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0. 봄비가 내리던 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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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0. 봄비가 내리던 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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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0. 봄비가 내리던 밤
2023.03.09.
“으으……흑. 도와주세요. 누가 좀…….”
부슬부슬 내리던 빗속에서 점점 선명해지는 울음소리를 따라간 지 얼마 후.
둘은 곧 후미진 골목 안, 쓰레기더미 사이에 쓰러져 있던 인간 여자를 발견하게 되었다.
모아와 비슷하게 배가 불러 있던 그녀는 임신 중이었다.
일리의 시선은 여자가 반쯤 몸을 누인 길바닥으로 향했다.
흥건하게 고인 빗물.
그 안엔 붉은 핏자국이 이미 번질 대로 번져 있었다.
배 속의 아기가 잘못되었다고 해도 전혀 이상할 게 없을 만큼의 출혈량이었다.
“이봐요! 괜찮아요?”
모아가 얼른 달려가 여자를 부축했고, 일리는 망설임 없이 빗속으로 뛰어드는 아내가 젖을까 곧바로 그녀를 쫓았다.
“배가, 배가…….”
인간 여자는 한 손으로 자신의 불룩한 배를 움켜쥐고, 다른 손으로는 모아의 팔을 붙든 채 고통 어린 신음을 흘렸다.
“나한테 기대요. 금방 병원에 데려가 줄게요.”
“아아……!”
일리는 고통에 찬 신음을 뱉는 여자에게서 강한 공포와 죽음의 향기를 맡았다.
오는 내내 자신의 신경을 강렬히 자극했던 바로 그 향기였다.
그리고 동시에 모아는 그녀의 몸 안에서 힘차게 뛰는 또 하나의 기운을 느꼈다.
엄청난 생명의 에너지.
아직 빛도 보지 못한 어린 생명은 그렇게 죽을힘을 다해 삶을 갈망하고 있었다.
“여보. 얼른 병원으로 데려다줘요.”
모아의 말에 곁에서 우산을 들고 서 있던 일리가 서늘한 얼굴로 여자를 내려다봤다.
“아이를 죽이려고 약을 먹었군.”
지독하게 낮은 음성에 어깨를 떤 여자가 식은땀을 흘리며 배를 꼭 움켜쥐었다.
남자에게서 흘러나오는 어마어마한 압박감에 간담이 서늘해졌지만, 그녀는 그 와중에도 울컥 차오르는 감정을 삼키며 힘겹게 입술을 뗐다.
“원하지 않던 아이예요. 어차피 태어나봤자 불행하기만 할 텐데, 나는 도저히 이 아이를 키울 자신이 없고, 그래서…….”
그런데 그 순간 모아가 입술에 검지를 가져다 댔다.
그녀는 남편인 일리를 보고도 재차 같은 행동을 반복하며 특유의 나긋하고 따뜻한 목소리로 속삭였다.
“쉿.”
“…….”
“아기가 들어요.”
아내의 말에 그도 더 이상 아무 말 하지 않았다.
“흑. 흐윽…….”
여자가 흐느끼기 시작하자 모아가 다정히 그녀의 배를 어루만졌다.
“이 아이는 분명 많은 사람에게 기쁨을 주는 아이가 될 거예요.”
복을 빌어주듯, 그녀가 말했다.
그러고는 다시 일리를 보며 물었다.
“여보. 도와줄 거죠?”
“당신이 도우라면 도와야지.”
“그럴 줄 알았어. 고마워요.”
싱긋 웃은 모아가 일리의 도움을 받아 여자를 병원으로 데리고 갔다.
덕분에 그녀는 간신히 고비를 넘기게 됐고, 배 속의 아이도 무사했다.
긴박했던 시간을 보낸 의료진이 뒤늦게 그녀를 병원으로 데리고 온 보호자를 찾았지만, 이미 일리와 모아는 모습을 감춘 뒤였다.
돌아오는 길에 그들은 각자가 느꼈던 기운에 대해 대화를 나누었다.
“있잖아요. 배 속의 아이한테 엄청난 삶의 의지가 느껴졌어요.”
“하지만 엄마의 원망과 공포를 양분 삼아 태어나겠지.”
“그래도 그 애는 분명 모두에게 사랑받는 사람이 될 거예요.”
“…….”
“내가 있는 힘껏 복을 빌어줬거든요.”
태어나기도 전에 엄마의 원망을 먹고 자랄 아이가 가여워서.
그리고 삶에 대한 의지가 무척 남달랐던 씩씩한 아이라.
아내의 이야기를 들은 일리가 조용히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다시 우리랑 인연이 닿는다면 당신과 나를 모두 만족시켜줄 아이가 되겠군.”
그러자 모아가 자신의 볼록한 배를 어루만지며 싱긋 웃었다.
“인연은 이미 시작됐어요.”
이른 봄비가 내리던 어느 새벽의 일이었다.
그리고 그해.
같은 날, 같은 시각.
인간 세상과 우국에서 각각 강과 산이 태어났다.
.
.
.
그들의 첫 만남은 그렇게 둘의 기억 속엔 없는 일이었다.
모아가 어린 아들에게 들려준 이야기였고, 스물일곱이 된 산이 자신의 연인이 된 이에게 다시 전달한 이야기였을 뿐.
하지만 아주 신기하고, 뜻깊은 인연의 시작이었음을 산과 강 모두 알 수 있었다.
그날의 만남이 시간을 달려 오늘의 결실을 만든 셈이니 말이다.
“결국 내가 태어난 것도 너희 부모님 때문이었다는 거네?”
“그런 셈이지.”
사실 그는 이 이야기를 꺼낼지에 대해 조금 망설였었다.
모든 걸 다 듣고 난 후, 그녀가 기억도 못 하는 일로 또 한 번 자신의 모친에게 상처받는 일이 되는 건 아닐까 해서.
하지만 강은 그에 대한 원망이나 슬픔보다는 태어나지도 않은 자신을 구한 이들이 산의 부모였다는 사실에 더 놀라고 감격했다.
“너무 신기해.”
그녀는 손바닥으로 제 가슴 언저리를 지그시 누르며 말했다.
그러고는 다시 고개를 들어 그에게 물었다.
“내 안에 계신다고 했지?”
강이 묻는 말에 산이 조용히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그래.”
“…….”
“눈에 보이진 않지만, 분명 네 안에 존재해.”
그러자 그녀가 진지하게 말을 꺼냈다.
“인사를 드리고 싶은데, 그럼 내 배꼽을 보고 인사하면 될까?”
“뭐?”
다소 엉뚱한 발언에 산이 실소했다.
하지만 그녀는 정말 진심이었다.
그래서 두 손을 모아 제 가슴에 댄 뒤, 마치 기도라도 하는 것처럼 자신의 마음을 전했다.
“제가 세상에 태어날 수 있게 도와주셔서.”
“…….”
“그리고 산이를 만날 수 있게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진심으로 인사를 건넨 강은 다시 반짝이며 눈을 떴다.
그러고는 그의 허리를 끌어안으며 입을 열었다.
“두 번째 만남이랑 세 번째 만남도 들려줘.”
“…….”
“그건 네 기억 속에도 있는 이야기잖아.”
또 알아? 듣고 나면 나도 잊고 살던 기억을 떠올리게 될지.
그녀는 그렇게 말하며 생긋 웃었다.
제 머리를 괸 채 말없이 강을 바라보던 산은 꽤 진지한 얼굴로 농담을 던졌다.
“공짜로?”
쪽.
말이 끝나기 무섭게 그녀가 입술을 부딪쳐왔다.
“자, 이건 선불이야.”
“…….”
“후불은 더 거하게 치를게.”
“참고로 두 번째 만남 끝나고, 세 번째 만남 들어가기 전에 중간 납입 한 번 더 있어.”
“콜.”
그녀가 흔쾌히 외치며 웃었다.
그런 강의 모습이 귀여워 그는 조용히 미소를 지었다.
두 번째 만남은 입양을 간 강이 일곱 살이 되던 해.
그녀에게 평생의 악몽을 선사하게 될 사고가 일어나기 직전 열렸던, 한 자선 단체의 후원인 모임에서였다.
기업의 회원으로 여러 곳을 후원하던 모아와 일리가 아들인 산을 데리고 참여했었고, 그곳엔 강과 그녀의 양부모도 있었다.
“어머나, 저기 저분들이에요.”
근처에서 수군대는 말을 들은 강의 양부모가 모두의 시선이 집중된 곳을 따라 고개를 돌렸다.
그곳엔 후원인들 사이에서도 늘 관심의 중심에 있던 일리와 모아 부부가 있었다.
“세상에. 아들은 벌써부터 미모가 훤하네.”
“그러니까요. 아버지 외모를 아주 빼다 박았는데?”
“있는 집 자식 같은데, 어느 집안이려나.”
작년에는 접점이 딱히 없어 인사도 못 나누었던 지라, 그들은 올해는 꼭 친분을 쌓으리라 결심했다.
작정하고 다가간 강의 양부모에게 다정히 화답해준 모아는 금세 어린 강에게 관심을 보였었다.
“아이 눈빛이 참 맑고, 총명한 것 같아요.”
“네. 저희가 가슴으로 낳아 사랑으로 키운 귀한 딸아이랍니다.”
“그러셨군요.”
그들은 굳이 자신들의 입양 사실을 밝히며, 어떻게든 부부에게 환심을 사려 노력했다.
“보아하니, 아드님도 저희 아이랑 비슷한 또래 같은데, 나이가 어떻게 되나요?”
“일곱 살이에요.”
“어머나. 저희 딸이랑 동갑이네요! 호호! 이것도 인연인데, 종종 소통하며 지내요.”
부부의 탐욕을 읽은 일리가 조용히 웃었고, 모아는 무릎을 굽히고 상체를 숙여 강과 시선을 맞추었다.
그러고는 다정히 인사했다.
“안녕, 예쁜 아가씨. 정말 잘 자랐구나.”
“저를 아세요?”
“그럼. 알고말고.”
따뜻한 미소를 지은 그녀가 강에게만 들릴 정도로 작게 말을 이었다.
“너는 반짝반짝 빛나는 어른이 될 거야.”
어린 강의 기억에 모아는 없었지만, 그녀의 말은 마법 주문처럼 느껴졌다.
나를 어떻게 아는 거지?
그런 생각을 하던 강은 마치 자신의 미래를 알고 있기라도 하는 사람처럼 저를 대하던 그녀의 의중이 정말 순수하게 궁금했다.
“왜 제게 그런 말씀을 하세요?”
그래서 물어본 말에 모아는 강의 머리를 가볍게 쓰다듬어주며 말했다.
“너는 내가 복을 빌어준 아이니까.”
그렇게 말한 그녀는 자신의 아들인 산에게도 인사를 시켜주었다.
“산아. 인사해.”
모아의 말에 강의 양모가 냉큼 끼어들어 어린 그녀의 등을 떠밀며 대신 말했다.
“안녕, 멋쟁이 도련님. 나는 서강이라고 해.”
엉겁결에 떠밀린 강이 눈치껏 먼저 인사를 건넸다.
“안녕.”
그런 그녀의 맑고 빛나는 눈빛을 마주 보던 그가 한 박자 늦은 인사를 했다.
“안녕.”
“…….”
“나는 한산이야.”
“세상에, 이름도 얼굴만큼 멋지네? 앞으로 친하게 지내자! 호호호.”
강의 양모가 다시 끼어들며 대신 답했다.
그게 두 번째 만남이었다.
이야기를 들은 강은 눈을 커다랗게 뜬 채 갈피를 잃은 듯 시선을 잘게 떨었다.
“기억 안 나지?”
마주 보고 누운 산이 피식 웃으며 묻는 말에도 그녀는 대답하지 못했다.
더 어렸을 때의 일도 기억하는 자신이 왜 산을 기억하지 못하는지 알 수 없었기 때문이다.
“이상해. 아무리 네가 어렸어도 쉽게 잊힐 비주얼은 아니었을 것 같은데…… 나는 왜 기억을 못 하는 걸까?”
“글쎄. 네가 많이 긴장했던 상태라 그랬을 수도 있지.”
거짓말은 아니었지만, 아버지인 일리는 거의 습관처럼 만났던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자신들의 존재를 지우고는 했다.
정체를 숨기며 살아가는 입장에서 낯선 이들의 기억에 오래 남아 좋을 게 없었기 때문이다.
아마 강의 양부모에게서 자신들의 기억을 흐릿하게 만들며, 어린 강에게도 약하게 최면을 걸어놓은 걸지도 몰랐다.
하지만 그녀는 그의 말에 뒤늦게 고개를 끄덕이며 수긍했다.
“맞아. 그렇게 큰 자리에 가면 나는 늘 굉장히 긴장한 상태였어.”
타인의 시선에 어떻게 보이는 가를 무척이나 중요시했던 양부모의 성향과 욕심을 잘 알았기 때문에 강은 늘 그렇게 큰 자리에 갈 때면 긴장할 수밖에 없었다.
늘 태도와 몸가짐을 바르게 하고, 어른과 대화를 하더라도 말을 더듬어서는 안 된다며 미리 준비한 짧은 대화문이나 답변까지 달달 외우게 했던 게 그들이었기 때문이다.
“너는 기억하고 나는 기억 못 하는 게 또 있네. 나도 기억하면 좋을 텐데.”
강의 말에 산이 그녀의 뺨을 어루만지며 미소 지었다.
“괜찮아.”
“…….”
“내가 기억하니까.”
정말이었다.
어렸을 때였지만, 일곱 살이었던 그의 기억 속에 처음 만났던 강의 모습은 뇌리에 깊숙이 박혀있었다.
어머니는 저 아이를 잘 기억해두라고 했지만, 굳이 어머니의 그런 당부가 없었어도, 산은 그곳을 다녀온 이후, 단 한 순간도 머릿속에서 강을 지운 적이 없었다.
아니, 지워지지 않았다.
자의든 타의든 늘 그녀의 곁을 맴돌 수밖에 없던 이유다.
“그럼 이제 세 번째 만남만 남았네?”
늦은 시간인데 잠도 오지 않는지, 강의 눈빛이 여전히 반짝였다.
사실 제일 궁금했던 이야기였기 때문이다.
그의 말에 의하면 마지막 만남은 열아홉에 있었던 보육원 화재 현장에서였는데, 그날의 어디에도 자신의 기억에 산이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조급한 자신과 달리 그는 느긋하기만 했다.
“빨리 얘기해줘.”
조르는 그녀를 가만히 바라보던 산이 살살 문지르던 강의 뺨을 아프지 않게 꼬집으며 말했다.
“내가 아까 분명히 말했던 거 같은데.”
“뭘?”
“중간 납입 있다고.”
그가 나른한 여우처럼 웃었다.
“계산은 확실히 해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