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3. 폭우가 몰아치는 밤
(83/118)
83. 폭우가 몰아치는 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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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3. 폭우가 몰아치는 밤
2023.02.12.
촬영은 밤늦은 시간까지 이어졌다.
빗속에서 찍어야 할 신 때문에 일부러 날을 맞추었는데, 예보에 나왔던 것보다 비가 많이 쏟아졌다.
덕분에 살수차를 동원했어도 연출하지 못했을 완벽한 배경이 만들어졌다.
오늘 찍을 장면은 문성준을 맞닥뜨린 신차희가 그와 추격전을 벌이다 마침내 맞붙게 되는 장면이었다.
초겨울. 그것도 비 오는 밤에 찍는 추격신과 액션신은 엄청난 체력이 요구되는 장면이었다.
흠뻑 젖은 채로 몇 번을 다시 찍다가, 컷 하기를 반복하자 몸에서 김이 날 정도로 열이 났다가도, 조금만 쉬면 금세 손발이 덜덜 떨릴 정도로 오한이 일었다.
따뜻한 물을 몸에 뿌리고, 수건을 둘둘 감고 있어도 그때뿐이었다.
잠시 휴식 시간을 갖는 중에 성 감독이 강에게 다가와 물었다.
“괜찮아? 아까 넘어진 덴 좀 어때.”
“괜찮아요.”
“얼마 안 남았으니까, 조금만 기운 내자고.”
“네. 걱정하지 마세요.”
씩씩한 그녀의 대답에 그가 어깨를 두드리며 독려하곤 자리를 떴다.
성 감독은 신휘에게도 다가가 걱정스레 그의 상태를 살폈다.
퇴원하자마자 강도 높은 액션신을 소화해내야 할 신휘가 무척 걱정스러웠다.
“좀 어때?”
내내 전전긍긍하는 성 감독에 비해 정작 신휘는 여유가 넘쳤다.
“할 만해요.”
씩 웃으며 그렇게 말한 그는 자신은 정말 괜찮으니, 강을 조금 더 신경 써달라고 당부하고 일어섰다.
재료가 소진된 푸드 트럭 몇 대가 철수하고, 따뜻한 차와 음료를 제공해줄 커피차만 한 대 남았다.
강이 맨 처음 커피 한 잔을 먹었던 그 트럭이었다.
“하필 비까지 이렇게 오는 바람에 더 고생이시네요.”
신휘가 건넨 말에 트럭 주인은 상냥히 웃어주었다.
“아유, 저보단 배우들이나 촬영팀이 고생이시죠.”
익숙한 일이라 괜찮다고 웃는 그에게 여자가 물었다.
“따뜻한 자몽차 한잔 드시겠어요? 보리차랑 녹차도 있고요.”
“그럼 보리차로 한 잔 부탁드릴게요.”
“네. 잠시만 기다리세요.”
그녀가 따뜻하게 끓인 보리차를 따르자, 구수한 냄새가 퍼졌다.
“향이.”
“…….”
“무척 진하네요.”
신휘와 여자의 시선이 허공에서 맞닿았고, 두 사람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작은 미소를 띠었다.
은은하게 퍼지는 보리차 향기에 근처에 있던 스태프며 배우들이 모두 트럭으로 몰려들었다.
제일 먼저 차를 받아든 신휘가 한발 물러서서, 트럭 주변에 몰려든 이들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모두에게 따뜻한 차 한 잔의 온기가 절실한 밤이었다.
짧은 휴식 시간이 끝나고, 다시 촬영이 시작되었다.
푸드 트럭 위에 오도카니 앉아있던 여사장은 턱을 괸 채 폭우가 쏟아지는 하늘을 바라보았다.
쿠릉- 쿠르릉-
하늘은 구멍이라도 난 것처럼 비를 쏟아내고, 이따금씩 천둥소리까지 들리는 게 꽤 을씨년스러운 밤이었다.
하지만 여자는 그 풍경을 무척 황홀하다는 듯이 바라보았다.
“비가 참…… 무섭게도 오네.”
혼잣말을 중얼거리던 그녀의 입이 길게 늘어졌다.
“악몽 꾸기 좋은 밤이다.”
.
.
.
신휘가 다친 건 촬영을 다시 시작한 지 채 한 시간이 지나지 않았을 때의 일이었다.
진흙밭이 된 땅 위에서 뒹굴던 강과의 액션신을 찍던 중 그만 합이 맞지 않아 난 사고였다.
그녀가 휘두른 삼단봉의 끝이 그의 얼굴을 스쳤고, 눈썹 아래가 그대로 찢어져 버리는 부상을 당하고 말았다.
탁!
“악!”
빗소리에 묻힌 둔탁한 소리와 함께 신휘의 비명이 짧게 울렸다.
그가 다친 곳을 감싸며 그대로 넘어졌고, 놀란 강은 얼른 이름을 부르며 몸을 숙였다.
“신휘야!”
“아…….”
“괜찮아? 어디 봐봐!”
그녀가 외친 소리에 놀란 성 감독이 컷을 외치고 스태프들과 함께 달려갔다.
“신휘 씨! 다쳤어? 어디 다친 거야!”
“아…… 별거 아니에요. 살짝 스치는 바람에…….”
“별거 아니긴! 피 나잖아!”
아직 분장을 하기 전이라 그의 얼굴에 뒤덮인 게 진짜 피라는 건 어렵지 않게 알 수 있었다.
구급상자를 가지고 달려온 스태프들이 급히 응급 처치를 했다.
“안 되겠다. 얼른 병원부터 가고, 오늘은 그만 철수……!”
“아니요, 감독님. 그냥 찍어요.”
촬영을 접으려던 성 감독에게 신휘가 말했다.
“병원부터 가야지, 이 얼굴로 무슨 촬영을 해!”
그가 말도 안 되는 소리 말라며, 언성을 높였지만, 그는 확고했다.
“눈두덩은 원래 살짝만 건드려도 크게 찢어지는 곳이에요. 괜찮으니까, 기왕 찍기 시작한 거 마저 찍고 가요.”
“아니, 그래도…….”
“감독님.”
신휘가 성 감독을 부르며 그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눈이 마주쳤고, 신휘의 두 눈이 희미한 적포도주 색으로 빛을 냈다가 사그라졌다.
그걸 본 성 감독의 동공이 서서히 풀리기 시작했고, 그는 시선을 옭아매며 말을 이었다.
“저 정말 괜찮아요.”
“아…….”
“필요하시면 향후에 책임 묻지 않겠다는 각서라도 써드릴게요.”
신휘의 말에 성 감독이 느릿해진 말투로 대답했다.
“아니야. 신휘 씨가 괜찮다면, 괜찮은 거겠지.”
진작 그럴 것이지.
그제야 싱긋 웃어 보인 그가 말을 이었다.
“지혈만 좀 하고, 바로 이어서 가요.”
“그럴까?”
“네. 작업도 환경이 받쳐줘야 하는 건데, 오늘 같은 날을 허무하게 날릴 순 없죠.”
“으응. 맞아.”
영혼 없는 인형처럼 고개를 끄덕인 성 감독이 조연출에게 잠시 쉬다가 다시 촬영을 재개하자고 이야기했다.
한편 강은 신휘가 타고 있는 밴에서 좀처럼 눈을 떼지 못했다.
촬영 현장에선 종종 일어나는 사고였지만, 아무래도 저 때문에 다친 게 내내 마음에 걸렸기 때문이다.
피가 흥건했던 얼굴이 괴롭게 일그러져있던 장면이 머리에 박힌 것처럼 계속 떠올랐다.
그녀는 결국 신휘가 쉬고 있는 밴으로 향했다.
똑똑.
창문을 두드리자, 얼마 지나지 않아 문이 열렸다.
그는 눈썹 위에 거즈를 댄 채 반쯤 누워있는 상태였다.
“혹시 나 때문에 깼어?”
“아니요. 그냥 누워있었어요.”
신휘가 그렇게 말하면서 몸을 일으켰다.
그러고는 차 문밖으로 팔을 내민 채 바람이 불어오는 방향으로 손을 뻗어 강의 머리를 가려주었다.
“바람 불어서 우산 소용없어요. 비 맞지 말고 들어오세요.”
“아, 응.”
고개를 숙인 그녀가 차 안으로 들어갔고, 곧 차 문이 닫혔다.
간접 등만 켜진 차 안은 어둑했다.
강은 신휘가 비켜준 입구 쪽 자리에 앉아, 옆에 있는 그에게 물었다.
“다친 곳은 좀 어때?”
“다 나았어요. 피도 멎었고.”
신휘가 덮어둔 거즈를 손끝으로 톡톡 치며 말했다.
하지만 여전히 그녀의 표정이 굳어있자, 그가 웃으며 말을 이었다.
“진짜예요. 제가 회복력 하나는 짐승 같은 편이라.”
“그래. 그럼 다행이고.”
그제야 강이 고개를 끄덕이며 시선을 돌렸다.
아주 잠깐의 시간이 흘렀지만, 더 할 말이 떠오르지 않아 금세 공기가 어색해졌다.
“그럼 좀 더 쉬다…….”
“나 걱정해서 온 거예요?”
인사를 건네려던 순간 신휘가 말을 걸어왔다.
그러자 그녀가 미간을 찌푸리며 대답했다.
“그럼 내가 너 놀리려고 왔겠어? 당연히 걱정했으니까 왔지.”
“음.”
묘하게 말끝을 늘이던 그가 고개를 살짝 갸웃거리며 혼잣말처럼 말했다.
“시간상 아직 문성준 걱정할 타이밍은 아니니까, 이번엔 진짜 나 걱정한 건가?”
“너 은근히 뒤끝 있다?”
“선배가 내 입장 되어봐요. 누가 목숨 살려주고 나서 쌩까면 집착 안 하게 생겼나.”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말라고, 쏘아붙이려는데 순간 산이 떠올라버린 건 왜일까.
그가 악몽으로부터 자신을 구해주고, 저를 외면해버렸다고 상상하니 말문이 막혀버리고 말았다.
저도 모르게 침묵으로 수긍해버린 강을 보며 신휘가 눈가를 확 찌푸렸다.
“누구 상상하길래 고개를 끄덕이지?”
그러더니 반쯤 기대고 있던 상체를 벌떡 세우며 진지하게 물어왔다.
“뭐야. 진짜 집착하는 사람 있어요?”
“아니, 뭐 집착이라기보다…… 네가 그런 비유를 하니까 어떤 마음인지 알 것도 같아서.”
“아. 기분 나빠.”
“이해한다는데도, 왜 기분이 나빠?”
“그게 나는 아닐 테니까.”
그렇게 말한 신휘는 매일 밤 그녀의 침실에 함께 있는 남자를 떠올렸다.
바로 서강의 경호실장이라던 한산.
사파로(485)가 새로 나타난 몽마의 정체도 밝히지 않고 죽어버리는 바람에 누가 그녀의 꿈을 독식하는지는 알 수 없었다.
하지만 적어도 한산이 강과 아주 밀접하게 엮인 사이라는 건 알 수 있다.
며칠간 지켜본 결과, 그는 늦은 밤마다 늘 그녀를 찾아오곤 했으니까.
어쩌면 한산은 새로 강의 꿈을 독식하는 놈일 수도 있고, 비밀리에 연애 중인 그녀의 연인일 수도 있다.
확실한 한 가지는 뭐가 됐든 기분 나쁘다는 것.
“궁금한 게 있는데.”
창 너머로 시선을 던진 신휘는 슬슬 준비했던 일을 시작해야겠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 전에 먼저 확인하고 싶은 게 있었다.
“뭐 하나 물어봐도 돼요?”
“뭔데?”
“선배랑 같이 다니는 경호원 있잖아요.”
그에 대한 서강의 마음.
“정체가 뭐예요?”
“……무, 무슨 말이야.”
“뭘 그렇게 놀라요. 진짜 사귀는 사이라도 돼요?”
정체가 뭐냐고 묻는 말도, 사귀는 사이라도 되냐는 말도 예측 못 했던 일이라 순간 얼굴이 굳고 말았다.
그러자 신휘가 삐딱하게 턱을 괸 채 말했다.
“왜 대답이 없지? 진짜 사귀나 봐.”
“너랑은 상관없는 얘기야. 그런 게 왜 궁금해?”
“상관있는 얘기니까, 궁금하지.”
“…….”
“나 선배한테 관심 많아요. 애정도 많고.”
“얼마나 봤다고 애정 타령이야?”
“왜요? 선배는 애정도 없는 사람 목숨까지 구해줘 놓고, 나는 나 살린 사람한테 애정 좀 가지면 안 되나?”
“그건……!”
“두산이는 잘 지내죠?”
불쑥 허를 찔러온 것도 그때였다.
“뭐?”
“고양이 키운다면서요. 이름이 무슨 산이라고 안 했나? 한라산인가 뭔가.”
시선을 돌린 그가 그녀를 손바닥 위에 놓고 가지고 놀기라도 하듯, 능청스럽게 말을 이었다.
“아. 한라산이 아니고 한산이랬나?”
“…….”
“아, 맞다. 그건 경호 실장님 이름이지. 기억났다. 백두산.”
빙글 웃던 신휘가 확인하듯 재차 물었다.
“맞죠? 두산이.”
무언가를 꿰뚫어 보려는 것만 같은 그의 눈빛에 강은 아무런 말도 할 수가 없었다.
불길한 예감에 목 뒤가 서늘해졌다.
일단 자리를 피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제 가봐야겠어.”
그런데 손목이 덥석 붙들리고 말았다.
“왜 벌써 가요.”
강이 자연스럽게 손목을 빼내며 대답했다.
“괜찮은 거 확인했으니까, 나도 촬영 준비해야지.”
“안 괜찮다고 하면 안 갈 거예요?”
느리게 떨어지는 음성이 무거웠다.
고개를 돌려 그를 바라보자, 신휘는 자신의 눈가를 덮고 있던 거즈를 뗐다.
그러고는 보란 듯이 상처가 났던 부분을 일부러 건드렸다.
“너 뭐 하는……!”
당황한 그녀가 소리치는 것과 동시에 그가 손끝으로 눈썹 아래를 꾹 눌렀다.
그러자 간신히 아물었던 상처가 다시 벌어지며 피가 주르륵 샜다.
“야!”
놀란 강이 얼른 들춰져 있던 거즈를 다시 눌러 덮었다.
“너 이럴 거야, 정말?”
한 대 쥐어박을 것처럼 노려보자 신휘가 피식 웃었다.
“그러지 말고 아까처럼 이름이라도 불러주면 안 되나?”
제 눈 한쪽을 가리고 있는 그녀의 손을 잡고 하얀 손등을 손끝으로 살살 문지르던 그가 애교라도 부리듯 말했다.
“아까 나 다쳤을 때, 신휘야, 하고 이름 불러줬잖아요.”
“…….”
“듣기 좋던데.”
그 말에 강이 가차 없이 손을 뗐다.
냉정하게 돌아서는 그녀의 뒷모습에 작게 실소하던 신휘가 잊은 게 생각났다는 듯 입을 열었다.
“아, 맞다. 깜빡하고 말 못 한 게 있는데.”
막 문고리를 잡아 열려던 강의 손길이 멈추었다.
곧 그의 입가에 서늘하고도 짓궂은 웃음이 걸렸다.
“나 몽마예요.”
“…….”
“상관없죠?”
장난은 여기까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