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78. 오늘을 기록 (78/118)


#78. 오늘을 기록
2023.01.26.



 
솨아아-

샤워기에서 쏟아진 물이 피부와 마찰하는 소리.

안개처럼 퍼진 자욱한 수증기 너머에 있을 그녀의 모습이 눈앞에 생생히 펼쳐지는 것만 같았다.

산의 검지 끝이 소파의 쿠션을 일정하게 두드렸다.

톡. 톡. 톡…….

빨라지는 심장의 박동에 따라 손끝도 분주해졌다.

매일 보는 사이니, 하루 정도는 눈에 보이지 않아도 괜찮을 거라고 생각했다.

아니, 이참에 떨어져 보는 경험이 꼭 필요할 거라 여겼다.

그리고 산은 분명히 알게 되었다.

그런 시도를 했다는 자체가 오만이었다는 걸.

서강은 아무 짓도 한 게 없는데, 벗어나려 할수록 살갗을 파고드는 올무 같았다.

태연하게 미소 짓는 얼굴로, 아무것도 모른다는 순수한 얼굴로, 언제든지 제 심장을 터트려버릴 수 있을 것만 같았다.

뭐든 저질러버리고 싶다는 충동이 야금야금 이성을 갉아먹기 시작했다.


“……하아.”

산이 커다란 손으로 얼굴을 덮었다.

마지막 남은 한 방울의 인내를 쥐어짠 탄식이 묵직하게 흘렀다.

사고 치기 좋은 밤이었다.


“안 되겠다.”

그는 몸을 벌떡 일으켜 주방으로 향했다.

그러고는 아일랜드 식탁을 짚고 선 채 얼음을 가득 담은 물 한 잔을 단숨에 비워냈다.

컵에 남은 얼음 하나를 입에 넣었다.

물로 해결될 갈증이 아니라는 걸 알지만, 입안에 무언가를 넣고 굴리거나 씹는 행위는 흐트러진 집중력을 끌어 모을 때 도움이 됐다.

혀끝에서 부서진 얼음 조각이 과열된 뇌를 차갑게 식혔다.

그는 자신이 알아낸 정보를 최대한 담백하게 전할 방법을 고민했다.

결론은 간단히 도출됐다.

악몽이 흐려진 건 그저 일시적인 현상이고, 그건 곧 융합이 가까워졌다는 단순한 조짐일 뿐이니 걱정할 것 없다고.

아직은 장담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는 상황이었지만, 그녀에겐 먼지만큼의 걱정거리도 안겨주고 싶지 않았다.

아니나 다를까.

강은 샤워를 하는 내내 걱정했던 모양이다.

예쁜 미간이 좁아져 있다.

그녀는 산이 앉아 있는 소파의 옆자리에 털썩 앉았다.

그러고는 지금 자신이 얼마나 유혹적인 향기를 풍기는지도 모르는 채 수분기를 가득 머금은 머리카락을 매만졌다.

잠잘 때가 가까워진 서강의 몸에선 유독 달콤한 냄새가 진해진다.

막 샤워를 마친 후였으니, 더 말할 것도 없었다.

하얗고 가느다란 목과 한입 베어 물면 과즙이 톡 터져 나올 것만 같은 복숭앗빛의 뺨을 보고 있자면, 속에서 열이 끓었다.

산은 자주 그녀의 얼굴과 몸 구석구석에 입을 맞추고 깨무는 상상을 했다.

머릿속에선 이미 몇 번이나 강을 잡아먹은 셈이지만, 이제 그런 자기 위로로는 충족이 되질 않았다.

배불리 그녀의 악몽을 독차지하면서도, 언젠가부터 악몽‘만’ 먹어야 한다는 사실이 그를 매번 시험에 들게 했다.

타고나길 인내와는 거리가 먼 탓에 무척 고역이 아닐 수 없었다.

물끄러미 강의 얼굴을 응시하던 산이 저도 모르게 손을 뻗었다.

하지만 걱정 가득한 얼굴로 중얼거린 그녀의 혼잣말이 그의 움직임을 멈추게 했다.


“오늘도 악몽을 안 꾸면 어떡하지?”

떠오르는 대로 뱉은 말이었지만, 사실 그건 우스운 걱정이었다.

산은 허공에 멈춰 있던 손을 내리며, 옅은 웃음을 흘렸다.


“그럼 기뻐해야지.”

기뻐해야 마땅하다는 그 당연한 말에, 강은 망설임 없이 답했다.


“기쁘지 않아.”

그렇지 않다고.

말도 안 된다고 생각했던 일을 바라게 된 건 상황이 변했고, 마음이 변했기 때문이다.

산이 물었다.


“어째서?”

“어차피 나는 네가 기억을 없애주니까 기억도 못 하는 악몽을 꾸는 건데, 너는 먹을 게 없어지잖아.”

질 좋은 악몽은 당장 허기를 채우는 것 이상의 것을 몽마에게 선사했다.

그들이 사는 세상에선 힘이 곧 권력이었고, 힘을 키우기 위해서는 반드시 모든 요건을 충족시킬 좋은 악몽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그러니 산이 나중에 어떤 선택을 하게 되든 지금 그에게 필요한 건, 현존하는 악몽 중 가장 좋은 악몽을 독차지해 결전의 날까지 꾸준히 힘을 비축하는 일이었다.

그런 의미에서 강은 그를 위해 무언가 보탬이 되어주고 있다는 사실이 꽤 뿌듯했다.

그런데 하필 이렇게 중요한 일을 앞둔 순간에 제 악몽이 흐려지다니.

당연히 마음이 좋을 리 없지 않겠냐는 그녀의 말에 산의 웃음이 더욱 길어졌다.

살짝 고개를 기울이던 그가 관자놀이를 괸 채 모호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근데 강아.”

“응.”

“우리가 서로를 걱정해야 할 사이는 아닌데.”

“…….”

“그렇지?”

너무나도 당연한 그 말에 강은 고개를 돌려 산을 바라보았다.

그러고는 흔들림 없는 견고한 눈빛으로 그를 향해 말했다.


“네 말이 맞아. 하지만 나는 네가 걱정 돼.”

“…….”

“네가 내 불행을 바라지 않는 것처럼.”

아무렇지도 않게 허를 찌른 그녀는 너에게 도움이 될 수 없다는 현실이 이렇게나 속상한 일로 다가올 줄은 몰랐다고 했다.


“재미있는 일이지. 우리가 어쩌다 이렇게 됐을까?”

그러고는 단단히 맞물려있던 입매를 느슨하게 풀며 웃었다.

‘우리’가 서로를 걱정해야 할 사이는 아닌데.

‘우리’가 어쩌다 이렇게 됐을까?

마음이 같다는 건 오간 말로도 이미 충분히 알 수 있었다.

상대의 불행이 나의 행복이 되는 운명.

그게 우리가 살 방법이고, 걸어야 할 길이라는 걸 너무나 잘 알고 있지만, 그건 이미 의미를 잃어버린 진실이었다.

우리는 더 이상 서로의 불행을 바라지 않으니까.

그러니 돌아갈 수 없는 늪의 한 가운데 빠져, 몸이 삼켜지더라도, 그게 진실이고, 진심이라면, 그것 또한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있잖아, 산아.”

강은 내내 생각해오던 것들에 대해 비로소 고민의 마침표를 찍었다.


“나는 남들이 다 하는 거, 내가 원하는 걸 다 이루어야지만 손에 들어오는 게 행복인 줄 알았어.”

“…….”

“그런데 그게 아니더라?”

그녀가 담백하게 웃으며 말을 이었다.


“진짜 행복은 더 이상 바라는 게 없어지는 순간에 이르는 거였어.”

그리고 그 순간이 변함없이 계속되길 바라는 것.

그 사실을 인정하지 않으려 했던 건, 그 선택이 불러올 엄청난 결과를 감당할 준비가 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이제는 아니었다.


“이미 나는 행복한 사람이었더라고.”

“…….”

“너 때문에.”

너 때문에.

그 말에 산의 눈빛도 흔들리기 시작했다.

너는 너 자체로 나를 행복하게 한다는 말.

그건 자신이 그녀에게 했던 말이었다.

그리고 강은 지금 자신과 같은 마음이라는 말을 하고 있었다.

그녀는 흔들리는 그의 눈을 올곧이 마주하며 말을 이었다.


“그래서 내가 당장 내일 죽게 되더라도 후회하지 않게, 오늘 너한테 꼭 하지 않으면 안 될 말이 있어.”

두려움보단 용기를 내는 게 인간한테 주어진 너무나 짧은 삶을 더 풍요롭게 살 수 있다는 결론이 선 순간.

가까이 다가간 강이 소파에 올려진 산의 손가락 끝에 살며시 제 손가락을 걸쳤다.

그러고는 조금씩 움직여, 마침내 그의 손등 위에 자신의 손을 완전히 포갰다.


“고마워, 산아. 그리고.”

그녀가 별처럼 빛나는 눈을 휘며 말했다.


“사랑해.”

사랑한다고.

단순한 호감이나 이성적 끌림을 넘어선 마음이라 좋아한다는 말로는 부족했다.

훌쩍 단계를 뛰어넘은 느낌이지만, 이 정도의 각오가 아니라면 시작하지 않는 편이 좋다고 늘 생각해왔다.

천천히 거리를 좁히며 다가간 강이 그의 입술에 제 입술을 부드럽게 가져다 댔다.


“정말 많이.”

“…….”

“사랑해.”

거듭된 고백에 잘게 흔들리던 산의 눈동자가 떨림을 멈추고, 마침내 커다랗게 뜨였다.

터질 것처럼 뛰어대던 심장이 한순간에 멎어버린 것만 같이 눈앞이 아득해지기 시작했다.

그녀는 스르륵 눈을 감고, 조금씩 입술을 움직였다.

그러고는 자신의 진심이 닿길 바라며 애정이 가득 담긴 입맞춤을 건넸다.

인간이 아닌 너를 사랑하게 되어, 감당할 수 없는 후폭풍을 맞이하는 것보다 이제 그 마음을 외면하는 일이 더 힘들어져 한 선택이었다.

내일이 보장되지 않은 삶에 오늘 이 마음을 전하지 못하면 죽는 순간까지 후회하고 말 거라는 걸.

이제는 확실히 알았으니까.

산은 희미하게 떨려오는 입술의 떨림을 느끼며, 느리게 눈을 감았다.


“…….”

“…….”

절대로 무너져선 안 되는 벽이 무너지고, 절대로 넘어선 안 될 선을 넘고 말았다.

파도처럼 부서질 거라는 걸 알면서도 마음은 서로를 향해 내던져졌다.

반전은 없었다.

막아도 막을 수 없는 일이 될 거라는 걸.

누르고 눌러 온 마음이 오늘 밤을 넘기지 못할 거라는 걸, 사실은 이미 알고 있었으니까.

이름을 부른다는 건 마음을 담는 일이다.

그리고 마음을 담은 고백을 받는다는 건, 영혼을 선물 받는 일이다.

늘 찾아 헤매던 삶의 마지막 퍼즐 조각이 무엇으로도 메울 수 없던 마음의 구멍에 정확히 들어맞는 순간이었다.

부드럽게 닿았던 입술이 옅은 떨림과 함께 멀어졌다.

산은 강의 목을 손으로 감싸듯 잡은 뒤 그대로 당겼다.

간신히 떨어졌던 입술이 아슬하게 다시 가까워졌다.


“이제 예전으론 못 돌아가.”

“…….”

“벽은 이미 무너졌으니까.”

인내는 여기까지였다.

커다란 손이 그녀의 뺨을 감쌌고, 다시 입술이 겹쳐졌다.

가슴이 저릴 만큼 어렵게 꺼내놓은 고백에 산은 뜨겁게 화답해주었다.


 
오래 참았다.

애초에 태어나길 자제력과는 거리가 먼 존재로 태어나 이만큼까지 버틸 수 있었던 건, 닿으면 부서져 버릴 것 같은 네가 너무 조심스러웠기 때문이다.

그만큼 소중했기 때문이다.

아주 오랫동안 켜켜이 쌓여온 태산 같은 애정이었다.

그는 강의 몸을 태워버릴 듯 그녀의 입술을 삼키고, 그토록 원하던 하얀 살결에 영혼을 묻었다.

뒤로 밀려나던 강의 몸이 중심을 잃고 소파 위로 쓰러지자, 산이 그대로 그녀의 위로 쏟아져 내렸다.

그 거침없는 움직임을 감당하기엔 소파가 너무 좁아 떨어질 것 같았다.

해일처럼 덮쳐오는 그를 가까스로 버텨낸 강이 간신히 입을 뗐다.


“산아.”

“나중에.”

커다란 손으로 그녀의 등과 허벅지를 받친 그가 가냘픈 몸을 번쩍 안았다.


“아……!”

깃털처럼 떠오른 몸이 커다란 품에 안정적으로 안겼다.

산이 걸음을 돌려 침실로 향하자, 저절로 문이 열리고 닫혔다.

형용할 수 없는 긴장감에 강은 그의 옷깃을 저도 모르게 꽉 쥐었다.

침대의 중앙에 풀썩 누인 강의 몸 위로 긴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산이 한 손으로 셔츠의 단추를 풀며 다른 손의 검지로 창문을 향해 까닥 손짓했다.

바람이 새어 들어올 정도로 열려있던 창문이 닫히고, 곧 철컥 소리를 내며 단단히 잠겼다.

그건 절대 이 순간을 방해받지 않겠다는 의지였고, 망치지 않겠다는 각오였다.

아마 이 밤은 죽는 순간까지 잊지 못할 기록이 될 테니까.

오늘만큼은 그 무엇도 우릴 방해할 수 없게.

그 누구도 우릴 훔쳐볼 수 없게.

아니.

훔쳐보려면 보라지.

이참에 네가 내 거라는 걸, 온 세상에 알려줄 테니까.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