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7. 단 하나의 진심
(77/118)
77. 단 하나의 진심
(77/118)
#77. 단 하나의 진심
2023.01.22.
‘종족을 떠나 여자를 위로할 수 있는 좋은 방법이 있어요.’
‘그게 뭔데?’
‘키스요.’
로미와의 대화를 떠올리던 산의 입술 사이로 실없는 웃음이 샜다.
‘네가 받고 싶은 거 말고.’
‘앗, 들켰넹. 히히.’
타박에도 헤실헤실 웃던 녀석의 얼굴은 또 어찌나 해맑은지.
로미가 아주 어렸던 꼬꼬마 시절부터 보아온 탓인지, 그는 그녀가 수하라기보단 여동생처럼 느껴졌다.
둘 다 어릴 때 부모를 잃고 의지할 곳 하나 없던 험한 세상에서 함께 자라서 더 그럴지도 몰랐다.
가족처럼 여기고 있다는 말은 진심이었다.
어쨌든 마냥 아이 같던 로미는 근래 이성에 눈을 떴는지, 안 하던 이야기를 하는 일이 부쩍 늘었다.
‘키스요.’
키스라니.
호기심에 반짝이던 눈을 떠올리니 자꾸 웃음이 났지만, 한편으론 진짜 오라비의 심정이 된 것만 같아 기분이 묘했다.
수인들은 반려를 일찍 정해 평생 단 한 번의 사랑을 한다.
아무래도 그녀가 짝을 찾을 날이 머지않았다는 징조일 것이다.
하지만 그런 잡념은 집 밖을 나서는 순간 모조리 날아가 버렸다.
그의 머릿속을 가득 채운 건 우습게도 고작 하루 떨어져 있었던 강이었다.
거의 다 왔다는 그녀의 연락을 받고, 외투도 걸치지 않은 채 집을 나섰다.
그리고 지하 주차장에 막 도착했을 때, 차의 문이 열리고 있었다.
“어? 산아.”
내리려던 강이 산을 발견하고는 반갑게 웃었다.
그녀의 얼굴을 보는데 어쩐지 가슴 한쪽이 욱신거리는 느낌이었다.
고작 하루 못 봤을 뿐인데, 그 하루가 마치 일 년처럼 길게 느껴졌다.
혹시 자리를 비운 사이에 무슨 일이 생기지는 않을까.
너도 나처럼, 너의 빈자리를 우주만큼 커다랗게 느끼고 있었을까.
온통 그런 생각으로 가득 찬 시간을 거닐며.
“강아.”
들릴 듯 말 듯 한 목소리로 강의 이름을 부른 그가 성큼성큼 다가갔다.
그러고는 그녀의 구두가 채 바닥에 닿기도 전에 강의 손목을 잡아당겨 와락 품에 안았다.
“아……!”
쏟아지듯 차에서 내린 그녀의 입술 사이로 짧은 탄성이 터졌다.
산은 강의 보드라운 머리카락에 입술을 묻은 채 말했다.
“보고 싶었어.”
아무것도 계산하지 않고, 꺼내놓은 날것 그대로의 진심이었다.
하지만 그걸 본 삼영은 눈이 튀어나올 듯 커다래졌다.
“히익! 야…… 야, 이것들아! 공공장소에서 이게 뭐 하는 짓들이야!”
물론 강이 사용하는 주차장은 일부 특정 세대만을 위해 따로 공급된 프라이빗한 공간이라 한눈에 주변이 다 파악될 만큼 작았고, 인적도 드물었다.
그러나 그는 벽에도 눈이 달린 것처럼 예민하게 반응했다.
CCTV며, 블랙박스도 어쨌든 카메라 아닌가.
언제, 어디서 예상 못 한 포착이 이루어질지 모를 일이니, 조심하고 또 조심해야했다.
그게 강의 숙명이었고, 자신의 사명이었다.
“이놈들아! 좋은 말로 할 때, 안 떨어질 테야?”
제 말은 귓등으로도 안 듣고, 예고에도 없던 멜로를 찍고 있는 둘을 그가 급히 떼어놓았다.
아니, 떼어 놓았다기보단 그런 건 집에 가서 하라며 등을 떠밀었다고 하는 게 맞겠다.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고, 삼영은 마치 비밀스러운 사랑의 보디가드라도 된 것처럼 사방을 살피며 둘을 밀어 넣었다.
“닫힘 버튼! 빨리! 빨리!”
그가 외쳤고, 산은 한팔로 강을 끌어안은 채 착실히 삼영의 명을 수행했다.
“어, 오빠……!”
그녀가 고개만 뒤를 돌려 인사하려 했지만, 곧 문이 닫혀버리고 말았다.
삼영은 아무 일도 없었던 척 주변을 슬쩍 정찰하곤, 곧 빠르게 사라져주었다.
둘만 남게 되자 강이 바로 입술을 뗐다.
“산아.”
“너는 나 안 보고 싶었어?”
그 말에 그녀는 대답을 하려다 말고 슬쩍 위를 보았다.
엘리베이터의 숫자가 빠르게 바뀌고 있었다.
아주 약간의 침묵이 흐른 뒤 대답이 돌아왔다.
“보고 싶었지.”
산이 시선을 내려 조용히 다음 말을 기다렸다.
“그런데 우리, 할 말 많잖아.”
“…….”
“그러니까 나머지는 집에 가서 이야기하자. 밤이 길 거야.”
그는 언제 재촉했냐는 듯 느긋하게 고개를 끄덕였지만, 엘리베이터의 문이 열리자마자 그녀의 손목을 붙들고 빠르게 내렸다.
도어록이 해지 되고, 열렸던 문은 곧 굳게 닫히며 두 사람을 익숙한 둘만의 공간으로 완전히 분리해냈다.
현관의 센서등이 켜지고, 둘은 서로를 마주 보았다.
고작 하루의 시간일 뿐인데, 일분일초가 온통 너였다.
부쩍 위험이 커진 일상을, 갑작스러운 변화를 넌 어떻게 이겨내고 있을까.
어쩌면 헤어짐이 가까워졌다는 징조라는 걸, 너도 느끼고 있을까?
우리가 느끼는 이 불안과 공허는 단순한 이별의 아쉬움일까?
그런 질문과 생각이 완벽히 일치한 순간, 둘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서로를 끌어안았다.
그리움이 묻어난 다정한 포옹이었지만, 격앙이 그대로 녹아든 애정 어린 포옹이기도 했다.
아직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는데, 맞닿은 심장의 고동이 터질 듯 뜨겁게 뛰어댔다.
“태어나서 오늘처럼 시간이 안 갔던 적이 없었던 것 같아.”
보고 싶었다는 그의 말에 강도 마음을 털어놓았다.
그저 몸이 가는 대로 다짜고짜 그녀를 끌어안고 봤지만, 뒤늦게 산은 조금 미안해졌다.
많이 기다렸을 텐데, 그럴듯한 소식을 가지고 와주지 못해서.
그래서,
“괜찮아?”
고작 싱거운 안부만 묻고 말았다.
강이 되물었다.
“뭐가?”
“제인이 몽마라는 거 들었다며.”
다쳤을 마음을, 너의 불안과 염려를 걱정해 물은 말이었다.
그 마음을 이해한 그녀는 애써 웃는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괜찮아.”
산은 어떤 말로 강을 위로하거나, 안심시켜야 할지 알 수 없었다.
“미안해. 내가 위로가 서툴러.”
그래서 건넨 사과에 그녀는 진심으로 웃었다.
괜찮다는 뜻이었지만, 그는 어떻게든 그녀를 위로하고 싶었다.
그리고 이렇게 답이 모호할 땐 직접 답을 얻는 것도 나쁘지 않은 방법이라고 생각했다.
“인간은 어떤 방법으로 위안을 얻지?”
“응?”
“로미한테 물어봤는데 별로 도움은 안 돼서.”
“로미가 뭐라고 했는데?”
“…….”
산이 대답이 없자, 그녀는 로미가 건넸을 법한 조언을 떠올려보았다.
몽마의 눈을 말린 눈깔사탕 한 봉지를 들고 찾아가 보라고 했을까?
아니면 그녀가 가지고 놀던 몽마의 두개골을 건네며, 뇌물공세를 펼쳐보라 권했을까.
어쩌면 맛있는 걸 함께 먹어보라고 했을 수도 있겠다 싶었다.
로미라면 했을 법한 귀여운 발상을 떠올린 강이 조용히 웃었다.
산이 대답이 없는 바람에 결국 진실은 알 수 없었지만, 이 순간 그가 제게 위안이 되고 싶어 한다는 마음은 충분히 알 수 있었다.
“인간도 몽마와 다르지 않아.”
언젠가 네가 했던 말처럼.
“우린 먹는 게 다를 뿐이지, 결국 같은 감정을 느끼니까.”
“…….”
“결국 네가 알고 있는 게 정답 아닐까?”
그녀의 답에 산은 질문을 바꿔보기로 했다.
“그럼 너도 나한테 안겨있을 때, 가장 큰 위안을 얻어?”
“어?”
“나는 그러거든.”
“그, 그야 너는 그때 식사를 하니까…….”
“물론 네 악몽은 더할 나위 없이 훌륭하지만, 너는 너 자체로…….”
잠시 말을 멈췄던 그가 다시 올곧게 시선을 마주하며 답했다.
“나를 행복하게 해.”
살아남는 게 삶의 유일한 목표였던 내게, 언젠가부터 너는 살아야 할 이유가 되어주었다.
그리고,
“멍청하게 그걸 이제 알았네.”
한계에 도달한 마음은 이제 외면할 수도 없게 커져, 더는 숨길 수 없는 진실이 되어버렸다.
있지도 않던 식탐이 너를 만난 순간 갑자기 생겨버린 게 아니라, 그냥 너를 욕심 낸 거였다는 걸 이젠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그건 강도 마찬가지였다.
삶에 대한 강박이 어느 순간 자연스럽게 사라지고, 이렇게 살다 죽어도 아주 억울하진 않겠다는 생각이 들었던 지점에 산이 있었다.
겪어보지 못해 몰랐던 행복의 실체를 마주한 느낌이랄까.
널 만나 충분히 행복했고, 그래서 고맙다는 말은 그녀가 그에게 건넸던 말 중 가장 100%에 가까운 진심이었다.
자신은 이미 행복한 사람이라는 사실을 문득 깨닫게 된 순간이었다.
마음이 벅차올랐다.
“음, 가만히 생각해보니까.”
강은 진지하게 고민을 하는 척하며 말을 이었다.
“나도 널 안고 있을 때, 마음이 편안해지고 위안을 얻는 것 같아.”
말도 안 된다고 생각했던 그와의 동침이 이제는 너무나 익숙한 게 되어버렸다.
그리고 그녀는 정말로 산의 보호 아래, 산의 품 안에 있을 때 가장 큰 위로와 안정을 느꼈다.
“내가 안고 있을 때?”
하지만 그의 입을 통해 다시 들은 말은, 뱉어놓고 난 후에야 꽤 민망한 말이었다.
뺨이 살짝 붉어진 강이 급히 말을 덧붙였다.
“뭐, 소소한 칭찬도 멋진 위로가 되고.”
“…….”
“나는 칭찬에 약하거든.”
칭찬은 고래도 춤추게 한다잖아?
그럴듯한 화제 전환이라고 생각했는데, 그가 그녀를 빤히 바라보았다.
강은 조금 더워진 것 같아, 손부채질하며 먼저 걸음을 돌렸다.
“계속 서 있을 거 아니면, 이제 들어가서 이야기하자.”
그러고는 거실로 들어서며 머리를 두 손으로 묶듯 잡았다.
“집이 좀 더운 것 같지? 어, 내가 머리끈을 어디에 뒀더라.”
그녀가 바로 앞에 놓인 테이블 위의 머리끈을 보지 못한 채 헤맸다.
산은 조용히 그것을 집어 든 채 다가갔다.
그러고는 그녀의 뒤에 선 채 긴 손가락을 뻗었다.
목덜미에 스치듯 닿은 감촉에 강이 굳은 듯 걸음을 멈추었다.
그가 그녀의 긴 머리를 하나로 모아, 묶어주며 말했다.
“칭찬에 위로를 얻는다고 했지.”
“응.”
“너는.”
“…….”
“보기도 좋고, 먹기도 좋아.”
평소 같았으면 힘껏 째려봤겠지만, 오늘은 그냥 웃음이 나왔다.
그러자 따라 웃던 산이 입술을 내려 그녀의 목덜미에 키스했다.
“아프지 마.”
움찔 어깨를 떤 강이 말했다.
“나 아픈 곳 없는데.”
“마음 아플까 봐.”
어떤 이유로든, 그녀가 다치거나 상심하지 않길 바라는 마음으로 건넨 말이었다.
그리고 그 마음은 오롯이 강에게 전해졌다.
아까 반쯤 빈말처럼 건넸던 ‘괜찮다’는 말에 온전히 힘이 실리는 듯한 기분이었다.
마음이 단단해지는 것 같았다.
이제 제 곁의 누가 몽마든 상관없었다.
네가 내 곁에 있으니까.
그리고 너도 몽마니까.
다른 건 중요하지 않았다.
남은 건, 지금 자신이 원하는 미래를 감당할 각오가 되어 있냐는 것뿐.
차가운 샤워가 간절했다.
“우선 좀 씻고 올게.”
나머지는 잠시 혼자만의 시간을 갖고, 천천히 정리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래.”
산은 그렇게 대답한 뒤, 소파에 앉아 느긋하게 그녀를 기다렸다.
허기를 한계 이상으로 오래 참기는 힘들어서 돌아오는 길에 악몽을 먹고 오는 길이었다.
만족스러운 식사는 아니었지만, 강을 제법 신사답게 대해 줄 수 있는 선택이었다는 것에 의미를 두기로 했다.
배가 고프지 않냐고 묻는 그녀에게 다른 악몽으로 배를 채웠다는 말은 하지 않았다.
티는 크게 내지 않아도, 강이 싫어하는 일이라는 걸 알기 때문이었다.
그녀는 오직 자신의 악몽을 통해서만 제가 만족하길 바랐다. 그리고 강의 그런 모습을 보는 일은 그에게 꽤 즐거운 일이었다.
그녀가 제 목에 줄을 묶어 구속한다고 해도, 꽤 나쁘지 않을 거라는 미친 생각마저 들 정도였다.
그런데 그 순간.
욕실에서 희미하게 물이 떨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솨아아 -
느리게 돌아간 산의 시선이 강이 있는 욕실 쪽을 바라보았다.
인간보다 뛰어난 오감이 오늘따라 더 기민하게 능력을 발휘하는 것만 같다.
샤워기에서 떨어지는 물줄기가 보드라운 살과 마찰하는 소리가 그의 상상력을 난폭하게 자극했다.
느긋했던 마음에 작은 돌 하나가 던져진 기분.
“…….”
마음에 풍랑이 일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