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85. 나보다 너를 (85/118)


#85. 나보다 너를
2023.02.19.



 


“당신이 왜 여기에…….”

바람처럼 흘러나온 혼잣말에 해미가 선득한 시선으로 산을 바라보았다.

그러더니 쯧 하고 혀를 차며 못마땅하다는 듯 말했다.


“내가 오래 살다 보니 너 같은 미물을 다 구하러 오는구나.”

“…….”

“내 의지는 아니니 오해는 말거라. 나는 하늘의 명을 받드는 것뿐이니라.”

말이 끝나기 무섭게 신휘가 멀리서 검날을 휘둘러 공격을 날렸다.

불시에 날아온 공격을 해미가 가뿐히 튕겨냈다.

하지만 이내 신휘가 직접 몸을 움직여 공격해왔고, 전광석화 같은 움직임에 해미의 시선도 더 이상 산에게 머물지 못했다.

킹! 키이잉!

예리한 날이 맞부딪쳐 갈리는 소리가 났다.

거리를 벌린 해미가 낫을 사선으로 고쳐 쥐며 그를 노려보았다.

즉각 원거리 공격을 날려봤지만, 저 못지않게 신휘도 반응 속도가 빨랐다.

눈속임용으로 연이어 공격을 던진 해미가 단숨에 거리를 좁히며 크게 낫을 휘둘렀다.

캉!

날카로운 마찰음이 검은 하늘을 울렸다.

둘은 무기를 맞댄 채 서로를 노려보았다.


“저번에 봤던 놈이 너구나. 맞지? 검은 넝마 뒤집어쓴 놈.”

“그래 맞아. 너도 맞지? 날붙이 들고 망나니처럼 설치던 놈.”

빙긋 웃는 그의 얼굴엔 약간의 타격을 입은 흔적도 없는 상태였다.

그걸 확인한 해미의 눈이 놀랍고 재미있다는 듯 동그래졌다.

분명 첫 기습은 외상을 입었어야 정상인데?

타격을 안 받은 건가?

아니면, 회복력이 말도 안 되게 빠른 건가.

모르긴 몰라도 간만에 적수를 제대로 만났다는 생각이 들어 그의 입꼬리가 길게 늘어졌다.


“그래. 저번에 못 본 승부, 오늘 한번 내보자꾸나.”

그러자 신휘가 장난스레 웃었다.

그러고는 거리를 조금 더 좁히며 나긋한 목소리를 흘렸다.


“근데 저번부터 느낀 건데.”

“…….”

“말투가 왜 그래? 콘셉트야?”

혐오하는 눈빛으로 그가 비아냥댔다.

해미의 얼굴에도 슬슬 웃음기가 가셨다.


“유치한 도발을 하는구만.”

“구린 건 사실이잖아.”

“그만 다물어라. 말이 많으면 화를 면치 못하니라.”

해미가 그렇게 말하곤 순식간에 모습을 감추었다가, 신휘의 뒤로 나타나 그의 목을 베어버릴 듯 낫을 휘둘렀다.

하지만 신휘 또한 모습을 빠르게 움직여 모습을 감췄고, 서로의 뒤를 노리고 다시 노리는 첨예한 승부가 이어졌다.

그러던 중에 그의 시선이 사람들이 널브러진 땅으로 향했다. 정확히는 이미 재가 되어 흩날리고 있는 구사영(940)의 잔해로.

순간 신휘의 얼굴에 번져있던 웃음이 사그라졌다.

서늘하게 시선을 옮긴 그가 해미에게 물었다.


“……우리 애 죽인 게 너야?”

“그래, 나다. 주제 모르고 덤벼들기에 도륙을 내줬지.”

그의 도발에 신휘의 눈이 더욱 날카롭게 빛났다.


“그래?”

“왜. 복수라도 하게?”

“어. 저 애가 죽었을 때 고통의 딱 열 배로 돌려줄 생각이야.”

“웃기고 있……!”

카앙!

그 순간 날카로운 소리와 함께 해미가 들고 있는 낫의 날이 반쯤 날아갔다.

무서운 속도로 회전하던 날붙이가 바닥에 내리꽂혔다.

눈이 커다래진 채 움직임을 멈춘 해미의 얼굴 앞으로 푸른 실 같은 섬광이 번쩍였다.

그러더니 이내 얼굴에 붉은 금이 그어지며, 그의 어깨에 흘러내린 긴 머리카락 일부 역시 날카롭게 잘려 나갔다.


“이, 이럴 수가…….”

“내가 농담하는 줄 알았지.”

표정이 아주 볼만하다며 낮게 웃던 신휘의 검이 그대로 해미의 목을 향해 날아들었다.


“크윽!”

그가 빠르게 낫의 손잡이를 들어 검을 막았지만, 신휘의 검날은 그대로 낫자루를 잘라내며 엄청난 기를 폭발시켰다.

콰앙하는 소음과 함께 해미가 날아갔다.

같은 속도로 그를 향해 날아간 신휘가 바닥에 떨어진 해미의 심장을 노리고 거꾸로 쥔 칼을 높이 들었다.

그 순간 등뒤에서 금빛 번개가 번쩍였다.


“멈춰라!”

설성의 목소리가 어둠 속에 울려 퍼졌다.

뒤이어 짐승의 하울링이 울리며 늑대의 모습을 한 로미도 모습을 드러냈다.


“주인니이임!”

쓰러진 산에게 제일 먼저 달려간 그녀가 안절부절못하고. 의식을 잃은 그의 주위를 빙글빙글 돌았다.

그러다 산의 의식이 완전히 꺼진 걸 확인하곤, 얼른 제 등에 태워 안전한 곳에 옮겨놓은 뒤, 설성의 곁으로 다시 돌아왔다.

화가 머리끝까지 난 로미가 신휘의 뒤통수를 향해 외쳤다.


“야! 우리 주인님 저렇게 만든 게 너냐?”

“…….”

“넌 오늘 뒈졌……!”

하지만 신휘의 정체를 맞닥뜨린 순간.

그녀는 사고가 정지해버리고 말았다.


“……양신휘?”

고개를 돌린 그가 무감각한 표정으로 로미를 응시했다.

그러자 그녀가 믿을 수 없다는 듯 말을 더듬었다.


“너 뭐야……? 네가 왜 여기에 있어?”

“왜 있겠어.”

“설마…… 몽마였어?”

“그래. 설마했지만, 너는 수인이었고.”

덤덤하게 대꾸하는 신휘의 말에 로미의 얼굴이 혼란으로 물들었다.

설성이 때를 놓치지 않고 그를 기습했다.

불식간에 날아온 그녀의 창을 막느라 신휘의 검은 해미에게 닿지 못하고 멀어졌다.

거리를 벌린 설성이 무방비 상태의 해미 앞을 보호하듯 막아서며 물었다.


“괜찮습니까?”

그러자 살짝 넋이 나가 있던 그의 낯이 일그러졌다.


“……방심했구먼.”

체면이 말이 아니게 됐다며 허탈하게 웃던 해미가 손바닥에서 금빛 번개 형상의 검을 뽑아내 쥐었다.

그걸 본 신휘가 피식 웃었다.


“뭐야. 그런 재주가 있었으면 진작 써먹었어야지. 저런 낡아빠진 낫자루는 대체 왜 들고 다닌 거야.”

그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해미와 설성이 땅을 박차고 올랐다.

그러고는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동시에 신휘를 공격했다.

킹! 카앙!

검을 가로로 눕혀 창과 검을 한꺼번에 막아낸 그가 해미를 걷어차 날려버리곤, 설성의 창을 잡아 그대로 한 바퀴 돌려 저만치로 날렸다.

하지만 무섭게 돌아온 해미의 검에 어깨를 베이고 말았다.

빠르게 반응했기에 망정이지, 하마터면 곧장 심장이 꿰뚫릴 뻔했다.


“쳇!”

해미가 아쉬움에 혀를 찼다.

뒤이어 설성이 또다시 그의 뒤를 노렸고, 신휘는 두 팔을 올려 그녀의 창을 막아냈다.

하지만 곧바로 날아온 묵직한 발차기를 미처 피하지 못해 옆구리를 얻어맞은 뒤 날아가 부딪쳤다.

그가 옷에 묻은 흙더미를 짜증스럽게 털어내며 해미와 설성을 향해 뇌까렸다.


“기습하는 건 완전 종특이구만.”

그 말에 해미가 대꾸했다.


“직업병이다, 이놈아!”

우국은 죄수를 가두는 석간을 관리하는 곳이다 보니, 모든 천인이 헌병대로 구성되어 있었다.

게다가 설성은 화국의 수장이 되기 전 설국의 부수장이었고, 설국은 전투를 위한 토벌대로 구성되어 있는 곳이었다.

그러니 해미는 기습이건 뭐건, 상대를 제압하려면 어떤 방법이든 동원한다는 뜻으로 한 말이었지만, 신휘는 그가 생긴 대로 재미없는 농담이나 던지고 있다고 생각했다.


“갑니다!”

난해해진 분위기를 타파하며 설성이 바로 공격에 들어갔다.

해미가 멀찌감치서 굳어있는 로미에게 소리쳤다.


“넌 뭐 하느라 구경만 하고 있던 게야! 서둘러 합세하지 않고!”

“네? 아, 네!”

엉겁결에 대답은 했지만, 좀처럼 발이 떨어지질 않았다.

그리고 그 틈을 타 신휘는 결계를 거둔 뒤, 그대로 후퇴했다.


“거기 서라!”

해미가 뒤를 쫓으려 했지만, 이미 그의 기척은 완전히 사라져버린 뒤였다.


“장기전으로 가기엔 저희가 불리합니다. 인간들이 입을 피해도 클 거고요.”

설성이 조용히 만류했지만, 그는 영 심기가 불편한 듯 기색을 숨기지 못했다.


“……죄, 죄송합니다.”

눈치를 보던 로미가 꼬랑지를 말아 넣은 채 사과했지만, 불난 집에 기름만 부어버린 꼴이었다.


“쓸모없는 놈!”

통박을 친 그가 그녀를 향해 눈을 부라리며 막말했다.


“반푼이 주인을 모시는 놈이니, 네놈도 변변찮겠지! 모자란 것들끼리 만나, 짐만 되는구나!”

보다 못한 설성이 말리려는데, 화가 난 로미가 미친개처럼 짖어댔다.


“뭐야! 왜 양신휘한테 뺨 맞고, 우리 주인님한테 화풀이예요!”

“……뭐라?”

“수장님이 인간사에 대해 뭘 알아요! 저 양신휘랑 같은 소속사에서 한솥밥 먹고 사는 사인데, 어떻게 이런 충격적인 재회 앞에서 아무렇지도 않게 막 공격하겠냐고요!”

“그건 네가 공사를 구분 못 해서 벌어진 일……!”

“그럼 공사 잘하시는 수장님이 양신휘 처리하셨으면 됐겠네!”

“……!”

“뿡!!”

……뿌웅?

해미는 이제 입이 떡 벌어진 채 대꾸도 못 하고, 그녀를 망연히 바라보기만 했다.

머리통을 풀스윙으로 얻어맞은 충격이었다.


“……뿡? 뿌우웅?? 지금 수인 따위가 감히 천인의 면전에 대고 뿡이라고 한 게요?”

그가 부들부들 떨며 설성에게 물었지만, 놀란 그녀도 섣불리 대꾸하지 못하고 당혹감에 눈알만 굴렸다.

그러는 사이, 로미는 있는 힘껏 눈을 흘기곤 자리를 떠 산에게 가버렸다.


“저! 저! 저……!”

부들부들 떨며 말을 더듬던 해미는 그만 뒷목을 잡고 쓰러져버렸다.

.
.
.

강이 눈을 떴을 때 제일 먼저 보인 건, 희뿌연 조명이었다.

눈을 다시 한번 꾹 감았다 뜨자, 흐렸던 시야가 선명해지며 낯선 천장이 보였다.

손등에 온기가 느껴져 고개를 돌려보니, 제 손등을 덮고 있는 로미의 작은 손이 보였다.


“으음.”

기척을 들은 그녀가 침대에 엎드려 있다가 벌떡 몸을 일으켰다.


“언니! 정신이 좀 들어요?”

“여기가 어디…….”

“병원이에요.”

“병원? 뭐가 어떻게 된 거야?”

간신히 목소리를 쥐어짜 물은 말에 그녀가 금방이라도 울 것처럼 눈시울을 붉혔다.


“우으으…….”

“왜 그래, 로미야. 응? 무슨 일이야.”

손을 뻗어 로미의 눈가를 훔쳐준 강이 주변을 느리게 훑으며 물었다.


“산이는?”

“…….”

“산이는 어디에 있어?”

“주인님은…… 아직 못 깨어나셨어요…….”

그녀는 초조함에 심장이 점점 빨리 뛰는 걸 느끼며 되물었다.


“그게…… 무슨 말이야?”

로미는 산이 설성과 해미가 나타난 이후로 그대로 의식을 잃었다는 이야기를 전했다.

설성의 말로는 음료 안에 들어있던 약이 인간 세상에 존재하는 흔한 수면제가 아니라, 우국에 있는 수면초를 섞어 사용한 것 같다고 했다.

수면초는 인간뿐 아니라 천인과 수인, 나아가 몽마에게까지 그 위력을 끼치는데 평범한 인간이 일반 수면제 정도의 영향을 받는 것에 비해 인 외, 특히 몽마에게는 그 위력이 훨씬 강하고 오래간다고.

그러니 산이 수면초를 먹은 게 사실이라면, 그 정도까지 정신을 잃지 않은 건 말로 설명되지 않는 부분이라는 첨언도 함께였다.

강은 마음이 욱신거렸다.

산이 위험에 처한 자신을 구하기 위해 필사적으로 약효에 저항했던 거라는 걸 깨달았기 때문이다.


“산이 지금 어디에 있어?”

“주인님은 다른 병실에 잠들어 계세요.”

“옆에 누가 있는데?”

“주인님 곁엔 설성님이 계세요.”

“…….”

“제 임무는 언니를 보호하는 거니까요.”

로미의 대답에 그녀는 또 한번 말문이 막힐 수밖에 없었다.


“주인님은 만약 언니와 주인님을 동시에 지켜야 하는 상황이 오면 무조건 언니를 지키라고, 늘 신신당부하셨어요.”

로미가 그렇게 말하며 훌쩍였다.

강은 그녀가 산에 대한 애정과 충성심이 얼마나 큰지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지금 로미의 마음이 어떨지도 알 수 있었다.

마음 같아서는 산의 곁을 지키고 싶었을 것이다.

가만히 로미를 바라보던 강은 그녀를 꼭 끌어안으며 말했다.


“고마워.”

덕분에 무사할 수 있었다.

남은 건 서둘러 산의 안위를 확인하는 일이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