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86. 우리의 거리 (86/118)


#86. 우리의 거리
2023.02.23.



- 강아. 너 정말 괜찮은 거 맞지?

“네. 정말로 정말로 괜찮아요.”

강은 두 번이나 ‘정말로’라는 말을 또박또박 힘주어 말하며 강조했다.

하지만 전화기 너머의 황 대표의 걱정은 끝날 줄을 모르고 이어졌다.


- 머리가 어지럽다거나, 막 속이 울렁거리면서 막 토할 것 같은 그런 증상 정말 조금도 없는 거지?

의식을 찾은 몇몇 배우와 스태프들이 호소하던 증상이었다.

그는 혹시나 강이 같은 증상을 겪고 있지는 않은지, 나중에라도 혹시 뒤탈이 생겨 배우가 교체될 일이 생기진 않을지 무척이나 염려하고 있었다.


“대표님.”

- 어, 그래그래. 강아. 어디 불편한 부분 있으면, 뭐든지 이야기 해.

깊은 한숨을 눌러 삼킨 그녀가 이마를 짚으며 차분히 말을 이었다.


“저 불편한 부분 정말 하나도 없고요.”

……정말 믿어도 되는 거지? 너 사소한 거라도 절대 숨기면-


“제가 제일 먼저 깨어난 거 보시면 알잖아요.”

- 그럼! 알지, 알지!

“그러니까 걱정 그만하시고, 다른 분들이나 좀 챙겨주세요. 이러다 안 아프던 곳까지 아프게 생겼어요.”

- 아이고! 너는 무슨 그런 무서운 말을 하고 그러냐? 알았어, 알았어. 그만 끊을게. 혹시라도 나중에 불편한 부분 생기면 언제든지 연락-

뚝.

인내심이 한계치에 다다른 그녀가 그만 참지 못하고 전화를 끊어버렸다.

그런데 전화를 끊기 무섭게 이번엔 문자가 도착한다.

[강아. 혹시나 뭐 필요한 거 있으면, 백 실장한테 연락해. 알았지? 나한테 직접 해도 좋고.]

문자를 노려보던 강이 액정을 빠르게 두드렸다.

[삼영 오빠 깨어나기 전까진, 저도 일 안 해요.]

화면을 깨부술 듯 전송 버튼을 누른 그녀는 침대 끄트머리로 휴대폰을 툭 던져버렸다.

삼영이 깨어나기 전엔 일하지 않겠다는 말은 진심이 아니었지만, 삼영의 안위라곤 안중에도 없는 황 대표의 태도가 보기 싫어 억지를 부린 것이다.

하지만 이렇게라도 해야 못 이긴 척, 삼영을 살피며 직원들 귀한 줄을 알 테다.

고요한 새벽.

특별 병동의 복도는 쥐 죽은 듯 조용하기만 했다.

은은한 조명 하나만 켜둔 병실에서 그녀는 침대에 옆으로 누워 조용히 주변을 살폈다.

온통 어둠뿐인 병실 곳곳엔 당장이라도 산의 이름을 부르면 그가 나올 것만 같은 그림자가 있었다.


“산아.”

 

 
강은 조용히 그의 이름을 불러보았다.

하지만 잠든 산은 그녀의 부름을 듣지 못했다.

필요하면 언제든 나타나겠고 했는데.

어둠이 있는 곳이라면 언제, 어디서든 만날 수 있다고 그랬는데.


“한산.”

간절함을 담아 재차 불러봐도 그는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익숙했던 적막이 불현듯 슬픔으로 다가왔다.

그녀는 약 10분 전, 병실을 나서던 로미의 마지막 모습을 떠올렸다.


‘언니. 일단 보는 눈이 있으니까, 여기 잠깐 계세요.’

그녀는 산과 안전하게 재회할 방법을 구해 오겠다고 했다.

또 혼자 남겨졌다가 같은 사고가 반복될까 걱정하는 강에게 로미는 ‘해미’라는 천인의 수장이 곁을 지키고 있으니 안심하라고도 말했다.

남겨진 강은 휴대폰을 켜 온라인 뉴스를 확인해보았다.

한바탕 세상이 뒤집혀있었다.

비밀의 정원 촬영 현장 집단 혼절 사건.

수면초와 일반 수면제를 섞어 탄 음료에선 당연히 수면초의 성분은 검출되지 않았고 수면제 성분만 검출되었다.

범인은 이미 흔적을 감춘 푸드 트럭의 여사장이 지목되었고, 그녀는 배우 교체로 여주인공 역할을 내려놔야 했던 배우 현소영의 지인으로 밝혀졌다.

현소영은 이번 사태에 관해 본인과는 무관함을 주장하며 억울함을 호소하고 있었지만, 결정적으로 그것을 증명할 푸드 트럭 여사장의 행방이 묘연해진 상태였다.

그녀의 정체가 몽마라는 걸 알고 있는 강은 모든 게 그럴듯하게 꾸며진 시나리오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알았지만, 신휘가 배후라는 것과 그의 정체가 인간이 아니라는 사실 중 어느 하나도 세상에 알릴 수 있는 건 없었다.

어쨌든 그 사건으로 인해 현재 관계된 모두가 병원 신세를 져야 했다.

그나마 더 큰 피해 없이 대부분의 인원이 빠른 퇴원을 한 게 다행이라면 다행이었다.

덩그러니 놓인 휴대폰이 다시 진동하기 시작했다.


“아, 왜 또……!”

또 황 대표일까 싶어서 저도 모르게 신경질적으로 휴대폰을 드는데, 로미의 전화였다.

벌떡 일어난 강이 얼른 전화를 받았다.


“응, 로미야.”

- 언니. 설성님이 결계를 쳐주신다고 했어요. 결계가 만들어지면, 일단 사람들 눈 피해서 움직이는 건 쉬울 테니까, 15분 정도 후에 병실에서 나오시면 돼요.

“그래, 고마워.”

- 네. 그럼 저는 잠깐 나갔다 올게요.

그렇게 통화를 마무리한 로미는 은밀하게 병원을 빠져나갔다.

그녀가 무거운 발걸음으로 향한 곳은 신휘가 입원해 있는 근처의 다른 병원이었다.


‘너 뭐야……? 네가 왜 여기에 있어?’


‘왜 있겠어.’


‘설마…… 몽마였어?’


‘그래. 설마했지만, 너는 수인이었고.’

이동하는 내내 그와의 충격적인 대면이 잊히질 않았다.

매일 투닥거리긴 했어도, 악감정은 없었는데.

겉으로는 매번 까칠하게 굴면서, 은근히 자신을 잘 챙겨주던 신휘의 모습이 자꾸만 마음을 괴롭혔다.

지인 중에 몽마가 있었던 적은 로미도 처음이었다.

유난히 관계 맺는 걸 어려워하던 강의 심정을 조금은 이해할 것 같았다.

병원에 도착하자 박 실장이 그녀를 맞이했다.


“로미야!”

“실장님.”

수심이 가득했던 그녀의 얼굴에 간신히 미소가 지어졌다.


“어휴, 너라도 무탈해서 다행이다. 정말 하늘이 도왔어.”

촬영이 없는 날에도 로미가 자주 촬영장을 찾는 걸 알기에, 박 실장은 그녀가 사고를 피한 게 천만다행이라고 했다.


“양신휘는요?”

“신휘 조금 전에 깨서 안정 취하는 중이야.”

안정은 개뿔.

애초에 수면제는 먹지도 않은 게 쇼하고 있네.

이 모든 일을 꾸민 원흉이 뻔뻔하게 누워 피해자 코스프레를 하고 있을 생각을 하니, 복잡한 마음도 사라지고, 속이 부글부글 끓었다.


“몇 호예요?”

“아, 1501호. 같이 갈…….”

“아니요. 저 혼자 다녀올게요. 실장님은 여기에 계세요.”

그렇게 말한 로미가 엘리베이터를 타고 이동했다.

그러는 동안 신휘를 향한 마음은 또 냉탕과 온탕을 오가며 복잡해지기 시작했다.

1501호 앞에 선 그녀는 길게 심호흡을 했다.

막상 오기는 했는데, 만나면 어떻게 그를 대해야 할지 알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자살하려고 했던 것도, 강과 얽히기 위한 쇼였을까?

아주 어릴 때부터 일리와 산을 보아온 그녀라 몽마에 대한 막연한 편견은 없었다.

당연히 그들이 절대 악이라는 생각도 하지 않았다.

신휘가 진짜 속내를 조금만 내비쳐주면 좋을 텐데.


“역시 궁금한 건 직접 물어보는 게 상책이지.”

그렇게 혼잣말하던 로미가 막 문을 두드리려고 했을 때였다.


“뭘 그렇게 중얼거려?”

“엄마야!”

등 뒤에서 들려온 목소리에 깜짝 놀란 그녀가 펄쩍 뛰며 소리쳤다.

얼굴에 반창고 하나를 덜렁 붙인 신휘가 시큰둥하게 로미를 바라보다 그녀의 머리통을 밀어내며 말했다.


“길 막지 말고 비켜.”

“우읍!”

주르륵 밀려난 로미가 얼른 그를 뒤쫓아 병실 안으로 들어갔다.


“야, 너 뭐야.”

“뭐긴 뭐야. 갑자기 찾아와서.”

“무슨 속셈이냐고! 너 내가 수인인 거 알고 접근했지!”

“똥개 냄새 폴폴 나길래 설마했는데, 진짜 수인일 줄은 몰랐지.”

“너도 냄새났거든!”

“그런데 왜 그냥 뒀어? 너희 주인 생각하면 직무유기 아니냐?”

“그, 그건……! 설마 네가 진짜 몽마일 줄은 몰랐고! 어? 또, 또……!”

당혹감에 횡설수설하던 그녀가 버럭 말을 이었다.


“그러는 너는 왜 나 가만히 둔 건데!”

“개미는 언제든 밟아 죽일 수 있으니까.”

“……!”

이 개싸가지!

오늘도 말싸움에서 밀린 로미가 두 주먹을 불끈쥐며 부들부들 떨었다.

귀를 후비며 그 모습을 바라보던 그는 할 말 없으면 그만 가라며 손짓했다.

하지만 그녀는 아직 묻고 싶은 게 많았다.


“우리 주인님을 어쩔 셈이야?”

“뭘 어째. 몽마들이 밥그릇 싸움하는 거 처음 봐?”

“그래서 우리 주인님이랑 밥그릇 싸움이라고 하겠다고? 주제를 알아라! 우리 주인님 개 세거든?”

“개 세긴. 나한테 처맞고 뻗어 있는 주제에.”

“야! 그건 네가 비열한 방법을 써서 그런 거잖아! 그런 식으로 이겨놓고 부끄럽지도 않냐?!”

로미가 박박 소리치자, 신휘가 느긋하게 어깨를 올렸다 내리며 대답했다.


“아무리 약에 취했다고 해도, 그렇게 좋은 꿈을 독식한 몽마 치고는 형편없던데? 나랑 제대로 붙었으면 벌써 죽었을걸?”

그가 말은 그렇게 하고 있었지만, 그녀는 여전히 떠오르는 의문을 지울 수가 없었다.

분명.

분명 이 모든 걸 신휘가 계획했을 거라 생각이 들진 않았다.


“양신휘.”

“좋을 말로 할 때, 오빠라고 부르자?”

그 와중에 칼같이 지적한 그가 한 대 쥐어박을 것처럼 눈을 치떴다.


“내가 인간들 틈에 섞여 사느라 스물다섯으로 사는 거지, 실제로는 살아도 너보다 열 배는 더 살았어.”

“솔직히 말해봐. 배후가 너는 아니지?”

하지만 로미는 그런 것 따윈 아랑곳하지 않고 물었다.


“하아.”

피곤하다는 듯 한숨을 쉬는 그를 마구 몰아붙였다.


“네가 싸가지 없긴 해도 주제도 모르고 욕망 좇는 스타일은 아니잖아. 응? 그렇지?”

“……야. 이게 진짜. 공손히 부탁해도 알려줄까 말까 할 판에.”

“배후가 누구야?”

끈질긴 그녀는 아무래도 쉽게 물러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곧 노지태가 도착할 시간인데 말이다.

시간을 확인한 신휘는 앞뒤 다 자르고, 로미가 원하는 대답을 들려주기로 했다.


“우리 대표님.”

“뭐……?”

“우리 대표님이 배후라고.”

마치 오늘 저녁 메뉴를 알려주듯 너무나도 쉽게 받아낸 답변에 그녀의 표정이 얼빵해졌다.


“우리 대표님? 노지태 대표님?”

“어. 대표님이 왕이고, 배후야.”

“……너 나 놀리는 거지.”

“어휴, 로미야. 좀.”

그가 징글징글하다는 얼굴로 얼굴을 쓸어내리며 말했다.


“너는 왜 진실을 말해줘도 지랄이세요. 안 믿을 거면 물어보지 말자. 응?”

“……진짜야?”

“한 번만 더 물어보면, 존X 패버릴 거니까 그렇게 아시고.”

이쯤 되니 거짓말은 아니라는 걸 알 수 있었다.

하지만 그래서 더 의문이었다.


“너, 근데…… 그런 거 이렇게 나한테 쉽게 알려주면 안 되는 거 아니야?”

그 말에 신휘가 피식 웃음을 터트렸다.

그리고 그 어이없다는 듯한 실소는 곧 박장대소로 번졌다.


“왜 웃어?”

그녀가 되묻는 말에 대답도 못 하고 웃던 신휘가 눈가에 맺힌 눈물을 쿡 찍어내며 말했다.


“너한테 알려준다고 뭐가 달라져?”

“뭐?”

“네가 뭘 바꿀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냐고.”

개미 주제에 제가 뭐라도 되는 줄 알고.

혼잣말로 비아냥대던 그가 간신히 웃음을 그치곤 침대에 널브러져 말을 이었다.


“너희가 배후를 안다고 해도 달라지는 건 아무것도 없어.”

“…….”

“때가 되면 서강 몸에 있는 혼이 융합을 마칠 거고, 그건 의심의 여지도 없이 왕의 차지가 될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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