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5. 사신(死神), 해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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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5. 사신(死神), 해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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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5. 사신(死神), 해미
2023.01.15.
몽마의 정체를 냄새로 알아채는 건 후각이 발달한 수인의 특기였다.
그런데 로미는 몽마의 급이 조금만 높아도 후각으로 정체를 밝혀내는 일이 쉽지 않았다.
그녀는 그 이유가 자신이 수인과 인간 사이에서 태어난 혼혈이었기 때문이라고 여겼다.
혼혈의 능력치는 저마다 천차만별이었으니 말이다.
물론 전혀 의심을 안 했던 건 아니었다.
맨 처음 제인을 맞닥뜨렸을 때 희미하게 맡았던 냄새가 계속 마음에 걸리긴 했으니까.
뒤는 그래서 밟은 거였다.
하지만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와본 게, 이런 광경을 목격하게 될 줄은 몰랐다.
아니, 그러지 않길 바랐다.
“아쉽다.”
“…….”
“간만에 꽤 잘 맞는 친구를 만났다고 생각했는데.”
로미는 심란한 마음에 저도 모르게 혼잣말했지만, 이내 마음을 다잡았다.
어쨌든 자신이 한 번에 정체를 알아보지 못했다는 건 제인이 중급 이상의 꽤 힘 있는 몽마라는 뜻이었고, 시간을 끌어 좋을 게 없는 승부였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녀는 나름의 작별 인사를 건넸다.
“언니 눈깔은 내가 잘 말려서, 두고두고 아껴 먹을게.”
“뭐라는……!”
로미는 그녀가 뭐라고 되받아치기도 전에 몸을 날렸다.
타악!
급소로 날아온 주먹을 반사적으로 피한 제인이 몸을 물리며 거리를 벌렸다.
덕분에 기도 압박이 풀린 노숙자는 축 늘어진 상태 그대로 기절해버렸지만, 다행히 생명에 지장은 없었다.
제인은 방어 자세를 취하며 로미를 노려보았다.
“……너, 뭐야.”
그녀의 물음에 로미가 답했다.
“안타깝게도 아군은 아니야.”
진심이었다.
아군이 아니라 안타깝다는 말은.
혼란스러웠던 건 제인도 마찬가지였던 지라, 현실을 인지하기까지 제법 시간이 걸렸다.
그녀는 차가워진 머릿속을 정리하며 로미의 기운을 읽었다.
몽마는 아니다.
천인도 아니었다.
가늘게 늘어진 눈매가 매섭게 빛나는가 싶더니, 그녀가 곧 깨달음을 얻었다는 듯 탄식했다.
“……수인이었어?”
하지만 놀라움도 잠시.
제인이 입가를 비틀며 비아냥댔다.
“어쩐지 개 냄새가 진동하더라니.”
“누가 할 소리. 언니 냄새도 만만치 않았거든? 몽마들한텐 썩은 생선 냄새가 나.”
“닥쳐!”
짧고 강렬했던 우정의 역사에 마침표가 찍히는 순간이었다.
둘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서로를 공격했고, 제대로 뒤엉켜 붙기 시작했다.
정체가 까발려진 이상 분명 원래 타깃이었던 강을 노려올 게 분명했다.
최대한 빨리 제인을 제압해야 했다.
퍼억!
로미가 휘두른 주먹에 제대로 턱을 얻어맞은 그녀가 나가떨어졌다.
쾅!
시멘트벽에 몸이 부딪쳤다 떨어진 제인이 이를 뿌득 갈며 일어섰다.
그러고는 고개를 좌우로 털며 말했다.
“하……. 이제 하다 못 해 개새끼까지 날 우습게 보고 덤비네?”
자조하던 얼굴에 웃음기가 싹 걷혔다.
“죽여버리겠어.”
아까의 화기애애함은 사라진 지 오래였다.
타악!
신휘에게 얻어맞은 앙금까지 싹 긁어모은 그녀가 부르르 떨며 로미에게 덤벼들었다.
탐색을 마친 제인의 속도가 방금보다 눈에 띄게 빨라졌다.
휘잉! 부우웅!
로켓 같은 주먹과 발이 마구잡이로 날아들었다.
“옴마야!”
콰앙!
간신히 피한 제인의 오른발이 그대로 콘크리트 바닥을 뚫었다.
제대로 맞았다면 머리통이 남아나지 않았을 거란 생각에 로미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이 쥐새끼 같은 게!”
제인이 바닥에 꽂았던 발을 들어 다시 그녀의 급소를 노렸다.
간발의 차로 이어진 공격을 막았지만, 반대쪽에서 날아온 주먹까지는 피할 수가 없었다.
“으앗!”
콰당탕탕!
바닥을 구른 로미가 비틀대며 일어서서 고개를 저었다.
눈앞이 빙글빙글 도는 기분.
“……아이고, 어지러워라.”
비껴 맞았는데도 충격이 엄청났다.
인적이 드문 곳이었기에 망정이지, 아니었으면 소란이 커질 뻔했다.
어떡하지? 장소를 옮겨야 하나?
강을 두고 멀리 떨어질 수가 없어, 고민하던 그때였다.
제인이 방향을 틀어 달리기 시작했다.
그녀가 재차 노숙자의 목숨을 노리려고 한다는 걸 알아챈 로미가 외쳤다.
“안 돼!”
그때였다.
하늘에서 빛이 번쩍하더니 순식간에 사방으로 결계가 쳐졌다.
쿠구구구구 -
심상치 않은 기(氣)에 놀란 로미가 하늘을 올려다봤다.
수인은 결계를 칠 수 없었고, 그게 가능한 건 천인이나 몽마뿐이었다.
하지만 분명한 건 지금 쳐진 이 결계가 제인의 것은 아니라는 거였다.
그녀는 곧 결계의 주인을 확인하곤, 눈이 커다래졌다.
“이건……!”
천인의 결계였다.
그와 동시에 가늘고 날카로운 목소리가 날아들었다.
“멈춰라.”
흰옷을 입고 머리를 길게 늘어트린 장신의 남자가 들고 있던 커다란 대낫을 휘두르며 나타났다.
낫에서 튕긴 번개 형상의 금빛이 제인에게 날아들었고, 그녀는 공격을 피해 노숙자에게서 떨어졌다.
콰과광!
시멘트벽이 두부처럼 잘려 나갔다.
파괴력의 여파가 땅의 울림을 통해 제인의 머리끝까지 전해졌다.
“제기랄! 넌 또 뭐야!”
버럭 소리친 그녀는 제게 공격을 한 천인이 방금 벤치에서 봤던 남자라는 걸 깨달았다.
“……뭐야. 웬 청학동 도령도 아닌 로커도 아닌 혼종인가 했더니 천인이었구나? 어쩐지. 분위기가 후지더라.”
“천박한 주둥이 함부로 놀리지 말거라. 입이 험한 놈은 끝이 좋은 법이 없느니라.”
“뭐야. 말투 왜 저래?”
제인이 오만상을 쓰곤, 말투까지 재수 없다며 꿍얼댔다.
곁에서 입만 떡 벌리고 있던 로미는 뒤늦게 정신을 차리고 물었다.
“혹시……, 우국의 수장님이신가요?”
그러자 그가 해골같이 음산한 낯을 내리며 말했다.
“그래. 내가 우국의 수장인 해미다. 너는 누구지?”
“저는 수인, 로미라고 합니다.”
“근데 나를 어찌 아는고?”
가뜩이나 무섭게 생겼는데, 목까지 길어 더 기이했다.
그녀는 바짝 졸아 든 어깨를 떨며 간신히 말을 이었다.
“그야…… 명성이 워낙 자자하셔서…….”
우국은 온갖 괴수들이 넘쳐나고, 시공간이 시도 때도 없이 비틀려 천인들도 수장되기를 꺼린다는 일명 금지의 땅이었다.
그런 우국을 다스리는 우국의 수장.
어지간한 하급 몽마들은 그 이름만 들어도 꽁무니를 감춘다는 자비 없고, 난폭하며, 그의 손아귀에 잡힌 몽마들은 어떠한 경우라도 살아 돌아가기가 어렵다는 죽음의 신.
그 악명 높은 소문의 주인공이 바로 눈앞에 있는 이 남자, 해미였다.
로미도 그를 실제로 만난 건 처음이었다.
소문에 의하면 팔 척 귀신 같은 키와 앙상한 몸. 그리고 눈만 마주쳐도 오줌을 지릴 것 같은 음산한 얼굴에 길게 찢어진 입을 가진 사내라더니, 그 말이 딱이었다.
하지만 소문의 내용을 있는 그대로 말했다가는, 아군이고 뭐고 저 대낫에 목이 날아갈 것 같아 로미는 적당히 둘러댔다.
명성이 대단해 모르는 이가 없다고.
빤히 그녀를 내려다보던 해미가 자라처럼 길게 뻗어 나온 목을 원위치하며 얇은 입술을 뗐다.
“명성이라. 자세히 듣지 않아도 무슨 이야기를 들었을지 알만 하구나.”
“아, 그, 이, 이상한 소문은 아니옵고……!”
“시답잖은 이야기는 나중에 나누도록 하지.”
그렇게 말한 해미가 낫을 고쳐 쥐고 제인을 바라보았다.
삐딱하게 서 있던 그녀가 손바닥에서 검은 막대기 형태의 연기를 뽑아냈다.
그러고는 이죽대며 말했다.
“놀고들 자빠졌네. 지들끼리 명성이 어쩌고.”
한껏 얄미운 표정을 지어 보인 제인이 조롱하듯 눈을 뒤집었다.
그녀는 이내 번개같이 달려들어 해미를 공격하려 했다.
하지만 가볍게 제인의 공격을 피한 그는 눈 깜짝할 새에 뒤를 점령한 뒤, 금방이라도 그녀의 목을 베어버릴 듯 낫을 가져다 댔다.
목덜미에 아슬아슬하게 닿을 듯한 서슬 퍼런 낫의 날이 달빛을 받아 더욱 시리게 빛났다.
해미가 스산하게 중얼거렸다.
“얘야. 도발도 상대 봐가며 해야 하지 않겠니?”
“……으윽!”
“그래야 내가 널 조금이라도 덜 고통스럽게 죽여줄 자비라도 베풀지.”
그 선득한 협박에 제인은 속이 뒤틀렸다.
왜 다들 날 못 잡아먹어 안달이야!
허공에 떠 있던 그녀의 오른손이 해미의 허벅지에 닿은 상태로 폭발을 일으켰다.
그와 동시에 빠르게 몸을 회전한 제인이 그의 손아귀를 벗어나며 도로 거리를 벌렸다.
“잔재주가 많구나.”
“엿이나 드셔.”
그녀가 양 중지를 동시에 날리며 피어싱이 달린 혀를 길게 뺐다.
해미의 낯이 불쾌하다는 듯 일그러졌다.
“건방진 놈이로고.”
“뭐래.”
“너는 곱게 죽기는 글렀다.”
“곱게 안 죽이면 뭐! 어쩔 건데?”
대낫을 쳐든 그가 답했다.
“어쩌긴. 사지를 갈기갈기 찢어, 개밥으로 던져줘야지.”
겁이나 주자고 한 말은 아니었다.
실제로 그가 사용하는 무기는 대부분의 몽마를 그런 식으로 처단했고, 해미에 대해 아는 바가 전혀 없는 제인만이 그 사실을 모를 뿐.
하지만 익히 그에 대해 알고 있던 로미는 어깨를 움찔 떨며 속으로 생각했다.
‘개밥으로 던져준다고? 설마 그 개가 나는 아니겠지?’
아무리 몽마라도 인간의 모습을 하고 짧게나마 대화를 섞었던 사이였다.
비록 아까는 눈알을 말려 사탕으로 만들겠다는 발언을 하긴 했지만, 실제로 모질지 못한 그녀가 제인을 먹을 수 있을 리 없었다.
그게 해미에게 갈기갈기 찢긴 상태라면 더더욱.
“웃기시네. 센 척하는 놈치고 진짜 센 놈 하나도 없더라.”
제인이 코웃음을 치며 말했지만, 사실 그녀는 이미 해미가 천인으로 모습을 드러낸 순간부터 이 싸움에서 이기지 못하면 살아 돌아갈 수 없음을 직감했다.
저보다 월등히 강한 상대를 만나면 오감이 그것을 인지하기 때문에 본능적으로 싸움의 승패를 어느 정도 판가름할 수 있어서였다.
하지만 어설프게 돌아가봤자, 저를 기다리고 있는 건 이사오의 심판이었다.
해미에 대한 데이터가 없는 지금. 그녀가 아는 가장 잔혹한 이는 왕인 이사오였고, 여길 피해 그에게 도망치는 건 여우굴을 피해 호랑이굴을 찾아가는 셈이었다.
그러니 오늘 강의 몸에 꿈의 문을 새기지 못한다고 하더라도, 목숨을 부지하려면 어떻게 해서든 저 천인이라도 제물 삼아 가져가야 했다.
무기를 단단히 고쳐 쥔 손에 힘이 들어갔다.
“이야아아아아!”
응축한 기를 폭발시킨 제인이 빠르게 달려들었다.
킹! 키잉!
날카로운 쇠붙이가 마찰하는 소리가 밤하늘에 연신 울려 퍼졌다.
그녀의 공격은 어느 하나 해미에게 쉽게 닿지 못했지만, 반대로 죽기 살기로 덤빈 탓에 그의 공격도 역으로 전부 막아내고 있었다.
하지만 복병은 로미였다.
해미를 상대하느라 미처 신경 쓰지 못한 그녀가 틈을 노려 발을 휘둘렀다.
제인과 로미의 완력은 그 파괴력이 엇비슷했는데, 둘 다 힘으로 승부를 보는 타입이라 탱크 두 대가 부딪치는 꼴이었다.
사이좋게 주고받은 발차기에 둘이 동시에 나가떨어졌다.
그리고 제인은 몸을 일으키기도 전에, 해미의 공격을 받았다.
쿠콰쾅!
그가 휘두른 무기에 찍힌 어깨뼈가 그대로 바닥에 처박히며 으스러졌다.
“아아악!”
고통에 찬 비명을 내지르는 그녀의 시야에 낫을 쥐고 선 채 저를 내려다보는 해미의 모습이 보였다.
밤하늘을 등진 채 스산하게 저를 보고 있는 그의 모습은 신의 일을 돕는다는 천인의 모습보다는 죽음을 몰고 다니는 사신에 더 가까워 보였다.
해미는 아무 말 없이 제인의 어깨를 박살 낸 낫자루를 치켜들었다.
그것을 높이 든 그의 모습은 완벽한 처형자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잘 벼려진 날 끝에 차가운 달빛이 내려앉았다.
‘……이렇게 죽는구나.’
모든 걸 포기한 그녀가 눈을 질끈 감았다.
저를 거두어준 박만금 여사의 모습이 주마등처럼 빠르게 뇌리를 스치던 그 순간.
키이잉!
날카로운 쇠가 맞부딪치는 소리가 들렸고, 눈을 뜨니 해미의 낫을 막고 있는 검은 연기 형상의 검이 보였다.
그리고 그것을 쥐고 있는 건 로브를 뒤집어쓴 신휘였다.
일부만 빛에 드러난 그의 눈과 커다래진 해미의 눈이 날카롭게 서로를 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