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0. 소백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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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0. 소백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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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0. 소백주
2022.12.29.
“잘 가.”
“…….”
“우린 곧 다시 만날 거야.”
닫히는 문 사이로 싱긋 웃는 신휘의 얼굴은 그녀가 TV에서 익히 봐오던 얼굴이 맞았다.
전혀 예상을 못 했던 탓에 제인의 입이 떡 벌어졌다.
“……양신휘였다고?”
연예계에 생각보다 많은 수의 몽마들이 있다는 건 익히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그 화려함 뒤에 가려진 이면이 얼마나 어둡고, 퇴폐적인가.
몽마들이 사족을 못 쓸 만큼 좋아하는 것들이 넘쳐나는 세상이 바로 연예계였다.
그녀는 신휘가 저 정도의 신체 능력을 가진 상급 몽마라는 사실도 놀랐지만, 그 배후에 왕이 있었다는 사실이 더 놀라웠다.
대한민국의 잘나가는 대형 기획사 중 하나인 문 엔터테인먼트.
그곳의 수장인 노지태가 몽마의 왕인 이사오(245)였을 줄이야.
“……하아. 망했네.”
놀라움 뒤로 밀려오는 막막함이 제인의 시야를 하얗게 물들였다.
뽕잎만 먹고 살던 때가 낙원과도 같았다는 걸 깨달았지만, 정체가 드러난 이상 그에게서 도망칠 방법 따윈 없었다.
제 삶의 일부는 이제 왕을 위해 움직이게 될 테니까.
하지만 죽지 않으려면, 최선을 다해 자신의 노동력을 바쳐야만 한다.
어떻게 해서든 강의 몸에 꿈의 문을 새겨야 할 의무가 생긴 것이다.
.
.
.
한편.
산에게 돌아온 로미는 처음 몽마떼를 발견한 곳 말고도 근처에 중급 이상의 몽마가 둘이나 더 나타났다고 보고했다.
다행히 때맞춰 등장한 설성이 다른 천인과 함께 와준 덕에 무리 없이 몽마를 퇴치했다는 이야기도.
“설성 말고 다른 천인이 또 나타났다고?”
“네, 근데 얼굴은 못 봤어요. 워낙 정신이 없었거든요.”
부수장 이상의 능력을 가진 천인인 것 같았는데, 그마저도 그저 예측에 불과하다고 했다.
왜냐하면 그는 설성과 찢어져 곧 다른 무리를 쫓았기 때문에 제대로 파악할 시간이 부족했다.
귀가 축 처진 로미가 쭈뼛대며 말을 이었다.
“죄송해요. 별 도움이 못 돼드려서.”
“괜찮아. 충분히 애쓴 거 알아.”
산이 그녀의 복슬복슬한 머리를 쓰다듬어주자, 뾰족한 귀가 뒤로 한껏 누웠다.
“다친 곳은 없어?”
“조금 힘들긴 했지만, 괜찮았어요.”
로미가 금세 꼬리를 살랑살랑 흔들곤, 잠든 강을 보며 물었다.
“언니는 괜찮아요?”
“괜찮아.”
“…….”
“일단은.”
그렇게 말한 그는 당분간 절대 강의 곁을 떠나지 말아 달라고 당부했다.
혹시나 자신이 그녀의 곁을 잠시 비우는 한이 있더라도.
“백 노인에게 다녀올게.”
“윽. 그 고약한 할아버지요?”
“이 집을 가장 빠르게 원상 복귀시킬 수 있는 사람은 백 노인뿐이야.”
“그건 그렇지만…….”
못마땅해하던 로미가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여기는 제가 있을게요. 얼른 다녀오세요.”
산은 그 길로 백 노인을 찾아 나섰다.
그는 산의 모친인 모아와 인연이 있는 노인이었다.
원래는 천계에서 오국(五國) 수장들의 무기를 만들며, 갖은 잡일을 도맡아 하던 도공이었는데, 손버릇이 안 좋아 쫓기듯 인간 세상에 오게 된 괴팍한 천인이었다.
부모님과 함께 인간 세상에 살면서부터 그를 알았지만, 제 손으로 도움을 요청하는 건 처음이었다.
산은 백 노인이 좋아할 만한 술 한 병을 준비해 달동네 깊은 곳에 은둔하는 그를 찾아갔다.
“계십니까, 어르신.”
인사가 끝나기 무섭게 찌그러진 양은 사발이 날아들었다.
가볍게 그것을 피한 산의 등 뒤로 요란한 소리가 울렸다.
땡그렁- 땡- 땡-
걸쭉한 욕지기가 날아들었다.
“어떤 싸가지 없는 자식이 이 시간에 넘의 집을 방문하고 지랄이여! 지랄이!”
다 쓰러져가는 집의 문 사이로 거지꼴을 한 백 노인이 모습을 드러냈다.
“야밤에 잠도 없는 상판대기 한번 보자! 어떤 후레자식이 잠도 잘 못 자는 노인네를 괴롭히려고……!”
욕부터 때려 박고 보던 그가 주름이 깊게 팬 눈가를 가늘게 늘이며 마당을 응시했다.
“으잉? 길바닥에 막 굴러댕기는 상판대기는 아닌디? 어디 보자, 내 안경이…….”
주변을 더듬던 백 노인이 알 하나가 깨진 돋보기안경을 주섬주섬 걸치며 나왔다.
“오잉?”
과장된 몸짓으로 움찔 어깨를 떨던 그가 재차 해괴한 소리를 내었다.
“또이잉?”
“잘 지내셨어요?”
“너 일리 아니냐?”
“산입니다.”
“오매! 산이여? 네가 그 일리 아들 산이란 말여?”
“네, 어르신.”
“아이고, 이놈아! 이게 얼마만이여! 아주 장성을 했구만! 장성을 했어! 지 아비랑 아주 빼다 박았네 그려!”
맨발로 달려 나온 백 노인이 산의 허리춤에 대롱대롱 매달려 격하게 반가움을 표했다.
손버릇이 안 좋은 그는 그 와중에도 제 버릇 개 못 주고, 산의 허리춤을 더듬었다.
“지갑 돌려주세요, 어르신.”
“무슨 지갑? 너 지금 간만에 본 나를 도둑놈 취급하는겨?”
“…….”
“썩을 놈이 아주 지 애비 닮아서 눈치는 드럽게 빨라, 아주.”
꿍얼대던 백 노인이 바지 속에 손을 넣더니 훔쳤던 지갑을 꺼내 들었다.
……어디서 꺼내는 거예요.
산이 따지지는 못하고, 슬쩍 미간을 좁혔다.
줘버릴까 하다가, 받아주면 한도 끝도 없을 것 같아 마지못해 엄지와 검지 끝으로 그것을 받아들었다.
“그나저나 어쩐 일로 나를 다 찾아왔당가? 나는 늙은이가 손버릇 좀 나쁘기로서니 느그 애미, 애비한테 그대로 팽당한 줄 알았어야?”
조용히 미소 짓던 산이 뒤늦게 모아와 일리의 소식을 전했다.
“부모님은.”
말끝을 조금 흐리던 그가 다시 입을 열었다.
“돌아가셨습니다.”
혼의 조각이 강의 몸에 남아 있긴 하지만, 물리적으론 죽은 것과 다름없으니 그렇게 전하는 게 맞았다.
사정을 길게 설명할 여유도 없었고.
“……뭐여?”
소식을 접한 백 노인의 눈이 놀라 휘둥그레졌다.
어지간한 세상사에는 눈 하나 꿈쩍 않던 그였지만, 모아와 일리의 소식엔 많이 놀랐는지 한동안 말이 없었다.
착잡한 얼굴로 담배 한 대를 다 태운 그는 못내 안타까운 듯 탄식했다.
“느이 부모는 그렇게 될 줄 알면서도 기어이 너를 낳은 거여.”
“…….”
“그러니까 살어. 느이 부모 몫까지, 아주 기깔나게 살아 봐.”
백 노인의 말에 산은 조용히 미소만 덧그렸다.
“자, 그럼 이제 가지고 온 거 내놔 봐. 모냥이 심상치 않은디.”
산이 가지고 온 술에 내내 눈을 떼지 못하던 그가 사심을 드러냈다.
그러자 산이 부드럽게 웃으며 말했다.
“어르신 좋아하시는 소백주입니다.”
“지럴허네. 이게 어른을 놀려? 천계에 발도 못 들이는 건 너나 나나 매한가지인데, 네놈이 무슨 수로 천계의 술을 구해?”
“어머니한테 받아 딱 한 병 가지고 있던 술입니다.”
소백주는 천계의 화국에서 나는 물로 만든 술이었다.
백 노인은 그 술을 무척 좋아했지만, 이제 아쉽게도 더는 마실 수 없는 술이었다.
그러니 눈이 돌아간 것도 이상할 게 없는 일이었다.
“얼른 내놔 봐! 진짜 소백주가 맞는지 내가 맛부터……!”
그가 기습적으로 폴짝 뛰며 팔을 휘둘렀지만, 산이 가볍게 들고 있던 술을 빼돌렸다.
“시방 젊은 놈이 늙은이를 놀리네?”
“제 부탁 먼저 들어주시면, 그때 드리는 걸로 하겠습니다.”
“뭐시여?!”
백 노인이 아쉬움에 펄쩍 뛰었지만, 단단한 산의 눈빛에 이내 못 이긴 척 혀를 찼다.
“그럼 뜸 들이지 말고 빨리 말해, 이 썩을 놈아!”
.
.
.
산과 함께 강의 집을 방문한 백 노인은 엉망이 된 발코니 창을 슥 훑어보았다.
“넘의 집을 아주 깨부숴놨구먼. 아주 작정하고 조진 거 보닝게 보통 놈이 아녀. 아주 간이 배 밖으로 나온 놈이란 말이여.”
눈에 띄어 좋을 게 없는 세상에서 이렇게까지 자신의 흔적을 남겨놓는 놈은 드물었다.
그래서 절로 긴장감이 다 들었다.
그사이에 산은 로미에게 강의 상태를 확인했다.
“좀 어때?”
“그냥 계속 잠만 자요.”
“한 번도 안 깼어?”
“네.”
고개를 끄덕이던 그녀가 강의 곁에 앉으려다 놀라서 펄쩍 뛰었다.
깨갱!
어느샌가 다가와 강의 곁에 앉아 있던 백 노인의 무릎에 앉아버린 것이다.
“이 짐승 새끼가 어딜 막 앉는겨?”
“하, 할아버지가 소리도 없이 앉아 계셨잖아요!”
억울해진 로미가 발끈해서 외치다가 그의 손에 들려 있는 털 한 움큼을 보곤 기겁해서 소리쳤다.
“내, 내, 내 꼬리털!”
“수인의 꼬리털로 붓을 만들면, 아주 귀한 물건이 되지.”
“저는 준다고 한 적 없는데요!”
“누가 공짜로 가져간다고 그러디? 옛다.”
백 노인이 소매 춤에서 낡은 주머니 하나를 꺼내 던져주었다.
“이게 뭐예요?”
“눈깔사탕.”
그의 말에 로미가 조심스럽게 코를 가져다 댔다.
낡은 주머니에서 백 노인에게 나는 요상한 꼬린내가 좀 나긴 했지만, 주머니 안의 내용물에선 확실히 맛있는 냄새가 났다.
“말린 몽마 눈알 냄새가 나요.”
“눈깔사탕이라고 했잖니.”
“근데 그런 것치곤, 또 다른 냄새가…….”
“껄껄. 그래. 내가 천계에서 도공으로 있을 때 화국에서 기르던 풀이 같이 들어 있다.”
“개풀이요?”
“오. 개풀을 아냐?”
“알죠! 이거 되게 귀한 건데?”
“암. 귀하고말고.”
그는 종종 수인의 도움을 받아야 할 일이 생길 때마다 쓰기 위해 가지고 있던 거라며, 설명을 덧붙였다.
“와. 할아버지 보기와 다르게 능력자시네요.”
로미가 말하자, 백 노인이 눈을 가늘게 뜨며 욕지거리를 했다.
“이게 귀한 거 줬더니만, 개 풀 뜯어 먹는 소리나 하고 자빠졌네. 내가 어때서!”
하지만 그녀는 이미 개풀 향기에 취한 듯 눈이 반쯤 풀려 해롱거렸다.
주머니에서 나는 꼬린내도 잊고, 그것을 마구 뺨에 비비며 킁킁댔다.
그동안 산은 둘이 뭐라고 하는지도 전혀 신경 쓰지 못한 채 깊이 잠든 강의 상태만 살피고 있었다.
“그 인간 여자가 네 도시락이냐?”
백 노인이 말을 걸었지만, 그는 신경이 온통 그녀에게 쏠려 있던 탓에 아무것도 듣지 못했다.
그걸 본 백 노인이 바람 같은 웃음을 흘렸다.
“이제 보니 도시락이 아니라 색시였구먼.”
그는 기억 속에 선명히 남아있던 모아와 이일리의 모습을 떠올렸다.
잠든 인간 여자를 바라보고 있는 산의 모습이 제 어미를 보던 아비의 눈빛과 참 닮았다는 생각을 했다.
“자, 그럼 한번 움직여볼까?”
백 노인이 일어서자, 그제야 산의 시선이 강에게서 떨어졌다.
“어르신. 죄송하지만, 시간이 많지 않습니다.”
“걱정 말어. 동트기 전에 내가 싹 돌려놓을 테니께.”
“잘 부탁드립니다.”
“소백주 바로 넘기는 거다?”
“그럼요, 어르신.”
확답을 얻은 백 노인이 망가진 집 안 곳곳에 자신의 기를 모아 만든 못을 박은 후, 그 가운데에 섰다.
그러고는 바지 속에 손을 넣어 무언가를 만지작거렸다.
그걸 본 로미가 질색을 하자, 산이 손을 뻗어 그녀의 눈을 가려주었다.
잠시 후, 백 노인이 망치같이 생긴 도구를 꺼내 들어 높이 들었다.
그러고는 의기양양한 표정으로 로미를 향해 말했다.
“너 잘 봐라잉? 놀라 자빠질 수도 있응게 뒤통수 조심하고.”
보기와 ‘다르게’ 능력자인 것 같다던 그녀의 말이 내심 신경 쓰였는지, 그가 보란 듯이 으스댔다.
로미도 호기심이 가득한 눈으로 슬쩍 고개를 뺐다.
“니가 보기엔 내가 마냥 꼬부랑 노인네 같겄지만.”
“…….”
“왕년엔 천계에서도 한 가닥 했던 양반이란 말이여, 내가.”
양손에 침을 뱉은 그가 망치를 움켜쥐곤 몇 개 남지 않은 누렁니를 드러내며 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