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1. 파도처럼 덮쳐 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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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1. 파도처럼 덮쳐 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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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1. 파도처럼 덮쳐 온
2023.01.01.
“니가 보기엔 내가 마냥 꼬부랑 노인네 같겄지만.”
“…….”
“왕년엔 천계에서도 한 가닥했던 양반이란 말이여, 내가.”
망치를 고쳐 쥐며 웃던 그의 얼굴에 웃음이 걷혔다.
고주망태 같던 팔다리의 흐트러짐이 단정해지고, 풀려 있던 눈엔 날카로운 빛이 스몄다.
“흐아압!”
기합을 내지르는 백 노인의 뒤로 푸른 후광이 비쳤다.
그가 못으로 연결된 가운데 지점을 내리치자, 빛이 번쩍였다.
“엄마야!”
깜짝 놀란 로미가 냉큼 산의 뒤로 숨어, 꼬랑지를 말았다.
쿠구구-
얕은 진동이 울렸다.
곧이어 부서지고 깨진 물건들이 서서히 원래의 모습을 되찾기 시작했다.
파편들이 모여 원래의 온전한 형태를 되찾고, 그을음이 묻었던 테이블과 카펫 위가 말끔해졌다.
마치 시간을 거꾸로 돌리는 것과 같은 현상을 눈앞에서 목격한 로미의 입이 떡 벌어졌다.
“우와앗!”
눈앞에 새하얀 불꽃이 터지는 감각에 절로 탄성이 쏟아졌다.
“누, 눈뽕 또 맞았다!”
백 노인에 대해 무성히 맴돌던 소문의 실체를 확인하게 된 순간.
그녀는 손버릇도 안 좋고, 성질도 괴팍한 노인네를 왜들 그리 찾아대는지 이해하게 되었다.
백 노인은 인간 세상에 살며 종종 천인에게 대가를 받고 온갖 잡일을 처리해주는 일을 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그가 나름대로 먹고살 수 있었던 이유가 바로 이거였다.
꿈속 세상이 아닌 현실 세계의 물리적 파괴를 되돌려놓는 일.
몽마와 천인들이 인간들 틈에 오랫동안 섞여 살 수 있었던 건, 백 노인 같은 이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하이고오…….”
간만에 이렇게나 힘쓸 줄 알았으면, 어젯밤 코가 삐뚤어지게 마시진 말 걸 그랬다며 백 노인이 헤엑헤엑 숨을 골랐다.
그러고는 넋이 나간 로미를 보며 파르르 엄지를 치켜세웠다.
“……봤냐? 이 나의 능력을?”
“……예. 할아부지.”
그녀가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제야 잇몸을 만개하며 웃던 그가 산에게 당당히 손을 내밀었다.
“내놔. 소백주.”
“여기 있습니다.”
산이 군말 없이 소백주를 건넸다.
그렇게 소중한 술 단지를 건네받은 백 노인은 강의 집을 말끔히 원래대로 돌려놓은 후, 기진맥진한 상태로 돌아갔다.
저 멀리 동이 터오고 있었다.
.
.
.
하품을 쩍쩍하던 로미를 돌려보낸 후.
산은 조용히 강의 곁을 지켰다.
평소보다 아주 깊은 잠에 빠졌다는 것 외에는 다를 게 없었지만, 그는 혹시라도 그녀가 깨어나지 않을까 봐 초조했다.
태어나면서부터 겪어온 대부분의 일이 전례가 없던 일이라 예측할 수 있는 것도 적었다.
부모를 통해 얻은 데이터 외의 것들은 직접 경험을 해야지만 알 수 있던 것들이라, 이럴 땐 정말 난감했다.
물어볼 사람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고독은 늘 그림자처럼 산의 곁에 함께했지만, 이럴 때 그는 더더욱 세상에 홀로 남아버렸음을 실감했다.
최초니, 유일이니 하는 것들은 그저 산이 날 때부터 가지고 태어난 외로움의 다른 말이었다.
그때.
강이 맞춰놓은 휴대폰 알람이 울렸다.
“……으음.”
죽은 듯이 잠만 자던 그녀가 뒤척이기 시작한 것도 그때였다.
“강아.”
산이 얼른 허리를 숙여 강의 안색을 살폈다.
“정신이 들어?”
그의 목소리에 그녀는 느리게 눈을 뜨고는 반쯤 잠에 취한 듯한 눈빛으로 산을 바라보았다.
“……언제 왔어?”
평소와 다를 바 없는 모습으로 온전히 잠에서 깬 강을 확인한 순간, 산은 형용할 수 없는 무언가가 가슴속에서 와르르 무너져내리는 걸 느꼈다.
“하아.”
깊은 탄식과 함께 그녀의 위로 쏟아져 내린 산이 팔을 들어 강의 목을 끌어안았다.
영문도 모른 채 그에게 안긴 그녀가 갈 곳 잃은 시선을 허공에 굴리며 조심스럽게 물었다.
“산아.”
“……응.”
“나 설마 지각이야?”
오늘이 무슨 요일이지?
촬영이 오늘부터 시작이었나?
아니면 나, 무슨 다른 스케줄 있었어?
평소와는 다른 그의 반응에 잠이 덜 깬 강은 머릿속이 멍하다 못해 하얘졌다.
그러다 뒤늦게 어젯밤 제인과 술을 마시다 그대로 잠이 들어버렸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뭐가 어떻게 된 거야.
제인은 언제 돌아간 거지?
이상했다.
술을 많이 마신 것도 아닌 것 같은데, 기억의 한 조각이 날아가 버린 것 같은 기분이었다.
산이 왜 이렇게 평소와 다른 반응을 보이는지도 알 수 없었지만, 저를 끌어안은 그의 몸이 미약하게 떨려오는 걸 느끼며 그의 불안함을 온전히 이해할 수 있었다.
“산아. 왜 그래.”
“…….”
“나 잠든 사이에 무슨 일 있었어?”
강은 낯설 만큼 겁에 질린 것 같은 그의 어깨를 감싸고 그를 다독이기 위해 등을 쓸어내렸다.
잠시 말이 없던 산이 뒤늦게 입술을 뗐다.
“네가.”
“…….”
“깨어나지 못할까 봐……”
그럴 일 없다는 걸 알면서도.
“죽어버릴까 봐.”
몇 번이고 살아 있음을 확인했는데도.
“이대로 영영 사라져버릴까 봐.”
“…….”
“나를 떠나버릴까 봐.”
무서웠다고.
산은 차마 뒷말을 잇지 못한 채 그녀를 안은 팔에 더욱 힘을 주었다.
강은 선뜻 이유를 묻지도 못한 채, 그저 안겨 오는 그를 받았다.
자신이 잠든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자신의 존재가 산을 초조하게 만들었다는 것만큼은 느낄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녀가 바람처럼 웃었다.
“내가 죽긴 왜 죽어.”
할 수 있는 건, 이렇게라도 그를 달래는 것뿐이라 그랬다.
궁금한 게 많았지만, 우선은 찌뿌듯한 몸을 좀 움직이는 게 먼저였다.
꼭 3일은 깨지 않고 잠들었던 것처럼 온몸이 뻑적지근해서였다.
“근데 너 언제부터 있었어?”
“어젯밤.”
“그럼 집에 가서 좀 쉬다 와. 나도 좀 씻고…….”
“싫어. 여기 있을 거야.”
“…….”
“여기서 씻고, 네 옆에 있을 거야.”
그렇게 말한 산은 고집을 부리며 떨어지지 않다가, 긴 설득 끝에 겨우 집에 가서 몇 벌의 옷을 가지고 다시 돌아왔다.
그사이 강이 먼저 샤워를 하고 나왔고, 산은 정말로 그녀의 집 욕실에서 샤워까지 하고 나왔다.
지금 마음 같아서는 몸을 씻는 그 잠깐의 시간조차 떨어져 있기가 불안해서였다.
머리도 채 말리지 못하고 나온 그를 보며, 강은 소파에 나란히 앉았다.
“자. 이제 얘기해봐.”
“…….”
“간밤에 무슨 일이 있었던 건지.”
산은 천천히 새벽에 있었던 일을 이야기하며, 너무 놀라거나 걱정하지 말라고 당부했다.
당분간은 자신이 함께 있겠다며.
그의 말에 그녀가 소파 등받이에 팔꿈치를 대고 턱을 괸 채 웃었다.
“놀란 것도 너고, 걱정이 많아진 것도 너 같은데?”
그러더니 되레 산을 위로했다.
나는 괜찮으니, 걱정하지 말라고.
그는 그 말을 듣곤 긴장이 풀렸는지, 몸을 늘어트린 채 강에게 기대어왔다.
턱을 괴고 있는 쪽 어깨에 이마를 대고 있는 산의 커다란 몸을 그녀가 말없이 쓸어내렸다.
덜 마른 머리카락에서 평소 제가 쓰는 샴푸 향이 나니 어쩐지 기분이 묘하다는 생각을 하며.
그런데 별안간 꼬르륵하는 소리가 났다.
“나 배고파.”
가감 없는 그녀의 솔직함에 산이 피식 웃음을 터트렸다.
“내 얘기를 다 듣고도 배가 고파? 너 어제 죽을 뻔했어.”
“그래도 이렇게 살았잖아. 산 사람은 또 살아가야지.”
간밤에 벌어졌던 일을 듣고도 무섭지 않다면 거짓말이겠지만, 피부로 와닿기엔 모든 게 잠들기 전 그대로의 모습이라 애써 깊게 생각하지 않으려 애썼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건 두려움이 아닐 테니까.
“밥 먹자.”
자연스럽게 산을 밀어낸 강은 애써 더 씩씩하게 주방으로 향했다.
그러고는 냉장고에서 달걀 두 개와 토마토 한 개를 꺼냈다.
팬에 스크럼블에그를 만드는데, 산이 다가왔다.
그러고는 그녀를 뒤에서 끌어안았다.
“산아.”
“응.”
“도도하던 한산이 갑자기 왜 이렇게 껌딱지가 됐지?”
“몰라. 분리불안인가 봐.”
“……네가 이러면 내가 요리를 할 수가 없잖아.”
딱 달라붙어 떨어질 줄 모르는 그 때문에 몸이 묶여버렸다.
강이 농담처럼 타박을 한 후에야 그가 한 걸음 떨어졌다.
산은 그녀가 식사를 하는 동안에도 맞은편에 앉아 떠날 생각을 안 했다.
그러고 보니, 제대로 쉬지도 못한 그가 무척 피곤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아무것도 모르고 꿀잠 잤는데, 그동안 너는 수습도 다 해주고, 잠든 나 지켜줘서 고마워.”
“…….”
“기억 못 하는 게 미안할 지경이야.”
“밥이나 먹어.”
산이 가볍게 웃으며 대답했다.
“근데 너는 배 안 고파?”
“고파.”
“어제 내 꿈 안 먹었어?”
“먹었는데, 활동량이 너무 컸나 봐. 배가 다 꺼졌어.”
납작한 배를 만지작대는 그를 보며, 그녀가 심각하게 고민했다.
“그럼 나는 또 자야 하나?”
간만에 푹 잔 탓에 잠이 올지 모르겠다며 걱정했지만, 그것도 곧 기우임을 깨닫게 되었다.
배도 부르고 햇살을 받고 앉아 있자니, 잠이 솔솔 쏟아졌기 때문이다.
평소보다 잘 잤는데도, 이상하게 컨디션이 조금 떨어진다는 느낌이 들었지만, 마침 산이 배가 고팠던 터라 개의치 않았다.
“나 잠들면 맘껏 먹어.”
“너를?”
“……미쳤니?”
그녀의 눈이 뾰족해졌다.
산도 반쯤 농담으로 건넨 말이긴 했지만, 반은 무의식적으로 튀어나온 말이었다.
요즘 강을 보면, 자꾸 꿈이 아니라 다른 게 탐이 났기 때문이다.
그래서 다른 의미로 고심이 깊어졌다.
필요 이상의 것이 욕심 나서.
암묵적으로 그어진 선을 곧 넘어버리고 말 것 같다는 예감이 들어서.
마음이 가는 대로 행동하면 그만이었던 예전과 달리 모든 게 조심스러워진 자신이 한편으론 낯설기도 했다.
“이상해.”
“뭐가?”
“나는 어려운 게 딱히 없었던 거 같은데.”
“…….”
“왜 이렇게 너는 어려운지 모르겠어.”
강은 말없이 그를 바라보았다.
그러더니 곧 그의 말에 동조한다는 듯 답했다.
“사실 나도 그래.”
“뭐가?”
“나도 늘 네가 어렵거든.”
“불편해?”
“아니, 지금은 불편하거나 싫은 감정이 드는 게 아니라.”
“…….”
“몰라. 그냥 어려워.”
어렵고, 무섭고, 두려웠다.
하지만 그것의 정체가 무언지 마주하고 입 밖에 내는 순간, 돌이킬 수 없어질까 봐.
속수무책으로 빨려 들어가, 손도 쓰지 못하고 이성을 잃게 될까 봐.
더 이상 말을 이을 수 없었다.
강은 얼마 지나지 않아 잠이 들었다.
그런데 무언가 이상했다.
그녀가 잠든 지 시간이 꽤 흘렀는데도, 악몽이 발현되지 않았다.
평소보다 시간이 좀 오래 걸린다고 생각할 때쯤, 희미하게 강의 몸에서 빛이 새기 시작했다.
붉고, 푸른 빛은 아지랑이처럼 춤을 추다 이내 엉켜 신비로운 보라색으로 빛났다.
그 형태와 빛깔은 평소와 같았지만,
“…….”
그 양이 월등히 적었다.
그는 손을 뻗어 그녀의 희고 부드러운 뺨을 어루만졌다.
접촉을 통해 흡수되는 악몽의 양도 평소와 눈에 띄게 달랐다.
속도도 마찬가지였다.
일부러 속도를 늦추고 있는 게 아니었는데, 몸 안으로 빨려 들어오는 기운이 너무나 미약했다.
산은 상체를 숙여 가까이 얼굴을 내렸다.
그러고는 그녀의 숨을 통해 흘러나오는 가장 강력한 악몽을 마셨다.
그의 표정이 서늘하게 굳었다.
악몽의 맛이,
“…….”
……변했다.
대체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걸까.
서둘러 그녀의 곁에 누워 접촉을 통해 꿈에 침투했다.
사방이 암흑으로 뒤덮인 무음의 세계.
저 멀리 물에 뜬 것처럼 잠들어 있는 강이 보였다.
산은 어쩐지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았지만, 서둘러 다가가 그녀의 더 깊은 무의식 속으로 침투했다.
그런데 무엇 하나 선명하게 보이는 게 없었다.
장면은 수시로 바뀌었고, 모든 감각이 통제된 것처럼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는 세상은 고장 난 TV를 보듯 어지러웠다.
그는 본능적으로 깨닫게 되었다.
강의 세계가 뒤틀리기 시작했음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