에 있는 이들은 결계 안이 이미 초토화가 됐든, 아니면 그 안에서 전쟁이 벌어지든, 결계 안의 모습을 보지 못한다.
확실한 건 결계를 칠 수 있을 정도의 실력자가 개입된 일이라는 것.
산은 마지막 통화에서 강이 했던 말을 떠올렸다.
‘오빠가 장 봐왔다고 해서 같이 있어. 저녁이나 같이 먹을까 하고.’
그렇다는 건 꽤 늦게까지 같이 있었단 말일 텐데, 삼영은 왜 연락이 안 될까.
재차 전화를 걸어봤지만, 여전히 그는 받질 않았다.
산이 발코니 너머 어딘가를 향해 휘파람을 불었다.
로미를 부르는 신호였고, 그녀는 곧 짐승의 하울링 같은 울음소리로 답해왔다.
아오오오-!
무사하니, 걱정하지 말라는 신호였다.
울음소리가 연이어 들려왔다.
천인과 합세했다는 신호였다.
얼마 전 내려왔다던 설성이 토벌을 돕는 모양이었다.
그때.
손에 쥐고 있던 휴대폰이 진동했다.
발신자가 삼영인 걸 확인한 산이 바로 통화버튼을 눌렀다.
“형.”
- 어, 산아. 전화했었네?
그의 목소리나 말투는 평소와 다를 게 없었다.
“어디세요?”
- 나? 아까 집에 왔지. 씻느라 전화 못 받았어. 무슨 일 있어?
“혹시 아까 형 말고, 누가 왔었나 해서요.”
- 나 말고? 아아, 제인 왔었어. 왜?
제인이 다녀갔다는 말에 그의 눈매가 일그러졌다.
“그 여자, 언제 돌아갔어요?”
- 나보다 먼저 갔는데? 간식 가지러 간다고 나가더니 안 오더라고. 그래서 나도 집에 왔지?
“알겠습니다.”
- 너는 어딘데?
“강이랑 같이 있어요.”
-- ……이 시간에?
삼영의 말투가 순식간에 뾰족해졌다.
- 말세로다. 남녀가 유별하거늘 어찌 이 늦은 밤에…….
“형이랑 둘 다 연락이 안 돼서요. 혹시 무슨 일 생겼나 싶어서 와봤죠.”
잔소리를 쏟아부으려던 그가 연락이 안 됐다는 말에 놀라, 말을 멈췄다가 다시 이었다.
- ……강이한테 무슨 일 생긴 건 아니지?
“아니에요. 오니까 자고 있더라고요.”
산은 적당히 둘러대고는 다시 연락하겠다는 말과 함께 먼저 전화를 끊었다.
이미 모든 흔적이 사라져버린 공간엔 범인을 특정할 만한 증거가 없었다.
연기처럼 사라져 희미한 그을음만 남아버린 혈흔이 몽마의 것이었음을 나타내고 있었다.
제인, 강, 삼영.
함께 있었던 사람은 셋.
누굴까.
강의 보금자리를 침범하고, 그녀를 노린 몽마는.
“…….”
범인은 과연 그들 중에 있었을까?
.
.
.
쿠당탕!
반쯤 기절한 채 끌려온 제인은 어둑한 방에서 눈을 떴다.
‘으으, 젠장…… 여기가 어디야…….’
상황 파악을 위해 눈동자가 분주히 굴렀다.
제일 먼저 보인 건 유광의 블랙을 베이스로 한 차갑고 어두운 분위기의 인테리어였다.
빛이 쏟아져 들어오는 곳을 향해 고개를 돌리니, 커다란 통창 너머로 펼쳐진 도심의 화려한 야경이 보였다.
창가 앞에 선 낯선 남자의 뒷모습이 보였다.
검은 슈트를 날렵하게 소화한 그는 기척을 느끼곤 천천히 뒤를 돌았다.
말끔하게 빗어 넘긴 포마드 헤어 아래 깊고 날카로운 눈매가 심연처럼 자리하고 있었다.
그 위압감에 눌린 제인의 어깨가 더욱 움츠러 들었다.
그런데 저를 내려다보는 저 오만한 얼굴이 어딘가 낯익다고 생각했다.
그녀는 뒤늦게 그가 문 엔터의 노지태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언론에 몇 번 소개된 그를 볼 때마다 범상치 않은 인물이라고는 생각했는데, 몽마일 줄은 몰랐다.
게다가 이런 모습으로 인간 세상에 있을 거라곤 더더욱 상상도 못 했고.
“겁도 없이 날뛰는 놈이라고 생각했더니, 신생 몽마였군.”
“다, 당신은…….”
“내가 누구냐고?”
그가 노지태임을 몰라서 묻는 게 아니었다.
노지태의 숨겨진 진짜 정체를 묻는 거였다.
하지만 곧 엄청난 기압에 뼈까지 으스러질 것 같아 제인은 저도 모르게 납작 엎드렸다.
그녀의 옆엔 검은 로브를 쓴 놈이 서 있었다.
저와 대치를 벌이다 반송장 상태로 여기까지 끌고 온 바로 그놈.
옆에 있는 녀석도 만만치 않은 상대였지만, 눈앞의 남자는 그것과는 차원이 달랐다.
본능적으로 알 수 있었다.
제인은 무릎을 꿇고 고개를 숙인 채 입을 열었다.
“……오구일(591)입니다. 왕을 뵙습니다.”
선대 몽마의 왕이었던 이일리(212)의 행방이 묘연해지고, 뒤를 이어 왕좌에 올랐다는 이사오(245).
소문으로만 듣던 현(現) 몽마의 왕이 눈앞의 남자일 거라 그녀는 확신했다.
그의 압도적 카리스마는 가히 위협적이었다.
아니, 위협적이라는 말 정도로는 부족했다.
이날까지 단 한 번도 패배를 맛보지 못했던 제인을 단숨에 꺾고 끌고 온 정체 모를 놈을 발아래 깔아두고 수족처럼 부리는 존재니, 그의 힘은 상상조차 할 수 없었다.
죽지 않으려면,
“사, 살려만 주신다면.”
“…….”
“뭐든 하겠습니다……!”
납작 엎드려 빌어야 할 때였다.
지태는 의자에 앉아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신나게 얻어터진 주제에.”
곤죽이 된 제인의 얼굴을 보며 그가 못마땅한 듯 중얼거렸다.
그러자 곁에 서 있던 검은 로브의 남자가 말을 이었다.
“사파로(485)보다는 훨씬 쓸모 있을 겁니다. 신체 능력도 월등하고요.”
그의 말에 지태가 턱을 괴며 말했다.
“네가 할 일은 하나야. 그 인간 여자의 몸에 꿈의 문을 새기는 거.”
“네. 알겠습니다.”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그리하겠노라 답했다.
지태는 두 번의 실패는 없어야 할 거라며, 자신을 만나기 이전의 삶을 그녀에게 담보로 걸었다.
제인은 고개가 떨어져 나가도록 머리를 조아렸다.
“데리고 나가.”
지태가 턱짓하자, 검은 로브를 쓴 남자가 그녀에게 말했다.
“따라 와.”
어디로 또 끌려가는 건 아닌가 했지만, 우선은 이사오가 안 보이는 곳으로 한시라도 빨리 사라지고 싶었다.
제인은 얼른 남자의 뒤를 따랐다.
붉은 카펫이 깔린 좁고 긴 복도는 높이가 높았고, 어두웠다.
아까 언뜻 본 장면으론, 서울 한복판에 있는 고층 빌딩 중 하나일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이곳이 어디인지 정확히 알 순 없었다.
아마도 문 엔터의 사옥이려니, 예측만 할 뿐이었다.
로브로 여전히 얼굴을 가리고 선 남자가 엘리베이터 버튼을 누른 채 침묵했다.
이리저리 시선만 굴리던 제인이 어렵게 입을 뗐다.
“날 매개체로 쓰려는 거야?”
그러자 남자가 정면으로 시선을 고정한 채 대답했다.
“그래. 네가 서강의 몸에 꿈의 문을 새기면, 왕은 네가 가져온 악몽을 취하실 거야.”
“…….”
“필요하다면 널 통해 직접 꿈속으로 들어가실 테고.”
한마디로 정체를 드러내지 않고, 서강의 악몽을 취할 매개체로 자신이 사용될 거라는 뜻이었다.
“왜 나야?”
그녀가 다시 조심스럽게 질문했다.
“너 정도 실력이라면 아까 네가 직접 새겼어도 됐잖아.”
“시끄럽게 일 벌려서 좋을 게 있나?”
“그건 그렇지만…….”
“만약 네가 나보다 전투 능력이 좋았다면, 기꺼이 나를 매개체로 사용하셨을 거야.”
답은 간단했다.
능력치에 따라 주어진 역할이 다르다는 것.
몽마가 인간의 악몽을 흡수하는 방법은 두 가지였다.
하나는 직접 인간의 곁에서 숨결을 통해 거기에 녹아난 공포와 흘러나온 악몽을 흡수하는 거였고, 하나는 인간의 몸에 꿈의 문을 새겨 침투하는 방법이었다.
후자는 인간의 꿈에 침투하기 위해 문을 새긴 몽마도 수면 상태가 되어야 한다.
그러니 강의 꿈에 침투하려면 자신이 수면 상태에 들어가야 한다는 말이 됐다.
말 그대로 문의 역할만 하는 거였다.
자신을 통해 왕은 서강의 꿈에 침투할 것이다.
그리고 그가 악몽을 먹는 동안 곁에서 가드의 역할을 하는 게 이 남자가 할 역할일 것이다.
요구되는 건 단연 뛰어난 전투 능력이겠지.
누구도 왕의 식사를 방해해선 안 되니까.
“노지태가 왕일 줄은 꿈에도 몰랐어.”
눈치를 살피던 제인이 넌지시 말을 던졌다.
혹시나 이 남자의 정체도 알 수 있을까 싶어서 떠본 거였다.
“너도 인간세계에 섞여 사는 인물이야? 인간 노지태의 측근?”
“…….”
“얼굴을 가리고 다니는 이유는 알아볼 사람들이 많아서일 것 같은데, 그건 누구나 알 사람이라는 거지?”
남자는 여전히 아무 대답이 없었고, 얼마 지나지 않아 엘리베이터가 도착했다.
그제야 그가 반쯤 고개를 돌려 턱짓했다.
“타.”
남자가 한 말이라곤 그게 전부였다.
제인은 이만 포기하며 순순히 엘리베이터에 올라탔다.
둘은 마주 본 상태가 되었다.
“얼굴이 말이 아니군.”
그녀의 얼굴을 바라보던 남자가 말했다.
어이가 없었다.
“네가 이렇게 만들어놨잖아.”
“그러니까 곱게 잡혀 왔으면 좋았잖아.”
남자는 로브의 단추로 손을 가져다 대며 말했다.
“다친 건 티 내지 말고 돌아가도록 해. 넌 얼굴이 알려졌으니, 괜히 남의 눈에 띄었다간 좋을 게 없어.”
그가 로브를 벗어 제인에게 던져주었다.
“읍!”
엉겁결에 얼굴로 던져진 로브를 받아 든 그녀는 이내 닫히는 문 사이로 드러난 그의 얼굴을 보았다.
“너는……!”
제인의 눈이 커다래졌다.
그녀도 이미 익히 알고 있던 인물이었기 때문이다.
무지막지하게 폭력을 휘두르던 인물이라고는 믿기지 않는 청순하고 아름다운 얼굴.
“잘 가.”
꽃 같은 미소로 인사를 건네는 남자의 정체는,
“우린 곧 다시 만날 거야.”
양신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