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2. 부전자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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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2. 부전자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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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2. 부전자전
2023.02.09.
‘선배는 나 안 기다렸잖아요.’
‘눈길 주겠다며. 관심도 주고, 애정도 준대 놓고, 그 이후로 면회 한번 안 왔잖아요.’
그가 남기고 간 말이 가슴 한구석을 콕콕 찔러왔다.
솔직히 말하자면 신휘가 아예 걱정되지 않았던 건 아니었다.
죽을 용기보다 살아갈 용기를 내는 게 더 어려웠던 때가 분명 제게도 있었으니까.
하지만 제인의 정체를 알고 난 이후엔 어쩔 수 없이 몸을 사릴 수밖에 없었다.
알고 지낸, 또는 알아갈 모든 이들의 정체를 의심할 수밖에 없는 현실이 분명 제게도 양날의 검 같은 상황을 불러올 거라는 걸 알고 있었지만, 최우선으로 생각해야 하는 건 자신을 위험에 빠트리지 않는 일이었다.
왜냐하면 그건 곧 산의 선택과 생존까지 직결되는 문제였기 때문이다.
그런데 머릿속에 정리된 내용과 상관없이 한숨이 계속 나왔다.
“하아…….”
어쩔 수 없는 상황이었지만, 마음이 무거운 것 역시 어쩔 수 없는 일이라 그랬다.
그때 그 순간, 신휘가 처한 상황이 진실이었다면 자신이 내민 손길이 그에게 어떤 의미로 다가갔을지 모르지 않았다.
비에 쫄딱 젖은 고양이처럼 처연했던 모습이 자꾸만 눈앞에 아른거린다.
강은 무겁게 마음을 눌러오는 죄책감을 밀어내며, 촬영장 내에 있는 사람들을 둘러보았다.
성 감독과 양은오 작가.
분주히 오가는 스태프들과 배우들. 회사 관계자들.
여기에도 몽마가 있을까? 있다면 몇이나 있을까? 누굴까?
끊임없이 의심해야 하는 일은 생각보다 큰 피로감을 동반했지만, 살아가는 이상 기약 없는 고립을 선택할 수도 없는 일이었다.
결국 늘 그래왔듯 최대한 위험에 처하지 않도록 몸 사리며 부딪치는 게 최선이었다.
급격히 피로가 몰려왔다.
커피를 달고 살던 때와 비교하면 카페인을 섭취하는 양이 현저히 줄었지만, 간만에 진하게 내린 커피가 마시고 싶었다.
강은 천천히 일어나 커피차를 향해 걸어갔다.
“안녕하세요.”
그녀가 먼저 인사했다.
그러자 안쪽에 앉아있던 젊은 여자가 어머! 하며 탄성을 내질렀다가 급히 제 입을 가렸다.
“어우, 죄송해요. 너무 팬이라 저도 모르게 그만.”
당황해서 귀까지 붉어진 그녀의 모습에 강도 덩달아 얼굴이 붉어졌다.
팬 앞에서 낯가리는 건 여전해서 손발이 고장 난 느낌이었지만, 그래도 감사하다며 생긋 웃어 보였다.
그 모습을 잠시 넋 놓고 보던 여자가 말을 이었다.
“어, 어떤 걸로 드릴까요?”
“뭐 있어요?”
“어, 음…… 아메리카노랑 라테랑 아이스티 있고요. 간단한 푸드도 있어요. 이쪽에 메뉴판 한번 보시겠어요?”
사실 간식을 입에 댈 생각은 없었지만, 그녀는 여자가 건넨 메뉴판을 잠자코 살폈다.
쿠키와 스낵랩, 과일 컵이 준비되어 있었다.
“여기 쿠키 맛집이야. 쿠키 한번 먹어봐.”
어느새 다가온 삼영이 슬쩍 메뉴를 추천하곤 자연스럽게 쿠키와 과일 컵 하나를 더 받았다.
“서강 배우님도 쿠키 드릴까요?”
“아니요. 저는 일단 커피만 한잔 먼저 마실게요. 차갑게요.”
강이 메뉴판을 돌려주며 한 말에 그녀가 잠깐만 기다리라며 원두를 내리기 시작했다.
“이야. 문 엔터, 건물만 삐까번쩍한 줄 알았더니 덩치 값 제대로 한다. 그치?”
멋있다. 멋있어.
삼영이 받아든 오트밀 쿠키를 오도독 씹으며 말했다.
“그러게. 저번에도 촬영장에 밥차 보내더니 오늘은 푸드 트럭을 종류별로 다 보냈네.”
“그 뿐이게? 갈 때 가져가라고, 선물까지 보냈어. 저기 있는 노란 쇼핑백 보이지?”
“저게 뭐야?”
“비누래. 이름이 뭐라더라. 조…… 조, 뭐라고 했는데. 아무튼 엄청 비싼 거래.”
코딱지만 한 게 몇만 원이나 한다며 혀를 내두르던 그가 그래도 향은 좋더라며 웃었다.
산이 등장한 건 그때였다.
“어, 산아. 커피 마실래?”
강보다 먼저 그를 발견한 삼영이 어서 오라며 직원마냥 메뉴판을 들이밀었다.
“괜찮습니다. 전 물이면 돼요.”
그때 강이 시킨 아이스 아메리카노가 나왔다.
“여기 커피 나왔습니다.”
“아이고, 감사합니다아.”
대신 그것을 받아든 삼영이 그녀에게 커피를 전달해주었다.
강은 목이 말랐는지 받자마자 크게 한 모금을 마시고는 산에게 말했다.
“음, 여기 커피 맛있다. 먹어봐.”
그러자 그가 기다렸다는 듯 고개를 내렸다. 그러고는 그녀가 마시던 커피에 꽂힌 빨대를 쪽 빨았다.
……시켜 먹으라는 뜻이었는데.
강이 빨개진 얼굴로 올려다보자, 산이 눈을 똑바로 마주치며 말했다.
“맛있네.”
“…….”
“네 말처럼.”
그러고는 커피를 한 모금 더 마셨다.
그들의 앞엔 어느 순간 다가온 삼영이 가림막처럼 펼쳐져 있었다.
“야, 이것들아……. 여기 촬영장이야. 진짜 작작 안 해?”
그가 얼굴이 하얗게 질려서 복화술로 타박했지만, 산은 재미있다는 듯 웃을 뿐이었다.
“형이 그러는 게 더 튀어요. 아무렴, 내가 주변도 안 살피고 그랬을까.”
“낮말은 새가 듣고, 밤말은 쥐가 듣는 법이야. 어디에 눈이 달려있을 줄 알고……!”
삼영이 눈을 부라리며, 경고했다. 제발 티 좀 내지 말라고.
그 모습을 본 강이 키득거리고 웃었다.
“강이 너 마저…….”
철없는 것도 옮는 거냐며 그가 꾸짖었지만, 그녀도 자꾸만 새어 나오는 웃음을 어찌할 도리가 없었다.
셋이 모여 쑥덕거리는 모습을, 커피 차 안에 타고 있던 여자가 힐끔거렸다.
그 시선을 느낀 삼영이 눈빛으로 한 번 더 둘을 단속하고는 얼른 그녀에게 다가가며 너스레를 떨었다.
“사장님. 혹시 르꼬르동 핑크 출신이신가요? 쿠키가 아주! 맛이 훌륭합니다!”
“아아, 감사합니다. 하나 더 드릴까요?”
“이러다 여기 있는 거 제가 다 먹는 거 아닌가 모르겠지만, 주시면 또 감사히 받겠습니다. 하하.”
그가 양손을 뻗자 그녀가 쿠키 한 개를 더 집어 들어 삼영의 왼손, 오른손에 나란히 쥐여주었다.
“세상에! 두 개나!”
양손에 쿠키를 하나씩 쥐고 웃는 그를 향해 여자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저기, 그런데요…….”
“네?”
상체를 숙인 채 산이 있는 쪽을 흘깃대던 그녀가 조용히 물었다.
“저분은 신인 배우신가요?”
“누구요?”
“저기 서강 배우님 옆에 계신 남자분이요.”
“……아.”
“엄청 잘 생기셨는데, 처음 보는 분이라.”
……그래서 자꾸 흘깃거렸구나?
지겹도록 겪는 일에 삼영이 마뜩잖게 웃으며 대꾸했다.
“아아. 배우는 아니고, 우리 회사 경호실장님이에요.”
“정말요?”
“네. 배우 뺨치게 잘 생겼죠?”
“어머나, 저는 당연히 배우인 줄 알았어요.”
“그래서 제가 어딜 가나 피곤하답니다. 제가 강이 매니저인지 경호 실장님 매니저인지 모르겠거든요. 하하하!”
“그러셨구나…….”
“아, 근데 이 쿠키 말인데요. 혹시 다른 맛도 있나요?”
삼영이 열심히 입을 털며 그녀의 시선을 돌리기 위해 애썼다.
강이 멀찌감치서 둘의 모습을 바라보는데, 산은 그쪽엔 관심 없다는 듯 조용히 물어왔다.
“아까 무슨 얘기 했어?”
“응?”
“양신휘랑. 분위기 꽤 진지하던데.”
“아, 그거…….”
그녀는 말끝을 흐리며 별 거 아니었다고 대충 얼버무렸다.
하지만 산은 마치 옆에서 대화를 듣기라도 한 사람처럼 구체적으로 콕 짚어 물었다.
“왜. 병문안 안 왔다고 서운하대?”
“어?”
“자기 기다렸냐고 물어보진 않고?”
“……얘기가 거기까지 들렸어?”
뻔하지, 뭐.
대답 대신 픽 웃던 그가 다시 질문을 던졌다.
“그래서 넌 뭐라고 했는데.”
잠시 고민하던 강이 뒤늦게 입을 열었다.
“뭐라고 하긴. 당연히 기다렸다고 했지.”
“……기다렸다고?”
눈가를 바로 일그러트리는 산을 보며 그녀가 답지 않게 왜 이러냐며 웃었다.
“한국말은 좀 끝까지 들어줄래?”
좁아진 미간을 검지로 살살 달래듯 눌러 편 강이 커피를 쪽 빨며 말했다.
“나는 양신휘가 아니라 문성준을 기다렸다는 뜻으로 얘기한 거야.”
“…….”
“무슨 말인 줄 알겠어? 남주의 부재가 아쉬웠던 거라고.”
“쟤도 그렇게 알아들었으러냐 모르겠네.”
“바로 알아들었어. 서운한 거 못 숨길 만큼.”
못내 마음이 쓰이는 듯한 표정을 짓는 강을 보며 그가 물었다.
“신경 쓰여?”
“아무래도 미안하지.”
거기까지 얘기한 그녀는 산을 바라보며 조금 더 목소리를 낮춰 이야기했다.
“하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라고 생각해. 너한테 걱정 끼칠 일은 조금도 만들고 싶지 않고, 그러려면 내 안전부터 챙겨야 하니까.”
“…….”
“나한테는 네가 제일 중요하거든.”
물론 다른 문제를 떠나 신휘를 영영 나 몰라라 하겠다는 뜻은 아니었다.
하지만 그가 스스로의 힘으로 일어나기 위해선 자신의 아픔을 누군가의 약점으로 쥐고 흔들게 두어서도 안 된다고 생각했을 뿐이다.
언제든 도움을 줄 순 있지만, 결국 그걸 이겨내야 하는 건 본인의 숙제라는 걸 누구보다 잘 아는 강이었기에 그랬다.
그런데 산은 다른 말은 아무것도 들리지 않았다.
나한테는 네가 제일 중요하다는 말.
그 말 하나만 박혔을 뿐이다.
그리고 그에게는 그게 자신이 어떤 선택을 하던 전적으로 지지하겠다는 말로 들렸다.
그녀는 처음 천인의 존재에 대해 이야기해줬을 때도, 전혀 예상치도 못했던 반응을 보였었다.
‘그럼 천인은 아군이야, 적군이야?’
‘너한테는 아군이지. 널 죽이려는 세력들로부터 널 지켜주는 존재들이니까.’
‘나는 저 존재들이 너에게 아군인지, 적군인지를 묻는 거야.’
‘……?’
‘몽마나 천인이나 네 존재를 인정해주지 않은 건 똑같잖아. 나는 저들이 절대 선(善)이라고 생각 안 해.’
최초이자 유일한 존재로 살아가며 안고 가야 할 외로움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자신이 품고 있는 원망을 감히 누군가에게 이해해 달라고 할 생각은 없었다.
그런데 강은 그런 제 마음을 처음으로 먼저 이해해주고, 존중해준 사람이었다.
그리고 다른 어떤 것보다 자신을 제일 중요하게 생각해주는 사람이었다.
“그러니 내가 널.”
……어떻게 사랑하지 않을 수 있겠나.
맺지 못한 말에 강이 다시 물었다.
“뭐라고?”
산은 대답 대신 느리게 주변을 훑었다.
그의 시선에 임시 휴게공간으로 세워진 천막 하나가 들어왔다.
그 방향을 향해 가볍게 손가락을 까닥이자, 바람 한 점 없이도 지지대가 휘청였다.
“어어어……!”
난데없이 흔들리는 지지대에 곁에 있던 스태프 하나가 허둥지둥 손을 뻗었다.
하지만 천막은 힘없이 무너져내리고 말았다.
그리고 그 덕분에 모두의 시선에서 완벽히 가려진 찰나에 맞춰 산은 강의 뺨을 두 손으로 붙잡았다.
그러고는 고개를 내려 깊게 입을 맞추었다.
촉촉하게 젖어있던 입술에서 은은한 커피 향이 났다.
아무렇지도 않게 가슴을 울리는 애정을 보여주는 그녀가 사랑스러워 견딜 수가 없어서, 충동적으로 한 행동이었다.
짧은 시간이 아쉬웠지만, 그는 그렇게나마 강의 마음에 보답했다.
도둑키스를 당한 그녀의 눈이 놀란 사슴처럼 휘둥그레졌다.
스태프들은 쓰러진 천막을 다시 세우느라 분주해졌다.
“이게 갑자기 왜 쓰러졌지?”
“좀 더 무거운 지지대 없어? 이거 가운데 하나 더 고정해야 할 것 같은데.”
뒤늦게 그게 산이 벌인 일이라는 걸 의심한 강이 그가 닿았던 입술을 말아 물었다.
“네가 한 거야?”
“응.”
그녀가 제 입술을 손끝으로 만지작대며 심각한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세상에. 너무 짜릿해.”
너스레를 떠는 강을 보며 산이 조용히 웃었다.
일분일초의 모든 순간에 있는 네가 애틋하고, 소중했다.
아버지가 어머니를, 또 어머니가 아버지를 매 순간 그런 눈빛으로 바라본 이유일 것이다.
그는 언젠가 로미가 저를 보며 갈수록 아버지를 닮아간다고 했던 말의 의미를 이해할 것도 같았다.
사랑에 빠진 제 모습이 사랑에 빠진 아버지와 똑같은 모습을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