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4. 우리의 우정을 위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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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4. 우리의 우정을 위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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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4. 우리의 우정을 위하여
2023.01.12.
“저한테 좋은 방법이 있는데.”
“뭔데?”
“제인에게 다시 가는 게 어때요?”
로미의 제안에 강이 놀란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산에게 듣기로 로미는 아직 그가 제인의 정체를 의심하고 있다는 사실조차 모르고 있다고 했는데.
속을 능청스럽게 감추는 걸 어려워하는 아이라, 혹시 마주치기라도 하면 행동이 무척 부자연스러울 거라고.
그러니 만일의 사태를 대비해 모르고 있는 편이, 쓸데없이 불씨를 지피지 않는 일이 될 거라고 했다.
결과적으로 로미도 제인의 정체를 의심한다기보단, 다른 의미로 밖이 더 안전하다고 판단했을 뿐이라는 이야기가 됐다.
“제인한테 가자고?”
“네. 같이 있으면서 주변 상황을 살피는 게 더 나을 것 같아요.”
강이 재차 되물었지만, 그녀는 확신에 차 고개를 끄덕였다.
문제는 제인에게 이미 선약이 있다고 하고 돌아선 뒤라 조금 고민이 됐다는 것.
게다가 강 역시 아직 제인의 정체를 의심해야 하는 상황이라, 여전히 그녀를 마주하는 일이 마음을 무겁게 했다.
하지만 곧 로미의 의견을 따르는 게 맞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눈에 보이지 않는 곳에서 초조해하기보단, 차라리 곁에 두고 상황을 주시하는 편이 나을 테니까.
그리고 무엇보다 곁에 있을 그녀를 신뢰했다.
“그래. 돌아가자.”
무려 몽마의 눈알을 말려 사탕처럼 먹는다던 무시무시한 그녀가 아니었던가.
바라는 게 있다면 제인이 부디 로미에게 눈알이 먹히는 일은 없었으면 한다는 거였다.
내심 그녀가 인간이길 바라는 강의 진심이었다.
아무것도 모르는 로미가 신이 난 채로 앞장섰다.
.
.
.
다시 돌아간 공원에서 제인은 혼자 술을 마시고 있었다.
“왜 혼자 마시고 있어요?”
곁으로 다가간 강이 조용히 묻자, 제인이 고개를 들어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러고는 반가운 기색을 숨기지 못하며 대답했다.
“알잖아. 나 친구 없는 거.”
자조적으로 웃는 제인의 얼굴이 처연했다.
그런 그녀의 모습을 보며 강은 자연히 산을 떠올리게 됐다.
인간과 다를 게 하나도 없는 남자 몽마의 모습을.
겉모습만 봐서는 도저히 정체를 가늠할 수 없는 이유였다.
그녀는 복잡한 마음을 뒤로한 채 제인에게 물었다.
“로미, 합석해도 괜찮아요?”
“그럼, 그럼! 오크 콜스! 나야 대환영이쥐. 근데 자기 손님들 오신다고 하지 않았어?”
“시간이 너무 늦어서 다음에 보기로 했어요.”
“그래? 너무 잘됐똬!”
그녀가 손뼉을 치며 기뻐했다.
“여기 앉아.”
제인이 앉은 자리에서 물러서며 자신이 앉았던 자리를 손바닥으로 툭툭 털어냈다.
생각보다 분위기는 나쁘지 않았다.
제인이 근래 만났던 남자들에 대해 떠들어대는 건 여전했지만, 로미는 크게 관심이 없는 모양이라 그녀가 양다리든 문어발이든 신경 쓰지 않았다.
그리고 제인도 이제 강의 성향을 파악했는지, 불편한 주제를 계속 이어가지는 않았다.
“아, 맞다. 한 실장님은 잘 지내?”
“네.”
“어디 갔어? 맨날 붙어 다니더니.”
강은 웃음으로 대답을 대신 했고, 안 본 새 제법 눈치가 빨라진 제인은 더 이상 캐묻지 않았다.
그저 캔맥주를 내밀며 술을 권할 뿐이었다.
“마시자.”
“죄송해요. 식단 중이라 술 못 마셔요.”
강이 정중히 거절했고, 제인은 로미에게 맥주캔을 건넸지만, 로미도 사양했다.
“저는 바나나 우유 먹을게요!”
“그래? 그럼 내가 편의점에서 얼른 사 올게. 리버는 뭐 마실 거야?”
“전 물이면 충분해요.”
그녀가 앞에 놓여 있던 생수병을 흔들며 말했다.
“그래, 그럼 내가 얼른 가서 바나나 우유 사 올게. 다른 건 더 필요한 거 없숴?”
“괜찮아요.”
“오케이. 웨이럽 미닛. 알비백.”
제인은 금세 바나나 우유에 빨대를 꽂아 들고 돌아왔다.
그러고는 땀이 송골송골 맺힌 얼굴로 웃어 보이며 로미에게 그것을 내밀었다.
“와아! 감사합니다!”
로미가 얼른 노란 단지 우유를 받아들었다.
그런데 제인이 그런 그녀를 빤히 바라보다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있잖아, 베이비.”
“네?”
“볼 한 번만 꼬집어 봐도 돼? 너무 귀여워서 못 참겠어.”
“넹!”
말이 끝나기 무섭게 로미가 제 뺨을 내주었다.
제인은 눈을 빛내며 후드티를 꽉 조여 맨 그녀의 귀여운 얼굴을 붙들었다.
그러고는 양손으로 로미의 뺨을 잡고 아프지 않게 흔들어댔다.
“우으으! 쏘 큐트! 어디서 이런 귀여운 생명체가 태어난 거지?”
“헤헷! 우리 엄마 뱃속에서!”
“오 마이 가쉬! 인형이 말을 하네?”
제인의 리액션에 로미가 까르르 웃어댔다.
조금만 더 했다가는 수인의 모습으로 변해 꼬리라도 흔들어댈 지경이었다.
치익 -
“자 그럼 이제 각자 마실 것도 생겼으니, 건배 한번 할까?”
두 번째 캔을 깐 제인이 손을 높이 들며 건배 제의를 했다.
“우리의 우정을 위하여!”
“위하여!”
로미가 얼른 바나나 우유를 부딪쳤고, 강도 대답 대신 미소를 띤 채 들고 있던 생수병을 가져다 댔다.
단숨에 맥주캔의 반을 비워낸 제인이 허공을 향해 외쳤다.
“아, 너무 기분 좋다!”
역시 머리 복잡할 땐, 술과 친구가 최고라며.
“나도 좋다!”
로미가 그녀를 따라 말했다.
말 많은 둘이 만나니, 시간이 빠르게 흘렀다.
그리고 로미와 제인은 서로가 꽤 마음에 들었던 듯 했다.
죽은 또 어찌나 잘맞는지, 강도 잠시 복잡한 상념을 내려놓고 문득 진심으로 웃을 정도였다.
그렇게 얼마나 지났을까.
이쯤에서 그만 일어서자고 강이 말하려는데, 제인이 먼저 입을 열었다.
“아휴, 오늘 왜 이렇게 화장실이 자주 가고 싶지? 나이 먹으면 방광도 작아지나 봐. 나 금방 토일렛 다녀올게.”
“네, 천천히 다녀오세요.”
강의 말에 제인이 뺨을 붉히며 말했다.
“나 큰일 보고 올 수도 있으니까, 너무 애타게 기다리지 마. 변비 있거든.”
찡긋 윙크를 날린 그녀가 옆에 있던 휴지를 챙겨 부리나케 화장실로 뛰어갔다.
공원에 있는 공중화장실은 꽤 떨어진 곳에 있었다.
하지만 제인이 향한 곳은 화장실이 아니라, 그 뒤편에 있는 어둑한 굴다리 쪽이었다.
꼬르륵-
그녀가 주린 배를 움켜쥐며 중얼거렸다.
“아, 제길. 배고파.”
몽마의 회복력은 인간에 비해 월등히 빨랐다.
그래서 양신휘에게 신나게 얻어터져 곤죽이 된 얼굴도 금세 멀쩡해졌지만, 그 이후에 제대로 된 식사를 하지 못했었다.
그나마 주린 배를 채웠던 것들도 허기를 달래기 위해 허겁지겁 먹었던 것들이라, 포만감이 오래 가질 못했다.
배가 고플 때 예민해지는 건 인간이나 몽마나 다를 게 없었다.
오늘 밤, 강의 몸에 꿈의 문을 새기려면 미리 에너지를 비축해둬야 했기에 그녀는 틈틈이 자리를 비우며 금방 먹어 치울 수 있는 악몽이 근처에 있는지 탐색했다.
“어디 노숙자라도 없나?”
굴다리는 노숙자들이나 취객들이 심심치 않게 발견되는 곳이라 급할 때 배를 채우기 안성맞춤인 장소였다.
그리고 운이 좋으면 가끔 꽤 괜찮은 악몽을 건지기도 했다.
근처를 두리번거리는데, 그녀의 눈에 벤치에 앉아있는 남자 하나가 들어왔다.
팔다리가 길쭉한 남자는 앉은키만 봐도 무척 커 보였는데, 굉장히 마른 체형이었다.
해골바가지에 미역 한 다발을 올려놓은 듯한 모습이랄까?
허수아비에 흰 옷을 걸쳐 놓은 것 같기도 하고.
게다가 구부정하게 앉아있어 그 모습이 기괴하기까지 했다.
“노숙잔가?”
남자를 응시하는 제인의 고개가 살짝 기울었다.
얼핏 보면 청학동 동자 같기도 하고, 로커 같기도 했다.
그러다 그녀의 시선이 곧 그가 들고 있는 긴 막대로 향했다.
붕대로 칭칭 감겨있는 걸 보니, 그제야 남자의 정체가 코스튬 플레이언가 싶었다.
취객이면 접근이라도 해볼까 했는데, 그는 퀭한 눈으로 바닥을 응시할 뿐 딱히 악몽의 기운이 느껴지진 않았다.
제인은 곧 관심을 거두었다.
그때, 굴다리 밑에서 무언가가 쨍그랑하고 깨지는 소리가 들렸다.
그러더니 악몽의 기운이 확 느껴졌다.
“예스. 먹이 발견.”
입맛을 다시던 그녀가 혀를 길게 빼 입술을 훑으며 웃었다.
“저것만 얼른 먹고 가야지.”
제인은 어둑한 굴다리 안으로 빠르게 이동했다.
그곳엔 잠이 든 노숙자 하나가 악몽에 시달리는 듯한 모양새로 발버둥 치는 중이었다.
“사, 살려줘. 돈은 이게 다라고. 먹고 죽을래도 없어. 그러니까 이제 그만……!”
“오오?”
팔짱을 끼고 선 그녀가 중년 남자의 상태를 보곤 금세 얼굴에 화색을 띠었다.
노숙자 중엔 빚쟁이가 꽤 많았는데, 그들이 꾸고 있는 악몽의 질이 대부분 꽤 괜찮았기 때문이다.
이번도 역시 마찬가지였다.
늙은 남자의 꿈을 먹는 건 제인이 별로 좋아하는 방식은 아니었지만, 지금은 찬밥 더운밥 가릴 때가 아니라 바로 달려들었다.
노숙자의 곁에 다가간 제인이 그의 악몽을 흡수했다.
남자의 몸에서 뿜어져 나오던 검은 연기의 형상이 그녀에게로 빨려 들어가기 시작했다.
“으으……!”
눈을 감은 채 악몽을 마시던 제인이 슬쩍 눈을 뜨곤 입맛을 다셨다.
조금만 더 겁을 주면 더 근사한 악몽이 발현될 거 같아서였다.
그녀는 곧 망설임 없이 그의 상체 위에 올라탄 뒤 남자의 목을 조르기 시작했다.
“하, 아윽…… 끄으으!”
고통에 몸부림치던 그의 입에서 금방이라도 숨이 넘어갈 듯한 신음이 새어 나왔다.
남자의 고통이 강해질수록 제인이 느끼는 쾌락은 점점 몸집을 부풀려갔다.
그녀는 고민에 빠졌다.
아직까지 살인을 해본 적은 없었지만, 자신은 타고난 신체 능력이 워낙 뛰어난 몽마였다.
“그러니까 인간의 혼을 먹으면…….”
말끝을 흐리던 제인이 요동치는 눈빛으로 제 아래 깔린 남자를 내려다보며 중얼거렸다.
“그놈보다 뛰어나게 될지도 몰라.”
신휘에게 얻어터지던 기억이 불순 떠올라 속이 뭉근하게 달아오르기 시작했다.
제인이 여태까지 살인을 하지 않았던 이유 중 하나는 그녀를 양녀로 삼아 키워준 박만금때문이었다.
제인이 ‘박만금 여사님.’ 혹은 ‘엄마’라고 부르는 존재였다.
그녀는 자신의 정체가 몽마라는 걸 몰랐지만, 어린 제인을 무릎에 앉혀놓고 늘 그녀가 사람을 해하지 않고 바르게 자라기를 기도했다.
굳이 그런 박만금을 위해서였다기보단, 다른 방식으로도 충분히 악몽을 취하며 살 수 있었기 때문에 제인은 살육을 하지 않았다.
천인의 표적이 된다는 건 생각보다 귀찮은 일이었고, 인간 세상에서 꽤 즐거움을 찾으며 나름 만족한 생활을 했기 때문에 구태여 문제를 일으키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덕분에 박만금의 바람까지 이루어준 셈이 되었지만, 어쨌든 모두를 위해 나쁘지 않은 일이었다.
하지만 지금 이 순간.
제인은 강한 살인 충동을 느꼈다.
이사오의 족쇄를 찬 이상, 어차피 예전처럼 살긴 글렀다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그러니 이왕 이렇게 된 거 아주 강한 힘을 갖는 것도 나쁘지 않을 거 같았다.
힘을 손에 넣으면 가장 먼저 양신휘에게 받은 만큼 돌려줄 생각이었다.
“쏘리, 엄마.”
뇌리를 잠깐 스친 만금의 얼굴을 지워내며 그녀가 중얼거렸다.
지독한 악몽을 해매는 남자의 입에선 괴로운 신음이 흘러나왔다.
“끄으으!”
“죽어……, 그냥 빨리 죽어버리라고……!”
제인의 손에 더욱 힘이 들어가던 때였다.
“그만둬!”
익숙한 목소리에 흠칫 놀란 제인이 얼른 뒤를 돌아보았다.
굴다리 밖에 로미가 서 있었다.
그녀는 꽤 복잡한 표정으로 제인을 바라보았다.
“설마 했는데, 그 냄새 진짜 언니 거였구나?”
“…….”
“아쉽다.”
무거운 한숨을 내쉰 로미가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간만에 꽤 잘 맞는 친구를 만났다고 생각했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