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2. 환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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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2. 환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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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2. 환영
2023.03.16.
산과 똑같이 생긴 그의 환영(幻影)은 도망치다 쓰러져있던 그녀에게 손짓하고 있었다.
언제나 자신이 꿈에서 강을 부르던 그 모습으로.
“이리 와. 내가 구해줄게.”
환영이 재차 손짓했다.
하지만 정작 그걸 지켜보는 산은 그만 깊은 수렁에 발이 묶여버린 것처럼 꼼짝도 할 수가 없었다.
또 다른 자신을 바라보는 기분이 무척 기묘했기 때문이다.
……나를 알아볼까?
그런 생각을 하며 시선을 강에게 돌리던 순간이었다.
“산아!”
그녀가 외쳤다.
이제 꿈속에서 완전히 저를 인식하게 된 강이 자신의 환영을 향해 달리기 시작했다.
와락 달려든 그녀가 그것의 품속에서 흐느꼈다.
“어디 갔다가 이제 왔어…….”
“…….”
“우리 이제 절대 헤어지지 말자.”
“…….”
강이 그렇게 말하며 환영을 더욱 강하게 끌어안았다.
그녀를 안고 있는 산의 환영은 어떤 대꾸도 없이 조용히 미소만 지을 뿐이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강을 안고 있는 팔에 서서히 힘을 주기 시작한 그것이 이내 몸을 으스러트릴 듯 조이기 시작했다.
그러더니 끝내 바닥으로 쓰러진 그녀의 위로 올라타 목을 조르기 시작했다.
“으…… 으윽!”
“…….”
“산아…… 이러지 마…….”
목이 졸려 괴로워하는 강을 산의 환영은 희열에 찬 얼굴로 내려다보았다.
광기 어린 웃음이 빠르게 다가오는 그녀의 죽음을 두 팔 벌려 반기고 있었다.
그저 꿈속의 한 장면을 보고 있을 뿐인데도, 모든 걸 지켜보는 산은 이루 말할 수 없이 더러운 기분을 느껴야 했다.
환영은 가는 목을 쥔 손가락 마디마디에 조금씩 더 힘을 가하기 시작했다.
“네가 너무 맛있어서 그래.”
“으흐윽……!”
“내가 불멸을 얻으려면 네가 꼭 필요해서 그래.”
하얗게 질려가는 강의 얼굴을 보며 다정하게 이름을 불렀다.
“강아.”
“그, 그만…….”
“이해해줄 수 있지?”
미소 짓던 환영이,
“넌 나를 사랑하잖아.”
그녀의 목을 비틀었다.
으드득!
“……!”
제대로 된 비명도 지르지 못한 채 눈이 커다래졌던 강이 이내 축 늘어졌다.
그 광경을 선명히 목격한 산은 온몸의 피가 차갑게 얼어붙는 것만 같았다.
그런데 얼마 지나지 않아 환영의 몸에 불씨가 붙은 듯 타오르기 시작했다.
재가 되어 흩날리기 시작한 산의 환영이 오묘한 표정으로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안타까움.
공허.
그리고 약간의 슬픔이 뒤섞인 듯한 얼굴로.
그러더니 들릴 듯 말 듯한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잘 봐.”
“…….”
“이게 우리의 결말이니까.”
“안 돼……!”
강은 목이 비틀려 쓰러진 와중에도 눈앞의 산이 점점 사라져가고 있다는 사실에 더 큰 공포를 느꼈다.
“가지 마. 안 돼…… 산아…….”
환영은 더 이상 말이 없었다.
그리고 그걸 바라보는 산도 말을 잃었다.
발끝이, 손끝이, 얼굴이, 눈과 코와 입이 타들어 가는 동안 누구도 그 상황을 막거나 바꾸지 못했다.
생에 처음 느껴보는 무력감에 그녀는 극강의 슬픔과 공포를 흘려냈다.
“한산!”
마침내 불티가 되어 흩날리던 산의 환영은 강의 품 안에서 완전히 재가 되어 사라졌다.
어떤 끔찍한 꿈속에서도 초연하기만 했던 산도 가장 바라지 않던 미래를 엿본 것만 같은 기분이었다.
절규하는 강을 당장이라도 달려가 안아주고 싶었지만, 아무리 손을 뻗어도 닿지를 않았다.
마치 자신이 악몽을 꾸고 있는 것처럼.
뒤늦게 그는 제 발목을 잡고 있는 게 태어나 처음 마주한 공포라는 것을 깨닫고는 도망치듯 악몽을 빠져나왔다.
번쩍 눈을 뜬 산의 관자놀이 옆으로 식은땀 한줄기가 주르륵 흘렀다.
“하아, 하아……!”
간담이 서늘했다.
하지만 악몽의 질만큼은 그 어느 때보다 높았고, 미쳐 돌아버릴 만큼 황홀했다.
충동적으로 강한 살의를 느꼈을 정도로.
아마 강을 만난 지 얼마 지나지 않았을 때, 이런 악몽을 마주했다면 그녀를 살려두지 못했을 것이다.
제가 이 정도니 다른 몽마들은 말할 것도 없는 일이었을 테지.
그렇게 생각하면 몽마들이 강에게 개떼같이 몰려들었던 것도 전혀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그녀의 악몽은 목숨을 걸어봐도 좋을 만큼, 훌륭했으니까.
어쨌든 지금은 자신을 지키고 강을 지키기 위해서라도 회복에 최선을 다해야 할 때였다.
산은 제 품에 안겨 잠든 그녀를 향해 시선을 돌렸다.
“흐윽…….”
강은 여전히 악몽 속에 갇혀 흐느끼고 있었다.
어차피 기억을 모두 지워줄 예정이었지만, 오늘따라 그녀가 괴로워하는 모습을 보기가 힘들었다.
꿈속의 강이 무얼 보고 있는지 잘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고개를 내린 산은 그녀의 영혼을 삼키듯 입을 맞추곤, 강에게서 뿜어져 나오는 모든 공포와 악몽을 집어삼키기 시작했다.
* * *
그 시각.
밖에선 산의 예상대로 천인과 몽마의 전투가 막 시작되고 있었다.
그가 느꼈던 결계의 기운은 해미의 것이었다.
우국은 천계에서 유일하게 천인 이외의 존재들이 드나들 수 있는 곳이었다.
그중엔 몽마도 있었고, 수인도 있었고, 온갖 혼종과 괴수들도 있었다.
천계에 위협이 되는 존재나 죄인들을 가두는 감옥인 석간(石間)도 관리하는 곳이었기에 우국에는 그들을 관리하는 헌병대가 존재했다.
그리고 지금 이 순간.
우국의 헌병대는 까만 먹구름 떼처럼 몰려든 하급 몽마들에 맞서고 있었다.
그 중심에 수장인 해미가 있었다.
금방이라도 돌풍이 몰아칠 듯 구름이 휘몰아쳤다.
어깨에 금장이 달린 흰 제복의 헌병대들이 각각의 무기를 쥔 채 이따금씩 금빛 번개의 형상을 한 기압을 뿜어내고 있었다.
강의 악몽 냄새를 맡고 근처에 있던 온갖 몽마들이 몰려들기 시작했던 터라, 그 수가 어마어마했다.
그리고 그에 비해 천인들의 수는 현저히 적었다.
동서남북으로 대형을 만들어 진을 치고 있는 모든 헌병대를 합쳐도 몰려든 몽마들에 비하면 10분의 1 수준에 불과했다.
“어, 어떡하죠? 저희 쪽 수가 너무 밀리는 것 같은데…….”
늑대의 모습을 한 로미가 곁에 서 있던 설성에게 말했다.
그러나 그녀는 여유로운 표정으로 상황을 관망할 뿐이었다.
“갈 곳이 있다고 하지 않았니?”
“네. 그렇긴 한데, 이런 상황에서 저까지 빠져버리면…….”
웅얼대던 그녀가 움찔해서 황급히 말을 이었다.
“아! 그러니까 제가 헌병대 실력을 못 믿는다는 게 아니라, 비록 제가 가진 힘이 크지 않지만, 그래도 보태는 게 아예 없는 것보다는 낫지 않을까 하여……!”
“그리 열심히 해명하지 않아도 된다.”
설성이 작게 웃음을 터트리며 귀까지 빨개진 로미를 귀엽다는 듯 바라보았다.
“혹여나 네 주인이 다칠까 봐, 걱정인 게지?”
“어, 그, 그게…….”
“정 의심되면 직접 눈으로 확인하는 것도 나쁘지 않지.”
뜻 모를 그녀의 말을 끝으로, 몽마 무리의 최전방에 있던 놈 하나가 어마어마한 괴성을 질러댔다.
「크와아앙!」
마치 어둡고 깊은 심해에서 듣는 괴수의 비명 같은 소리.
광폭으로 울려 퍼지는 소리와 함께 집채만 한 몽마 하나가 헌병대를 향해 빠르게 돌진했다.
놈의 비약적인 움직임에 바람이 폭발하듯 발생했고, 동요한 잡귀들이 놈을 따라 일제히 달려들기 시작했다.
해미의 우측에 있던 헌병대 하나가 예리한 시선으로 놈들을 응시했다.
그러더니 곧 손바닥을 펼쳐, 거의 제 몸 크기와 비슷한 활을 뽑아냈다.
“우, 우와!”
그걸 본 로미가 저도 모르게 입을 벌렸다.
헌병대는 군더더기 없는 동작으로 시위를 당겼고, 곧 아무것도 없던 활시위에 금빛의 번개 형상을 한 화살이 걸렸다.
빠른 속도로 몽마 무리와 천인들의 거리가 좁혀졌지만, 그는 신중히 최전방에 있는 놈의 급소를 겨냥했다.
사정거리 안에 놈이 들어서자 팽팽하게 당겨져 있던 활시위가 피잉! 하는 소리를 내며 화살을 밀어냈다.
후우웅!
커다란 회오리를 빛처럼 두른 화살이 무리를 향해 날아갔고, 긴 장대만큼 커진 화살의 촉은 한 치의 오차도 없이 맨 앞에 있던 녀석의 머리를 관통했다.
쿠쿠쿠구구구구구궁!
그 위력에 흔적도 없이 소멸한 건 한 놈이 아니었다.
가장 큰 놈을 시작으로 주변에 몰려 있던 잡귀들의 몸이 마치 빛에 타들어가듯 순식간에 사라져버렸다.
빛이 몽마들을 소멸시키고 사라졌을 땐, 까만 도화지 같던 밤하늘은 마치 커다란 구멍이 뚫린 것처럼 보였다.
눈도 깜빡이지 못하고 그 광경을 목격한 로미의 입이 더 이상 벌어질 수 없을 만큼 떡 벌어졌다.
“……!”
주변에 있던 놈들이 혼비백산해서 뒷걸음질 치기 시작했다.
물론 쉽게 물러날 생각은 없는 것 같았지만, 지능이 어느 정도 있는 것들은 인지 능력이 없는 최하급의 몽마들을 방패처럼 앞세워 방어태세를 갖추었다.
팽팽한 기운이 맞섰지만, 표정의 변화가 크지 않은 헌병대들에 비해 확실히 몽마들 사이에선 긴장감이 흘렀다.
설성이 그 광경을 보며 로미에게 말했다.
“직접 보니 좀 안심이 되니?”
“어…… 아, 그, 그것이……!”
“헌병대는 선발 과정에서 엄청난 양의 몽마를 상대한단다.”
“…….”
“상대가 저런 하급 몽마라는 전제하에 헌병대 개인의 전력은 대략 1대 100 정도의 수준이지.”
엄청난 이야기를 아무렇지 않게 얘기하던 그녀는 곧 인자한 목소리로 물었다.
“백 노인을 찾아가려던 거지?”
움찔한 로미가 허를 찔린 표정으로 말을 더듬었다.
“어, 어떻게 아셨어요?”
“백 노인은 천계에서도 훌륭한 도공이었지만, 동시에 수인의 전투력을 가장 단기간에 최대 역량으로 끌어올리는 최고의 수인 훈련사이기도 하니까.”
“…….”
“큰 싸움을 앞둔 상황에서 너처럼 충성심 높은 수인이라면, 당연히 그를 떠올릴 거라 생각했거든.”
설성은 작게 미소 지으며 고갯짓을 했다.
“여기는 마음 놓고 다녀오렴. 곧 큰 전쟁이 시작될 거야.”
그 말에 로미가 눈을 부릅뜨며 전의를 다졌다.
“네! 그럼…….”
꾸벅 고개를 숙인 그녀가 인사했다.
“제가 돌아올 때까지, 저희 주인님 잘 부탁드릴게요!”
그렇게 말한 로미는 설성의 배웅을 받으며 까만 밤하늘을 향해 사라졌다.
그녀는 자신이 낼 수 있는 최대한의 속도로 달렸다.
하얗고 보드라운 털이 바람에 거칠게 휘날렸다.
시간이 없었다.
주기적으로 거처를 옮기는 백 노인이 언제 또 사라질지 모를 일이었기 때문에, 한시라도 빨리 그를 만나 역량을 키워야 했다.
‘개미는 언제든 밟아 죽일 수 있으니까.’
‘너희가 배후를 안다고 해도 달라지는 건 아무것도 없어.’
신휘의 정체를 알게 된 날 그가 했던 말이 머리에 박혀 떠나질 않았다.
백 노인을 찾아가야겠다고 내내 생각은 하고 있었지만, 오늘 우국 헌병대의 실체를 직접 눈으로 확인하고 나니 더 시간을 지체하면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엄청난 전투력을 가진 헌병대의 수장으로 있는 해미.
그런 해미와 동등하게 맞서던 게 신휘였다.
그런데 그 정도의 위력을 가진 녀석이 왕이 아니라 왕의 수하라니.
‘도대체 노지태는 얼마나 괴물이라는 얘기야?’
떠올리기만 해도 오금이 저릴 만큼, 몽마로서 그의 힘은 말도 못 할 것이다.
그러니 강해져야 했다.
손 놓고 바보처럼 때를 기다리기보단,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이라면 어떤 방법을 써서라도 강해져야 했다.
그래야 위기의 상황이 닥쳤을 때, 제 목숨을 바쳐서라도 산에게 시간을 벌어줄 수 있을 테니까.