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4. 사치로(4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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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4. 사치로(4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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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4. 사치로(475)
2023.02.16.
“나 몽마예요.”
“…….”
“상관없죠?”
간단한 자기소개라도 하는 듯한 말투였다.
“주변에 천인이며 수인이며 다양하게 데리고 있는 거 같던데, 이참에 나랑도 친하게 지내요.”
강은 순간 머리가 핑 돌았다.
“아……!”
급기야 눈앞이 어질해지더니, 그대로 주저앉고야 말았다.
그는 앞으로 엎어질 뻔한 그녀를 친절히 시트에 기대도록 한 뒤, 자장가라도 부르는 듯 나긋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약 때문에 졸릴 거예요.”
그렇게 말한 신휘가 제대로 몸도 못 가누는 강에게 미주알고주알 떠들어댔다.
“있잖아요. 제가 촬영장에 늘 수면제 가지고 다니던 거 기억나요? 그거 사실 선배 먹일 거였거든요.”
“…….”
“그런데 뭐 주는 것마다 매니저 형이 빼앗아 먹더라고. 덕분에 스케일이 꽤 커졌지만, 제대로 준비했으니 고마워해야 할까 봐요.”
귀하디귀한 수면초(睡眠草)까지 동원했다며 알 수 없는 말을 하던 그가 창밖의 푸드 트럭을 가리켰다.
신휘는 촬영 초반에 현장에서 강에게 이온 음료를 건넨 적이 있었다.
의심 없이 마시면 기회를 틈타 수면제를 탄 음료를 마시게 할 작정이었고, 성공하면 그날 바로 그녀의 몸에 꿈의 문을 새길 계획이었다.
하지만 삼영이 복병이었다.
자리를 뜨는 척하며 들었던 삼영과 강, 두 사람의 대화를 떠올렸다.
‘근데 이건 뭐야?’
‘신휘 씨가 마시라고 줬어.’
‘강아, 너는 다이어트 중이니까 물 마셔. 이건 오빠가 대신 마셔줄게.’
‘그래, 오빠 마셔.’
‘오빠가 네 거 뺏어 먹으려는 게 아니고, 오빠가 또, 우리 강이 기미 상궁이잖아? 남이 주는 거 아무거나 마시면 안 되지.’
물이 아닌 음료라 문제였나 싶었지만, 마시는 물까지 들고 다니는 걸 보니 어렵겠다 싶었다.
결국 깔끔한 일 처리를 위해 푸드 트럭을 동원하게 된 것.
현장에 있던 모든 사람이 푸드 트럭에서 제공하는 음료를 마셨고, 일반 수면제와 수면초의 뿌리를 섞어 만든 약은 일정 시간이 지난 후 효과를 발휘했다.
창밖에 그들이 여기저기 널브러진 이유였다.
“으읏……!”
강은 엉망으로 비틀어지는 시야 때문에 손을 휘저으며 저항했다.
하지만 몸에 모래주머니를 잔뜩 달고 물속을 허우적대는 것처럼 움직임이 마음대로 되지 않았다.
곧 시트가 뒤로 눕혀졌고, 신휘가 위를 점령하며 자신의 두 팔 사이에 그녀를 가두었다.
당장이라도 밑에 깔린 저를 물어뜯을 듯 바라보는 그의 눈빛이 붉게 빛났다.
“의미 없는 저항하지 마세요. 그냥 조금 자고 일어나면 다 끝나 있을 거니까.”
“아니야……!”
“참. 푸드 트럭에서 차 마셨던 사람들은 전부 잠들었어요. 매니저님이나 경호실장님도 마찬가지고.”
거기까지 말한 신휘가 상체를 세워, 차 문을 열고 밖을 한번 바라보았다.
“이런.”
안타깝다는 듯 탄식하던 그가 환하게 웃었다.
“전멸이네?”
손을 올려 손차양을 만든 신휘의 셔츠가 올라갔다.
살짝 보이는 그의 장골에 475라는 숫자가 불씨처럼 선명히 빛났다.
인간 양신휘의 가면을 쓴 몽마 사치로(475)의 정체가 드러나는 순간이었다.
땅바닥 위에 아무렇게나 널브러진 채 잠들어 있는 사람들 사이로 한 여인이 유유히 걸었다.
푸드 트럭의 여사장이었다.
그녀는 눈을 붉게 빛내며 신휘를 향해 가볍게 손을 흔들어 보였다. 손목 안쪽에 940이라고 적힌 숫자가 빛났다.
여사장의 정체는 그의 계획을 도운 몽마 구사영(940)이었다.
쓰러져 있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검붉은 연기를 피우며 저마다의 악몽을 발현하기 시작했다.
사영은 그 광경을 황홀하게 바라보며, 흥건해진 입안의 침을 꼴깍 삼켰다.
그녀에게는 이곳이 뷔페나 다름없었기 때문이다.
“치로 님. 여기 있는 악몽들 정말 제가 다 먹어도 되나요?”
“얼마든지 먹어. 오늘 고생해준 대가니까.”
“아아. 감사합니다.”
몽롱하게 눈이 풀린 사영은 입이 귀까지 찢어진 채 허리 숙여 인사했다.
어렴풋이 바깥 풍경을 본 강이 고개를 저으며 괴로운 신음을 토해냈다.
“안 돼…….”
스르륵 시선을 내려 그녀를 바라보는 그의 얼굴에 안타까운 미소가 스쳤다.
“그러니까 그때 죽게 내버려두지 그랬어요. 그랬으면 은혜를 원수로 갚는 일도 없었을 텐데.”
신휘가 천천히 몸을 내리곤, 긴 손가락을 뻗어 강의 얼굴을 어루만졌다.
“꿈의 문은 어디에 새기는 게 좋을까?”
어린아이를 어르듯 말을 건넨 그의 눈이 곧 호기심으로 빛나기 시작했다.
“은밀한데 새겨야, 남친이 빡치겠지?”
그만두라고 말하고 싶은데, 이제 말을 하는 일조차 힘겨워졌다.
조용히 웃던 그는 아랑곳하지 않고 그녀의 길고 하얀 목덜미로 손끝을 가져다 댔다.
“이쯤?”
“…….”
“아니면 더 아래?”
미끄러져 내려간 그의 손이 왼쪽 허벅지를 꽉 움켜쥐었다가, 다시 손을 올려 그녀의 어깨 한쪽이 드러나도록 옷을 내렸다.
“아니지.”
“……싫어.”
“역시 여기가 제일 좋겠네요.”
“하지 마……, 그만……!”
최선을 다해 저항해봤지만, 이미 의지를 배반한 팔다리는 축 늘어져 버리고 말았다.
의식이 점점 멀어지고, 몸은 깊고 깊은 늪으로 빠져드는 것 같은 기분이었다.
서서히 다가온 신휘가 강의 어깨에 가볍게 키스했다.
그러고는 입술을 조금 벌려 베어 물 듯 살갗을 머금었다가 곧 이를 세웠다.
콱!
칼날이 박혀 드는 듯한 통증과 함께 곧 불에 지져지는 듯한 작열감이 느껴졌다.
“……아악!”
고통에 비명을 질렀지만, 이내 입을 막은 신휘의 손에 의해 소리도 내지 못했다.
“으읍! 으으읍!”
신음하는 그녀의 눈꼬리 끝에 눈물 한 방울이 맺혔다.
어떻게든 산을 불러야겠다고 생각했지만, 약 기운 때문에 정신이 아득해지기 시작했다.
산아. 너도 잠들어버렸을까?
간신히 고개를 돌려 바라본 폭우 속 풍경은 시체들이 널브러진 공포영화 속 한 장면을 연상케 했다.
꿈에서만 보던 장면을 실제로 마주하니, 심장이 조여드는 것만 같았다.
숨을 쉬기가 어려워졌다. 등에서는 식은땀이 났고, 눈앞이 어지러웠다.
바르르 떨리는 그녀의 속눈썹 위로 긴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강의 눈을 손으로 가린 신휘가 곧 차 문을 바라보자, 저절로 닫혀 잠겼다.
“벌벌 떨면서 뭘 끝까지 보고 있어.”
“…….”
“조금만 참아요. 거의 다 됐으니까.”
그의 목소리가 물속에서 듣는 것처럼 멀어졌다.
그렇게 정신이 까무룩 잠들기 일보 직전.
콰앙!
차의 문이 뜯겨나가며, 모습을 드러낸 산이 신휘의 목을 움켜쥐며 그대로 반대쪽 창문을 부수고 튕겨 나갔다.
“산아…….”
강의 입술 사이로 조그맣게 그의 이름이 불렸다.
그것을 마지막으로 그녀의 의식이 끊겼다.
한편, 차 밖으로 튕겨 나온 두 남자는 한 몸처럼 엉켜 바닥을 굴렀다.
그러다 동시에 주먹을 주고받으며 반대 방향으로 나가떨어졌다.
비틀거리며 일어선 산이 비에 젖은 얼굴을 쓸어내리며 미간을 찌푸렸다.
천둥을 동반한 폭우가 온 세상을 쓸어버릴 듯 내렸고, 산은 약 기운에 취해 가뜩이나 흐린 시야가 더욱 뒤틀리는 것만 같은 기분이었다.
‘……제기랄!’
고개를 저은 그가 온몸에 밧줄처럼 감겨드는 무력감을 떨쳐내며 정신을 차리기 위해 애썼다.
산의 시선이 차에 남겨진 강에게 향했다.
그녀를 데리고 우선 어떻게든 여길 벗어나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몸을 트는데, 빠르게 그의 앞을 막아선 신휘가 웃는 낯으로 말했다.
“가긴 어딜 가.”
말과 동시에 그가 손을 뻗어 산의 타이를 틀어쥐었고, 산은 목이 졸리는 걸 막기 위해 재빨리 자신의 손등에 타이를 한 바퀴 감아 제 쪽으로 당겼다.
힘이 팽팽하게 맞섰다.
약 기운 때문에 원래의 힘을 쓸 수 없는 것도 사실이었지만, 결코 만만한 상대가 아님을 직감했다.
신휘는 타이를 쥔 채 그대로 땅을 박차고 날아올라, 그의 배에 올라탄 뒤 무게를 실어 급하강했다.
콰앙!
“크윽!”
산의 입에서 신음이 터져 나왔다.
장기가 터지고, 뼈가 박살나는 것만 같은 기분이었지만, 약 기운 때문인지 통증마저 둔해졌다.
그는 기를 쓰고 신휘의 옷깃을 잡아 돌렸다.
몇 바퀴를 구르다 위를 점령한 산이 두 눈을 붉게 빛내자, 아래에 깔린 신휘가 피식 웃음을 터트렸다.
“너였구나. 사파로를 죽인 게.”
조용히 흘러나온 그의 목소리가 폭우에 파묻혀 잘 들리지 않았다.
신휘의 목을 누르고 있는 산의 손이 바들바들 떨리기 시작했다.
정신력으로 버티고는 있지만, 몸이 의지대로 움직이지 않는 느낌이 점점 강해졌기 때문이다.
“서강도 알아? 너 몽마인 거?”
그가 목이 눌린 채 태연히 물어왔다.
“깨어있을 때도 침실에 들락날락하는 걸 보니, 연애라도 하는 모양인데.”
“…….”
“어때? 연애도 하고, 악몽도 독차지하는 기분이?”
그는 대답 대신 경고했다.
“내가 왜 너희들 정체를 들쑤시지 않고 다닌 줄 알아?”
“왜?”
“조용히 지나가는 게 제일 좋으니까. 위협만 되지 않으면, 굳이 치고받는 싸움 따위 할 필요 없으니까.”
“…….”
“근데 서강을 건드리면 얘기가 달라져.”
산이 눈을 부릅뜨며 순식간에 손바닥에서 검은 연기 형태의 검을 뽑아냈다.
그 모습을 무연히 바라보던 신휘가 말했다.
“그 약을 먹고도 이 정도로 정신을 유지하는 건 높이 사지.”
“…….”
“하지만 그게 다야.”
그가 서늘하게 산을 올려다보며 그의 옆구리에 손바닥을 가져다 댔다.
“너는 나 절대 못 죽여.”
빠르게 응축된 기가 폭발했고, 정통으로 신휘의 공격을 받은 산은 그대로 날아가 커다란 나무에 부딪히고 말았다.
터엉!
“커헉!”
고통 어린 신음과 함께 입에서 검붉은 피가 뿜어져 나왔다.
팔 한쪽도 제대로 휘두르기 어려운데, 이미 반쯤 정신이 날아가 버린 상태로 그를 상대하기엔 아무래도 무리가 있었다.
신휘가 바로 공격을 해왔고, 산은 본능적으로 검을 들어 간신히 그의 검을 막아냈다.
날카롭게 부딪친 검날이 검은 기운을 폭발적으로 내뿜으며 서로를 밀어붙였다.
“용케 아직도 정신줄을 붙들고 있네?”
“닥쳐. 정신 사나우니까…….”
산이 간신히 목소리를 쥐어 짜냈다.
하지만 이제 눈앞의 신휘가 휘어진 엿가락처럼 보이기 시작했다.
시간을 벌려면 제대로 된 한 방을 노려야 했다.
정신을 잃지 않으려 없는 집중력까지 끌어모으는데, 어디선가 날아든 공격에 신휘가 맞고 저만치 나가떨어졌다.
“허억……!”
간신히 숨을 내쉬며 버티고 선 그의 시야로 흰옷을 입은 장신의 남자가 어룽거렸다.
구부정한 자세로 목을 길게 뺀 채, 낫을 든 그가 고개를 슥 돌려 산을 바라보았다.
순간 번개가 치며 남자의 움푹 팬 눈가에 그림자가 졌다.
다크서클이 짙게 드리워진 해골 같은 몰골을 본 산의 동공이 바짝 조여들었다.
눈앞에 나타난 천인이 해미라는 걸 깨달은 그가 믿을 수 없다는 듯 중얼거렸다.
“당신이 왜 여기에…….”
어떤 천인이 내려오더라도 우국의 수장만큼은 절대 아닐 거라고.
아니.
절대 아니어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귓가에선 해미가 열여섯의 제게 드러냈던 날것의 적대감이 여전히 남아 있었다.
‘회의를 하고 말 것도 없습니다. 혼종은 죽여 없애는 게 답이지요.’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다 보니, 산은 문득 의구심이 들었다.
저 천인이 저를 도우러 온 건지, 아니면 혼란스러운 틈을 타 이참에 아예 죽이러 온 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