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1. 결국 너였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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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1. 결국 너였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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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1. 결국 너였어
2023.03.12.
“내가 아까 분명히 말했던 거 같은데.”
“뭘?”
“중간 납입 있다고.”
나직한 목소리가 팔랑팔랑 떨어지는 새의 깃털처럼 그녀의 가슴에 내려앉았다.
아픈 상태라 병약미까지 더하니, 천년 묵은 여우가 따로 없다.
“계산은 확실히 해야지?”
홀린 듯 산을 바라보던 강은 멍하니 혼잣말처럼 말했다.
“……너 나한테도 최면술 써?”
“음?”
“아니야, 아무것도.”
여우든, 늑대든 어차피 내 건데 뭐가 문제인가.
그녀는 그렇게 생각하고는 자석에 이끌리듯 그의 입술에 자신의 입술을 꾹 눌러 붙였다.
말랑하고 촉촉한 게 꿀이라도 발라둔 것처럼 달았다.
입술이 아니라, 간을 달라고 했어도 그냥 내어줬을 것 같다고 느낄 만큼.
‘……너는 왜 아픈데도, 섹시하고 난리야.’
이런 네게 설레지 않는다면, 그야말로 유죄다.
떨어지고 싶지 않아 나름 오래 붙이고 있었는데, 큰맘 먹고 멀어지려고 하니 이번에는 산이 목덜미를 부드럽게 감아 당겼다.
덕분에 살짝 떨어졌던 입술이 다시 맞닿았고, 그는 입술이 닿은 채로 말했다.
“이번 건 좀 비싸.”
그렇게 말한 산이 엄지에 닿아 있던 강의 보드라운 뺨을 쓸며 입을 벌렸다.
부드럽게 빨려 들어간 입술이 그대로 삼켜졌다.
컨디션이 안 좋아 그런지 평소보다 움직임도 작고 느릿했지만…… 그래서 어쩐지 더 자극적이었다.
‘열 떨어트린다고 옷까지 벗었는데, 이러다 열만 더 오르는 거 아니야?’
그런 걱정을 하는 와중에도 찌릿하고 간지러운 감각에 몸이 움츠러들었다.
마치 부드러운 깃털이 등줄기와 심장을 한꺼번에 훑어 내리는 것처럼.
느리고 녹진한 키스가 이어졌다.
혼을 앗아갈 듯 입을 맞추던 그가 그녀의 턱과 뺨을 지나 목덜미로 내려왔다.
붉은 입술이 쇄골 아래에 머물다가 자연스럽게 어깨를 향했다.
옷이 내려가 동그랗게 드러난 하얀 어깨에 선명히 새겨진 상처를 산이 말없이 바라보았다.
아차 싶어진 강이 다시 옷을 올리려는데, 그가 손을 잡아 세웠다.
그러고는 고개를 내려 상처를 머금듯 물었다.
촉.
가벼운 입맞춤을 하고, 멀어진 입술 사이로 살짝 빠져나온 혀가 상처를 핥았다.
“산아, 거기…….”
“소독.”
“아니. 그게 아니고…… 아까 샤워하고 약 발라뒀는데…….”
씻어낸다고 지워지는 상처도 아닌데, 거품을 내 몇 번을 문지르던 곳이었다.
다행히 꿈의 문은 새겨지지 않았지만, 산이 볼 때마다 기분 나쁠 것 같아 일부러 연고까지 찾아 발랐던 상처인데.
보란 듯이 그 위에 입을 맞추는 그를 보며 강은 말없이 산의 옷자락만 움켜쥐었다.
마지막으로 깊게 입술을 눌렀다 뗀 그가 고개를 들어 강을 바라보았다.
“많이 아팠어?”
“아니, 네가 침 발라놔서 다 나았어.”
그 말에 턱을 괸 채 피식 웃던 산이 말했다.
“이따 덧발라줄게.”
“…….”
“얘기 끝나면.”
아쉬운 마음을 달래며 그가 멀어졌다.
산은 곧이어 낮고 부드러운 목소리로 그들의 마지막 만남에 관한 이야기를 시작했다.
“세 번째는…….”
마지막 만남이 이루어진 건 그들이 열아홉이던 해의 보육원 화재 사고에서였다.
모두가 잠든 시간이라 더 피해가 컸던 사고.
노후한 건물은 비상벨과 스프링클러가 제때 작동하지 않아 삽시간에 화마를 키우고 말았다.
문틈 새로 들이닥친 연기를 헤치고 겨우 빠져나왔지만, 눈앞은 그야말로 아수라장이었다.
어떻게든 밖으로 나가야 한다는 생각에 최대한 몸을 낮추고 출구를 향해 가던 때.
‘언니!’
뜨겁게 치솟던 불길 너머에서 호정의 절박한 외침이 울려 퍼졌다.
그리고 강이 사방을 둘러보며 그녀의 이름을 부른 순간.
‘호정아! 어디 있……!’
그만 연기를 마시고 말았다.
콜록! 콜록!
목과 폐가 타들어 가는 것만 같던 고통 속에서 몸부림치던 강은 모든 걸 집어삼킬 듯 일렁이는 불길 속을 헤매다 쓰러졌었다.
탁! 타닥!
무서운 속도로 번지던 불은 금방이라도 그녀를 덮칠 듯 몸집을 키웠고, 검은 그을음과 연기로 뒤덮인 시야는 혼탁하게 흐려져 버렸다.
‘언니! 살려줘!’
호정아…….
더 이상 나오지 않는 목소리 때문에 마음속으로만 애타게 호정의 이름을 부르며, 그녀는 복도와 계단 어디쯤에서 정신을 잃고 말았다.
그리고 산은 불길 속에서 강을 구해 데리고 나온 게 자신이라고 말했다.
이야기를 들은 그녀는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나를 건물에서 데리고 나온 게…… 너였다고?”
“응.”
“나는…….”
“삼영이 형이 구해준 걸로 알고 있었겠지.”
“네가 그걸 어떻게 알아?”
“형한테 너를 맡긴 게 나였으니까.”
“…….”
“그리고 네가 병원에 실려 가고, 치료를 받고, 퇴원할 때까지 계속 지켜봤으니까.”
그는 아무렇지도 않게 그런 이야기를 하며, 삼영이 널 구한 것도 틀린 건 아니라고 말했다.
그때까지만 해도 산 역시 숨어 지내던 때라, 모습을 드러낼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정신을 잃은 강을 데리고 나와 눈에 잘 띄는 곳에 내려놓았고, 그런 그녀를 가장 먼저 발견했던 게 삼영이었다.
그는 당시 보육원에 종종 봉사를 오곤 했던 동네 주민이었다.
보육원 관계자와 아이들은 물론이고 동네 사람들 모두가 삼영을 ‘삼촌’이라고 불렀었다.
강은 열여섯이 되던 해에 그를 처음 만났었다.
동네 백수마냥 추리닝 바람으로 돌아다니며, 보육원이나 동네 복지센터의 온갖 허드렛일을 다 거들어주던 사람 좋은 아저씨.
그녀뿐 아니라 보육원의 모두에게 삼영은 고마운 사람이었다.
강의 매니저가 된 것도, 그녀가 직접 그에게 부탁해 건넨 제안이었다. 곁을 잘 내어주지 못하던 제게 삼영만 한 적임자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는 10년이 넘도록 강의 곁을 지켜주고 있는 여전히 고마운 사람이었다.
가족이 없는 그녀에게 엄마이자, 아빠고, 오빠였을 만큼.
“나는 몰랐어, 정말…….”
“내가 얘기를 안 했으니까.”
그가 가볍게 답했다.
그 큰 불길 속에서 저를 데리고 나온 게 산이었다니.
그래. 생각해보면 이상했다.
사고 충격으로 기억이 드문드문 잘린 거라고만 여겼는데, 자신이 정신을 잃었던 곳은 분명 불길이 치솟았던 건물 안이었기 때문이다.
혼자 걸어 나온 것도 아닐 텐데, 어떻게 건물을 빠져나오게 된 것인지에 대해서는 왜 생각해보지 못했을까.
아마 떠올리기만 해도 상처였고, 죄책감이 드는 사건이어서 그랬을 것이다.
강의 눈가에 물기가 어리는 걸 눈치챈 그가 물었다.
“울어?”
“아니, 그냥…… 뭔가 감격스러워서.”
당황한 그녀가 고개를 숙이며 손바닥으로 얼굴을 가렸다.
마음에 파도가 친 것처럼 큰 감동이 밀려들었다.
지금의 자신이 존재할 수 있었던 이유가 제게 가장 소중한 두 사람 덕분이었다는 것과 삶의 모든 순간에 산이 있었다는 사실 때문에.
“뭘 그런 걸로 울어.”
“…….”
“앞으로 목숨 바쳐 사랑할 건데.”
그가 대수롭지 않게 말하며, 얼굴을 가리고 있는 강의 손을 내렸다.
그러고는 엄지로 그녀의 촉촉한 눈꼬리를 가볍게 문질러 닦아주었다.
온갖 감정이 뒤섞인 눈으로 그를 바라보던 강은 조용히 입을 열었다.
“결국 나를 살린 건…… 너였어.”
그러자 산이 대답했다.
“나를 살린 것도 너였고.”
반드시 살아야만 했던 이유가 너였고, 몇 번이나 죽음의 고비에 있던 나를 오늘까지 살게 한 것도 너였다.
어쩌면 불멸을 얻게 될지도 모를 내 삶에서 한없이 짧기만 한 생을 가진 너를 만나 사랑에 빠진 일.
그건 가장 귀한 축복이었고, 동시에 가장 두려운 저주였다.
그리고 절대로 피할 수 없는, 이미 예정된 일이었다.
어머니인 모아가 마지막으로 했던 말이 있다.
‘산아. 때가 되면 그 아이를 찾아오렴.’
그녀는 이미 오래전에 죽음을 예감했을 것이다.
어쩌면 강을 처음 만났던 그 순간부터.
어쩌면 일리를 만나 사랑에 빠지게 된 순간부터, 모아는 앞으로 일어날 모든 일을 예견했을지도 몰랐다.
배 속에 산을 품은 채 강을 만났던 그날.
‘인연은 이미 시작됐어요.’
그녀가 남편에게 했던 말이 그 증거였다.
그리고 생의 마지막 순간.
재가 되어 사라지던 일리와 푸른빛이 되어 사라지던 모아가 남은 생명을 모두 끌어모아 만들어낸 마지막 혼의 조각.
둘의 마지막 의식은 그렇게 인간 세상을 잠시 떠돌다가 사고가 나 죽음의 경계에 섰던 강의 몸에 들어갔다.
강한 생명의 기운과 지독한 악몽을 모두 품은 훌륭한 ‘그릇’이자, 아들의 운명을 결정할 ‘열쇠’가 될 인간에게로.
모아는 때가 되면 그 아이를 찾아오라고 했지만, 산은 그때부터 늘 강의 곁을 맴돌며 멀리서 그녀를 지켜보곤 했다.
그리고 스스로를 지킬 수 있을 만큼 힘을 키웠을 때, 비로소 그녀의 앞에 나타난 것이다.
모든 걸 알게 된 강이 벅찬 마음을 주체하지 못해 산을 와락 끌어안았다.
그러고는 조용히 그의 품에서 말했다.
“오늘 밤이라면 너한테 근사한 악몽을 줄 수 있을 거 같아.”
“……왜?”
그녀의 말뜻을 선뜻 이해하지 못한 산이 되물었다.
그러자 강이 조금 웃으며 대답했다.
“행복해서.”
“…….”
“너무너무 미칠 만큼 행복해서, 무서워. 내가 가진 이 행복을 잃을까 봐.”
죽음이 두렵지 않던 예전과는 달랐다.
절대 돌아가고 싶지 않은 순간에 갇혀버린 것만 같은 악몽 속에서 끝도 없이 쫓기는 것보다, 영원히 머물고 싶은 순간이 사라져버리는 공포가 이제는 더 커져버린 탓이다.
산은 뒤늦게 그녀의 마음을 이해했다.
저 역시 다르지 않았기 때문이다.
강은 얼마 지나지 않아, 그의 품에서 깊이 잠들었다.
여전히 눈꼬리에 물방울을 매단 채 잠든 그녀는 곧 강한 기운의 공포와 악몽을 뿜어내기 시작했다.
아지랑이처럼 피어오른 붉고 푸른 연기가 용처럼 강의 몸을 휘감더니, 곧 보라색의 불길이 되어 크게 일렁였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짧고 강렬한 진동이 천지(天地)를 뒤흔드는 것만 같은 기운이 느껴졌다.
금빛 형상이 번쩍인 걸 보아하니, 천인의 결계가 쳐진 게 분명했다.
아마 어느 때보다 강해진 강의 악몽이 순간적으로 강력한 기운을 뻗쳐, 근처에 있던 악몽들이 냄새를 맡고 몰려들었을 가능성이 높았다.
‘천인들은 어떤 방법을 동원해서라도 너희들을 보호할 거다.’
설성이 했던 말이 떠올랐다.
밖에서 결계를 친 게 그녀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분명한 건 로미를 포함한 수장급의 천인들이 전력을 다해 둘을 보호하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하지만 전적으로 그들만을 의지할 수는 없었다.
정확히 알 수는 없지만, 악몽의 기운이 강해진 만큼 분명 강의 몸속에서는 또 다른 변화가 시작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건 곧 혼의 융합이 가까워졌다는 뜻이다.
머지않아 노지태와 양신휘가 본격적으로 움직일 거란 뜻이기도 했고.
생각을 마친 산은 빠르게 강의 악몽과 그녀의 공포를 흡수했다.
꼭 오랫동안 굶다가 산해진미를 만난 기분이었다.
그런데 언젠가부터 품에 안긴 강이 작은 목소리로 흐느끼기 시작했다.
“아니야…….”
미간이 구겨지더니, 고개를 젓고.
“안 돼…….”
기어이 눈물을 흘리고 만다.
대체 무슨 꿈을 꾸기에 이렇게 괴로워하는 걸까.
그는 꿈을 엿보기 위해 그녀의 무의식으로 침투했다.
발끝에 달라붙는 불길한 기운을 떨치며 산은 한 걸음, 한 걸음 나아갔다.
잠든 강을 잠시 바라보다, 더 깊은 무의식의 끝으로 향했다.
오늘따라 유난히 꿈의 핵이 멀게만 느껴졌다.
그리고 마침내 도달한 그녀의 가장 깊은 꿈속 한복판에서……,
“이리 와. 내가 구해줄게.”
산은 또 다른 자신이 강에게 손짓하는 장면을 마주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