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73. 숨은그림찾기 (73/118)


#73. 숨은그림찾기
2023.01.08.



 
우여곡절 끝에 촬영을 마친 로미가 성 감독의 눈치를 보다 슬금슬금 걸음을 옮겼다.

고작 다섯 글자밖에 안 되는 대사였지만, 그 짧은 대사 안에 감정을 욱여넣기가 쉽지 않았다.

도대체 ‘간만에 피 맛을 본 소미가 희열에 차-’를 어떻게 연기해야 한다는 것인가.

보다 못한 성 감독이 직접 시범까지 보여주겠다며 나섰다.

그는 눈을 반쯤 까뒤집고 마치 약에 취한 사람처럼 히죽 웃기도 했고, 침을 흘릴 것처럼 입을 벌리다 좀비처럼 어깨와 손을 떨기도 했다.

그러다 입술을 혀로 훑으며 ‘손맛 죽이네.’를 중얼거렸다.

연로한 배우들이 이참에 감독 말고 배우를 하라며 우스갯소리를 할 정도였지만, 그 현장 안에서 진심으로 웃지 못하는 건 오직 로미뿐이었다.

그녀는 성 감독의 시범 연기에 어떤 감흥도, 깨달음도 얻지 못한 채 그저 주변 사람들을 따라 영혼 없는 박수나 짤짤 쳐댈 뿐이었다.

모두가 한마음인데, 저 혼자만 겉도는 것만 같은 기분.

그가 가르쳐준 대로 열심히 따라 해봤지만, 분위기는 더욱 처참하게 가라앉았고, 결국 가뭄에 콩 나듯 주어진 대사를 날려버리고 말았다.


“컷! 쉬었다 가겠습니다!”

사인이 떨어지자마자 로미가 폴더처럼 허리를 접으며 사방에 대고 인사했다.


“수고하셨습니다! 수고하셨습니다!”

그 안에 숨은 참뜻은 미안합니다, 죄송합니다, 였다.

꽤 씩씩하게 돌아섰지만, 모두를 등지자 애써 힘주어 끌어 올렸던 입꼬리가 절로 처졌다.

그녀의 걸음이 쥐구멍을 찾는 모양새마냥 바삐 구석으로 향했다.


“……난 왜 이렇게 연기가 안 늘지?”

연예계에 발을 들인 건 자신을 강의 측근으로 심어두기 위한 산의 오랜 계획이었다.

하지만 진심으로 이 일이 즐겁다고 생각했다.

물론 아이돌로 데뷔해 연기까지 하게 될 줄은 몰랐지만, 무대 위에서 퍼포먼스를 하는 것만큼은 꽤 적성에 잘 맞았고, 로미가 인간 세상을 더 사랑하게 된 이유기도 했다.

그만큼 큰 사랑을 받았으니까.

그런데 욕심이 너무 과했던 걸까?

강을 만나기 위한 과정이었다고는 하나, 매번 자신의 한계에 부딪히니 씩씩한 그녀도 위축될 수밖에 없었다.

구석에 의기소침해진 채 쪼그려 앉아있는데, 문득 신휘의 모습이 떠올랐다.


‘야, 이 멍청아. 이게 그렇게 안 되냐?’

아무리 같은 소속사 식구라지만 너는 진짜 쉴드 불가라며 욕을 퍼붓던 그는 실컷 구박해놓고, 곧잘 연기 지도를 해주곤 했다.

그리고 그가 매니저를 통해 건네준 자료나 영상들은 꽤 큰 도움이 됐었다.

나중에 박 실장에게 들어 알았지만, 신휘가 제게 개인 지도를 붙여줄 것을 대표에게 권하기도 했다는 말도 들었었다.


“……양신휘가 보고 싶을 줄이야.”

매번 못 잡아먹어 안달인 사이였지만, 막상 그가 없으니 서운했다.

구석에 박혀 훌쩍거리는 로미에게 강이 다가갔다.


“로미야.”

“앗, 언니! 아니, 선배님!”

주변을 의식한 그녀가 재빨리 호칭을 정정하곤 언제 울적했냐는 듯 감정을 추스르며 활짝 웃었다.

강은 고민하다 위로를 건네러 온 거였지만, 어떤 말을 꺼내기도 전에 로미가 먼저 바짝 다가와 속사포로 귓속말을 쏟아냈다.


“언니. 주인님 없다고 혼자 막 돌아다니시면 안 돼요. 아셨죠? 불편하실 수도 있지만, 주인님이 돌아오시기 전까지는 저보고 언니 옆에 꼭 붙어있으라고 했거든요. 아, 그리고 절대 엘리베이터도 혼자 타게 하지 말라고 하셨어요.”

“아…… 그래…….”

그녀의 모습에 강은 어설프게나마 건네려던 위로를 접었다.

아무래도 로미 스스로 먼저 마음을 정리할 시간이 필요해 보였기 때문이다.

대신 강은 다른 이야기를 꺼냈다.


“그럼 오늘 종일 붙어 있어야 하니까, 우리집 놀러 올래?”

그녀의 제안이 무척 의외였는지, 로미는 반쯤 얼이 빠진 얼굴로 재차 되물었다.


“……어, 그래도 돼요?”

“그럼.”

“정말요? 불편하시지 않겠어요?”

“불편하지 않아.”

오히려 지금은 누구라도 곁에 있어야, 자신이 애써 외면하고 있는 불안을 좀 누를 수 있을 것 같았다.

로미의 얼굴에도 금세 함박웃음이 번졌다.


“좋아요! 너무 좋아요!”

강이 처음으로 제게 보인 호의라 기분이 무척 좋아진 것이었다.

이렇게나 좋아하는 걸 보니, 강은 오히려 조금 미안해졌다.

지나친 경계심이 쓸데없는 곳을 향했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사실 친해지기엔 로미만큼 신분 확실하고, 성격까지 좋은 적임자가 없었는데.

게다가 산의 명령이라고는 해도 늘 제 주변을 정찰하며 경호를 마다하지 않던 그녀 아닌가.

오히려 고마워했어야 했다.


“먹고 싶은 거 생각해 놔. 이따 내가 사줄게.”

강은 그동안 곁을 잘 내주지 못했던 만큼, 이제나마 더 잘해줘야겠다고 생각했다.


“신난다! 히히!”

금세 울적함을 털어낸 로미는 깡충깡충 뛰며 기쁨을 숨기지 못했고, 다시 씩씩하게 걸음을 옮겼다.

그렇게 촬영이 끝난 후, 로미는 강과 함께 삼영의 차를 타고 귀가했다.


“내일 비 온대.”

삼영의 말에 강이 되물었다.


“촬영은?”

“방금 연락 왔는데, 아무래도 취소하는 게 낫겠다고 하시네?”

미리 잡혀있던 야외 촬영을 실내 촬영으로 전환하려던 성 감독은 그냥 하루 쉬고, 날이 좋아지면 촬영을 재기하자고 했다.

남자주인공인 신휘가 빠진 상태에서 계속 강의 촬영분만 이어가는 게 별로 좋은 방법은 아니라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로미 씨는 오늘 강이네 놀러 간다고 했지? 거기서 잘 거야?”

삼영이 묻는 말에 당황한 로미의 시선이 분주해졌다.


“어, 저는…… 그래도 돼요? 선배님?”

그녀가 조심스럽게 물었고, 강은 흔쾌히 응했다.


“응. 자고 가.”

전례가 없던 일이라 삼영이 이상하게 생각하지는 않을까 걱정했지만, 그는 기분 좋게 웃으며 맞장구를 쳐주었다.


“그래, 이참에 둘이 좀 친해져.”

강에 비해 촬영 분량이 많지 않은 로미가 자주 촬영장에 놀러 왔던 탓에 삼영은 그녀와 대화할 기회가 많았다.

그사이에 꽤 친해지기라도 한 건지, 그는 로미에게 제법 호의적이었다.


“자, 다 왔습니다. 숙녀분들.”

차가 늘 서던 자리를 찾아 익숙하게 정차했다.


“그럼 조심히 들어가.”

“안녕히 가세요!”

로미가 삼영에게 폴더 인사를 하곤 신이 나서 강의 팔짱을 꼈다.

하지만 이내 그녀를 의식한 듯 팔을 빼고 물러섰다.


“아, 죄송해요. 제가 너무 친한 척했죠?”

로미가 호의에 들떠버린 자신을 책망하며 어색하게 웃었다.

그리고 강은 그녀의 팔이 빠져나간 자리를 물끄러미 바라보다 로미에게 조금 웃어주었다.


“아니야. 그동안 내가 의도치 않게 거리를 좀 두는 바람에 많이 불편했을 텐데, 애써줘서 고마워.”

“어…….”

“산이 도와서 나 지켜주는 것도 너무 고맙고.”

“어, 아니, 그, 아니에요. 제가 좋아서 하는 일인 걸요. 덕분에 저도 장난감도 많이 생기고, 눈깔사탕도 많이 먹고 좋았어요.”

“눈깔사탕?”

“아, 그게 뭐냐면 하급 몽마들 중에서도 가끔 맛있는 눈알을 가진 놈들이 있거든요? 바로 먹으면 맛이 없는데, 타기 전에 얼른 건져서 말렸다가 먹으면 존맛탱이에요.”

……존맛탱이라니.

신이 나서 떠들어대는 그녀를 강이 귀엽다는 듯 바라보았다.


“집에 가서 맥주 한잔할래?”

“좋아요!”

“안주 뭐 좋아해?”

“저는 다 좋아요. 여기는 진짜 맛있는 게 많은 거 같아요.”

“그럼 참치 어때?”

“참치 좋아요! 참치 마요! 참치 마요!”

“아, 그 캔 참치 말고, 회.”

“에? 그거 엄청 비싼 거잖아요!”

“혹시 못 먹니?”

“없어서 못 먹어요!”

로미가 수인의 모습으로 있었다면, 꼬리가 떨어지도록 흔들어댔을 모습이 눈에 훤했다.

강이 웃으며 말했다.


“그럼 가까우니까, 운동도 할 겸 걸어서 같이 다녀오자.”

“좋아요!”

“음. 일단 우리 둘 다 좀 가리긴 해야 할 것 같으니까, 모자만 좀 가지고 나올게.”

“네! 네!”

헤어스타일이 워낙 눈에 띄는 로미라 강은 제 후드 집업과 모자도 같이 빌려주었다.

캡을 눌러쓴 채 후디의 끈을 꽉 매어주니 너무 귀여웠다.

강은 저도 모르게 흐뭇한 얼굴로 로미를 바라보다가 그녀의 말랑한 뺨을 살짝 만졌다.

그러자 로미가 애교라도 부리듯 그녀의 손에 얼굴을 대고 마구 비벼댔다.


“그럼 갈까?”

“네!”

 

 
한껏 기분이 좋아진 로미가 강아지처럼 강을 졸졸 따라나섰다.

그렇게 참치를 사서 돌아오는 길이었다.

한강 공원을 지나는데, 익숙한 목소리가 걸음을 붙들었다.


“허니!”

제인이었다.

다 가리고 있어도 귀신같이 알아보는 눈썰미가 여전했다.


“아, 제인.”

그 순간, 킁킁대던 로미가 미간을 찌푸렸다.


“으. 어디서 썩은 내가…… 아닌가?”

고개를 갸웃대던 그녀가 주변을 둘러보았다.

얼굴이 묘하게 굳은 건 제인도 마찬가지였다.


“비 온 것도 아닌데, 어디서 하수구 냄새가 놔쥐? 꼭 젖은 개새끼 냄새 같기도 하고…… 어머! 로미 아니에요? 맞지! 세상에 웬일이야! 너무 반갑다! 나이스 투 밋유! 나 팬이에요!”

“어? 절구 파는 언니! 나도 알아요! SNS 스타!”

로미도 반갑게 알은체를 하며 제인이 절구 팔 때 추던 낯뜨거운 춤을 춰댔다.

둘은 서로가 신기하다는 듯 눈을 반짝이며 탐색하다, 초면인데도 불구하고 손바닥을 짝짝 마주쳐댔다.

강은 얼마 전, 함께 술을 마시다 그녀가 사라져버렸던 날의 일을 떠올리며 물었다.


“제인.”

“응?”

“그날 어떻게 된 거예요?”

“그날?”

“자고 일어나보니까 없던데.”

“아! 그날! 말도 마! 자기 술 너무 약해!”

제인은 화장실에 다녀왔는데, 강이 그새 잠들어버렸다고 말했다.

아무리 깨워도 정신을 못 차리기에, 어쩔 수 없이 집에 와야 했다고.


“그래요?”

“응. 허니는 술 약속 잡으면 안 되겠더라. 다음부턴 주스나 마셔.”

제인이 깔깔대고 웃었다.

물론 산에게 들은 게 있어 완전 의심을 거둘 순 없었지만, 강은 구태여 진실을 들추지 않았다.

그가 돌아오기 전까진 최대한 소동의 불씨가 될 수 있는 건 피해야 했기 때문이다.


“근데 둘이 이 시간에 어디 가?”

“같이 맥주 한잔하기로 해서요.”

“그래? 그럼 나도 거기 끼어도 될까?”

제인이 기대에 찬 눈빛으로 물었지만, 강은 웃으며 거절했다.


“오늘은 다른 분들도 오시기로 해서, 좀 어려울 것 같아요.”

“아…… 그래?”

“그럼 먼저 가볼게요.”

그녀가 가볍게 인사를 건넨 뒤, 로미의 손을 잡아끌었다.

제인은 무척 초조했다.

어떻게든 자리를 마련해서 한시라도 빨리 그녀의 몸에 꿈의 문을 새겨야 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런 상황에서 억지로 끼어들긴 무리였다.

다행히 술을 마신다고 하니, 잠들기를 기다렸다가 움직이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았다.


“좋은 시간 보내!”

돌아서는 두 사람을 향해 제인이 손을 흔들었다.


“로미도 만나서 반가웠어!”

뒤통수에 대고 연신 떠들어대는 제인을 향해 강과 로미가 다시 한번 손을 흔들어주었다.

그런데 집에 거의 다 와 갈 때쯤 로미가 말했다.


“언니.”

“응?”

“아무래도 집으로 가는 건 좀 위험할 거 같아요.”

결계를 칠 수 있는 이가 없는 상황이라 만일을 대비해 사람이 많은 곳에 있는 게 낫겠다는 판단이 들었다.

망가진 강의 집을 고치기 위해 산이 백 노인을 찾아가 얼마나 애를 썼는지 모르지 않았기 때문이다,

강은 로미의 말에 동의했다.


“그럼 밖에서 먹을까?”

“저한테 좋은 방법이 있는데.”

“뭔데?”

“제인에게 다시 가는 게 어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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