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76. 마중 (76/118)


#76. 마중
2023.01.19.



 
키이잉-!

날카로운 쇳소리와 함께 제인의 앞에 검은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그녀를 처단하려던 해미와 그런 그를 막아선 신휘의 눈이 허공에서 날카롭게 맞부딪쳤다.

두 남자가 뿜어내는 엄청난 기의 마찰에 제인은 이미 바닥에 누워있는데도, 한 번 더 보이지 않는 커다란 무언가에 밟혀 땅속으로 꺼질 것만 같은 기분을 느꼈다.

로미도 별반 다르지 않았다.

양손과 발을 바닥에 대고 잔뜩 웅크린 그녀가 기압에 날아가거나 실신하지 않으려 이를 악물었다.

해미가 신휘를 매섭게 노려보며 물었다.


“너는 누군데, 내 결계를 뚫고 들어왔지?”

설성에게 이 정도 역량을 가진 놈에 대한 데이터를 넘겨받은 기억은 없었다.

하지만 그는 곧 자신이 던진 질문이 의미 없었음을 깨달았다.

데이터야 상대에 대한 흥미가 생긴 이후에 수집해도 충분히 늦지 않으니, 이제부터라도 직접 놈에 대해 탐색해보면 그만이다.

어쨌든 자신의 호기심을 자극하기엔 충분한 힘을 가진 녀석이라는 걸 알 수 있었으니까.

끼기기긱-!

맞닿은 검과 낫의 날이 한 치의 양보도 없이 대립했다.

곧 해미가 느리게 감았다 뜬 눈을 크게 떴다.


“오호라.”

그러고는 답이 없는 신휘를 대신해 다시 말을 이었다.


“결계를 뚫고 들어온 게 아니라.”

“…….”

“처음부터 영역 안에 있던 놈이구나.”

자신이 정체를 드러내지 않고 제인을 지켜봤듯, 그 역시 더 깊고 어두운 그림자 속에 숨어 있었으리라.

로브에 얼굴이 거의 가려진 그의 얼굴은 표정을 읽을 수가 없었다.

끝이 올라간 유난히 붉은 입술이 굳게 다물려 있는 게 보일 뿐.

신휘는 대답 대신 들고 있던 검은 검에서 응축된 기를 한 번에 폭발시켰다.

분출된 힘은 곧바로 해미에게 직방으로 날아들었고, 커다란 폭발음과 함께 그를 저 멀리 날려버렸다.

퍼엉!


“수장님!”

놀란 로미가 소리쳤다.

하지만 결계의 끝까지 날아간 그는 검은 연기에 파묻혀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제인과는 비교도 안 될 만큼 강력한 힘이었다.


“이 자식이!”

로미가 끈을 바짝 조인 후드를 벗고 모자를 벗었다.

그러고는 땅을 박차며 허공으로 뛰어올랐다.

그녀는 허공에서 한 바퀴 구르며 늑대의 모습으로 변한 뒤, 빠르게 달려들었다.

그리고 신휘는 짐승의 모습이 되기 전 로미의 얼굴을 똑똑히 보았다.


‘……로미?!’

그림자에 반쯤 가려져 있던 그의 눈이 커다래졌다.

반사적으로 검을 움켜쥐고, 공격 자세를 취했던 신휘는 저도 모르게 움직임을 멈췄다.

순식간에 지척으로 가까워진 로미의 커다란 앞발이 그의 얼굴을 가격하기 일보 직전이었다.


“멍청아! 뭘 멀뚱히 보고만 있어!”

제인이 재빨리 신휘를 옆으로 밀치며 소리쳤다.

콰쾅!

로미의 앞발이 땅에 꽂히고, 그녀의 뒤를 빼앗은 제인이 두툼한 꼬리를 잡아, 있는 힘껏 던졌다.

넝마가 된 어깨가 제대로 힘을 못 쓴 탓에, 제대로 힘이 실리진 않았지만, 방금 건 그저 시간을 벌기 위함이었다.

벽을 박차고 다시 반격해오는 그녀를 향해 제인은 있는 힘껏 오른발을 휘둘렀다.

빠아악!


“깨액!”

콰콰콰광!

체중을 실은 채 옆구리에 제대로 꽂힌 위력이 로미를 이미 무너진 콘크리트 더미로 날려버렸다.


“깨갱! 깨갱!”

제대로 얻어맞은 그녀가 비명을 질렀다.

신휘는 눈매를 구기며 그 광경을 바라보다, 곧 제인을 향해 돌아섰다.

그러고는 어깨를 부여잡은 채 신음하고 있는 그녀를 데리고 결계 밖으로 도망쳤다.


“거기 서!”

간신히 잔해를 헤치고 나온 로미가 외쳤지만, 이미 둘은 모습을 감춘 뒤였다.


“으으윽…….”

인간의 모습으로 돌아와 풀썩 주저앉은 그녀의 위로 긴 그림자가 드리웠다.


“서두를 필요 없다.”

어느새 나타난 해미가 결계를 거두며 말했다.

얼굴에 생채기 하나 나지 않은 그는 옷에 묻은 먼지를 감흥 없이 툭툭 털어내며 말을 이었다.

싸움이 시작된다면 죽지 않기 위해서라도 승리해야겠지만, 가장 좋은 방법은 싸움 자체를 만들지 않는 일이라고.

그것도 천계도, 지하계도, 이계도 아닌 인간 세상에서는 다툼이 커져봤자 좋을 게 없었다.

어차피 원치 않아도 곧 전쟁은 피할 수 없게 될 테니, 그전까지는 상대의 전력을 파악하는 정도면 충분했다.

긴장이 풀린 로미는 아예 바닥으로 엎어져 버리고 말았다.

해미가 눈만 스르륵 굴려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괜찮은 게냐?”

“……네에. 괜찮습니다.”

“쯧쯧. 머리 하나의 몫을 못 해내는구나.”

“……죄송합니다.”

“그 정도 실력으론 주인을 지키는 일은 고사하고, 네 실낱같은 목숨 하나 부지하지 못 할 게다.”

가슴이 욱신거릴 만큼 아픈 말이었지만, 사실이었다.


“명심하겠습니다.”

그의 가는 눈이 로미의 다친 곳을 투시라도 하듯 빤히 바라보았다.

그러고는 무릎을 접고 앉아 유난히 긴 손가락을 펴 그녀의 옆구리에 가까이 가져다 댔다.


“부러진 갈비뼈가 폐를 찔렀구나.”

밝고 따뜻한 빛이 희미하게 번쩍였다가 사라졌다.

극심했던 통증이 조금 가라앉은 듯한 기분이 들었다.


“내가 해줄 수 있는 건 이 정도뿐이다. 임시방편이니 당분간은 휴식하며 회복에 전념해야 할 게야.”

“……감사합니다.”

낯을 찡그리고 있던 로미가 짧게 인사를 건네고는 몸을 일으키려 했지만, 쉽지 않았다.

언제 다쳤는지 손목도 접질린 것처럼 퉁퉁 부어있었기 때문이다.

해미는 손을 내밀어주는 대신 들고 있던 낫자루 끝을 무심하게 내밀었다.

얼굴은 귀신의 왕이라고 해도 믿을 만큼 무섭게 생겼지만, 확실히 천인은 천인이구나 싶어 로미의 입꼬리가 실룩였다.

의외로 그가 보기보다 따스한 마음을 가졌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그녀가 두 손으로 자루를 쥐고 씩씩하게 일어섰다.

그러고는 해미에게 물었다.


“그런데 수장님은 어떻게 알고 오신 거예요?”

“출장 왔다.”

“네?”

“설성이 네 주인과 다시 천계에 돌아가지 않았니. 교체선수로 왔단 말이다.”

“아…….”

“아무튼 저놈들 뒷조사는 내가 할 테니, 너는 그릇에게 가보거라.”

“그릇이요?”

“네 주인이 꿈을 먹고 있다는 그, 인간 여자 말이다.”

“아, 네! 그럼, 부탁드리겠습니다.”

인사가 채 끝나기도 전에 해미가 자리를 떴다.

모자를 눌러쓴 로미가 옆구리를 움켜쥔 채 절뚝이며 돌아왔다.

그녀를 본 강이 놀라 달려왔다.


“로미야!”

“언니…….”

가까이서 본 얼굴은 더 엉망이었다.


“어떻게 된 거야!”

“아니, 별건 아니고…….”

“조금만 참아, 바로 구급차 부를게!”

그녀는 일의 자세한 사정을 묻는 대신, 휴대폰을 집어 들었다.

하지만 로미가 팔을 붙들며 고개를 저었다.


“아니요. 집으로 데려가 주세요. 거기가 더 안전해요.”

“다친 건 치료 받아야지.”

“수인들은 인간보다 회복력이 빨라서, 괜찮아요. 그러니까 그냥 집으로 가주세요.”

“그래도…….”

“부탁이에요.”

강은 잠시 고민했지만, 결국 그녀를 부축해 집으로 돌아왔다.

침대에 로미를 눕힌 강은 여기저기 긁히고 쓸린 곳을 꼼꼼히 닦아준 뒤, 약을 발라주었다.

그녀가 안정을 좀 찾자, 강이 그제야 사정을 물었다.


“어쩌다 이렇게 됐어?”

“그…… 크게 다친 건 아니니 걱정하지 마세요.”

로미는 제 부상보다 제인이 몽마라는 걸 어떻게 전해야 할지 난감한 얼굴이었다.

산에게 듣기로 꽤 친하게 지냈다고 들었는데, 사실을 알면 강의 상심이 너무 클 것 같아서였다.

하지만 강은 먼저 눈치를 채고 이야기를 꺼냈다.


“널 이렇게 만든 게, 제인이야?”

“아, 그게…….”

화들짝 놀라 얼버무리던 로미는 결국 어쩔 수 없이 실토했다.

강은 어느 정도 예상했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 몽마였구나.”

물론 예상했던 일이라고 해서, 상심하지 않은 건 아니었다.

언제나 그랬듯, 그저 받아들일 뿐.

그녀는 서운한 기색을 감추고 로미를 돌보는 일에 정성을 쏟았다.

.
.
.

산은 예상했던 것보다 빨리 돌아왔다.

하지만 빨리 온 만큼 아쉽게도 수확이 없었다.

순우에게는 연구 중이라는 답만 얻을 수 있었고, 변화한 강의 몸 상태는 융합이 완성되어간다는 징조일 뿐이라는 예측 가능한 답만 돌아왔다.

정확한 건 인간 세상의 시간으로 한 달은 더 지나야 알 수 있을 것 같다는 말과 함께.

집으로 돌아온 산은 하루치 휴가를 반납했다.

3일씩이나 필요하지 않게 된 탓에 내일 바로 복귀할 생각이었다.

오자마자 강에게 연락을 했는데, 닿지 않았다.

삼영에게 연락을 해보니, 촬영 중이라는 회신이 돌아왔다.

산은 로미를 불렀다.

오전 내내 촬영장에서 강의 곁을 충실히 지키던 그녀는 주인의 호출에 빠르게 모습을 드러냈다.


“주인님!”

수인의 모습으로 나타난 로미가 그의 옷자락에 마구 뺨을 비벼대다 벌렁 드러누웠다.

산은 습관처럼 그녀의 배를 만져주다 옆구리 쪽에 느껴지는 상흔의 기운을 느끼고 물었다.


“다쳤어?”

“넹. 다쳤었는데 거의 다 나았어요. 이렇게 움직여도 하나도 안 아프고요.”

그녀가 발라당 누운 채 좌우로 몸을 꺾으며 활어처럼 파닥거렸다.

그리고 그는 곧 로미에게 그간의 일을 전해 들었다.


“예상한 대로군.”

제인이 몽마였다는 사실은 그리 놀랍지 않았다.

그보다는 해미가 설성의 대타로 왔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절로 간담이 서늘해지며 온몸에 소름이 돋는 것만 같은 기분이 들었다.


‘회의를 하고 말 것도 없습니다. 혼종은 죽여 없애는 게 답이지요.’

명만 내리시면 언제든 즉각 처형하겠다며 귀신처럼 웃던 게 바로 그였기 때문이다.

그때의 기억이 트라우마처럼 박혀, 천계에 가더라도 그만큼은 절대로 마주치고 싶지 않았다.

어쨌든 그런 해미의 공격을 막고 제인을 데리고 도망쳤다는 또 다른 몽마.

검은 로브를 썼다고 하는 그놈은 이미 얼마 전부터 나타나 강의 주변을 주시하던 놈과 같은 놈일 것이다.


“제가 그놈 얼굴이라도 확인해보려고 했거든요? 그랬는데!”

“……,”

“그랬는데!”

“그랬는데?”

“……결국 털끝 하나도 못 건드렸어요.”

그렇게 이야기하는 로미는 잔뜩 풀이 죽은 표정이었다.

이번 전투를 통해 수인으로서 자신의 실력을 아주 객관적으로 파악했기 때문이다.

그도 그럴 것이 그동안 상대해온 몽마들은 언어 구사는 물론 팔다리조차 제대로 형체를 갖추지 못한 하급 중에서도 최하위 계급들이었다.

동네 개울가에서 피라미만 잡고 놀다가 갑자기 망망대해에 던져져 상어와 싸운 기분이 딱 이럴 것이다.

산은 그런 그녀를 말없이 바라보다 손을 뻗었다.

그러고는 커다란 손으로 로미의 머리를 쓰다듬어주었다.


“고생했어.”

그러자 그녀가 고개를 저었다.


“아니에요. 수인은 원래 주인을 지키고, 주인의 오른팔이 되어주는 존재인데…… 저는…….”

“너는 내 분신이야.”

“……네?”

“가족이라고.”

산은 그렇게 이야기하며 조금 웃어주었다.


“충분히 잘하고 있다는 얘기야.”

 

 
울먹울먹하던 그녀의 커다란 눈이 동경에 물들어 더욱 영롱하게 빛났다.

자신의 실력에 실망해서 힘을 키워야겠다는 것보다 훨씬 더 강력한 동력을 얻었기 때문이다.

로미는 마음속으로 다짐했다.

언제든 자신이 목숨을 바쳐야 하는 순간이 온다면 그건 산을 위해서일 거라고.

그녀는 먹먹한 마음을 다잡으며 그의 등을 떠밀었다.


“어서 언니에게 가보세요. 강한 사람이라 티는 안 내도 상심이 클 거예요.”

그런데 산이 조금 고민스럽다는 듯 입을 열었다.


“인간은…… 아니, 여자는 어떤 식의 위로에 기운을 얻지?”

“걱정되세요?”

당연히 걱정하고 있다.

그는 잠시 다물려 있던 입을 다시 뗐다.


“그냥 내가 워낙 그쪽은 서툴러서.”

그러자 로미가 냉큼 나서서 꽤 전문가다운 포스로 말했다.


“종족을 떠나 여자를 위로할 수 있는 좋은 방법이 있어요.”

“그게 뭔데?”

산이 묻자, 그녀가 눈을 가느스름하게 뜨며 확신에 차 말했다.


“키스요.”

그의 표정이 짜게 식었다.


“네가 받고 싶은 거 말고.”

“앗, 들켰넹. 히히.”

로미가 해맑게 웃었다.

그녀를 밉지 않게 흘겨보던 산이 이만 강을 만나러 가겠다며 로미를 보냈다.

부재중을 확인한 강에게서 집에 거의 다 왔다는 메시지가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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