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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1. 복귀 (81/118)


#81. 복귀
2023.02.05.


우주처럼 광활한 어둠.

소리마저 사라진 암흑 속에서 유일하게 빛을 발하는 건 보라색의 반딧불 형태를 띤 악몽의 결정체들이었다.

그것들은 바람에 흩날리는 꽃잎처럼 강과 산의 주변을 부유하다, 서서히 빛을 잃고 떨어지기 시작했다.

산은 천천히 눈을 떴다.

그의 두 눈이 짙은 푸른색을 띠며, 강의 모습을 담았다.

산은 자신의 눈에 비친 그녀의 모습이 마치 심해 속에 갇힌 인어의 모습일 것 같다고 생각했다.

온통 처음 겪어보는 일의 연속인데, 계획한 일마저 뜻대로 되지 않고, 앞날은 깜깜했다.

불멸을 얻고자 했던 선택에 네가 존재하는 시간은 턱없이 짧을 것만 같아 벌써 가슴이 먹먹했다.

당장 내일마저 장담할 수 없는 현실 속, 우리는 앞으로 어떤 길을 걷게 될까.

유난히 사이가 좋았던 부모님은 늘 서로를 애틋하게 바라보곤 했다.

그 모습을 떠올리니, 웃음이 났다.

결국 죽게 될 걸 알면서도 속절없이 서로에게 빠져들었던 아버지와 어머니를 처음으로 이해하게 된 순간이라 그랬다.

그는 천천히 눈을 감았다.

어쩌면 이대로 깨어나지 않는 게 가장 행복한 결말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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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이 잠에서 깬 건 그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았을 때였다.

곁에 턱을 괸 채 누워있던 산이 그녀의 허리에 손을 감으며 인사했다.


“잘 잤어?”

“응.”

품을 파고든 강이 잠이 덜 깬 목소리로 물었다.


“악몽은 어땠어? 또 흐려졌어?”

꿈에서 깨자마자 그녀가 가장 먼저 한 일은 그가 제대로 식사 했는지 묻는 일이었다.

그는 다시 한번 서로의 불행을 바랄 수 없는 처지가 된 걸 실감하며 답했다.


“안 흐려졌어.”

“다행이다.”

그제야 강이 편히 눈을 감았다.

고되긴 했던 모양.

산은 그녀의 동그란 이마에 부드럽게 입을 맞추었다.

쪽 하는 소리에 강이 소리 내어 웃으니, 간지러운 숨결이 그의 목덜미에 내려앉았다.


“컨디션은 좀 어때?”

“음…… 푹 잔 거 같아서 기분은 좋은데, 몸은 좀 무거운 것도 같고.”

사실 좀 무거운 정도가 아니라 천근만근이었다.

행여 그가 죄책감을 느낄까 싶어, 적당히 둘러댔을 뿐.

품속에서 눈을 빼꼼 뜬 그녀가 산을 올려다보며 장난스럽게 물었다.


“혹시 나 몽유병 있어? 잘 때 막 돌아다니나?”

“아니.”

“그럼 꿈속에서 너무 열심히 뛰어다녀서 그럴까? 나 오늘 무슨 꿈 꿨어?”

천진하게 묻는 강에게 그는 차마 모든 사실을 털어놓을 순 없었다.

꿈에서 네가 얼마나 고통스러워했는지, 그리고 그런 너를 보면서 나는 방관할 수밖에 없었고, 결국엔 이도 저도 아닌 상태로 너를 구하고 말았다는 얘기를 어떻게 하겠나.

그렇다고 앞으론 너를 극한으로 몰아, 남은 악몽을 모조리 쥐어짤 예정이니 이해해달라는 얘기도 할 수 없다.

그녀는 충분히 이해한다고 말하고도 남겠지만, 자신이 그러지 못할 거라는 걸 경험했기 때문이다.

결국 무얼 얘기하든 진실은 부담만 안길 뿐이었다.

이렇다 할 대안이 없으니 더욱.


“들어서 뭐 하게. 좋은 꿈도 아닌데.”

“그래도 궁금하단 말이야. 너한테 내 악몽은 끔찍할수록 좋다며.”

꿈은 꿈일 뿐인데 어떠냐는 강의 말에 그는 동의하면서도, 동의하지 못했다.

고민하던 산은 결국 앞내용은 전부 자르고 말했다.


“별것 없었어. 내가 너무 빨리 구해버려서 그냥…… 야한 꿈이 돼버렸거든.”

“……어?”

아니나 다를까.

그녀의 맑은 눈동자가 정처 없이 흔들린다.

그는 웃음을 삼키며 태연히 말을 이었다.


“고백받자마자 꿈에서 널 봤는데.”

“…….”

“가만히 둘 수가 있어야지.”

“그래서 우리가 뭘 했는데?”

“그냥 뭐, 우리가 잠들기 전에 하던 거?”

“…….”

“굳이 예를 들어보자면.”

고개를 내린 산이 강의 이마에 가볍게 입을 맞추었다.

그러고는 그녀의 뺨과 코와 입에 차례로 키스하며 속삭였다.


“이런 거, 저런 거, 그리고 여기도. 또…….”

“그, 그만!”

어깨에 걸린 옷을 내리며 다가오는 그를 제지한 강은 뺨이 붉어진 채 되물었다.


“……그게 가능해?”

“가능하던데.”

산이 조용히 웃었다.


 
그녀는 어쩐지 억울하다는 표정이 되었다.


“왜?”

그가 묻자, 강이 입을 삐죽이며 대답했다.


“너만 기억하고, 나는 기억 못 하니까 억울하잖아.”

“어쩔 수 없지. 그렇다고 악몽을 기억하게 둘 수는 없으니까.”

“그건 그렇지만…….”

“억울할 것 없어.”

피식 웃던 그가 달래듯 입을 맞추며 말했다.


“내가 생생히 다 기억하고 있으니까, 그대로 재연해주면 되잖아.”

그 말에 그녀가 다시 다가오려는 산의 어깨를 다급히 막아냈다.


“그건 안 돼.”

“왜?”

“그랬다간 나 오늘 촬영장에서 정말 쓰러질지도 몰라.”

“그럼 반만 재연해볼게.”

제 어깨를 짚은 강의 손목을 아무렇지 않게 잡아 침대에 누른 그가 여우처럼 웃었다.


“안 돼! 지금도 힘들단 말이야!”

그녀가 모든 인내를 끌어올리며 고개를 돌리곤, 눈을 질끈 감았다.

그러고는 아랑곳하지 않고 다가오는 산의 입술을 다른 손으로 틀어막아 버렸다.

손바닥 안에 갇힌 그의 입술이 쪽 하는 소리를 내며 속살거렸다.


“알겠어. 그럼 반의 반만 할게.”

“안 된다고!”

“그럼 뽀뽀만.”

“안 된다니까?”

“뽀뽀도 안 돼?”

느긋하게 흘러나오는 산의 숨결이 손바닥을 통해 심장까지 간질이는 느낌이었다.

아아.

어쩌다 내가 이런 여우를 키우게 돼서, 손도 못 쓰고 잡아먹히게 됐을까.

그런 생각이 들었지만, 더는 거절할 수 없었다.


“……그럼 반의 반의 반만.”

“알겠어.”

“약속해. 맛보기만이야.”

“알았다니까.”

아이처럼 키득거리는 웃음이 흘렀다.

그렇게 일분일초가 아깝다는 듯 다가오는 그 때문에 강도 이만 못 이긴 척 그를 끌어안았다.

그리고 쓸데없이 정직한 한산은 정말로 반의 반의 반만 보여주고, 친절히 그녀를 욕실 안까지 안아서 데려다주었다.

강이 먹던 사탕 빼앗긴 아이 같은 표정으로 산을 쳐다보았다.

그가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고개를 기울이며 물었다.


“왜 이렇게 화가 났어?”

“…….”

“나는 시키는 대로 했는데.”

이익!

대꾸할 말을 찾지 못한 그녀가 주먹을 꽉 쥐었다가 풀며, 눈을 흘겼다.


“너는 너무 정직해.”

“촬영 펑크내면 안 되잖아.”

“나도 알거든?”

흥!

조그만 발을 바닥에 콩! 하고 구른 그녀가 욕실 안으로 사라졌다.

마음 같아서는 당장이라도 그의 목을 감고 끌고 들어오고 싶었지만, 일에 지장을 주면서까지 무리를 해서는 안 될 일이었다.

가뜩이나 지금도 온몸이 두들겨 맞은 것처럼 아픈데.


“안 되지. 안 될 일이지. 정신 차리자, 서강.”

강이 거울을 보며 제 뺨을 가볍게 찰싹 두드렸다.

그러면서도 한편으론 조그맣게 한숨이 나왔다.

이제 시작이고, 앞으로 시간은 많으니 마음껏 사랑할 일만 남았다고 생각하고 싶은데.

오늘 하루도 장담할 수 없는 현실 속에 살고 있다는 건 이미 그녀도 충분히 느끼고 있었기 때문이다.

과연 우리에게 얼마의 시간이 더 허락될까.

행복은 더 바랄 게 없어지는 순간에 도달하는 것이지만, 동시에 잃을 게 생겨 두려워지는 순간이기도 했다.

더도 말고, 덜도 말고 오늘 같은 순간이 계속되길 바라는 건 욕심일까?

강은 처음으로 살고자 하는 마음에 반드시 그래야만 할 명확한 이유가 생겼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녀가 바라는 행복은 바로, 산과 함께 하는 삶이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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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휘가 복귀했다.

‘비밀의 정원’ 팀은 그의 복귀를 케이크 하나로 조촐하게 축하하며 신휘를 환영했다.


“웰컴!”

케이크 위에 꽂힌 초의 불이 꺼졌다.

팡! 팡!

폭죽이 터졌고, 박수가 함께 쏟아져 나왔다.

야외 촬영을 위해 찾은 장소는 인적이 드물었지만, 신휘의 회사에서 보낸 푸드 트럭들 덕분에 거의 가든파티 분위기였다.

기약 없는 기다림이 이어지는 동안 항간에는 남자주인공 교체설까지 떠돌았지만, 성 감독과 양은오 작가가 그럴 일은 없을 거라 직접 못 박으며 배우에 대한 기대와 믿음을 증명했다.

격한 환영에 화답이라도 하듯 그는 촬영장을 돌았다.

그러고는 감독이나 배우는 물론 스태프들 한 명, 한 명에게까지 일일이 인사를 건네며 사람 좋은 얼굴로 웃었다.

다리 위에서 몸을 던지려던 사람으로는 전혀 보이지 않을 만큼.

촬영장의 신휘는 사고 전이나 후나 겉보기에 달라 보일 게 없었지만, 강은 아무 생각 없이 웃기만 하는 저 얼굴 뒤에 가려진 그늘이 완전히 사라졌을 거라는 생각은 하지 않았다.

하지만 예정보다 이른 복귀는 어떻게든 저에 대한 믿음에 부응하기 위한 선택이었을 거라고 여겼다.

이번 일이 그의 삶에 좋은 동력이 되어주길 진심으로 바랐다.


“복귀 축하해. 다들 많이 기다렸어.”

담백하게 건넨 인사에 신휘가 눈매를 느슨하게 휘어 웃는 얼굴로 다가왔다.

그러고는 자신의 뒷목을 가볍게 주무르며 조용히 물었다.


“선배도 나 기다렸어요?”

이상할 것 하나 없는 질문이었지만, 그녀는 바로 대답하지 않았다.

그러다 공기가 무거워지려고 할 때쯤 뒤늦게 입을 열었다.


“당연히 기다렸지.”

“…….”

“남자주인공 없이 촬영을 계속하기엔 아무래도 한계가 있으니까.”

강의 대답에 그의 입가에 옅게 번져있던 미소가 사그라졌다.

그러더니 곧 한숨인지 뭔지 모를 작은 바람이 샜다.


“난 또 나 기다렸다는 줄 알고.”

하마터면 설렐 뻔했다며, 신휘는 가볍게 웃었다.

양신휘를 기다린 게 아니라 문성준을 기다렸다는 뜻이라는 걸 눈치챈 모양이었지만, 강도 굳이 그 사실을 정정하지 않았다.

하지만 신휘를 향해 쏟아지던 낭설에도 굳건한 믿음으로 그를 기다려준 촬영팀의 기대가 얼마나 컸는지는 알려줘도 좋겠다고 생각했다.


“혹시 기사 봤어?”

“무슨 기사요?”

“교체설 돌 때, 감독님이랑 작가님이 직접 나서서 그럴 일 없다고 못 박으셨었어.”

“아아.”

신휘가 영혼 없는 감탄을 흘리며 들고 있던 아메리카노를 쪽 빨았다.


“다들 너에 대한 믿음이 커. 걱정도 많이 했고, 복귀 소식 들었을 땐 거의 잔치 분위기…….”

“그럼 뭐해.”

“뭐?”

“선배는 나 안 기다렸잖아요.”

눈빛이 묘하게 까칠해졌다.


“눈길 주겠다며.”

“…….”

“관심도 주고, 애정도 준대 놓고, 그 이후로 면회 한번 안 왔잖아요.”

피식.

원망과 자조가 뒤섞인 듯한 신휘의 모습에 그녀는 말문이 막히고 말았다.


“일단 살려는 놨는데, 애새끼처럼 구니까 골치 아프죠?”

“그게 무슨 말이야.”

“그래서 내가 물어봤잖아요. 뒷감당 되겠냐고.”

건조하게 말을 잇던 그가 자리에서 일어서며 가만히 강을 내려다보았다.


“그러니까 앞으로 누군가한테 손을 내밀 땐, 좀 더 신중하게 생각하고 내밀도록 해요.”

“…….”

“커피 맛있게 드시고.”

언제 까칠했냐는 듯 생긋 웃어 보인 신휘가 회사에서 보낸 커피차를 가리키며 자리를 떴다.

그가 사라진 자리를 말없이 바라보던 그녀의 입술 사이로 옅은 한숨이 새어 나왔다.

신휘의 말투는 농담 같았지만, 결코 농담이 아니었다는 걸 잘 알기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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