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87. 죽거나 죽이거나 (87/118)


#87. 죽거나 죽이거나
2023.02.26.



 


“너희가 배후를 안다고 해도 달라지는 건 아무것도 없어.”

“…….”

“때가 되면 서강 몸에 있는 혼이 융합을 마칠 거고, 그건 의심의 여지도 없이 왕의 차지가 될 테니까.”

그렇게 말하는 신휘는 마치 배부른 사자를 떠올리게 했다.

한마디로 주제 넘는 걱정 하지 말라는 거겠지.

저렇게 당당히 정체를 드러내는 걸 보면, 그만큼 이 싸움에 자신이 있다는 뜻일 테고.

로미는 그를 물끄러미 바라보다 다시 물었다.


“그럼 너는?”

“나, 뭐.”

“너는 왜 그 사람을 위해서 일하는 건데?”

위해서 일하긴, 개뿔.


“우린 선택권이 없어. 그냥 까라면 까든가, 개기고 뒤지든가 둘 중 하나지.”

철저한 약육강식의 세계.

살기 위해선 피라미드 꼭대기에 위치한 최상위 포식자의 지배하에 목숨을 연명하는 수밖에 없었다.

몽마들의 세계에선 모든 게 왕을 위해 돌아가기 때문에, 언제든 왕이 자신을 위해 살길 원하면 그래야만 한다.

그러니 최고가 아닌 어중간한 힘과 권력은 오히려 거추장스럽고, 피곤하기만 한 것.

신휘 입장에선 사는 게 참 재미없는 이유기도 했다.

할 말을 잃고 서 있는 로미에게 신휘가 손짓했다.


“원하는 대답 다 들었으면 꺼져. 정체 다 까발려진 마당에 겁대가리 없이 여기저기 기웃대지 말고.”

“야, 이게 듣자 듣자 하니까-”

“아, 그리고 하나 더.”

그가 휴대폰을 들여다보며 건성으로 말을 이었다.


“너 얼마 전에 발연기해서 욕 바가지로 먹은 날 있지? 계속 그딴 식으로 연기하면 안 잘리는 게 이상한 거야. 액션으로 때우는 것도 한두 번이지.”

로미는 그가 얼마 전 촬영을 언급하고 있다는 걸 금세 깨달았다.

일대 다수의 액션을 소화한 후, 대본 지문에 적힌 ‘간만에 피 맛을 본 소미가 희열에 차-’를 표현하지 못해 ‘손맛 죽이네.’라는 대사를 엉망으로 애드리브 친 일이었다.


“그 얘기가 갑자기 왜 나와?”

“이 오빠가 특별히 그동안의 애정을 생각해서 너한테 마지막으로 알려주는 연기 팁이니까 잘 들어둬.”

“…….”

“앞으로 황소미를 연기할 땐, 네가 몽마들을 사냥할 때를 떠올려.”

“뭐?”

난데없이 무슨 얘기람.

의중을 파악하지 못한 로미가 얼굴을 찌푸렸다.


“걔들의 눈알을 뽑아 말려서 사탕을 만들고, 두개골을 공처럼 가지고 놀 생각에 신나게 사냥할 때를 떠올리란 말이야.”

“……그게 연기하는 거랑 무슨 상관인데?”

“순수한 광기를 표현하기가 어려우면 그냥 그때를 재연하면 된다고. 알겠어? 아이처럼 순수한 모습이 킬러의 어떤 냉철한 모습보다 소름 끼치게 다가올 수도 있으니까.”

그렇게 말한 신휘가 말했다.


“알았으면 가 봐. 대표님 오실 때 다 됐으니까.”

“근데 뜬금없이 그런 건 왜 알려주는 건데?”

“말했잖아. 미운정도 정이라 마지막으로 알려주는 팁이라고.”

“왜 마지막인데?”

한창 세상사가 궁금한 네 살짜리 아이처럼 ‘왜?’만 반복하는 로미를 그가 못마땅하다는 듯 바라보았다.

저건 머리가 나쁜 건지, 눈치가 없는 건지.


“그럼 넌 우리가 죽을 때까지 쎄쎄쎄나 하면서 찐남매 코스프레 할 줄 알았냐?”

“내 말은 그게 아니라, 네가 꼭 당장이라도 죽을 것처럼-”

“죽으면 뭐.”

“…….”

“너랑 상관있어? 어차피 죽이거나, 죽을 운명일 텐데.”

거침없는 그의 발언에 정적이 내려앉았다.

할 말을 잃고 서 있던 그녀가 주먹을 꽉 쥐며 다시 물었다.


“그럼 대표님 올 거니까, 가라는 얘긴 왜 해주는 거야?”

“네가 더럽게 연기를 못하니까.”

“내 정체를 밝히고 여기서 죽여버리면 그만이잖아. 근데 왜 살려서 돌려보내주냐는 거야.”

신휘는 대답이 없었다.

그런데 그 순간 멀리서 기척이 느껴졌다.

그러자 그의 얼굴이 사뭇 무섭게 돌변했다.


“넌 언제든 밟아 죽일 수 있는 개미라고.”

“…….”

“내가 아까 분명히 말했잖아.”

거리를 좁힌 신휘가 경고하듯 말했다.


“무슨 말인지 알겠어? 너는 당장 신경 써야 할 만큼의 가치조차 없다는 거야.”

“야, 너……!”

“알아들었으면 빨리 꺼져.”

서늘한 그의 목소리를 마지막으로 곧 노지태. 아니, 이사오(245)가 등장했다.


“로미 와 있었구나?”

“아, 안녕하세요. 이사님.”

“신휘랑 또 싸웠어?”

“아니요, 그게…… 얘가 자꾸…….”

평소처럼 그냥 못마땅해 죽겠다고 일러바치면 그만인데, 그의 정체를 알고 나서인지 정말로 모든 게 부자연스럽게만 느껴졌다.

연기를 못할 테니, 어서 가라던 신휘의 경고를 이해하게 된 순간이었다.

잔뜩 긴장한 그녀는 그동안 느꼈던 알 수 없던 위압감에 대해 다시 생각해보게 되었다.

몽마의 왕이라니.

기에 눌려 죽는다고 했어도 전혀 이상한 일이 아니었던 거다.


“저 그럼 이만…….”

가보겠다고 말하려는데, 등에서 식은땀이 나고 발이 잘 떨어지지 않았다.

여기서 정체를 들키면 정말 아무것도 못 하고 개죽음만 당할 텐데.

어쩌면 애써 돌려 보내주려던 신휘가 더 곤란한 입장이 될 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런데 그때 익숙한 목소리가 끼어들었다.


“형.”

박 실장을 부른 신휘가 말했다.


“쟤 좀 집에 가라고 해요. 귀찮아 죽겠어.”

없던 두통이 다시 생긴 것 같다는 그의 말에 박 실장이 서둘러 그녀를 떠밀었다.


“가자, 로미야.”

“아니, 잠깐만-”

마지못해 밀려 나가던 로미가 신휘를 바라보았다.

시큰둥한 눈빛에 장난기가 살짝 어린 입꼬리는 여느 때와 다를 바가 없는 모습이었다.

양신휘.

너 진짜 무슨 생각이야?

* * *

한편.

수면제를 먹고 쓰러진 모두가 몇 군데의 병원에 찢어져 입원 중이었다.

다행히 산은 같은 병원에 입원하게 됐고, 강은 로미가 알려준 대로 일정 시간이 흐른 후, 병실을 나섰다.

사람들의 눈을 피해 이동이 쉽도록 천인의 결계가 쳐져 있다고 하는데, 인간인 강의 눈엔 딱히 어떤 변화가 보이진 않았다.

교대로 야간 근무를 서는 간호사들은 데스크에 앉아 각자의 업무를 보고 있었다.

강은 혹시 몰라 아주 조심스럽게 움직였지만, 그들의 눈엔 딱히 그녀의 움직임이 보이지 않는 것 같았다.

비상계단을 이용해 이동한 그녀는 곧장 산의 병실을 찾았다.

그가 있는 곳은 복도의 맨 끝에 있는 병실이었다.

똑똑-

노크를 하자, 안에서 낯선 여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들어오세요.”

우아하고 무게감이 느껴지는 말투였다.

아마 산의 곁을 지키고 있다는 천인일 것이다.

2인실을 사용 중인 그의 병실 한쪽 침대는 비어 있었고, 창가 쪽 자리에 잠든 산의 곁엔 설성이 있었다.

이야기만 들었지, 직접 그녀를 만난 건 처음이었다.

어떤 식으로 인사를 건네야 할지 몰라 머뭇거리던 강은 가볍게 묵례한 후, 말했다.


“처음 뵙겠습니다. 서강입니다.”

그러자 설성이 기품 있는 미소와 함께 화답해주었다.


“나는 설성이라고 한다.”

“천인이시죠? 로미에게 이야기 들었습니다.”

조금 웃은 그녀가 늦은 대답을 했다.


“나도 네 이야기는 많이 들었다. 인간과 이야기를 나누는 건 처음이라 신기하구나.”

그렇게 가벼운 인사를 주고받은 후, 설성은 옆으로 조금 비키며 길을 터주었다.


“그럼 실례하겠습니다.”

강은 곧바로 산의 상태를 살피러 갔다.

잠든 그의 모습을 보는 건 처음이었다.

아름답지만 낯선 광경에 기분이 이상했고, 마음은 욱신거렸다.

그녀는 조심스럽게 산의 이마에 내려앉은 머리카락을 넘겨주며 설성에게 물었다.


“언제 깨어날까요?”

“수면초의 약효는 뿌리 하나당 한나절 정도야. 놈이 얼마나 썼는지는 모르겠지만, 많이 먹지 않았다면 곧 일어날 거다.”

“다행…….”

“하지만 의식이 깨어나는 것과는 별개로 수면초는 몽마에겐 독초나 다름없어. 깨어나더라도 해독제가 필요할 만큼 내상을 많이 입었을 거야.”

다행이 아니었다.

청천벽력 같은 소식에 놀란 강의 얼굴이 급격히 어두워졌다.


“해독제는 구할 수 있는 건가요?”

“천계에 있지. 그 애는 네 곁을 안 떠나려고 하겠지만, 깨어나는 대로 설득해서 올려 보내야 할 게다.”

설성은 그렇게 말하고는 떠날 채비를 했다.


“우국 수장님이 곧 헌병대를 동원해 내려올 거야. 그 아이의 수인도 함께 있으니, 네가 그 애 곁을 조금만 지켜다오.”

“어디 가시게요?”

“내게도 곁을 지켜드려야 할 분이 계시거든.”

그렇게 말하는 그녀의 표정은 어딘가 씁쓸한 미소가 번져 있었다.

이 싸움에서 또 다른 누가 다치기라도 한 걸까?

아니면 천계로 돌아가려는 걸까.

대답을 들어봤자 어차피 잘 알지도 못할 이야기일 거라는 생각에 강은 조용히 그녀에게 인사했다.


“병원 근처에 다른 천인이 있다. 그러니 크게 걱정할 일은 없을 테지만, 절대 혼자서 병원 밖을 벗어나는 일은 없도록 해야 할 것이야.”

“네, 알겠습니다.”

설성은 산을 잘 보살피라는 거듭된 당부를 마지막으로 곧 모습을 감췄다.

병실에는 다시 차갑고 쓸쓸한 적막만이 맴돌았다.

강은 산에게 가까이 다가가 잠든 그의 손을 잡았다. 차가웠다.

그녀는 산이 깨어나길 간절히 기도하며, 그의 두 손을 잡아 자신의 뺨에 가져다 댔다.


“산아.”

“…….”

“빨리 일어나. 집에 가자.”

떨리는 목소리에 두려움이 묻어났다.

산을 잃게 될까 봐, 몹시 초조하고 두려웠다.

하지만 다행히 그는 얼마 지나지 않아 잠에서 깨어났다.

몽마에게 잠은 인간의 수면과는 달라, 꿈의 문을 통한 잠이 아니면 망망대해 같은 무의식 안에 갇혀 있다가 나오는 꼴이었다.


“으음…….”

형용할 수 없는 불쾌한 기분에 미간을 찌푸리던 산은 곁에 있는 강을 보자마자 벌떡 일어나 그녀를 세게 끌어안았다.

거칠게 들고 나는 숨소리 뒤로 걱정 어린 그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괜찮아?”

“응.”

“다친 곳은 없고?”

“덕분에 아주 멀쩡해.”

강이 나보다는 너를 걱정하라고 대답했지만, 산은 한참 동안 그녀를 끌어안은 채 격동하는 가슴을 가라앉히기 위해 애써야 했다.

뒤늦게 밀려온 안도감에 온몸이 녹아내릴 것만 같은 기분이었다.

어쨌든 그가 의식을 찾은 건 다행인 일이었지만, 수면초는 몽마에게는 독약이나 다름없어 내상이 생각보다 심각했다.

설성의 말대로 해독제를 구하려면 천계에 가야 했다.


“해독제를 구하려면 천계에 가야 한대.”

“지금은 안 돼.”

“아니.”

딱 잘라 말한 강이 산의 어깨를 밀어내곤 그의 얼굴을 붙들며 말했다.


“반드시 지금 가야 해. 가능하면 빨리.”

 

 
이러다간 자칫 둘 다 죽고 말 거다.

강은 자신의 힘으로 산을 지켜주긴 어려울 테지만, 지금 그를 위해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 정도는 잘 알았다.


“그러니까 얼른 다녀와.”

불안한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던 산은 마음이 무거운 듯 한숨을 쉬었다.

나중을 위해서라도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 그 역시 너무 잘 알았기 때문이다.

지금은 서로를 믿는 수밖에 없었다.

산은 떨어트렸던 시선을 다시 천천히 올리며 말을 이었다.


“그전에.”

“…….”

“너한테 꼭 확인할 게 있어.”

“뭔데?”

강이 되묻자 그가 그녀의 여린 어깨를 감쌌다.

아니길 바라고 있지만, 떨림이 고스란히 손끝에 묻어나왔다.

강의 몸 어딘가에 새겨졌을지도 모를,


“꿈의 문.”

꿈의 문을 반드시 찾아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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