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2. 킬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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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2. 킬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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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2. 킬러
2023.01.05.
쿠구구구 -
지면이 흔들렸다.
꿈의 세계를 구축하고 있던 요소들은 각기 분리되어 불티처럼 흩날리기 시작했다.
어지럽게 바뀌던 광경 속 건물들은 급속도로 무너져내렸고, 무채색의 풍경은 찢긴 사진처럼 갈라지기 시작했다.
마침내 세상은 검은 잉크라도 뒤집어쓴 듯 암흑으로 물들었다.
완벽한 무(無)의 세계였다.
디딜 곳이 사라진 산의 몸은 튕겨 나오듯 악몽을 벗어났다.
아니. 그건 쫓겨났다는 표현이 더 어울렸다.
“헉!”
침대에서 벌떡 몸을 일으킨 산의 이마에서 식은땀 한 줄기가 흘러내렸다.
고개를 돌려 잠든 강을 바라보는 그의 눈빛이 불안하게 흔들렸다.
그녀는 여전히 곤히 잠이 든 상태였다.
“……도대체 어떻게 된 거지?”
오후의 햇살이 나른하게 내려앉은 평온한 풍경이 무척이나 이질적으로 다가왔다.
강이 깨어난 건 그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아서였다.
기분 좋게 잠에서 깬 그녀가 몸을 뒤척이다 곧 곁에 앉아있던 산을 발견했다.
눈이 마주치자, 그가 먼저 인사를 건넸다.
“잘 잤어?”
“응. 너는? 배부르게 먹었어?”
산은 대답 대신 부드러운 미소로 화답했다.
자신을 바라보는 눈빛이 왠지 평소보다 더 온화하고 따뜻하다고 느껴졌다.
마주 보고 있자니, 저도 덩달아 미소가 지어지는 그런 표정이었다.
“왜 이렇게 눈에서 꿀이 뚝뚝 떨어져?”
오늘 먹은 악몽이 아주 만족스러웠던 걸까?
그런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산은 말없이 그저 그녀를 바라보기만 했다.
강은 천천히 몸을 일으킨 뒤 기지개를 켰다.
그러고는 침대를 벗어나며 말했다.
“우리 바람 쐬고 올래? 내가 오토바이 태워줄게.”
간만에 외출을 좀 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어 제안했다.
하지만 그는 어쩐 일인지 대꾸가 없었다.
강은 우뚝 걸음을 멈추곤 뒤를 돌아봤다.
굳게 다물린 그의 입술을 보고 있자니, 무언가 안 좋은 예감이 스쳤다.
발이 바닥에 붙어버린 것처럼 몸이 무거웠지만, 발길을 되돌렸다.
조심스럽게 다가간 그녀가 산에게 물었다.
“왜 그래?”
자신이 잠든 사이에 또 무슨 일이 생겼던 걸까?
어젯밤 이후, 애써 묻어두고 있던 초조함과 두려움이 스멀스멀 밀려오는 기분이 들었다.
그리고 곧 산에게서 나온 이야기는 그녀에게도 청천벽력과도 같은 말이었다.
“강아.”
“응?”
“네 악몽이 흐려지기 시작했어.”
그녀는 순간 머리가 하얘졌다.
전혀 예상치 못했던 이야기라 어떤 반응을 보여야 하는지 몸이 고장나 버린 느낌이었다.
“악몽이 흐려지다니? 그게 무슨 말이야?”
강은 떨리는 손끝을 말아쥐며 물었다.
“말 그대로야.”
“…….”
“꿈에서 나오는 기운이 옅어졌어. 내가 먹을 수 있는 게 거의 없을 만큼.”
“그럼 어떻게…….”
억지로 입술을 애써 떼어봤지만, 당혹감에 목소리가 잘 나오지 않았다.
그제야 자신을 바라보는 그의 눈빛이 아주 복잡한 감정을 담고 있었다는 걸 깨달았다.
뭐가 어떻게 된 걸까?
갑자기 왜 이렇게 된 거지?
집채만큼 커다래진 불안이 파도처럼 그녀를 덮쳐온 건 아주 순식간의 일이었다.
“우린 앞으로 어떻게 되는 거야?”
“…….”
“나를…….”
강이 저도 모르게 뒷걸음질 치며 말했다.
“떠날 거야?”
울컥.
처음 느껴보는 두려움이었다.
언젠가 이런 날이 올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었지만, 맞닥뜨린 현실은 예측했던 것보다 훨씬 커다란 공포였다.
산의 어깨에 올려져 있던 그녀의 손이 떨어졌다.
뒷걸음질을 치는 바람에 멀어지던 손목이 덥석 붙들렸다.
의자에 앉은 채 강의 손목을 낚아챈 산이 그녀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그의 눈빛엔 여전히 형용할 수 없는 복잡한 감정이 물들어 있었다.
하지만 강의 손목을 붙들고 있는 손만큼은 단단했다.
“답을 가져올게.”
“…….”
“그러니까 나한테 조금만 시간을 줘.”
.
.
.
산은 곧장 로미를 불러 당부했다.
“한시도 떨어지지 말고 붙어있어.”
“어디 다녀오시게요?”
그녀가 말하자, 그가 나갈 채비를 하며 대답했다.
“설성을 만날 거야.”
강의 상태가 갑자기 변하기 시작한 원인을 알아내야 했다.
그리고 산은 그걸 알아낼 수 있는 가장 빠른 루트가 설성을 통한 길이라는 걸 알았다.
“근처에 터를 잡았다고 했지?”
“네, 그렇긴 한데…….”
“알려줘, 어딘지.”
그는 로미에게서 얻은 정보를 토대로 곧장 설성이 있는 곳으로 향했다.
당분간 인간 세계에 머무를 계획이라는 그녀의 집은 다행히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있었다.
인적이 드문 동네의 오래된 단독 주택.
가택신이 튀어나올 것 같은 세월의 흔적이 여실히 느껴지는 집이었지만, 관리가 잘된 게 느껴지는 곳이었다.
마당에 나와 화초를 돌보고 있던 설성의 모습은 마치 오랫동안 이곳에 머물렀던 사람처럼 전혀 이질감이 없었다.
“그러고 계시니 정말 인간 같으시네요.”
인사 대신 건넨 말에 그녀가 뒤를 돌아보았다.
그러고는 생긋 웃으며 대답했다.
“네가 먼저 날 찾아올 줄은 몰랐구나.”
설성은 갑작스러운 산의 방문에도 놀라지 않았다.
“꽤 오랜만이지? 잘 지냈니?”
“덕분에 잘 지냈습니다.”
그가 가볍게 대답했다.
산의 나이 열여섯.
천계에 끌려갔던 날. 천인의 수장들은 모두 만났었다.
그리고 당시 설성은 자신을 끌고 온 설국의 수장을 직속상관으로 모시고 있던 설국의 부수장이었다.
대화는 몇 마디 나누지 못했었지만, 그녀의 얼굴만큼은 또렷이 기억하고 있었다.
10년 이상의 세월이 흘렀지만, 설성은 변한 게 없었다.
하지만 그녀는 소년에서 어른이 된 산의 모습이 꽤 놀라운 듯했다.
“잘 컸구나. 길에서 마주쳤으면 못 알아봤겠는데?”
가볍게 웃던 설성은 이내 안부는 이쯤 하자며, 자신을 찾아온 이유를 물었다.
“그래, 무슨 일이지?”
“설국에 계셨으니 꿈에 대해 잘 아실 거라 생각합니다.”
“왜? 그 애 꿈에 무슨 문제라도 생겼니?”
천계에서는 모아와 일리의 혼을 담고 있는 강을 ‘그릇’이라고 불렀다.
하지만 그녀는 그에게 말할 때만큼은 ‘그 애’라는 호칭이 더 적합하다고 생각했다.
산은 자신이 마주했던 것에 대해 이야기했다.
“처음 보는 광경이었습니다.”
“어땠지?”
설성이 도자기 안에 든 화초에 물을 주며 느긋하게 물었다.
“꿈속의 장면이 빠르게 바뀌더니 곧 갈기갈기 찢겨나가고, 하늘과 땅이 제멋대로 뒤틀렸습니다.”
그는 생생하게 떠오르는 장면들을 하나하나 되짚으며 대답을 이어나갔다.
“곧 암흑으로 뒤덮인 세상은 불에 타버린 것처럼 재가 되어 흩날리기 시작했고, 얼마 지나지 않아 완전히 무너져 내렸습니다.”
“…….”
“저는 튕겨 나왔고요.”
그는 물었다. 혼이 완전한 융합을 마쳐 간다는 징조인 거냐고.
하지만 그녀는 고개를 저었다.
“융합혼에 관한 건 이례가 없던 일이라, 천계에서도 연구 중이야.”
느리게 흘러나온 한숨이 무겁게 깔렸다.
“하지만 네가 본 것들은…….”
잠시 말을 멈춘 설성은 말을 신중히 고르는 듯했다.
산은 최대한 담담히 들으려 했지만, 그녀의 반응만 봐도 반가운 결과는 아닐 거라는 예감이 들었다.
설성이 들고 있던 주전자에서 다시 가느다란 물줄기가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녀는 여전히 화초에 시선을 고정한 채 말을 이었다.
“융합혼과는 별개의 일인 것 같구나.”
“…….”
악몽 속 세상이 무너지기 시작했다는 것.
그건,
“그건 그 아이가 행복해지기 시작했다는 증거란다.”
강의 삶에 변화가 생겼다는 것.
“너무 걱정은 말렴. 일정하지는 않겠다만, 한순간에 사라지지도 않을 테니.”
“…….”
“준비할 시간은 충분할 게다.”
여기서 준비라 함은, 슬슬 다른 악몽을 찾을 준비를 하라는 뜻이었다.
애초에 인간의 행복과 몽마의 행복이 같을 수 없었다.
몽마는 인간의 불행과 공포를 먹고 사는 존재였기 때문에, 둘은 절대 같은 선상에서 행복할 수 없는 운명이기 때문이다.
그가 단도직입적으로 말했다.
“총수장님을 만나고 싶습니다.”
“태천님을? 왜?”
“묻고 싶은 게 있어요.”
“말했지만, 아직은 얻을 수 있는 정보가 많지 않을 거야.”
“그럼 이것도 대답해 줄 수 없습니까?”
“뭐를?”
“혼의 융합이 완전해지면.”
“…….”
“서강은 어떻게 되는 겁니까?”
그릇이 된 인간은 더 이상 악몽을 꾸지 않고 자유로워지게 된다- 라는 가설 속에 숨어진 진짜 의미.
이례가 없던 일인 만큼 어떤 극단적인 가설을 세워도 이상하지 않을 문제였다.
설성은 잠시 말이 없었다.
“그건 순우가 연구 중이야.”
순우는 인간의 죽음을 돌보는 일국(日國)의 수장이었다.
그리고 그는 천계에서 연구자 같은 역할을 동시에 수행하는 인물이었다.
“이쪽도 데이터가 없어 애먹는 중이거든. 아직은 인간의 신변에 일어나는 변화를 관찰 중인 상태일 거야.”
“그럼 일국의 수장님을 만나게 해주세요.”
산의 요청에 주전자에서 졸졸 흐르던 물줄기가 뚝 끊겼다.
고개를 돌린 그녀가 되물었다.
“순우를?”
“네.”
설성은 잠시 말없이 그를 바라보다 다시 화분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러고는 나머지 화초에 골고루 물을 주며 대답했다.
“좋아.”
“…….”
“나와 함께 가도록 하자.”
.
.
.
산은 회사에 휴가를 신청하고, 자리를 비웠다.
그리고 그동안 강의 곁을 지키는 건 로미에게 일임해두었다.
그가 자리를 비운 동안 임시로 고용된 경호원이 삼영과 함께 강의 곁을 지켰다.
촬영이 재개되었다.
아직 신휘의 복귀가 좀 남은 상황이었기 때문에 일정은 무리하지 않는 선에서 천천히 진행하기로 했다.
남자 주인공의 부재가 길어진 상태다 보니, 배우들의 몰입도도 낮아질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특히 상대역인 여자 주인공에겐 감정의 교류 없이 일방적으로 극을 끌어나간다는 것 자체가 좋은 결과를 만들기 어려운 일이었다.
지금 이 순간.
유일하게 촬영장을 날아다니는 건 오직 로미 하나뿐이었다.
대사가 거의 없이 액션 씬 위주로 촬영을 하던 그녀는 정말로 물 만난 물고기처럼 종횡무진 촬영장을 누볐다.
희대의 발연기로 평생 먹을 욕을 다 먹었던 로미의 재발견이었다.
그런데 문제는 마지막 촬영을 앞두고 일어났다.
그녀가 맡은 역할은 신휘가 맡은 배역인 빌런 문성준의 오른팔로 나오는 황소미였다.
말보다 주먹이나 무기가 앞서는 캐릭터라 자연히 대사가 적었고, 그래서인지 이제껏 크게 문제가 있었던 적은 없었다.
아니, 오히려 그녀의 엄청난 액션 연기에 모두가 매번 감탄할 정도였다.
그런데 간만에 제대로 피 맛을 본 황소미가 대사를 하는 장면이 있었다.
[손맛 죽이네.]
고작 다섯 글자였다.
대본에는 ‘희열에 찬 소미가 감격하여’라는 지문이 있었다.
그런데 맛을 살린답시고 애드리브를 한 게 문제였다.
“아따, 손맛 죽여주는구마요잉?”
“컷!”
당연한 결과였다.
당혹감에 마른세수를 하던 성 감독이 나지막이 그녀를 불렀다.
“……로미 씨.”
“네?”
“설정에 없던 건 하지 말자. 응? 황소미 서울 사람이야.”
극의 맛을 살려내는 애드리브라면 환영이지만, 이런 경우는 당연히 안 하느니만 못한 애드리브였다.
아니 이 정도면 솔직히 캐붕(캐릭터 붕괴)수준이었다.
다행히 씩씩한 로미는 빠르게 수긍했다.
“아아! 알겠습니다! 제가 대사가 거의 없어서 욕심이 앞섰나 봐요, 헤헷!”
꾸벅 고개를 숙인 로미가 다시 촬영에 임했다.
하지만 그녀의 애드리브 욕심은 이미 불이 붙어버린 뒤였다.
안 하겠다는 게 아니라, 다양한 시도를 하겠다는 뜻이었던 거다.
그중 하나라도 성 감독의 마음에 들면 무척 뿌듯할 테니까.
“손맛이 오졌드래요!”
“컷!”
“손맛이 맛있수다!”
“컷!”
“마! 이게 손맛이다! 크으!”
“국밥집이냐?!”
결국 폭발한 성 감독이 메가폰을 내동댕이치려던 걸 옆에 있던 조감독이 겨우 뜯어말렸다.
로미는 그렇게 딱 한 번 대사 칠 수 있었던 기회마저 날려버린 채, 눈빛 연기로 마무리해야 했다.
하지만 피 맛에 심취한 킬러 같은 느낌은 끝내 나지 않았다.
너무 음흉하거나, 게슴츠레하거나, 반짝반짝했다.
“……제발 엔딩 요정은 아이돌 무대 위에서만 해.”
넌 냉철한 킬러라고.
성 감독이 울기 직전의 표정으로 중얼거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