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89. 붉고, 푸른 (89/118)


#89. 붉고, 푸른
2023.03.05.



 


“대표님.”

“뭐!”

“오늘 날씨가 참 좋죠?”

“뭔 개소리야. 비 와서 땅 질퍽한 거 안 보여?”

그러니까.

쥐도 새도 모르게 사람 하나 묻어버리기 딱 좋은 날씨잖아.

삼영의 입가에 작은 웃음이 번졌다.

인성 개차반인 대표 밑에서 호구인 척 일을 해온 것도 벌써 몇 년째였다.

늘 가슴에 사직서를 품고 다니던 그는 인내의 끝이 다가오고 있음을 느꼈다.

하지만 늘 그랬듯, 오늘도 가슴에 참을 인(忍)을 새기며 날뛰는 살의를 눌렀다.

아직은 때가 아니니까.

그러니 할 수 있는 건 그저,


“그래도 바람이 선선하니, 퇴원하기 좋은 밤이네요.”

언제나처럼 상상 속에서나 황 대표의 대가리를 있는 힘껏 갈기는 일뿐.

웃는 얼굴에 침 뱉으랴.

매 순간 인내의 부스러기까지 끌어모아 미소 짓는 삼영을 보며 황 대표가 두툼한 입술을 비죽거렸다.


“뭐야. 퇴원한다는 뜻이었어?”

“어이구, 누워 있으면 다 돈인데, 얼른 일어나야죠.”

실은 네 돈 들어가는 것도 아닌데, 왜 지랄이냐고 따져 묻고 싶었다.

하지만 소속사 연예인이든 직원이든 자빠져 있는 꼴을 못 보는 인간에게 무슨 이해를 구할까.

게다가 저 아니면 강이 곁을 내주질 않으니, 그의 입장에선 확실한 손해가 맞는 거다. 그러니 이렇게까지 아픈 사람을 재촉하는 거겠지.

아니나 다를까.


“진작 그럴 것이지.”

어수룩한 놈이라며 꿍얼거리던 그가 다시 버럭 외쳤다.


“알았으면 냉큼 일어나! 너 때문에 나까지 여기 묶여서 뭐 하는 거야, 이게.”

“아휴! 그러게 안 오셔도 되는데, 왜…….”

“내가 오고 싶어서 온 줄 알아? 강이가 아주 신신당부하는 바람에 내가 어쩔 수 없이 여기 있는 거지. 어?”

“이게 보자보자 하니까! 네가 그러고도 사람 새X야? 이 천하의 호로 새X! 오늘 너 죽고, 나 죽자!”

삼영이 한 말이 아니었다.

TV속 드라마에서 배우가 외친 대사였다.

움찔한 황 대표와 삼영이 동시에 TV를 쳐다보았고, 중년의 여배우는 주변을 둘러보다가 식탁 위에 놓인 사과 바구니를 보고 눈알을 까뒤집었다.

흥분한 병실의 노인들이 하나 되어 외치기 시작했다.


“잘한다! 신 여사! 그거 그냥 그놈 얼굴에 뭉개버려!”

“맞아! 저렇게 싸가지가 없는 놈은 쓸개가 달달해질 때까지 처맞아야 정신을 차린다고!”

“그래! 사과 싸대기 가자! 사과 싸대기!”

시청자의 염원에 힘입은 신 여사가 양손에 사과를 쥐고는 눈앞의 남자에게 마구 던져댔다.

퍽! 퍽!

황 대표는 마치 제가 두들겨 맞기라도 하는 것처럼 몸을 움찔움찔 떨어댔다.


“와하하!”

박장대소하던 백 노인이 황 대표를 보며 들으라는 듯 말했다.


“여기 제 발 저린 놈이 하나 있나보구만! 심보 곱게 써, 이 양반아! 하하하!”

6인실 대장의 호통에 그만 먹던 사과가 목에 걸리고 말았다.


“……켁!”

얼굴이 시뻘게진 그가 가슴을 텅텅 치곤, 냉장고를 뒤져 병 음료 하나를 급히 따서 마셨다.

불씨가 붙었던 삼영의 가슴에 시원한 사이다 한 잔이 부어지는 순간이었다.

그와 눈이 마주친 백 노인이 찡긋 윙크를 날리며 힘내라 주먹을 흔들어 보였다.

그와 동시에 황 대표의 전화가 요란하게 울려댔다.

발신자는 강이었다.


“히익!”

황 대표가 발신자를 확인하고는 다시 가슴을 텅텅 쳤다.

간신히 넘긴 사과 조각이 역류하는 기분이었다.

황급히 삼영에게 다가간 그가 협박하듯 말했다.


“이삼영.”

“예?”

“너 내가 존X 지극정성으로 간호해준 거 알지.”

“어…….”

“어는 무슨 어! 빨랑 대답안……!”

황 대표가 당장이라도 삼영의 멱살을 틀어쥐곤 짤짤 흔들 것처럼 몰아붙이다, 급격히 몰려드는 눈총을 의식한 듯 목소리를 낮추었다.


“아무튼 내가 무슨 말 하려는 건지 알지?”

“예, 그럼요. 대표님 덕분에 제가 이렇게 멀쩡히 깨어났죠.”

마지 못 해 대답하자, 그제야 그가 말 잘하라며 으름장을 놓고는 목소리를 가다듬었다.

커흠! 흠!


“어! 어! 강아!”

- 뭐야. 왜 이렇게 늦게 받아요.

“아니, 삼영이가 깨는 바람에 내가 호다닥 들여다보느라 그랬지 뭐니. 미안하다.”

그러자 무미건조했던 그녀의 얼굴에 순식간에 생기가 돌았다.


- 정말요? 오빠 깼어요? 상태는요? 아니, 영상 통화해요!

“여, 영상 통화?”

되묻기가 무섭게 액정에 영상 통화 전환 버튼이 떴다.

엉겁결에 수락 버튼을 누르자, 눈이 휘둥그레진 그녀가 애타게 삼영을 찾았다.


- 오빠, 어디 있어요? 안 보여요!

“걱정 마! 조금 전에 정신 차려서, 내가 지금 막 사과도 깎아서 먹이던 중이야.”

그가 반쯤 씹고 남은 사과 조각을 삼영의 입안에 쑤셔 넣고는 카메라에 비춰주었다.


“야. 웃어, 빨리.”

황 대표가 속삭이는 소리에 그가 사과를 입에 문 채 바짝 마른 입술을 늘여 보였다.


- 방금 깼다면서 아무거나 막 먹으면 어떡해!

그녀의 걱정 어린 호통에 황 대표가 얼른 삼영의 입에 물려있던 사과를 손가락으로 헤집어 도로 빼냈다.

주르륵 흘러내린 침을 소매로 훔친 그가 해탈한 얼굴로 메마른 미소를 지어 보였다.


“강아. 오빠, 괜찮아.”

- 정말 괜찮은 거지? 언제 깼어?

“나 방금.”

- 토하거나 어지러운 건 없어?

“으응. 괜찮은 거 같아. 아무튼 오빠 너무 걱정하지 마. 금방 퇴원할 거 같으니까.”

그제야 걱정스러운 마음에 굳어있던 강의 얼굴이 조금 풀어졌다.


- 내일 날 밝는 대로 병문안 갈게, 오빠.

그녀의 말에 황 대표가 냉큼 끼어들었다.


“얘가 여기가 어디라고 와, 오기를! 삼영이 내일 퇴원시킬 거야!”

- 누구 마음대로 퇴원을 시켜요? 그러다가 어디 탈이라도 생기면……!

이번엔 삼영이 끼어들었다.


“나 정말 괜찮아, 강아.”

이 인간 옆에 있다가는 화병으로 죽을지도 몰라. 그러니까 말리지 말아주라.

그가 온 얼굴의 근육을 미세하게 사용하며 강에게 필사적으로 사인을 보냈다.

곧이어 카메라에 비추던 삼영의 얼굴이 사라지고, 황 대표의 부담스러운 얼굴이 화면을 가득 메웠다.


“확인했으니 됐지? 아무튼 너무 걱정하지 말고, 푹 쉬어.”

- 혹시라도 무슨 일 생기면 바로 연락해주셔야 해요.

“아이고, 알았어. 걱정 많으면 주름 생긴다, 너? 얼른 자. 내일 연락할 테니까.”

뚝.

전화는 그렇게 끊기고 말았다.

강은 이미 끊긴 전화의 액정을 잠시 바라보다가 이내 작게 한숨을 쉬었다.

순간 긴 팔이 그녀의 목을 감싸 당겼다.

산이었다.


“형 괜찮대?”

“으응.”

맥없이 그의 품에 갇힌 강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산이 말했다.


“그럼 이제 나 좀 봐줘.”

“옷은 언제 벗었어?”

“너 통화할 때.”

“왜 벗었는데? 더워?"

“아니. 추운데 몸에서 자꾸 열이 나.”

축 늘어진 그가 몽롱하게 풀린 눈으로 대답했다.

손을 뻗어 얼굴과 팔을 만져보니 정말로 뜨끈뜨끈했다.


“어떡하지? 얼음주머니 좀 가져올까?”

“아니.”

“그럼 해열제는?”

“그것도 됐어. 나한테는 네가 약이야.”

되지도 않는 억지를 부리는 산을 강이 가늘게 흘겨보았다.


“흘겨볼 시간에 한 번 더 안아주는 게 어때?”

피식 웃은 그가 그녀의 손목을 붙들어 제 허리를 감싸게 했다.

강은 산이 덮고 있던 이불을 조금 더 밑으로 내려 허리 아래로만 덮게 했다.


“추운 건 오한 때문일 거야. 그래도 참아야 해. 열부터 떨어트려야 하니까.”

그녀의 말에 그가 착한 아이처럼 고개를 끄덕였다.

둘은 그렇게 서로를 마주 본 채 가만히 시간을 보냈다.

그 어떤 순간보다 행복의 정점을 찍는 것 같은데, 이만큼 불안하고 초조했던 적이 또 있을까 싶은 밤이었다.

말이 사라진 공간엔 상념만이 가득했다.

우리한테 앞으로 허락된 시간이 얼마나 남았을까.

우리도 남들처럼 평범하게 사랑할 수 있을까?

……행복할 수 있을까?

하루를 살더라도 행복하게 살고 싶다고 늘 생각했었는데, 막상 손에 들어온 행복은 쉬이 놓아지지 않았다.

조금만 더.

조금만 더.

나는 이제껏 충분히 불행했으니까.

흘러버린 시간에 보상이라도 요구하듯, 갈피 잃은 마음은 자꾸만 애걸복걸하게 된다.

누구도 이루어주지 못할 소원이라는 걸 알면서.

행복은 결국 손에 쥔 모래알과 같아서, 아무리 애를 써도 빠져나가는 걸 막을 수가 없었다.

무기력하게 그것을 바라볼 수밖에 없는 마음엔 슬픔과 애틋함만 차올랐다.


“있잖아.”

강이 산을 바라보며 먼저 입을 열었다.


“우리가 예전에 이미 세 번을 만났었다고 했잖아.”

“응.”

“그 이야기를 조금 더 듣고 싶어.”

할 수 있는 건 그저 순간을 소중히 여기는 일뿐이라.

그녀는 자신이 알고 있지 못한 그들의 이야기를 더 많이 알기를 원했다.

가슴에 담아둘 추억은 처음부터 형체가 없어, 죽어도 사라지지 않을 테니까.

강의 말에 산은 느리게 눈을 한번 감았다 뜨며 대답했다.


“처음은 나도 기억 안 나. 태어나기도 전이었으니까.”

“그래도. 어머니한테 전해 들은 이야기는 있다며.”

그 말에 뽀얀 뺨 위에 올라가 있던 그의 엄지가 천천히 움직여 그녀의 살갗을 문질렀다.


“……듣고 싶어?”

“응.”

강이 눈을 빛냈다.

별을 쏟아부은 것처럼 아름다운 눈을 사랑스럽게 바라보던 산은 천천히 기억을 되짚었다.

.
.
.

시작은 강과 산이 태어나기 전으로 거슬러 올라갔다.

일리와 모아가 각각 지하와 천계를 떠나 인간 세상과 우국을 오가며 살던 무렵이었고, 모아가 산을 품었을 때의 일이기도 했다.

바람이 아직 서늘한 계절.

그녀는 남편과 함께 늦은 밤거리를 걷고 있었다.


“비가 오네요.”

제게 한껏 기운 우산 밖으로 손을 내민 모아가 손바닥에 고이는 빗물을 보며 웃었다.


“아가야, 이거 봐. 비야. 우국에서도 봤지?”

그녀는 배 속에 있던 산에게 이렇게 종종 말을 걸며 세상 만물에 관한 이야기를 들려주곤 했다.

일리는 그런 아내의 모습을 지켜보다가 젖은 손을 붙들어 제 코트 주머니 안으로 집어넣었다.


“감기 걸려.”

“에이, 이 정도로 감기 안 걸려요.”

모아가 웃음을 터트리며 그의 어깨에 머리를 기댔다.

남편은 늘 저를 깨지기 쉬운 물건이라도 다루듯 아주 조심히 대했다.

실제로 그랬다.

인간 세상에서 나름 안정적으로 자리를 잡은 뒤였는데도 불구하고 일리는 언제나 모아가 쥐면 산산이 부서질까, 놓으면 바람에 흩어질까 하는 마음이었다.

지금의 산이 강을 그렇게 바라보듯.

어쨌든 그날은 레스토랑에서 저녁 식사를 하고, 바에서 긴 이야기를 나누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이었다.

자정이 다 된 후미진 골목에서 울음 섞인 신음이 들려온 건 바로 그때였다.


“으으으…… 흐윽.”

남편의 어깨에 머리를 기대고 있던 모아가 미어캣처럼 고개를 들며 주위를 살폈다.


“이게 무슨 소리지? 여보. 무슨 소리 안 들렸어요?”

“글쎄.”

“이상하다. 분명히 울음소리 같은 게 들렸는데.”

“당신이 임신 중이라, 예민해져서 그래.”

“들어 봐요. 지금도 또!”

희미한 신음을 쫓아 그녀가 귀를 기울였다.

어지간해서는 귀찮은 일에 휘말리고 싶지 않았던 일리도 더 이상 아내의 주위를 돌릴 수가 없어 포기했다.

이타심과는 거리가 먼 자신과 달리 그녀는 곤란에 처한 가여운 이들을 그냥 지나치지 못했기 때문이다.


“저쪽이에요. 저쪽에서 분명 소리가 들렸어.”

“내가 보고 올 테니까, 당신은 뛰지 마.”

“응. 안 뛸 테니까, 같이 가요.”

모아가 일리의 팔을 꼭 붙들며 대답했다.

아내를 혼자 떼어두는 것도 별로 내키지 않아, 그도 고개를 끄덕였다.

걸음을 옮길수록 우는 소리가 점점 선명해졌다.


“분명 이쯤 어디 같은데…….”

뛰지 않겠다던 모아의 걸음도 조금씩 조급해지기 시작했고, 일리는 빗속에서 점점 짙어지는 죽음과 공포의 향기를 강하게 느꼈다.

아내도 분명 무언가를 느낀 게 분명했다.

몽마인 자신은 느낄 수 없는, 천인만이 느낄 수 있는 긍정의 무언가를.

어둠 속에서 영롱하게 빛나는 모아의 검푸른 눈동자가 그 증거였다.

그녀를 바라보는 일리의 두 눈에도 짙은 핏빛의 붉은 이체가 감돌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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